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혈관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
김신영 (시인·문학박사)
이무원,「 빈의자」(월간《우리詩》2010년1월호)
길상호,「 너라는 소문」(계간《시작》2009년겨울호)
황강록,「 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월간《현대시》2009년12월호)
임동윤,「 마음 한 채」(월간《우리詩》2010년1월호)
권혁웅,「 오늘의 운세·2」(계간《시와반시》2009년겨울호)
시의 혈관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토머스 칼라일은『영웅숭
배론』에서 시에 대한 단상을 말한 바 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시를 읽다 보
면 우리의 혈관은 뜨거운 가슴이 되어 그에 화답하기 때문이다. 시란 사람
들의 혈관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어 냉랭하고 메마른 우리의 가
슴을 따뜻하고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의 시
로 말미암아 세상은 밝아지고, 한 편의 시는 순수하며, 아름다운 것들의 자
리를 찾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 빛이 들어온 것을
우리는 직감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
다하나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부딪치며 살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빛이 필요
한 것이다. 그 빛이 바로 시라고 할 것이다. 시는 우리를 순수하고 아름다
운 낙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에 그러한 따뜻함과 빛의 의미를 담은 시를 주로 대상으로
선정하여 살펴보았다. 지나가거나 잊혀진 것들은 생내적 안타까움과 아쉬
움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형상으로 남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을 통
해 세상의 여유와 그것들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러
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리라.
너에게 가는 모든 통로가 끊어진 후
망각 속으로 달려가는 시간의 질주 속에
지워도 남는 빈 의자
가는 곳마다
한 자리 잡고 있다
하루는 키만 크는 그림자 앉아 있더니
하루는 떠도는 향기 소복이 쌓여 있더니
오늘은
흐느적이는 구름 속에서
빈 의자 들이 모여
동쪽으로 서쪽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키 큰 미류 나무에
까치들이 여기 저기 몰려와
집을 짓듯
하늘 한복판
의자들이 집을 짓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바람만이 가끔 안부를 묻는
허공의 집
추억만 늙어가는 집
- 이무원,「 빈의자」(월간《우리詩》2010년1월호)
이별이 의미하는 것은 남겨진 추억 때문에 알 수 있는 무엇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므로 위 시에서 사람들이 떠나도 남아 있는 허공의 집의 의미는 추
억이다. 추억의 집은 의자로 환치되어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지만 그
공간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집이며 바람만이 그 집에 거하는 집이다. 결국
추억은 허공에 지은 집이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 까치들이 몰려와 추억이
얽히고 설킨 집이 완성되었다. 그 허공에 지은 집이 너에게로 가는 길의 어
디쯤이었을지 모르나 그로 말미암아 추억은 아름다운 소재 하나를 간직한
셈이다. 비록 추억만 늙어 가더라도 그러한 추억 속에 집과 의자가 흔들리
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로쇠 호스를 혈관에 꽂고 오늘은 나무의 맥박으로 눕고 싶어, 수천 개
푸른 귀를 달고도 너의 말에 넘어지지 않는 뿌리가 필요해, 가지에 가지를
친 너의 말들을 가지마다 찾아가 가만히 푸른 손으로 틀어막겠어, 그래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말들은 나이테 두루마리에 차곡차곡 새겨놨다가 죽어서
도 가져가겠어, 스스로 속을 파내고 관이 되어 거지 부장품처럼 너의 말들
안치할 거야, 밤마다 유리창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때문에 너의 잠도 편
치 않겠지, 나를 꺾고 싶은 너의 바람, 그렇게 강도를 낮춰도 소용이 없어.
내게는 온몸에 박아둔 낚시바늘이 있거든, 가지 끝 푸른 미끼를 무는 순간
파르르 너의 말들은 낚이게 될 거야, 그러면 너는 온통 푸르게 변한 내 얼
굴과 마주해야 해, 조심해! 그 말의 주인공이 너라는 소문이 있어!
