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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빠져나간 시간들
박해림(시인 ․ 문학박사)
시간은 달리기를 잘한다. 멈춰 있다가도 움직임이 감지되는 그 순간 이미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시간에 엮인 우리는 잠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내 안은 물론 내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전방위로 달리기를 작정한 시간은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도 멈출 방도가 없다. 어느 한 때 주변이 고요하면 시간이 정지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시간이 어느 용기에 고여 있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내가 정지되어 있을 때, 또는 정지됨을 의식하고 있을 때, 정지되었다고 느낄 때 세상의 모든 시간도 더불어 정지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의식의 밖에서든 안에서든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시간은 똑 같은 페이스로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단, 내가 빨리 달릴 때 시간도 빨리 달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내가 느리게 사유하거나 움직일 때 시간 또한 느리게 인식될 뿐이다. 태초부터 시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정지한 적 없음은 우린 선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문학적 상상이 허용된 시인들의 시간은 어떠할까. ‘상상’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전방위로 장착된 관계로 마음먹은 대로 시간을 당겼다 밀었다 주물럭거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말한 시간은 물론 경험되어진 시간과 그 외의 시간들을 선험적 인식으로 재창조하여 결과물을 만들어 놓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이 펼쳐놓은 시간의 역사는 물리학적 시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경험에 내재된 구상, 비구상 시간이기도 하다. 수학적 개념과 물리에 대한 일반론적 이해가 학교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인지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는 사뭇 다를 것이다. 개인적 경험만으로는 시간을 알고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인데 반대로 오늘 날 넘치는 정보로 인해 시간을 인식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개인의 경험은 오직 개인의 것이다. 서로 온기를 나누듯 경험을 나눌 수는 있어도 덜어낼 수는 없다. 무한대 시간 속에서 유한한 개체의 경험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경험들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시간을 무한히 팽창시킨다. 그렇다면 아래의 시인들은 각각 어떠한 경험들로 이 세상을 팽창시키고 있는지 살펴본다.
마루에 등불 내놓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사립문 밀치면 훅 끼쳐오는 가난의 냄새
가난했기에 가난에 더는 주눅 들지 않았고
모든 게 불편했으므로 불면에 이내 익숙해지던
연기에 새까맣게 그을린 낮은 처마 끝
해마다 봄이 되면 제비가 깃들고
댓돌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집
철따라 색신 고운 꽃 아직도 피고 있을까.
쇠똥냄새 나는 골목 낮은 담장을 사이 하고
이름 불러 허물없이 나누는 넉넉한 인정
집집마다 방문도 활짝 열어 놓고 사는 마을
베틀 놓는 소리 마당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
삼경 이끈 지나도록 글 읽는 소리 들리고
고집스런 기억 속으로 자주 끊기는 무성영화의 화면
헛간 한 구석에 아직도 웅크리고 앉아 있을까.
-김석규,「그리운 옛집」(《우리詩》2월호)
시간을 훌쩍 뛰어 건너 과거의 한 때에 머물고 있는 시적 자아는 궁핍했던 집안 사정을 조망하고 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첫 행부터 ‘사립문 밀치면 훅 끼쳐오는 가난의 냄새’라고 했을까. 그 시대의 가난은 죄가 아니었다. 죄가 아니었으므로 주눅 들지 않은 불편함이었고 불면에 익숙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이웃하고도 ‘허물없이’ 넉넉한 인정을 나눌 수 있었다. 지금, 여기가 아니므로 그리울 수 있다. 하지만 김석규가 보아낸 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의 회한만 말하고픈 것이 아니다. 팽팽한 연줄과도 같은 가족과 가족,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던 연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적 삶의 속성에서 놓치고 있는 끈끈함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서 빠져나간 시간을 확인하며 그 시간을 채우고 있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 ‘고집스런 기억’으로 표상되는 과거의 시간을 ‘구석’이라는 공간에 가두어놓고 싶은 것이다. 그 공간은 누구와 나눌 수 없다. 오직 시인만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가갈 수 없는 절실한 시간에의 갈급, 긴장의 끈을 좀 더 팽팽히 했으면 좋았겠다 싶다.
