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몇가지는 사후에 태어날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니체와 들뢰즈
질 들뢰즈는 1972년에 푸코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론이란 정확히 일종의 도구상자와도 같습니다. 이론은 유용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기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을 위해서 그러해야만 하지는 않습니다(그리고 자족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최근 프랑스 철학 내의 이론적 생산물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업이 이들의 집합적 도구상자에서 중심적인 도구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질 들뢰즈에게 해당하는데, 들뢰즈의 작업은 '니체'라는 이름의 도구를 계속해서 기꺼이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들뢰즈가 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두 형태 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들뢰즈의 사용법은 비록 명시적으로는 니체에 관한 해석을 던져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석을 니체가 그 당시의 어떤(유일한?) 지배적인 철학적 풍조라고 보고 도전하고 있는 형태로 간주한다. 두번째로, 니체가 분명히 언급되든 아니든 간에 들뢰즈는 다양한 니체적 모티브들을 전유해서 이론 자체의 비판적 기획의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 이 글에서 나는 첫번째 형태를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니체에 관한 들뢰즈의 초기 텍스트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이 글의 말미에 들뢰즈의 후기 저작에서 작동하는 니체적 흔적들 중 몇몇을 추적할 것이다.
<니체에서 헤겔/하이데거로>
들뢰즈가 니체에 관한 초기 텍스트에서 선택한 해석 전략과 10여년 후에 자끄 데리다가 제공한 니체 해석 전략을 비교함으로서 들뢰즈의 철학적 기획에 니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이 둘은 모두 '알기 쉬운(transparent)' 작가는 아니지만, ≪니체와 철학≫ 그리고 ≪박차들: 니체의 스타일≫에서 그들의 독특한 의견이 있다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즉각적 과제는 니체에 대한 독해를 전달하는 것이지만, 이 초기 텍스트들은 각각 단순하게 니체의 사유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이유로 니체를 이용한다. 들뢰즈의 경우 자신의 니체 독해를 자극했던 것은 반-헤겔적 논점이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으며, 데리다는 보다 신중하게도 하이데거적 해석학에 맞서기 위해서 니체를 사용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헤겔과 하이데거에 도전하기 위해 니체를 선택했다는 이런 표면상의 단순성이 이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모호하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데리다가 하이데거와 맺고 있는 관계는 들뢰즈가 헤겔에 대해 맺은 관계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이후 계속된 작업은 그가 하이데거에게 동료 여행자로서 그러나 어떤 하이데거적인 과장(excesses)을 올바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동료 여행자로서 접근하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존재신학적인 동시에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전통을 극복하려는 하이데거의 기획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 들뢰즈는 헤겔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그의 이론적 저작은 마찬가지로 헤겔과 국가장치를 지속적으로 동일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의 노마드적 전쟁기계는 이러한 국가기구에 대항해서 계속 투쟁한다.
초창기 작업에서 데리다는 형이상학으로부터 로고스중심주의적 사유 경향들을 해체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자주 니체를 언급한다. 보다 특별하게 데리다의 텍스트에서 니체는 데리다가 서구 형이상학의 핵심이라고 설정하고 있는 충만한 현존을 위한 노스텔지어적 갈망에 대한 대안으로서 나타나곤 한다. 사실 '니체'는 대안적 사유의 가능성과 로고스중심주의의 타자를 가장 적합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능한다. ≪박차들≫에서 우리는 또 다시 니체를 대안적 사유의 표본으로 간주하려는, 이번에는 하이데거 자신의 노스텔지어적 경향들과 관련해서 그렇게 하려는 데리다적 전략을 보게 된다. ≪박차들≫에서의 논의는 니체의 저작과 관련해 제기된 세가지 문제들 주변에서 구조화되는데, 각각의 문제들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와 겨루게 될 치명적인 무기로서 펼쳐진다. 세가지 문제들이란 텍스트의 문제, 고유한 것(the proper)의 문제, 스타일의 문제이다. 첫번째 문제를 제기하면서 데리다는 니체의 텍스트에 있어서의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니체의 여성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하이데거의 독해는 여성의 지위(position)에 관한 관심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데, 이러한 관심의 결여는 성(gender)과 여성의 문제에 관한 남성로고스중심주의적 전통의 무지를 되풀이하고 있으며 니체적 텍스트의 복잡함에 관한 부적절한 개념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전통 내에서 니체의 위치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하이데거적-형이상학적 존재물음을 니체적-가치론적 적절함의 물음으로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데리다는 니체를 형이상학적 전통의 최후의 위대한 대표자로 보는 하이데거와 명백히 결별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니체의 잃어버린 우산에 관한 논의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데리다는 가장 직접적으로 니체의 스타일의 문제를 논의하는데, 그것은 니체의 텍스트와 텍스트 일반들, 뿐만 아니라 해석의 문제틀과도 관련된 것이다. 데리다가 '(성서)해석학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하는 이 논의는 그의 논문 <차연>의 '하이데거의 희망'이라는 장의 보충으로 읽혀질 수 있으며 또 이러한 비판적 논의에서 제기된 많은 논점들을 반복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데리다의 해석이 하이데거의 해석을 대체한다거나 논박하지 않듯이 여기에서도 하이데거에 대한 데리다의 반응은 그리 명료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초기 독해에 관한 <보충(suppl ment)>이며, 보충성이라는 데리다적인 다른 문제들처럼 이러한 <보충>은 자신이 보충하는 것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뛰어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니체의 스타일에 관한 논의에세 데리다의 전략은 이중적이다. 즉 데리다는 스타일의 문제가 하이데거의 독해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사태가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하이데거의 비판이 항상 간접적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박차들≫은 철학적인 '미결정성'의 또 다른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특히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내에 포함시키려고 하면서도 이 역사에서 자신은 배제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의 성공과 관련해서 그러하다. 하나의 텍스트로서 ≪박차들≫은 니체/하이데거에 관한 데리다의 양가적인 관계에 대한 이정표(signpoint)로서 나타나며, 양가성은 1980년 이전에 그의 다수의 저작에서 관찰할 수 있는 그의 사유에 있어서의 어떤 결정불가능성(미결정성)을 표식한다.
그러나 이 양가성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용어가 아니다. 들뢰즈가 철학사 내에서 다소 경전적인 인물들에 관한 단선적인 철학적 분석에 일차적으로 몰두했던 시기에 발간된 ≪니체와 철학≫은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에 프랑스에서 니체의 사유에 관한 관심에 기여한 가장 뛰어난 연구서다. 이 텍스트에서 들뢰즈는 헤겔의 변증법과 니체의 계보학을 화해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시도이며 자신은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즉 니체의 철학에 관한 해석을 제공하려는 들뢰즈의 욕망은 니체를 신-헤겔적 변증론자로 독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과 부합한다.