- 길상호,「 너라는소문」(계간《시작》2009년겨울호)
낚시는 바늘을 무기삼아 생명을 위협하는 음험한 도구이다. 그 낚시에
낚이는 사람들의 말은 실상 우리 자신들의 쓸모없는 호기심과 욕심과 허영
때문이다. 현명하게 우리의 말은 여기 저기 귀를 달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
해 사방을 기웃거리며, 말이 많아 손으로 틀어막기도 하고, 또 스스로 속을
파내어 말들로 인한 온갖 부패를 덜어내기도 하나, 잠을 자면서도 편치 않
는 말들 때문에 드디어는 낚시 바늘에 걸리고 만다. 우리의 말들은 낚시 바
늘에 낚이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낚시
바늘에 걸려 허덕이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말이라 할 것이다. 말이 많으면
말이 번성하여 그 말로 인하여 올무에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입을 가
진 자는 모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말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가. 우리의 말이 낚이는 현실은 인정할 수 없으나, 말이 말을 낚는 세상에
서 가장 많은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니, 특히 시인들이니 말
에 조심해야 한다는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술 취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는 좌절한 아버지로 표상화된다. 술
취하여도 비틀거리거나 중언부언하지 않는 아버지들은 성공한 아버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술 취하여 중언부언을 일삼으
며 자신의 실패를 사회탓으로 돌리고 고단한 꿈을 접은 채 가족들에게 짐
을 던져 놓는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좌절한 수컷의 냄새가 난다
꿈이 심란해 지는 시절이 오면
아들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버진 왕이 되고 싶었거나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을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꿈꾸었든 꿈꾸지 아니하였든
그는 우울한 술 냄새를 풍기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내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남편
집 안은 그의 옷자락에 묻어온 어둠으로 더러워진다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그의 공허한 노랫소리와 뒤섞여
구석에 웅크린 채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수컷들은 꿈을 팔아 돈을 벌어오는 걸까
깔릴 듯한 꿈의 무게에 비해 손에 받아든 돈이 너무 가벼워서 술을 마시는
걸까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내가 되어 태어날 꿈을 꾸었고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좌절하였으니
내가 되어 태어날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난 여기 있다. 누군가 수천억의 가능성을 뚫고 내가 되어, 아버지가 되어
그것봐! 할 수 있잖아! 아직 포기하지 마 넌 한 적이 있어!
귀찮게 귀찮게 꿈속에서만 소리를 지른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
귀찮게 귀찮게 술 먹었을 때만 중얼거린다. 한 소리를 반복하고 또 반복
한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자기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하긴
정자가 왜 내가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할 리가 있겠나....
- 황강록,「 술취한아버지에게서는」(월간《현대시》2009년12월호)
황강록의 시에 나타난 아버지는 좌절한 아버지의 전형이다. 아버지의 모
습은 시인의 후각을 자극할 만큼의 술로 취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술취한 아버지는 ‘좌절한 수컷의 냄새’로 대변된다. 아버지
의 술취함이란 심란한 시절이며, 좌절한 공간이며, 꿈을 버리고 희생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의 어두움은 공허한 노래와 섞여 지워지지 않는 것이
다. 잠에서 깨고 나면 왜 그랬는지 기억도 흔적도 없는 술 취한 수컷의 냄
새는 오늘도 많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변된다.
그 겨울 네 얼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봄이 오기까지 녹지 않는 눈 더미에 갇혀서
나는 벌써 그리움이라는 말을 잊었는가
돌다리도 지워지고 앞개울도 몸을 바꿔 흘러야만 하는
눈 시린 오늘, 말하자면 나는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였구나
내 짧은 생각으로는 나를 기억하리라 생각했는데
이 마을, 이 집, 이 마당에서도
여전히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제대로 껴안지 못했나보다
서로가 서로 사이에 높다란 벽 하나 세워놓고
문은 꽁꽁 닫아놓고 다만 그리워한 것일 뿐,
그래서 눈 내리는 이 길목에서 손 움켜잡았던
그 불같은 마음도 어쩌면 불이 아니었구나
돌아서면 저만치서 바라다볼 뿐,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법만 익혔나보다
그러니까 지금도 한 사나흘 눈만 내리는구나
이 겨울 내내 감옥 한 채 지을 눈만 쌓이는구나
- 임동윤,「 마음한채」(월간《우리詩》2010년1월호)
대개 그리움을 동반하는 우리의 기억은 그 중심에 실재의 모습보다 다른
물리적인 것들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분위기와 이름, 향기와 걸음걸이,
스타일과 스카프 등, 여러 흔적을 기억한다. 마음의 지도를 따라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에서 우리는 실망스럽게도 주변이었던 것들의 흔적만 접
하게 될 뿐 본질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그리움의 정도에 대해
회의하며 의미를 잃고 방향도 잃는 것이다. 그의 얼굴은 본질인데 본질을
기억할 수가 없는 것이다. 회의는 깊어 손잡았던 애틋한 기억마저도 냉엄
한 눈으로만 남는다. 차가운 눈 한 채가 마음이 되어 긴 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다.