시간이 흘러가도 차오르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의
흔적만이 켜켜이 쌓여갈 뿐
해체할 수 없는 기억은 읽을 수 없는 암각화처럼 쓸쓸하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심지를 꽂았던 가슴에는
우물 같은 자국이 있다, 그 너머로
조금씩 무너져가는 오래된 탑과
빛과 바람이 스칠 때마다
기억을 지워가는 벽화의 채색 빛처럼
대웅전 어칸 문의 경첩이 기억하고 있는
문이 열리고 닫혔던 숫자만큼
제 몸을 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 안으로 물컹하게 들어갔던 것, 혹은 빠져나왔던 것
흔적으로 남아
뚫린 가슴 너머로 바람 흘려보내며
푸른 깃발을 기다리고 있다
허물어져가는 시간의 눈금 위에 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온 몸에 푸른 꽃 피도록 오래 서 있다
-김경성,「오래된 그림자 -관룡사 당간 지주」(《우리詩》2월호)
절간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 절을 거쳐 간 숱한 삶의 그림자를 보아낸 시인의 예리한 눈은 ‘해체할 수 없는 기억’에 머물러 있다. 기억이란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알면서도 짐짓 건드려보았던 것인지 ‘암각화처럼 쓸쓸하다’라고 진술한다. 내게서 빠져나간 시간은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관룡사 당간 지주에 새겨진 자국들은 한때의 그 누군가의 절실한 기억의 편린이었을 것이며, 여과되지 않은 아픔이었을 것이며, 기구(祈求)였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잠시나마 고였던 시간의 흔적을 따라 또 다른 시간을 찾아 나서는 김경성의 시선은 한 발짝 비켜선 채 냉철함마저 보인다. 타자가 남긴 시간의 흔적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발견한 때문이다. ‘대웅전 어칸 문의 경첩이 기억하고 있는/문이 열리고 닫혔던 숫자만큼/제 몸을 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가슴 안으로 물컹하게 들어갔던 것, 혹은 빠져나왔던 것’은 바로 현재라는 창을 통한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나의 절실함이 여닫았을 문의 경첩으로 발견되어진 것이다. ‘허물어져가는 시간의 눈금 위에 서서/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결심하는 것이다.
늦은 하산길에 밤을 만나다
한뎃잠 자는 것들의 뒤척임 짚으며
나무에 귀를 대니
출렁이는 강물소리 듣겠다
몇 몇 지류들이며
반짝이는 물너울 검은 등짝도 보겠다
천강에 달 하나씩 내걸어
우으로 우으로 흐르는 나무여
물푸레 만엽의 잠이여
긴 발자국 하나 네 물소리를 따라가고 있는 거 아니?
강물을 잘라 먹으며
제 생의 눈금 늘여가고 있는 야행의 저
집도 없이 노숙을 일삼는 저
발바닥 인생의 민달팽이를 아니?
먹거리나 보채는 수만 이빨들에
싫은 내색 없이
제 잎새들로 밥 한 상 차려주고
밤새 사각사각 숟가락질 소리 그냥 듣는 거니?
한 입 베어 물면 만개의 구멍 틈새로 보일
치설*에 살 벤 조각달의 잠도 노숙이겠다
-김추인,「노숙의 시간을 엿보다」(《정신과표현》1/2월호)
김추인의 시간은 현재적이다. 지금 바로 여기의 시간이다.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이들의 시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아낸다. ‘첫 행의 늦은 하산길에 밤을 만나다’가 보여주듯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자아는 어느 날 문득 거리에 팽개쳐진 한뎃잠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밤이 가져다주는 적요는 일반적 의미로 휴식의 또 다른 말이나 실상 치열한 삶과 허기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확인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단지 읊조리며‘나무’로 명명된 노숙인의 내부에서 출렁이는 생성의 강물소리를 듣고 강물의 지류에서 어두워가는 존재의 희미한 단절을 본다. ‘천강에 달 하나씩 내걸어/우으로 우으로 흐르는 나무여’의 오직 한 쪽으로 흐르는, 그 어떤 방법을 찾지 못한 노숙인들의 모습을 따라 눈과 귀를 열고 있는 시인은 이들의 삶이 생성의 시간에서 내쳐진 채 오직 ‘조각달’의 넉넉한 품새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노숙인들의 삶에서 빠져나간 시간들이 한 밤 길거리에 노숙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내 노숙의 시간을 엿보는 것이다.