헤겔의 사유가 어떤 통일적인 종합을 향한 운동에 의해 항상 이끌여지는 곳에서 니체는 정반대로 복수성(multitude)을 긍정하고 다양성을 환호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실 들뢰즈는 니체의 저작 전체를 헤겔 변증법에 대한 논박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이라는 유명한 헤겔적 발견을 그 자신의 발견물인 '긍정적인 것의 부정성'과 대립시키는 것이다. 니체에 있어서 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 간의 양적인 차이에 초점을 맞추면서 들뢰즈는 이 반동적 힘들이 능동적 힘들을 양적으로 능가한다고 하더라도 위베어멘쉬( bermensch)의 지배는 노예의 반동적 힘들을 능동적으로 부정하는 그/그녀의 능력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노예는 부정적 전제('당신은 타자이며 악하다')로부터 긍정적 판단('따라서 나는 선하다')으로 나아가는 반면 주인은 자아의 긍정적인 변별화('나는 선하다')로부터 부정적인 주석(보충)('당신은 타자이며 나쁘다')으로 나아간다.
들뢰즈에 따르면 힘의 기원에는 양적인 차이가 있으며, 계보학자의 과제는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르는 힘의 이러한 미분적(변별적)이고 발생적인 요소에 몰두하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는 타자의 반동적 부정(negation)이 그 결과로 자아의 긍정적인 긍정을 갖고 있는 반면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전도시킨다. 즉 주인이 자아를 능동적으로 위치설정하는 것은 노예의 반동적 힘의 부정에 의해 수행되며 이것으로 귀결된다.
≪니체와 철학≫을 읽으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이 텍스트는 니체의 사유를 전통적인 존재론의 담론적 실천들 속에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니체-효과라고 부르는 것을 들뢰즈의 저작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가장 흥미롭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들뢰즈 자신으로 하여금 니체에 관한 그의 초기 저작에 반하여,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말할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그는 철학사란 '철학의 자기 오이디푸스'라고 쓰고 있으며, 또 들뢰즈 자신이 '철학사에 의해 다소간 황폐해진' 세대, 가장 최후의 세대의 일원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니체에 의존해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빠져나갔다'. 제도화된 담론을 지배하는 분과학문적 규칙의 규범화하는 권력에 대한 푸코의 설명을 상기시켜 볼 때, 들뢰즈는 철학사가 항상 철학에서 권력의 대리자(agent)로서 억압자의 역할을 해 왔다고 쓴다.
"어떻게 여러분은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그리고 그들에 관한 아무개의 책을 읽지 않고서도 생각할 수 있는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협스런 학파가 전문가들(specialists)을 제조하지만 -- 그러나 이것은 또한 외부에 거주하는 자들을 이들이 경멸하는 이러한 전문가주의(specialism)에 더욱더 순응하도록 만든다. 철학을 요청하는 사유의 이미지는 역사적으로 형성되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할 수 없게 효과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들뢰즈는 계속해서 자신은 철학사의 일부분으로 나타나는 철학자들을 좋아하지만 한 가지 관점 혹은 모든 관점에서 '순수이성의 관료주의'로부터 탈출한 철학자들을 더욱 좋아한다고 말한다. 니체에 관한 들뢰즈의 텍스트는 대립(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헤겔적 패러다임, 즉 지양(Aufhebung)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니체의 차이의 긍정을 발전시키는 한 전통적인 철학적인 담론의 경계를 탈피하려는 것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후기 저작에서 니체<의> 해석에서 니체<와의> 실험으로 옮겨가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철학의 '공식 언어'의 외부에서, 철학 속에서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지배하는 유기적 규칙들 외부에서, 그리고 이들 후기 저작들이 모든 철학적 제스춰에 각인되어 있는 정치적이고 리비도적인 차원들을 인정하는 한 철학 내에서 작동하는 전형적인 권력 놀이들 외부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들뢰즈의 후기 저작에서 니체의 텍스트는 탈영토화하는 정치학의 예가 되는데, 모든 텍스트들은 스스로를 이해될 수 있는 특권적 대상이라기 보다는 사용될 수 있는 도구로 표현됨으로써 이 탈영토화하는 정치학을 갈망해야 한다. 푸코처럼, 그러나 데리다와는 달리 들뢰즈는 텍스트의 언어놀이에 만족하지 못하며, 후기 저작에서 그는 '해석'의 전반적 기획을 거부하기에 이르며 대신 그 명확한 의도가 정치적 변화를 촉진하거나 자극하는 것에 있는 <실험>의 과정을 선택한다. '기표'는 발명된 것이기에 마치 해석의 강박관념이 독자들을 은폐되고 비밀스런 의미를 찾기 위해 모든 방향으로 보내버리듯이, 사물들은 아직 스스로를 분류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뢰즈는 ≪대담(Dialogues)≫에서 말한다. '의미'를 회복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는 해석학적인 해석 기획 그리고 기표들의 놀이를 추적하는 구조주의적 기획과 달리, 들뢰즈는 코드화, 탈코드화, 재코드화를 강조한다. 코드화 과정은 이것이 법적인 것이든 계약적인 것이든, 혹은 제도적인 것이든 간에 들뢰즈에게 있어선 정치의 존재를 구성한다.