장마가 끝난 후에 가을 황사가 오니
세차 쿠폰 쓸 일이 없겠다
물병자리, 출렁이는 건 다 술이니 주색을 멀리하라
간을 챙기지 않으면 초상집에 다녀올 때 망자가 따라붙겠다
물고기자리, 좌정관천이 분수이므로 큰물을 생각지 마라
물이 많으면 그물도 크니 물 바깥이 번작이끽야라,
한쪽을 그슬린 후에 반대쪽으로 뒤집힐 것이다
양자리, 천랑성이 그 방향에 들었으니
전전반측하는 날이 많겠다 촌지는 5만원권이 아니면 사양하라
황소자리, 만 리 밖에 경사가 있어 30개월 후에는
물 건너오는 동료들이 있겠다 천봉우출이라,
하늘이 무너져도 소가 나올 곳은 여기임을 명심하라
쌍둥이 자리, 밥 한 그릇을 놓고 형제가 다투는 형국이니
선산을 지키기 어렵겠다
집안에 도둑이 있으니 들보 위를 조심하라
게자리, 모래사장에 집을 지은 격이니
게가 구럭에 들었구나 사방이 막혔으니 팔불출이 따로 없다
사자자리, 한 번 크게 포효하니 이웃이 신고한다
맹수를 그렸더니 비루먹은 개가 되었구나
처녀자리, 기다리던 이는 유학가고
오년 만에 시집갔더니 그이가 유학에서 돌아왔네,
삼경에 기러기 떼는 울며 어디로 날아가는가
천칭자리, 친구의 여자를 만날 운세이니
군대 간 친구에게 면회 갈 일이 있으면 빠지지 마라
가재는 게편이나 전갈은 옆에 없으니
오늘은 어디에서 몸을 누일꼬
사수자리, 술이 못에 가득하고 고기가 나무에 걸렸으니
비만과 당뇨를 조심하라 그림의 떡에서도 향기는 난다
염소자리, 수많은 파지를 먹어댔으니 구설이 두렵다
홍염살이 있으니 침 묻지 않게 조심하라
황사가 그치고 나면 돼지풀이 지천이니
쓸쓸이 쓸려가고 나서도 기침 눈물 코막힘은 여전하리라
- 권혁웅,「 오늘의운세·2」(계간《시와반시》2009년겨울호)
우리에게는 신년이 되면 흔히 그 해의 운수를 점치는 풍속이 있다. 그 풍
속은 재미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 더 큰 의
미를 둔다. 때로 그 운세로 인하여 더 열심히 살기도 하고 실망하여 하던
일들을 접기도 한다. 권혁웅의 시는 이러한‘운세’를 시화詩化하는 창의적
발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운세의 행위는 사주를 알려주는 말투 또는 문장
투를 그대로 빼닮았다. 인생의 길흉지사를 100여 괘로 분석하여 사주를 보
는 일은 재미도 있지만 자신의 미래를 엿본다는 것에서 대단히 자극적인
면이 있다. 딱히 운세대로 되지 않더라도 상황의 변화무쌍을 탓하니 운세
는 실패도 없다. 운세는 미래예측보다는 사람들을 감싸주고 가다듬는 역할
을 오히려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흉사를 막고 좋은 일을 더 잘되게 하여
주니 사람들에게는 위안과 액막이이며, 실패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으며 살
아가게 해주는 상담자이며 마음 치료사이다. 권혁웅의 시는 이로써 미신으
로 치부되는 운세를 통해 사람들의 길흉지사를 현대적 기우를 적용하여 명
쾌하게 풀어줌으로써 유희 같은 웃음을 선물하고 있다.
1) 토머스 칼라일
김신영 시인
*1994년《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불혹의 묵시록』이 있음
평론집으로『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가 있음
*한국기독교문인협회 회원
시산맥, 시의지평 동인
*계간《아시아문예》편집장.
《창작21》편집위원
*호서대, 협성대 강사 역임
현재, 홍익대와 대전대학 외래교수로 출강 중
출처 / 우리시회 - 감사합니다._()_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와 들뢰즈 (0) | 2010.03.21 |
---|---|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0) | 2010.03.20 |
시 쓰기, 시 앓기 / 김기택 (0) | 2010.03.19 |
좋은 시란? / 정민 (0) | 2010.03.14 |
시의 이미지 따라가기 / 조영미 (0) | 2010.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