과일에도 살의 결이 있다는 것을
골드키위 돌려깎기 하다 보면
안다, 있는 힘껏 햇빛을 빨아 제 꼴대로 속을 채워야
칼집도 순하게 먹힌다는 걸
숲에 들어 문득 낯선 길로 들어섰을 때 내 피가 먼저 알아보고 놀라 기뻐하는 곳,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땅!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내가 요즘 어질머리 심하고 어깨근육 뭉치는 것은
생겨먹은 대로 살지 못해서 그렇다고
누가, 삐뚤어진 내 척추를 자근자근 눌렀다,
아프다
왼쪽으로 골목을 두 번 꺾어 닥치는 대로 길이나 잃어볼까
처음부터 나의 나였던 내가 꼴린다
-손현숙,「꼴값한다」(《시안》2009년 겨울호)
손현숙의 시간은 과일을 통해 성찰된다. ‘살의 결’이 비단 과일에만 있는 게 아님을 실토하며 뿌리를 거슬러 유영한다. ‘있는 힘껏 햇빛을 빨아 제 꼴대로 속을 채워야/칼집도 순하게 먹힌다’는 막힘없는 진술은 이내 길 없는 길에서 문득‘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땅!’을 만날 수 있게 한다. 내 속에서 빠져나간 시간을 통해 성찰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으나 진정성에 의해 질러가거나 길을 찾게 된다. ‘어질머리’와 ‘어깨근육’의 문제를 인지해낸 힘이 타의인 것처럼 ‘누가, 삐뚤어진 내 척추를 자근자근 눌렀다,//아프다’로 전환시켰지만 첫 연 첫 행부터 이미 알고 있다. 자아의 성찰적 힘 탓임을 안다. 하지만 시인은 마지막에 반전을 꾀한다. ‘생겨먹은 대로 살지 못’한, 남에게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살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일탈(?)을 감행하고자 한다. 원래로의 회복을 ‘왼쪽으로 골목을 두 번 꺾어 닥치는 대로 길이나 잃어볼까’의 반어적 표현을 꾀함으로써 드러난다. ‘과일에도’의 ‘~에도’에서 어떤 있는 것에 더함을 강조하는 조사를 통해 간절히 제 모습을 찾고 싶은, 애초부터 생겨먹은 대로 살고 싶은 시인의 소망은 제목의 ‘꼴값한다’의 중층적 의미에 자신을 슬쩍 감추고 있다.
하루는 들판이 나 수거했다
하루는 나 수거한 들판이 나 딛고 일어섰다
나 일어서도 들판이 더 크게 일어섰다
온통 초록으로 나 수거했다
나 수거한 초록에다 나 빨았다
빨고 빨아도 나 초록으로 빨아졌다
수천 수 만 톤의 초록 물에서
내 삶의 영법으로 헤엄쳐 여기까지 왔다
내가 다 젖어서 가라앉는 날은 오는가
오기는 와서 나 온전히 수거하는 날은,
이 항해에 앞서
초록이 깜쪽 같이 아버지 수거한 것
봉분에 엎드려서야 보았다
하루는 나뭇가지가 나뭇잎 내려놓았고
하루는 나무뿌리가 나뭇잎 검은 흙으로 수거해갔다
-최창균,「수거」(《정신과표현》2010년 1/2월호)
초록은 생성의 대표적 색상이며 소멸을 소멸이지 않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사계절의 순환은 그것을 증명한다. 초봄, 마른 나뭇가지에 초록의 전 단계인 연두로 시작된 초록향연은 순식간에 진한 여름초록으로 내달린다. 가을이면 다시 그 진한초록을 다 내려놓고 또 다른 초록을 준비하기 위해 긴 겨울잠을 잔다. 이미 초록의 유전인자를 가졌으므로 결코 다른 색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임도 안다. 최창균 역시 초록의 일상성을 가지고 있다. 계절과 관계 없이 도심의 변두리에서 맞닥뜨리는 일상은 온통 초록이다. 초록이 가득한 들판이다. 그의 시적 유전자가 초록이리라는 유추를 끌어내는 이 시는 결코 가볍지 않은 행간의 여백으로 성찰을 끌어오는 동시에 내게서 빠져나가는 시간을 아버지와 연결시키고 있다. 자신을 관통한 ‘삶의 영법’은 초록을 거슬러 오는 것임을 밝힌다. 시인은 어느 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깨닫는다. ‘수거’가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간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성찰을 만나는 자아는 내게서 빠져나간 시간이 자신을 키우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아래 두 편의 시는 ‘어머니’라는 대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간을 성찰하고 있다.