그리고 니체의 독창성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새로운 종류의 책, 즉 그의 아포리즘이 의미를 기호화하기(signify meaning) 보다는 힘들을 전달하는 한에서 코드화들을 거부하는 책을 썼다는 데 있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972년 니체에 관한 세리지(Cerisy) 콜로키움에서 <노마드적 사유>라는 논문의 표현으로 인해 들뢰즈에게 제기된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사유와 '해체'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제가 당신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당신은 나의 경우 하이데거적인 관점에 대한 나의 견해에 몇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기쁜 일입니다. 텍스트의 해체라는 방법과 관련해서 보자면, 저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제 자신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텍스트에 관한 주석가라고 표현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제게 있어 하나의 텍스트는 단지 텍스트 외적인(extra-textual) 실천 속에 있는 사소한 수레바퀴wheel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해체의 방법 혹은 텍스트적 실천의 방법, 혹은 여타 다른 방법에 의해서 텍스트에 관한 주석을 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텍스트를 길게 늘어뜨리는 텍스트 외적인 실천 속에서 하나의 텍스트를 이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문제입니다. 당신은 제게 노마드의 반응을 믿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데리다적 해체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은 아닐지라도 이 언급은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입장이 데리다의 입장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사용과 방법간의 차이.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데리다가 철학사에서 특권적 텍스트들과 경전적 사상가들 몇몇에 관해 주석달기를 하면서 중요한 지점에서 '니체'라는 고유한(proper) 이름을 방법론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사실 '니체'는 로고스중심주의적이라기 보다는 대안적 사유의 가능성을 위한 환유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니체'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이 학계 내에서든 밖에서든 정치적 함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나는 니체에 관한 데리다의 다른 텍스트들 ― ≪기호 해석하기 (니체/하이데거)≫와 ≪오토바이오그라피: 니체의 가르침과 고유한 이름의 정치학≫ ― 을 아카데믹/지적 정치학과 세계정치학 각각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려는 데리다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서 제시하면서 위의 주장에 반대하고 싶다. 그러나 데리다 저작의 정치적 차원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 차원이 텍스트적으로 맥락화된다는 사실을, 즉 그것이 독해와 해석의 실천들로의 방법론적 개입의 맥락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된다. 다른 한편, 들뢰즈에게 문제는 방법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데리다가 오늘날 유명한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는 모토를 제시하는 곳에서 들뢰즈는 오히려 텍스트를 추방시키고자 한다. 즉 독해가 정치적 행위인 한 과제는 텍스트적 그물망 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외적인 실천으로의 탈주선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 다른 맥락에서 들뢰즈는 이번에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아상블라쥬(agencement; 배치)라는 그들의 통념에 의거해서 동일한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책은 외부를 통해서만, 그리고 외부 위에서만 존재한다'('A book exists only through the outside and on the outside'). 하나의 아상블라쥬로서의 책은 다른 아상블라쥬들과의 상호연관에서 존재한다 ; 그것은 함께 결합될 수 있는 것에 의거해서 존재하며 함께 기능할 수 있는 것에 의거해서 존재한다. 사용과 방법간의 차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 그리고 들뢰즈의 텍스트적 실천들과 데리다의 해체적 실천들 간의 대조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 우리는 이제 들뢰즈가 니체의 텍스트들과 더불어 구성한 몇가지 아상블라쥬들을, 그가 니체의 텍스트와 텍스트 외적인 실천들 사이에서 행한 '연관관계들'을 검토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니체-실험의 몇가지를 검토해야 한다.
의지, 권력, 욕망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근접한 입구가 된, 그의 디오니소스적 세계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법이 된 말 속에서 다음과 같이 공표한다. "이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에 다름아니다. - 그리고 이것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없다. 여러분 자신들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다. - 이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는 모든 미래의 이원론에 대해 도전한다. 즉 이해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의거해서 작동했던 하나의 모델을 따라 전진하는 것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 대신 권력에의 의지의 수위와 종류 모두를 구별하는 다가적인(polyvalent) 일원론을 채택하는 니체의 선언은 세계를 이분법적 집합, 즉 선 또는 악, 정신 또는 신체, 진리 또는 오류, 우리 또는 그들 등으로 분할하고 위계화하려는 이후의 모든 이분법적 시도에 대한 도전으로서 자리잡는다. 세계는 그러한 이분법적 사유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며, 모든 것은 권력에의 의지이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모든 개념적 구별의 상호텍스트적이며 우발적인 성격이 이분법적 대립의 엄격하게 위계화된 메타서사에 대한 그 어떤 호소도 의심스럽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니체는 모든 형이상학자들의 '전형적인 편견'과 '근본적인 믿음'은 '그 대립적 가치들에 대한 믿음이다'라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주인의 도덕성과 노예의 도덕성, 아폴로니안과 디오니소시안, 삶-고양과 삶-부정(위협) 등등과 같은 대립쌍을 계속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이 결과, 그의 텍스트는 어떻게 비대립적인 방식으로 그가 이분법적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세계는 ..."이라는 니체의 가장 유명한 미출간된 책으로부터 인용한, 일원론적인 최종 노트를 따라서 가능한 한 날카롭게 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그의 최종의 (그럼에도 사후의) 출간 저작의 최종 언급은, 궁극적인 이분법적 선택을 설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언급을 기억해야 한다. 즉 "나는 이해되어 왔었던가? -- 디오니소스 對 the Crucified (십자가에 박힌 사람)"
니체의 응축된 공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마술적 공식 ... 다원주의=일원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비된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일원론과 다원론간의 구별을 붕괴시키며, 또한 이항적 개념들을 전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니체를 따른다. 이항적 형식(format)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발성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헤겔적 전통은 물론이고 데리다 및 여타 최근의 프랑스 사상가들과 차별점을 설정하는 가장 명백한 지점의 하나를 나타내고 있다. 헤겔적 지양은 보다 고차적인 종합 속에서 이원론적 대립을 해결하는 반면, 데리다는 이항적 대립을 보다 원초적인(primordial) 선험적 '비-개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글쓰기와 말하기 간의 대립의 가능성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원형-흔적archi-trace' 혹은 '현존하는 것'the being present의 표현이나 부재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차연>). 이와 달리 몇 개의 기초적인 분석적 범주들 -- 편집증(paranoia)과 분열분석,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 수목적인 것(arborescent)과 리좀적인 것, 국가기구와 노마드적 전쟁 기계, 매끈매끈한(smooth)과 울퉁불퉁한(striated) -- 에 대한 간단한 연구조차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어떤 종류의 이항론의 작업틀 내에서 작업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항론은 이분법적 개념들을 분해(dissove)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수화시키려고 한다.
니체가 비대립적 방식으로 이원론적인 개념들을 이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남겨두는 반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의 고원≫의 서문에서 직접적으로 이 논점에 맞서며, 여기에서 이들은 이원론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단지 다른 이원론에 도전하기 위해서만 그러할 뿐이라고 한다. 이항개념들이 사용될 때, 우리는 이원론적 개념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이런 사용은 필연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원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특권화하고 구체화(reify)하는 것을 주의깊게 피해야 하며, 반면에 이러한 이원론이 대립보다는 차이들을 표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이런 이원론을 사용하는 것이 항상 잠정적인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고유하게 대립된 주체들을 표식하는 것으로서 이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차이들을 승인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혹은 다가적인(polyvalent) 일원론의 전망에 도달하는 것이 니체와 들뢰즈의 기획들 사이의 중심적인 접촉점 중 하나다. 니체가 모든 것은 권력에의 의지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의 관심을 실체들, 주체들, 사물들로부터 떼어내고 대신 이러한 술어들 사이의 관계들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들은 힘들의 관계들이다. 즉 인력과 척력, 지배와 종속, 부과와 승인, 기타 등등. 니체에게 형이상학적인 것이 있다면, 그리고 (하이데거가 그러하듯이) 이런 관점에서 니체를 바라보는 것이 특별히 유용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쨋든 그러하다면, 이 형이상학은 역동적인 것이며, 실체-형이상학이 아니라 '과정' 형이상학이며,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생성의 형이상학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 이러한 생성들은 힘들의 과정들일 것이다. 즉 보다 강한 생성이거나 보다 약한 생성이거나, 혹은 고양이거나 저속화일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러한 생성들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없다. 따라서 그가 옹호하는 목표는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약한-생성보다는 보다-강한-생성을, 굴복이 아니라 극복을 포함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손익계산서를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이다.
