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理와 虛僞
럿 셀
Bertrand Russell (1872- 1970) : 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사회평론가, 名門 출신으로 켐브리지 대학에서 배우고 일차대전 중 反戰사상으로 투옥될 때까지 母校 講師, 그 후 사회평론가로서 주로 저술활동을 하였다. 1950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1947와의 공저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 Vol Ⅰ-Ⅱ, 1910- 13 는 記號論理學 발전의 한 시기를 劃하는 중요한 著作이었다.
그 밖에 哲學上의 주요 저작으로는 『外界의 知識』Our Knowledge of the Exteral World, 1914 , 『數理哲學序說』Introduction to Mathemathical Philosophy 1919,『 哲學槪說』An Outline of Philosophy, 1927, 『意味와 眞理의 探究』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40, 西洋哲學史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人間의 知識 』Human Knowledge ; Its Scope and Limits, 1948 등이 있다. 사회평론가로서도 사회문제, 결혼문제, 교육문제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다음 글은 『哲學의 諸問題』The Problems of Philosophy, 1912 의 제 12章의 번역이다.
사물들에 관한 인식과는 달리, 진리에 관한 우리의 인식에는 그와 반대되는 것, 즉 誤謬가 있다. 사물들에 관한 限,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할 수도 있고, 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直接知 knowledge by acquintance에 국한해서 보건대, 사물들에 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심적 상태란 없다. 우리가 직접 숙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그 어떤 것이 아니면 안된다. 우리는 직접지로부터 잘못된 推論을 하는 일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지 그 자체가 거짓된 것 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熟知에 관해서 는 二元論은 없다. 그러나 진리의 인식에 관해서는 이원론이 있다. 우리는 참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거짓된 것도 믿을 수가 있다. 많은 문제들에 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의견이 구구하고 相反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그 가운데서 어떤 信念들은 반드시 그릇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릇된 신념들도 참된 신념들이나 마찬가지로 강력하게 주장되는 일이 때때로 있는 이상, 어떻게 하여 이 그릇된 신념들을 참된 신념들과 구별할 수 가 있는가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가 된다. 어떤 주어진 경우에 우리의 신념이 오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여 알 수가 있는가? 이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여서, 이에 대한 완전히 만족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덜 어려운 하나의 예비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곧 ‘진리와 허위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장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비적인 문제이다.
이 장에서 우리가 따져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신념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우리는 어떻게 하여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신념이 참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신념이 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진리란 무엇인가?’ 또 ‘허위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일 뿐이요, ‘어떠한 신념이 참인가?’, 그리고 ‘어떠한 신념이 거짓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제를 완전히 갈라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 까닭은 이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혼동하면, 그 어떤 쪽 문제에도 참으로 적용될 수는 없는 해답이 나옴에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본질을 찾아내려고 할 때에 지켜야 할 점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이론이나 반드시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세 가지 要件이다.
(1) 우리가 가지는 진리론은 반드시 진리와 반대되는 것 즉 허위가 있음을 용인하는 이론이 아니면 안된다. 참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이러한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는데 실패해 왔다. 즉 그들이 세워놓은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는 모두 참이어야만 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허위의 餘地를 찾는 데에 지극히 곤란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념에 관한 이론은 직접지에 관한 이론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직접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 만일 신념이 없다면, 허위도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또한 진리는 허위와 상관적이라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진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함은, 자뭇 명백한 일인 것 같이 생각된다.
만일 우리가 단순한 물질만의 세계를 상상해 본다면, 그러한 세계에는 허위가 성립할 여지는 없을 것이며, 또한 거기에는 이른바 ‘사실’은 있을지언정, 진리는 허위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거기에는 어떠한 진리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진리와 허위는 신념과 言明에 달린 특성인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물질만의 세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신념도 언명도 없을 것이므로, 진리도 허위도 또한 없을 것이다,
(3) 그러나 방금 말한 바와는 반대로 하나의 신념의 眞僞는 언제나 그 신념 자체의 외부에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내가 찰스 1세는 絞首臺 위에서 죽었다고 믿고 있다면, 그러한 나의 신념이 참인 까닭은, 그 신념을 음미해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그 신념 자체의 고유한 성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2세기 반 이전에 일어났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이다. 또 만일 내가 찰스 1세는 그의 침상에서 죽었다고 믿는다면, 나의 신념은 거짓이다. 나의 신념이 아무리 생생하고 또 그 신념에 도달하는 데에 아무리 주의를 했다 하더라도, 그로 해서 나의 신념이 거짓임을 免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것도 또한 옛날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그러한 것이요, 나의 신념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진리와 허위는 신념의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념이 다른 것들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특성이요, 신념의 내적 성질에 따라 좌우되는 특성이 아니다.