오월, 그 날
뒤통수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애기똥풀꽃에 파묻힌 것처럼 하늘이 노랬다
그리고 모든 얼굴에 대한 기억을 한꺼번에 잃었다
얼굴 실인증失認症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대문께에서 마주친 아내 얼굴 알아보지 못하고
가는 귀 먹은 어머니께 누구세요 누구세요
보자마자 잊혀지고 시시각각 지워지는 얼굴들
손톱만큼이라도 기억이 있어야
보고 싶다 말하지 외롭다고 말하지
-서춘기,「얼굴에 대한 기억」(《시안》2009년 겨울호)
기억은 곧 시간의 다른 말이다. 기억은 시간을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중심은 기억이며 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까 늘 노심초사하고 있다. 서춘기의 기억은 삶의 중심에서 멀어진, 멀어지고 있는 가까운 이들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전면에 내걸려 있다. ‘얼굴 실인증失認症’에서 밝히고자 하는 시인의 진술은 거시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적이다. ‘오월 그 날’의 거시적 얼굴이 내 가까운 혈족인 미시적인 얼굴인 어머니와 아내에 이르면서 삶의 중심을 이루는 기억으로 환원된다. 나를 향한 성찰은 밖에 있는 타자의 성찰 또한 동시적으로 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기억의 중심에서 밀려난 ‘누구세요 누구세요’의 망각의 외침은 내 속을 빠져나간 시간의 적나라한 외침이기도 하다. ‘보자마자 잊혀지고 시시각각 지워지는 얼굴들/손톱만큼이라도 기억이 있어야/보고 싶다 말하지 외롭다고 말하지’의 토로는 한탄과 자책과 자조에 다름 아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넷째 연 두 번째 행의 ‘대문께에 마주친 아내 얼굴 알아보지 못하고/ 가는 귀 먹은 어머니께 누구세요 누구세요’라는 부분이다. 여기서 아내가 어머니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 누구세요?’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아보지 못하고’를 ‘못한’으로, 어머니께의 ‘께’는 빼고, ‘누구세요 누구세요’는 한다’를 첨가해야 며느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노인의 실인증이 될 것이다. 정리하면‘대문께에서 마주친 아내 얼굴 알아보지 못한/가는 귀 먹은 어머니, 누구세요 누구세요 한다’가 된다.
내일모레면 팔순인 어머니
만날 젊을 줄 알았습니다
모처럼 함께 길산책을 하였습니다
두어 발짝 떼시고는 쉬엄쉬엄 저만치 오시는,
차멀미가 싫어서 걷는 게 오히려 자신 있다던
그 말이 참으로 무색했습니다
주어진 트랙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서서히
탈진해 가는 무명선수
나는 보았습니다
결승선을 막 통과하려고 안간힘 쓰는
미래 어느 날
내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한영숙,「50보 100보」(『푸른 눈』2010년 시집에서)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에겐 빠르게 가고 누구에겐 천천히 가는 법은 없다. 단지 그렇게 느낄 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게 축적된 시간은 빠져 나가는 법이다. 어머니한테 쌓여 있던 시간이 어느 날 빠르게 빠져나간 것을 인지한 딸은 어머니의 시간이 곧 자신의 시간임을 깨닫는다. ‘차멀미가 싫어서 걷는 게 오히려 자신 있다던/ 그 말이 참으로 무색했습니다.’가 의미하는 성찰의 자세는 시간의 역사성을 통시적으로 읽어내었다는 말이 된다. 늘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놓치는 시간, 그 시간이 압축된 어머니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트랙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서서히/탈진해 가는 무명선수’가 회화적 이미지로 각인되면서 어머니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이 동일시됨을 느꼈을 것이다. 「50보 100보」라는 재미있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 거리와 무게와 성질과 의미, 내용일 것이다. 50보와 100보에 들어 있는 시간의 질량은 꼭 그만큼 정확할 것일진대 그 의미와 내용은 다를 것임은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한영숙이 감각한 시간의 의미는 그다지 차이를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있다.‘미래 어느 날/내가 바로 거기에 있’음을 인지하고 시간이 가져다주는 허무함과 동시에 삶의 진정성과 희노애락을 동시적으로 성찰되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시간을 통해 현재의 나를 말하는 것은 매우 익숙한 방식이다. 일반적인 방식을 택한 많은 시들은 자신의 시적 획득이 쉬워지는 만큼 한편으로 불안하다. 이미지와 진술의 발현은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시적 행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요즘의 시들이 대체로 절대적인 관점에 의해 씌어졌다고 할 때 시인과 시적 자아의 동일성 문제가 발생한다. 요즘 창작된 시들이 시인과 분리하기보다 함께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게서 빠져나간 시간’그 시간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그랬듯 지금 역시 그러할 것이며 미래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인간과 시간의 함수관계는 다양하게 표출될 뿐 그 어떤 말로도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물리학과 수학의 역학관계에 의존한다면 좀 더 쉽게 이해될 뿐인 것이다.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변환 속에서 인간의 내면에 장착되었다가 한 순간 빠져 달아나는 액체도 기체도 고체도 아닌 이상야릇한, 관념 덩어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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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그리운 옛집」(월간 《우리詩》2010년 2월호)
김경성, 「오래된 그림자」(월간 《우리詩》2010년 2월호)
김추인, 「노숙의 시간을 엿보다」(격월간 《정신과표현》1/2월호)
손현숙, 「꼴값한다」(계간 《시안》2009년 겨울호)
최창균, 「수거」(격월간 《정신과표현》1/2월호)
서춘기, 「얼굴에 대한 기억」(계간 《시안》2009년 겨울호)
한영숙, 「50보 100보」(시집 『푸른 눈』2010년, 한국문연)
출처 / 우리시회 - 우리詩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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