우리가 들뢰즈의 저작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우리는 그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이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들뢰즈는 선택이란 항상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국부적이고 상대적이라고 하는 다원주의적 연속체(continuum)에 의거해서 주어진 대안들 사이의 전통적인 이항적 구별을 재형성하는 기획에 열성적이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더불어 욕망하는 생산의 연속체에 대해서 말할 때, 이들이 호소하는 모델은 권력에의 의지를 존재자들의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한 니체의 근본적인 답변이라고 보는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힘들의 변별(미분)으로 이해된 권력에의 의지라는 니체의 '일원론'이라는 형태를 띤다.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이 완전한 형이상학자인 하이데거가 존재의 논리, 즉 존재-논리(onto-logie)에 의거해서 권력에의 의지를 이해하고 있는 곳에서 들뢰즈는 권력에의 의지를 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에 관한 해석 속에, 그리고 가치평가를 용이하게 하는 긍정과 부정의 변별적 논리 내에 위치시킨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는 존재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계보학적인 수준에서, 즉 존재와 존재자의 수준에서라기 보다는 힘들과 이런 힘들이 부여된 상이한 가치들 사이의 양적이고 질적인 차이들의 수준에서 작동한다. 모든 것은 권력에의 의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선과 악, 진리와 오류를 넘어서려고 하는 니체는 실체들 없이 합리성을, 관계성(releta) 없이 관계들을, 배제없이 차이들을 사고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의 사유는 사건의 논리학에 의거해서 인식된 들뢰즈의 욕망하는 아상블라쥬를 위한 하나의 모델의 역할도 한다.
니체의 형식적 구조를 하나의 모델로서 사용하는 것에 덧붙여서 들뢰즈는 우리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의 '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파악하며, 두가지 구성적 극점들(component poles)에 대한 확장된 설명을 던져준다. : 의지와 권력. 프랑스 사유 일반이 과거 30여년 동안 소위 3인의 의심의 대가, 즉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축으로 하여 작업해 왔다면, 우리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이들이 맑스와 프로이트보다 니체를 특권화시키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맑스는 일차적으로 권력의 register와 더불어 작업하며, 프로이트는 일차적으로 욕망의 register 내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들 두가지 resister가 겹친다는 것에 무지하며, 이들이 이것들을 관련시킬 때에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킬 때 뿐이다. 반면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하나에 대해 다른 하나를 특권화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의 사유는 욕망과 권력의 포괄적인 연계(conjunction)에 의거해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서 니체에게 있어서 의지가 권력을 의지하고, 권력이 스스로를 의지를 통해서 표현하는 한 <권력에의 의지>는 남아도는(redundant) 것이다. 맑스나 프로이트에 대해 니체를 특권화하면서 들뢰즈는 의지의 극과 권력의 극 간의 공모(complicity)를 인정하며, 그 결과 다른 극의 중요성을 없애버리거나 이를 그의 분석에서 배제하지 않고서도 극들의 하나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특히 가타리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 들뢰즈는 권력의 의지함(willing)-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는 욕망을 주체화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과 권력이라고 하는 친밀하고 복수적인 결합(coupling)을 인정한다.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욕망을 권력에의 의지와 연결시키며, 욕망이 생산적이라는 통찰은 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 모두의 생산성에 의거해서 권력에의 의지에 관한 그의 성찰을 발전시킨다.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니체적인 권력에의 의지의 기계론적이고 기능주의적인 번역으로서 욕망하는 생산을 도입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욕망하는 의지와 욕망된 대상의 기능적 아상블라쥬이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목표는 욕망을 기능주의적인 어휘속에, 기계론적인 색인 속에 집어넣는 것인데, 이는 실체적 의지, 에고, 무의식 혹은 자아로 욕망이 인격화/주체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욕망이 위치하게 될 내재성(interiority)의 영역에 의해 성격규정된, 별개의(discrete) 주체라는 유기체적 함의를 피함으로써(By avoiding the organicist connotations of a discrete subject characterized by a realm of interiority within which desire will be located) 들뢰즈는, 주체없는 권력에의 의지가 의지함을 행한다고 말할 때 혹은 권력에의 의지가 '행위자(agent)'를 생산하면서도 생산된 '대상'이라는 것을 내포할 때 니체가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역설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을 아상블라쥬의 부분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주체의 극에서 욕망을 구체화하거나 인격화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아상블라쥬들의 기계론적 언어가 외재성 -- 외부와의 연계는 항상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 을 함축하고 있는 한, 이 언어는 욕망과 욕망된 대상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을 인정한다. 들뢰즈는 욕망을 결여라고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이 견해는 프로이트, 라깡, 샤르트르,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욕망이란 욕망된 대상이 부재하다는 것을 지각하는 반응 속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하거나 또는 욕망이란 대상의 결여에 의해 주체 속에서 생산된 어떤 상태라고 가정한다.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 욕망이란 기층구조(infrastructure)의 일부분이다. 즉 욕망은 욕망된 대상은 물론이고 이 욕망된 대상이 나타나는 사회적 장을 구성한다. 또 다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처럼 욕망은 생산적이다. 그리고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를 복수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복수적인 형태들 속에서, 즉 일단은 생산자와 생산물, 일원론과 다원론으로 나타나듯이 들뢰즈도 또한 욕망이 복수화되고 다극화(polyvocal)되기를 원한다. 니체는 강력하고 건강한 권력에의 의지를 극대화하려고 하면서도 약하고 퇴폐적인 권력에의 의지의 필연성도 인정한다. 심지어 불가피성까지도. 들뢰즈는 욕망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때로는 해체적이고 때로는 억압되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또 다른 때에는 자기 자신의 억압을 추구하고 이를 생산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 자신의 억압을 추구하는 이러한 욕망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분석의 목표 중 하나이며, 우리는 그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 욕망과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의 '발견' 즉 의지는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를 의지하는 것이라는 '발견' 사이의 구조적인 유사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들뢰즈가 니체를 전유하고 있듯이 권력에의 의지는 욕망하는 기계로 전화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니체의 생물학주의(biologism)는 들뢰즈의 <모든 것은 욕망이다>로 된다. 건강한 권력에의 의지에 관한 니체의 긍정은 들뢰즈의 욕망하는 생산의 긍정이 된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즉 우리에게는 이러한 전화를 통해서 무엇이 얻어질 수 있는가? 이 문제에 관한 답을 통해서 나는 두 개의 텍스트적 실험을 보여줄 것이다. 첫째로, 들뢰즈에서 니체로 이동해 가면서 니체의 중심적 테마의 하나, 즉 bermensche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들뢰즈의 접근방법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두번째 실험에서는 방향을 바꿔서, 기독교적 도덕성에 관한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에 몰두하는 것이 어떻게 정신분석학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의 몇가지 특성들을 조망하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생성(becoming; 됨)- bermensche
들뢰즈의 후기 저작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테마 중 하나는 그가 '생성'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그는 생성을 이것과 혼동될 수 있는 몇가지 다른 변형적 과정들과, 특히 진화와 구별한다. 생성을 구별짓는 중심적인 특징은 고정된 용어의 부재이다.