위의 요건 가운데에서 제 3의 요건을 충족시키자면, 우리는 진리는 신념과 사실과의 어떤 형태의 대응 correspondence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하는 견해- 이 견해는 대체로 철학자들 사이에 가장 공통적인 것이었다-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論駁할 수 없는 반론이 일어나지 않을 만한 대응의 형태를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점 때문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만일 진리가 사유와 사유의 밖에 있는 어떤 것과의 대응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한다면 사유는 진리가 언제 도달되었는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은, 진리란 전혀 신념의 밖에 있는 어떤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의 정의를 찾아내려고 노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類의 定義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시도는, 진리란 整合性 coherence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허위의 徵表는 곧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단의 신념에 정합성이 없다는 것이며, 진리의 본질은 완전하고 완결된 ‘진리’의 체계의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하나의 큰 난점, 아니 두 가지의 큰 난점이 있다. 제일의 난점은, 신념의 정합적 체계는 단지 하나 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는 점이다. 소설가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과거를 하나 꾸며내면,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합치되지만 실제의 과거와는 전연 다르다고 하는 일은 있음직한 일이다. 좀 더 과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주제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 전부를 설명하는 假說이 종종 둘이나 그 이상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에 과학자들은 어느 하나의 가설을 제외한 모든 가설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언제나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또한 철학에 있어서도 두 개의 상반되는 가설이 다같이 사실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인생이란 하나의 긴 꿈이요, 외부의 세계는 꿈 속의 대상들이 가지는 정도의 實在性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견해가 旣知의 사실과 모순된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이 실재한다고 보는 상식적 견해를 버리고 바로 이 견해를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처럼 整合的 體系는 단 하나 밖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증명이 없기 때문에, 정합성은 진리의 定義로서는 미흡하다.
진리의 이러한 정의에 대한 또 하나의 반론은, 이 정의는 ‘整合性’의 의미를 旣知의 것으로 想定하고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整合性’은 論理의 諸法則이 眞임을 前提하는 것이라고 하는 反論이다. 두 명제가 정합적인 것은 이 두 명제가 다같이 참일 수 있는 경우요, 두 명제가 不整合的인 것은 적어도 하나의 명제가 거짓이 아니면 안 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두 명제가 다같이 참일 수 있는가 어떤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矛盾律과 같은 진리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 이 나무는 너도밤나무이다’와 ‘ 이 나무는 너도밤나무가 아니다’라는 두 명제가 정합적이 아닌 것은 그것이 모순율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모순율 자체가 정합성 與否의 吟味를 받아야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모순율을 거짓이라고 가정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다른 것과 부정합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논리학의 제규칙은 정합성 여부를 음미하기 위한 뼈대와 틀을 제공하는 것이요, 법칙 그 자체가 이러한 음미에 의해서 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진리를 알게 된 다음에는 정합성이 진리여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이유로 봐서 정합성이 곧 진리의 의미를 附與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사실과의 對應이 진리의 본성을 이룬다고 하는 견해에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事實’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신념이 참이기 위해서 신념과 사실 사이에 존립하지 않으면 안되는 대응의 본성은 어떠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규정해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上述한 세 가지 요건에 따라, 우리가 탐구해야할 진리론은 (1) 진리에는 그 반대 즉 허위가 있다는 것을 용인하며, (2) 진리란 신념의 특성이라고 보되, 그러나 (3) 진리를 신념과 외부의 사물과의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특성이라고 보는 이론이 아니면 안된다.
그처럼 虛僞를 容認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념을 이 신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대상과 정신과의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만일 신념을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신념도 直接知와 마찬가지로 진리와 허위의 대립을 용인하지 않고, 언제나 참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보면 명백해질 것이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이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 이라고 하는 단일한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한 대상이 있다면, 그 신념은 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대상은 없으며, 그 때문에 오셀로는 그러한 대상과의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념은 그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 일 수가 없다.