"실재적인 것은 생성 자체이며, 생성의 block이지 추정된 고정된 용어가 아니다. ... 생성은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생성하지 않는다. ... 생성은 자신과 별개의 주체를 결여한다. ... 생성은 그 자신의 일관성을 지닌 동사이다. 그것은 '나타남appearing', '있음being', '같게 함equaling', 혹은 '생산함'으로 환원되거나 이것으로 소급될 수 없다."
들뢰즈는 '생성'과 겉보기에는 동의어인 이러한 모든 것 속에서 결여된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진화론적인 언어가 한 과정의 시작과 종착점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이것들 사이의 여정을 모호하게 하는 반면, 합성적(compound) 생성의 언어는 이러한 최종적 귀착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에 주목한다. 생성들은 극들 사이에서 일어나며, 또 생성들은 항상 기원이나 목적지(destination) 없는 중간(middle)을 지나쳐가고 따라가는 중간자들(inbetweens)이다.
생성의 이런 운동의 실험적 가치는,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 독해에서, 특히 은유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카프카가 사용하는 변신(metamorphosis)에 의거해서 제시된다. 은유는 유사성과 모방의 관계들을 요청하는 반면, 변신은 생성의 과정들을 각인하고 있다. 그들은 ≪변신≫을 스스로를 곤충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사고하는 한 개인의 유비로 읽지 않는다. 이런 독해는 사실상 곤충을 비인간화된 인간성의 은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그레고리의 곤충-됨(becoming-insect)이다. 즉 그레고리의 곤충-됨은 그의 가족에 의해서 재-영토화될 수 있을 뿐인 가족의 정치학을 탈-영토화하며, 그의 누이의 사진을 집어들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그레고리의 죽음-됨(becoming-dead)으로 귀결되는 사과를 던지는 것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유형지(The Penal Colony)≫에서 공무원의 기계-됨이나 ≪아카데미 보고서≫에서 침팬지의 인간-됨도 카프카의 단편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성에 주목함으로써 복수성의 과정으로서의 주체성이라는 대안적 통념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게 되며, 이 과정에서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은 스스로를 타자-됨으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은 이 주체들을 고정되고 완전히 형성된 것으로 과잉결정하면서도 오이디푸스적으로 불구화되거나 사회적으로, 상호주관적으로 소외된 것으로 과잉결정하는 전통적인 정신분석적이거나 실존론적 해석이 그들에게 부과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다. 다른 한편 들뢰즈와 가타리의 독해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라도 가능한 것이다. -- 주체는 복수적인 생성의 과정들이며, 이 과정들 속에서 모든 것은 여타의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다. 인간성은 곤충이 되는 것이며, 곤충은 침팬지가 되는 것이고 침팬지는 살인기계가 되는 것이며, 살인 기계는 인간성이 되는 것이며, 등등 끝이 없다.
생성에 주목하는 것은 니체의 bermensche와의 실험에 의해서 사용될 수 있게 되며, bermensche와 관련된 많은 해석적 역설들은 우리가 bermensche를 니체의 이상적 주체 모델이나 완전한 인간존재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피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하이데거와 카우프만을 포함하여 니체에 대한 가장 영향력있는 해석가들의 대다수가 bermensche를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좌익과 우익에서 나온 희화적인 이미지들은 니체의 bermensche를 Maslowian적인 자기-실현적 개인이나 파시스트적인 도덕적 괴물의 모델로 묘사하는 것들이다. 한편 우리는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bermensche는 그의 열등한 추종자들을 지배하는 금발의 거인이 아니다. bermensche는 단지 즐거워하고 죄가 없으며, 자유로운 인간 존재일 뿐이며, 그를 압도하지 못하는 충동적 욕구(instinctual drives)를 소유하고 있는 자이다. 그는 그의 욕구의 주인이지 노예가 아니며, 따라서 그는 충동적 방출(discharge)과 외적인 장애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J.P. 스턴은 다음과 같이 쓴다.
"[니체는] 자기-실현과 자기-생성의 무조건적인 가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부터 온 그릇된 믿음(bad faith)과 더불어 나아가는 판타시즘과 초인(Superman)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부터 온 그릇된 믿음을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던져주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질 수 있는 교리를 불신에 가득찬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중복된 자아에 대한 엄숙한 숭배 -- 개인적 본래성의 파토스 -- 가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의 주요한 교리였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어떤 사람도 A. 히틀러보다 더 자기-창조된 '가치들'의 완전한 실현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다."
니체 자신은 bermensche라는 단어를 <보다 고귀한 종류의 인간>이나 다윈적이고 진화론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보냈다. 따라서 니체를 초인(superman)의 철학자라든지, 신의 죽음에 뒤따르는 새로운 인간-신학(anthropo-theology)에 의거해서 신의 대체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존재인 양 인간을 고양시키려 하는 사람으로 읽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들뢰즈가 푸코에 관한 책(≪푸코≫)의 부록(<철학극장>)에서 지적하듯이, 신의 죽음을 생각한 사람, 그리고 신의 부재에 의해 공허하게 된 공간 속에 인간을 집어넣으려고 한 사람은 니체가 아니라 포이에르바하이다. 이와 달리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단지 최후의 교황(the last Pope)에게만 흥미있는 오래된 이야기이며, 몇가지 방식으로, 종종 비극이라기 보다는 희극으로 말해진 이야기이다.
들뢰즈적인 접근방법은 이상적 인간성의 몇가지 모델에 의거해서 니체가 bermensche에 의해서 의미하려고 한 바를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니체적 텍스트에서 bermensche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실험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bermensche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최후의 인간, 보다 고귀한 인간, 자유로운 영혼, 주인과 노예, 도덕주의자라고 알고 있는 bermensche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들뢰즈적인 접근방법은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들뢰즈가 지적하듯이 "우리가 만화의 수준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매우 임시적인(tentative) 표시에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니체의 bermensche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던지려고 하는 니체의 주석가들처럼 담론은 종종 이러한 수준으로까지 하강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니체적 텍스트에 " bermensche"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특별한 존재나 존재유형의 이름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 bermensche"는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최상의 성취의 유형(a type of supreme achievement"라고 부르는 것인 힘들의 어떤 이상화된 응집화(conglomeration)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다른 어떤 곳에서도 bermensche에 관한 철학적인 안내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bermensche가-되기 위해서 취해야할 단계들에 관한 주장을 제공한다. 들뢰즈를 따라서 나는 bermensche가-되기를 하이픈(-)을 써서 복합적인 아상블라쥬를 표시하는 복합동사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배치된 것(to be assembled)의 귀결점을 실체화(hypostatizing)하고, 재실체화하거나 신격화하기 보다는 배치하기(assembling)의 능동적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단지 인간 존재의 bermensche-되기에 대해서만, 외적인 권위적인 부과의 한계 밖에서 강함(strength)을 축적하고 지배(mastery)를 실행하는 과정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는 이러한 bermensche-됨의 과정을 "삶-고양"(life-enhancement)이라고 부르며, 그는 이것에 의해서 주관성의 이상적 형태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력에의 의지의 자기-극복과 증대의 과정을 지적할 수 있다. bermensche를 한가지 견해 혹은 한가지 수수께끼 이상의 다른 어떤 형태로 제시하는 데에 있어서의 니체의 실패 --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그의 거부 -- 는 "S는 bermensche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bermensche가 주체가 예시화될 수 있는 존재론적 상태나 존재의 방식을 지시하지 않는 한 항상 "아니오"가 된다는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bermensche-됨의 상이한 가능성들과 더불어 실험함으로써 우리는 금세기 초에 제공된 니체에 관한 몇가지 독해의 비극적인 경우에서처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넘어서는 인간(Overman)"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중심화된 초-주체(super-subject)를 구성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실험적 접근방법은 짜라투스트라 자신의 실험주의(experimentalism)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길을, "유일한 길 --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존재의 방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bermensche-되기라고 부르는 생성의 무한한 과정들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극복과 가치변환(transvaluation)의 긍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 혹은 정신분석학의 계보학
이제 두번째 실험으로 되돌아 가면서 나는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비판,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이 너무도 복잡해서 이 짧은 글 안에서는 다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내가 여기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금세기 초에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정교화시킨 분석적 패턴을 따르는 방법에 의거해서 이들의 비판이 개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반그리스도≫의 저자가 ≪앙띠오이디푸스≫의 저자들의 주장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교회 실천들에 대한 니체의 계보학적인 설명으로부터 정신분석학의 실천들을 분석하는 방법을 끌어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현대 민속학(ethnology)의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 인용하고 있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나타난, 나쁜 양심의 기원, 그리고 교회와 국가간의 동맹에 대한 니체의 분석에서 중심적인 논점 중 몇 개를 재빨리 요약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첫번째 에세이에서 니체는 "원한(ressentiment)의 정신으로부터 기독교성의 탄생"을 연대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능동적으로 반응하는데 있어서의 무능력은 이러한 무능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의 발명으로 나아간다. -- "주체" 개념. 주체의 발명에 의해서 노예는 행동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는 행동성을 근거지우고 또 이를 지탱하는 하나의 실체(substratum) (궁극적으로는 영혼)를 창조한다. 노예는 이제 강함(strength)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강함으로 표현하지 못하며, 극복하려고 욕망하지도 또 주인이 되려고 욕망할 수도 없다.
노예의 도덕성은 이제 다음과 같은 도덕적 함의를 끌어온다. 즉 강한 것은 악한 것이 될 수 없다; 약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작용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일군의 희생물로 생각하여 행동을 삼가할 것을 선택하는 양처럼, 허구로서의 주체/영혼의 노예적인 유형의 발명은 스스로를 좋은 것으로 해석하게끔 허용하고, 그 강함의 본질적인 결여를 자발적이고 은총에 가득찬 성취라고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게 해주는 것으로부터 힘을 분리시킨다. 다시 말해서 주체의 발명은 노예로 하여금 그들의 약함을 자유로 해석하게끔 허용했다.
두번째 에세이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죄, 나쁜 양심, 처벌과 책임성 -- 다시 말해서 도덕성 -- 을 가능하게 하는 기억력을 키우는데 몰두하는 담론적 기억술(mnemotechnics)의 잔인한 역사를 추적한다. 고통, 그것은 니체에 따르면 기억술에 가장 강력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것이 기억속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깊이 각인되어야 하며 크게 상처받아야 한다. 이러한 양육의 메카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니체는 첫번째로 죄와 나쁜 양심의 기원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들의 기원은 채무자와 채권자의 경제적 관계에 놓여 있다. 본질적으로 상환할 수 없는 빚이라고 인식되어 온 도덕적 개념인 "죄"는 본질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부채에 관한 경제적이고 법적인 통념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처벌의 기원에 있어서, 빚을 상환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부터 출현하는 앙갚음(보복)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Schuld, 부채/죄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동등성을 설립하고자 애쓰는 기이한 보상의 논리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 가격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은 상환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들이 소유한 어떤 것, 즉 그들의 신체, 그들의 배우자, 그들의 자유, 심지어 그들의 생명으로 실체적인 보상을 할 수 있는 채무자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와 고통이 애초부터 서로 얽혀있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고통은 채권자가 고통을 가함으로써 쾌락을 얻는 한 빚과 균형을 맞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지배를 실행함에 있어서, 그리고 고통을 가함으로서 얻어지는, 따라서 채권자가 주인의 쾌락에 참여하게 되는 기본적인 즐거움이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잔인성이 원시인들에게 쾌락을 구성하는 그 수준은 이러한 고통을 그들 자신들과 신들을 위한 축제적인 놀이로 전환시킴으로써 입증된다.