그의 신념은 그와는 다른 대상, 즉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한다는 것’과의 관계라고 말할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데스데모나가 케시오를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 이와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곤란한 일이다. 따라서 신념이란 정신과 단일한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 이론을 찾아내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關係란 언제나 두 개의 項 사이에 성립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어떤 관계는 세 개의 項을 요구하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네 개의 항을, 또 어떤 것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사이에’ between라고 하는 관계를 생각해 보라, 두 개의 항만이 나와 있는 限, ‘사이에’라는 관계는 불가능하다. 즉 세 개의 항이 그러한 관계를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數이다. 요크는 런던과 에딘버러의 사이에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에 런던과 에딘버러의 두 곳 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 두 곳 사이에는 아무 것도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嫉妬에는 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즉 적어도 세 사람을 포함하지 않은 질투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 ‘A는 B가 C와 D와의 결혼을 추진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와 같은 명제에는 네 개의 항의 관계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A와 B와 C와 D가 모두 나와 있으며, 그 관계는 이 네 개의 항을 모두 포함하는 형식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될 수가 없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더 들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둘 이상의 항이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허위가 당연히 용인되어야만 한다면, 判斷하는데에나 또는 믿는데에 들어 있는 관계는, 두 개의 항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여러 개의 항 사이의 관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는 캐시오를 사랑한다고 믿을 경우에, 그가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든가 또는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딘일한 대상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어떠한 정신과도 독립해서 존립하는 객관적 허위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록 논리적으로 논박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피해야 할 이론이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판단을 정신과 거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대상들과가 모두 따로따로 나타나는 관계라고 본다면, 그 편이 허위를 설명하기에 더 쉽다. 다시 말하면 데스데모나, ‘사랑한다는 것’ , 캐시오 - 이 모두는,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는 캐시오를 사랑한다고 믿는 경우에 존재하는 관계 속에 들어 있는 항들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오셀로도 역시 관계의 한 항이므로, 이 관계는 네 개의 항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네 개의 항의 관계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 대하여 어떤 일정한 관계를 가지며 또 사랑한다는 것과 캐시오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믿는다는 것과는 다른 어떤 관계에 있어서는 그러할는지 모르나 ,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오셀로가 거기에 관련된 세 개의 항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가 아니라, 그 항들을 합친 전체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이다. 이것은 믿는다는 관계의 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이 한 예는 네 개의 항을 함께 매놓는다. 그러므로 오셀로가 자신의 신념을 품고 있을 때에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믿는다’고 하는 관계가 오셀로, 데스데모나, 사랑한다는 것, 캐시오의 네 개의 항을 함께 얽어서 하나의 複合的 全體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신념이라든가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믿는다는 또는 판단한다는 관계에 지나지 않는데, 이 관계는 정신을 정신 자신과는 다른 여러 가지의 사물들에 관계지어 주는 것이다. 신념이나 판단의 行爲란, 어떤 특정한 시간에 어떤 항들 사이에 믿는다고 하는 또는 판단한다고 하는 관계가 일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참된 판단과 거짓된 판단과를 구별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 할 수 있게해 주었다. 어떠한 판단의 행위에도 판단하는 정신이 있고, 이 정신이 판단하는 항들이 있다. 우리는 정신을 판단에 있어서의 主體라고 부르고, 나머지 항들을 客體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는 캐시오를 사랑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오셀로는 주체인데 반하여, 데스데모나, 사랑한다는 것, 캐시오는 객체이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판단의 構成要素라고 불리워진다. 우리는 판단한다는 관계에는 分別 sense 혹은 方向 direction이라고 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比喩的으로 말하면, 판단한다는 것은 그 객체들을 - 정한 順序로 배열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이러한 순서는 문장 내의 단어의 순서에 의해서 지시되는 것이다. (屈折言語: 유럽의 여러 언어와 같이 단어가 문장 안에서 가지는 관계를 語形과 語尾의 굴절 즉 변화에 의해서 나타내는 언어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것이 語尾變化에 의해서, 예를 들면 主格과 對格과의 相異에 의해서 지시되는 수가 많다) 캐시오가 데스데모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오셀로의 판단과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의 판단과는, 똑같은 구성요소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판단한다는 것의 관계가 그 구성요소를 이 두 경우에 다른 순서로 배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캐시오가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 판단의 구성요소는 역시 똑같지만, 구성요소의 순서는 다르다. ‘分別’ 또는 ‘方向’을 가진다고 하는 이러한 특성은, 판단한다는 관계가 다른 모든 관계와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다. 