우리가 현대적 문화로 돌아갈 때, 니체는 잔인성의 정신화(spiritualization)와 신성화를 고찰한다. 원시인들은 매우 즐거워하는 반면에 현대인들은 잔인성에 대한 그의 충동을 부끄러워한다. 현대인은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발명해야 한다. 즉 이제 처벌은 보존되어야만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것을 행했다면, 처벌은 이제 더 이상 쾌락과 지배를 위한 인간 욕망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신의 판단의 결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처벌의 '도덕적' 기능은 그러므로 죄의 감정을 자각하는데 있어며, 그것은 나쁜 양심을 창조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설명에 대해 니체는 나쁜 양심의 기원은 인간이 공동체들로 진입할 때 직면하게 되는 심각한 병에 있다고 설명한다. 긴장-축소(tension-reduction)라는 일반적인 프로이트적 모델과 프로이트가 ≪문명과 그 반대자들≫의 7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초자아(superego)의 기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모두 예견하면서 니체는 하나의 공동체로 진입하려고 할 때 우리의 충동을 외재적으로 방출하는 것의 금지가 이러한 충동을 내향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적대성(hostility), 잔인성, 전멸시키고 공격하는 데 있어서의 즐거움을 위한 충동, 변화와 파괴를 위한 욕망이 면제받을 수 없게 되고 대신 이러한 충동의 소유자에 반대하게 되듯이 "인간의 내재화(Verinnerlichung)"야말로 "나쁜 양심"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나쁜 양심은, 즉 가장 불가사의한 병은 인간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니체는 결론짓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물론적 분열분석을 분명하게 고무하고 있는 분석적 움직임속에서 니체는 나쁜 양심에 관한 이러한 심리학적 설명을 국가의 기원과 연결시킨다. 니체는 '자연상태'에서부터 사회의 정립에 관해 설명하는데, 이 서사는 로크나 루소가 말한 신화보다는 홉스가 말하고 있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나쁜 양심은 점진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기원하지 않으며 동시에 기원한다. 이러한 변화는 폭력 행위에 의해 시작된다. 즉 국가의 제도. 국가는 폭력적이고 전제적이며 억압적인 기계이며,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인 예술가들과 제물에 의해 창조된다. -- 정복자들과 지배자들은 노마드적이고 무형태적인 덩어리들에 형태를 부과한다. 비록 지배자들 자신은 나쁜 양심을 결여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유를 위한 충동을 타자에게 잠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기원한다. 억압되고 유폐될 때 이러한 자유를 위한 충동 -- 형태의 자율적인 부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 은 단지 스스로에 대해 반대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지배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타자에게 향하게 할 수 있지만, 약한 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자신들에게로만 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만듦으로써만 고통스럽게 하면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 기원은 원시국가의 제도에 거주하지만, 나쁜 양심은 국가의 현대적 형태의 진화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나쁜 양심과 병의 관계는 임신(pregnancy)과 병의 관계와 같다고 니체는 말하며, 이러한 병의 후예가 기독교적 도덕성과 교회라고 설명하면서 두번째 에세이를 마친다.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채무자/채권자 관계는 현재 세대와 그 선조의 관계의 형태를 띠게 된다. 즉 우리는 선조들의 관습을 거부함으로써만 우리의 선조들에게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우리의 부채는 공동체의 권력이 증가하는 한도에 따라 증가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신들(gods)로 변형되며, 이후 세대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이러한 미지불된 부채는 이해관계에 따라 계승된다. 공동체의 권력이 증가함에 따라, 공동체가 보편적 제국을 향해 전진함에 따라, 선조들의 신성함(divinity) 또한 증가한다. 기독교성과 더불어 니체가 부채/죄와 임무의 영속적인 도덕화에 있어서 "천재의 일격(stroke of genius)"이라고 보고 있는 기독교적 신, 즉 "지금까지 달성된 가장 극대화된 신"은 가장 극대화된 부채성을 수반한다. 기독교성의 천재의 일격이란 신 자체를 인간의 죄를 위한 희생물로 삼는 것이다. 자신을 채무자에 대한 희생물로 삼음으로써 채권자는 부채로부터 벗어나며 동시에 부채를 영원하고 궁극적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기독교적 신의 기원은 죄와 금기에의 이러한 미친 의지이며, 이러한 금기에의 의지는 죄와 동등하게 될 수 없다. 신 이전의 이러한 새로운 죄는 신을 신성한 판단과 교수형 집행인으로 완전히 신성화하는 것으로 귀결되며,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반테제와 인간의 자기고통의 궁극적 수단으로 귀결된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기독교성의 창시자와 과학의 이데올로그들의 형태로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이 현대 세계 -- 이것 속에서 이 성직자들은 본질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 의 해석을 구성하게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자들이란 "성직자의 가장 최근의 인간형"이라고 주장하며 ≪앙띠 오이디푸스≫ 전체를 통틀어 정신분석의 실천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니체에 의해 분석된 기독교성의 실천과 병행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초기 성직자들처럼 정신분석가들은 그들 자신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세계를 재해석했다. 전체적인 정신분석적 건축물은 오이디푸스 드라마의 토대 위에 구성되며, 정신분석가의 일차적 임무는 그 대중들을 성공적으로 오이디푸스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병이며 우리는 치료법을 가지고 있다!"고 정신분석가들은 선언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성이 자신의 치료 권력의 주장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독교성의 실천이 그 죄와 원죄의 신봉자들을 확신시키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필요로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도 정신분석학에 의해 약속된 정신분석적 해방이 리비도적 경제를 가족의 테두리 내로 유폐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하면서 비슷한 접근방법을 취한다. 니체의 "인간의 내재화"에 그들은 인간의 오이디푸스화를 덧붙인다. 즉 오이디푸스는 니체적 나쁜 양심의 쪼개진(분열된) 운동 -- 타자에게 기투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오는 -- 을 반복하는데, 아버지를 제거하고 대체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불만족스런 욕망은 이제 그러한 욕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그들은 정신분석적인 해석적 실천들을 니체의 금욕적인 성직자들이 행하는 해석만큼이나 환원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니체의 성직자들이 모든 사건들을 신의 보상과 처벌의 논리 내에 있는 한 계기(moment)로 환원하는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석가들도 모든 욕망을 가족적인 고착화(fixation)의 형태로 환원해 버린다. 니체의 금욕적인 성직자들처럼 정신분석가들은 스스로를 위해 건강이라는 가면을 창조했으며, 이러한 가면은 그들의 양심에 독을 풀어넣음으로써 건강을 전제적으로 지배(tyrannize)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된다.
기독교적인 신이 사랑 없이도(out of love)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이러니를 니체가 지적하고 있는 곳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가들이 오이디푸스적으로 황폐화된 환자들에 대해 갖는 관심의 다양한 표현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연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닉한 비꼬기의 궁극적인 결과도 또한 서로 병행한다. 즉 기독교성의 자기희생적인 신이 무한한 그 옹호자들을 죄인과 부채자로 만들어버리는 곳에서 정신분석학은 고갈될 수 없는 전이와 지칠줄 모르는 분석의 형태로 그 자신의 무한한 부채를 창조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니체의 분석의 가장 흥미로운 변형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기독교의 성장과 국가의 성장간의 니체의 연결을 리비도적 경제와 정치경제에 대한 그들의 논의를 위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들은 욕망을 모든 수준에서의 사회적 분야에 도입하고자 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촉진키시고 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적인 사회적 투입(investment)을 잠재의식적(subliminal)인 것으로 간주했고 그 결과 그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무의식적 욕망의 탈성적인(desexualized) 표상으로 해석했다. 사회 분야에서 성적인 관계들이 나타날 때 이것들은 프로이트에 의해서는 오이디푸스적 가족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해석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표상의 극장 내에서의 예속화(enslavement)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어디에서나 가족을 보는 반면 부, 계급, 성별, 인종의 모든 관계들 즉 가족 외부의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모호하게 하는 환원적 가족주의(familialism)를 거부한다. 그들은 프로이트가 경제적 의존의 성적인 차이를 인정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실패는 종속적인 사회적 지위('과부들', '시골처녀' 등등)에 있는 여성들을 어머니나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위한 대체물(예를 들어, '박쥐인간'이나 '늑대인간')로 일관되게 환원했다는 점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모든 투입(investment)은 그것이 리비도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사회적이다. "우리는 사회적 투입이 그 자체로 에로틱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역으로 가장 에로틱한 욕망이 전체 사회적 분야에 몰두하고 있는 충분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입을 초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생산이 리비도적이고 리비도적 생산이 사회적인 한 사회적 분야를 탈성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진리는 섹슈얼리티가 도처에 있다는 것이다. 즉 관료가 그의 기록물을 애정스럽게 만지고 재판관이 정의를 집행하고, 사업가가 돈을 유통시키는 방식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와 성교하는 방식 속에서. 그리고 거기에서는 리비도가 변형을 경유해서 나아가지 않듯이 은유에 호소할 필요도 없다. 히틀러는 파시스트들을 성적으로 발기시켰다. 깃발, 민족, 군대, 은행은 많은 사람들을 발기시켰다."
맑스와 프로이트를 수정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 사회적 장을 구성하는 한, "사회적 생산은 결정적인 조건들 하에서 욕망하는 생산이다"고 결론내린다.
이러한 방식으로 욕망을 생산에 연결시키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의식이라는 과장된 혹은 친숙한 모델을 보다 정치적인 모델로 대체한다. 즉 극장을 공장으로." 욕망의 문제는 프로이트와 대면해서는, 극적으로 친숙한 표상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생산의 문제, 즉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문제, 실험의 문제, 권력과 정의의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정신분석을 분열분석으로 대체하거나, 혹은 그들이 말하고 있듯이 "정신분석학자들을 분열분석"해야할 필요를 명확히 한다. 정신분석은 그 대중의 성공적인 오이디푸스화가 욕망에 관한 초기의 논의에서 언급된 현상, 즉 그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는 현상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러한 현상의 발견은 무엇보다도 빌헬름 라이히와 연결되는데, 라이히는 파시즘을 대중들의 허위 의식에 의거해서 설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대신 라이히는 대중들의 욕망을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을 공식화시켰다.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욕망의 이러한 전도된 표현이 설명되어야만 한다. 라이히에게 권력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즐거움에 의거해서 설명되며, 이러한 즐거움은 "작은 인간들"의 "F hrer"와의 동일시에 의한 대리경험된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설명은 카프카의 ≪유형지≫에서 공무원들이 기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그들의 매혹과 더불어, 그리고 정신분석학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 더불어 그들을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여기에서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서의 무에의 의지에 대한 니체의 설명, 그리고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즐거움을 감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선택하는 나쁜 양심에 대한 니체의 설명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답변을 파시즘의 리비도적 경제에서 심리적 억압과 사회적 억압간의 연결이라는 라이히의 질문에 위치지운다. 대중들이 파시스트 지배자와 수동적으로 동일화함으로써 욕망은 작동한다고 라이히가 보고 있는 곳에서 니체는 금욕적 욕망을 도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작용적(active)이고 궁극적으로는 긍정적(positive)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즉 "의지 자체는 구제되었다"고 간주한다.
라이히 및 니체와 더불어 행한 실험에 기반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끄집어 낸다. 즉 욕망은 생산적이고, 그것은 생산적이어야하며, 생산적인 것이 될 것이다. 사회적 장(field)이 욕망으로 하여금 비-억압적인 형태에서도 생산적이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것에 유용한 것이면 어떤 형태로든지 생산할 것이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단지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적 장에 관련해서만 국부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욕망과 관련해서는 어떤 전반적이고 보편적인 혹은 총체적인 판단도 있을 수 없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세번째 에세이가 권력에의 의지의 고양과 향상에 의거해서 금욕주의적 수도사들의 구체적인 실천들을 분석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산적인 리비도적 능력들과 억압적인 리비도적 능력들, 미시생산성들과 미시파시즘에 의해서 정치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실천을 문제시하면서 이러한 비판을 계속해 나간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작업에 위치지어져야만 하는 질문,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에 의해 제기된 도전들에 의거해서 접합시키고 있는 진리와 관련해서 니체에 의해 첫번째로 접합된 질문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든지 "그것은 진실인가?"가 아니라 "그것은 작동하는가?"이다. 계속되는 구절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행하고 있는 몇가지 방식들을 볼 수 있었다.
결론
≪대담집≫에서 들뢰즈는 "내가 저자에 대해서 썼을 때, 나의 이상은 그를 슬픔에 잠기게 할 어떤 것도 쓰지 않는 것, 혹은 그가 죽었다면 그로 하여금 무덤에서 흐느끼게끔 하는 것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 그러한 즐거움, 그러한 힘, 그렇게 요염하고 정치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로 되돌아가게 되면, 그는 어떻게 주고 발명하는지를 알게 된다." 니체에 관해 썼던 글의 경우에 들뢰즈는 이러한 이상과 만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는 자신의 사후저작의 특성을 종종 언급하면서 다음 세기에는 그의 정당한 계승자들, 즉 그의 저작에서 "미래의 철학자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들뢰즈가 이러한 철학자들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데리다와 푸코의 작업과 더불어 들뢰즈의 작업은 최근 프랑스 사유에서 '니체주의'라고 기술될 수 있는 것에 커다란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니체가 특별한 유대관계를 느낀 문화의 언어를 가진 프랑스인들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그의 정당한 계승자들은 니체에게 놀라운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그를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금세기 초에 니체는 자신이 가장 최근의 프랑스인들의 '매혹적인 동지'를 발견했다고 언급했으며, 과거의 어떤 역사에서도 "당시의 파리에서만큼이나 그렇게 탐구적이고 동시에 그렇게 세심한 정신분석학자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니체의 독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든지 신봉자처럼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며, 그는 두가지 상황을 공식적으로 예측하고자 했다. 더욱 중요하게, 아마도 그는 그의 '가장 자연스런 독자와 청중들' 속에 프랑스인들을 포함시켰을 것이다. [중략 - 역자] 최근 프랑스 철학은 니체의 부름에 답해왔고 또 그의 도전에 반응해왔다. '프랑스 니체'로 불리우곤 하는 독해의 다양성은 종종 1960년대 이래로 성장해 온 니체에 대한 관심의 르네상스에서 의미심장한 역할을 행하고 있다. 그리고 전방에서 질 들뢰즈의 '적극적인 노력'과 더불어 니체의 말은 프랑스와 여타 다른 곳에서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서는 물론이고 현대(the present)에 대한 가장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문화적인 문제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도구로서 거듭 되풀이해서 생명력을 얻고 있다.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眞理와 虛僞 (0) | 2010.03.21 |
---|---|
무위(無爲)에 대하여 (0) | 2010.03.21 |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0) | 2010.03.20 |
시의 혈관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 / 김신영 (0) | 2010.03.20 |
시 쓰기, 시 앓기 / 김기택 (0) | 2010.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