관계의 ‘분별’은 순서와 배열이나 많은 수학적 개념들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이상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판단한다’라든가 ‘믿는다’고 하는 관계란 주체와 객체를 하나의 복합적 전체로 함께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점에서는 판단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모든 관계와 꼭 같다. 어떤 관계가 둘이나 또는 그 이상의 항들 사이에 성립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이 관계는 각 항들을 하나의 복합적 전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만일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사랑한다면, 여기는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사랑’과 같은 하나의 복합적 전체가 있다. 이 관계에 의해서 통합되는 각 항들은 그 자신 복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것들이 통합된 결과로서 생기는 전체는 반드시 복합적이다. 어떤 항들을 관계지우는 하나의 관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들 각 항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합적 객체가 있다. 또 반대로 하나의 복합적 객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구성요소들을 관계지우는 하나의 관계가 있다. 믿는다고 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경우에 성립하는 복합체에 있어서는, 믿는다는 것이 곧 (각 항을)통합시키는 관계요, 이러한 믿는다고 하는 관계의 ‘분별’에 의해서 주체와 객체는 어떤 순서로 배열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하는 것을 고찰하였을 때에 본 바와 같이, 객체 가운데의 하나는 반드시 관계가 아니면 안된다. - 즉 이 경우에는 ‘사랑한다’고 하는 관계가 곧 그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믿는다고 하는 행위에 있어서 生起하는 경우에는 이 관계는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지는 복합적 전체라는 통일성을 낳아놓는 관계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관계는, 그것이 믿는다고 하는 행위에 있어서 生起하는 경우에는, 객체중의 하나인 것이다 - 즉 그것은 건축물에 있어서의 시멘트가 아니라, 하나의 벽돌과 같은 것이다. 이 경우에 시멘트는 ‘믿는다’고 하는 관계다. 이 신념이 참일 때에는, 또 하나의 다른 복합적 통일체가 있게 되는데, 이 통일체에 있어서는 신념의 객체 중의 하나이었던 관계가 다른 객체들을 관계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서 만일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는 캐시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참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복합적 통일체가 있으며, 이 통일체는 오로지 신념의 객체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그 순서는 이 객체들이 신념에 있어서 가졌던 순서와 같으나, 신념의 객체중의 하나이었던 관계가 지금은 신념의 다른 객체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시멘트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떤 신념이 거짓일 경우에는, 신념의 객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와같은 복합적 통일체는 없다. 만일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는 캐시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거짓이라면,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과 같은 복합적 통일체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신념이 일정한 결합된 복합체에 對應하는 때에는 그 신념은 참이요, 대응하지 않는 때에는 거짓이다. 明確을 기하기 위하여 신념의 객체가 두 개의 항과 하나의 관계요, 이 항들이 신념의 ‘분별’에 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에는 만일 그러한 순서로 되어 있는 두 항이 그러한 관계에 의해서 하나의 복합체로 결합되면, 그 신념은 참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신념은 거짓이다.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진리와 허위와의 정의가 된다. 판단한다는 것 또는 믿는다는 것은 정신을 하나의 구성요소로 하는 일정한 복합적 통일체이다. 만일 餘他의 구성요소들이 신념 속에서 가지는 순서로 배열되어 하나의 복합적 통일체를 형성한다면, 그 신념은 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
따라서 진리와 허위란 신념의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外的인 특성이다. 왜냐하면 어떤 신념이 진리이기 위한 조건은 신념이나 또는 (일반으로) 어떠한 정신도 전연 內包하지 않고 있고, 단지 신념의 객체들만을 내포하고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무엇을 믿을 때에, 그 신념이 참인 것은, 그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의 객체들만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체가 대응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대응이 진리를 보증하며, 이러한 대응이 결여될 때 허위가 나온다. 이로써 우리는 동시에 다음의 두 가지 사실, 즉 신념은 (a) 그 존재에 관해서는 정신에 의존하고 있으나, (b) 그 진리에 관해서는 정신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이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다시 서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캐시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와 같은 신념을 예로 든다면, 우리는 데스데모나와 캐시오를 客體項 object- terms이라고 부르고, 사랑한다는 것을 客體關係 object-relation라고 부른다. 만일 여기에 ‘캐시오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의 복합적 통일체가 있어서, 이 통일체가 객체관계에 의하여 신념에서와 똑같은 순서로 관계지워진 객체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러한 복합적 통일체는 신념에 대응하는 사실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념은 대응하는 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참이요, 대응하는 사실이 없는 경우에는 거짓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진리나 허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신은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一旦 신념이 만들어지면, 정신은 이 신념을 참이게끔 한다든가 거짓이게끔 할 수는 없다. 물론 기차시간에 대 간다고 하는 것과 같이 신념이 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未來事에 관한 신념이라고 하는 특수한 경우에는 예외이지만, 신념을 참이게끔 하는 것은 事實이며, 이 사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결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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