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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by 丹野 2010. 3. 20.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제 1장 희랍문명의 발달

인류 역사상 희랍에서 갑자기 문명이 발생한 사실만큼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문명을 이룰 수 있는 요소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존재했으며, 이곳으로부터 이웃 나라로 전파되어 갔으나, 어떤 요소는 희랍인들이 제공하기까지는 전혀 결핍되어 있었다.
희랍인들이 예술과 문학에서 이룬 업적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순수한 지적인 영역에서 그들이 이룬 업적은 더욱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수학과 과학 및 철학을 창안하였다. (산수와 초보적인 기하학은 이집트인과 바빌론인들 사이에도 이미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주먹구구의 정도를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전제에서 출발해서 연역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희랍인들이 처음이었다) 年代記 이사의 역사를 처음으로 쓴 것도 그들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됨됨과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옛날부터 물려받은 전통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사색하였다. 그 때 희랍의 천재들에게 나타난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으며, 사람들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대한 讚辭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발달된 희랍의 모습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가치있는 일이기도 하다.


철학은 탈레스로부터 시작된다. 그 연대는 다행히 그가 예언한 일식에서 계산해 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일식은 BC 585년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철학과 과학은 본래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 전 6세기 초에 동시에 발생했다. 희랍과 그 이웃 나라에서 그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것은 우리로서는 부분적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으나, 오늘의 발달된 考古學은 우리에게 일찍이 우리들의 할아버지 시절에 가질 수 있었던 知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글자는 이집트에서 BC 4000년 경에 발생되었으며, 얼마 후에 바빌론에서도 발생되었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처음에는 그림으로 대상이 표시되었고, 이 그림도 곧 類型化되어서 表意文字로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게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후 몇 천 년이 지나, 이 복잡한 문자들은 발달을 거듭하여 알파베트 문자로 변모되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문명이 발달된 것은 나일강, 티그리스 강 및 유프라테스강 때문이었다. 이 강들은 농사를 한결 쉽사리 지을 수 있게 하고 생산도 이 내게 하였다. 이 문명은 여러 면으로 스페인 인들이 멕시코나 페루에서 발견한 문명과 비슷하였다.


전제적인 권력을 잡고 있는 神과 같은 왕이 군림해 있었으며, 심지어 이집트 같은 곳에서는 모든 토지가 왕의 소유였다. 종교로 말하면 多神敎dll고, 그 중에서 최고의 신이 한 분 있으며, 왕은 이 신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귀족 계급과 司祭 계급이 있고, 왕이 약하거나 어려운 전쟁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이 사제 계급이 왕의 통치권을 침범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토지는 農奴들이 경작하고, 이들은 귀족이나 사제 계급에 속해 있었다. 이집트의 神學과 바빌론의 그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죽은 자의 영혼은 地下의 세계로 내려가서, 그들의 지상생활에 대하여 오시리스(Osiris-主神)에게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고, 영혼은 결국 육신에게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를 「미이라」로서 보존하였으며, 엄청나게 큰 무덤을 만들었다.「피라밋」은 BC 4000년 말부터 3000천 초까지 여러 왕들이 建造한 것이다.
그 후로 이집트 문명은 주춤해 버렸다. 종교적인 保守主義가 문명의 발달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 나라는 BC 1800년 경에 히크소스라는 셈족에게 정복되어 약 2세기 동안 지배를 받았다. 이들은 이집트에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않았으나, 이집트 문명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QQKQL론은 이집트보다 한결 호전적인 나라로서 발전하였다. 초기의 지배 민족은 셈족이아니라 스메리아 족으로 그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은 楔形文字를 발견하였으며, 셈족이 정복했을 대 이 문자는 계승되었다. 바빌론은 독립한 여러 도시가 서로 싸운 끝에 한 제국을 세웠다. 그러자 다른 도시의 신들은 바빌론의 신 마르덕Marduk에게 순종하게 되고, 이 신은 희랍의 제우스가 판테논에서 차지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은 이집트에서 훨씬 먼저 일어났다.
이집트와 바빌론의 종교는, 고대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豊作 숭배 Fertility cult였다. 땅은 여성이고 태양은 남성이었다. 그리고 황소는 남자의 생식력의 化身이며, 따라서 황소신은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바빌론에서도 땅의 여신 이쉬타 Ishtar가 모든 여신들 중에서 최고의 여신이었다. 위대한 母神은 서부 아시아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희랍 이주민들이 소아시아에서 이 母神의 신전을 발견했을 때, 그 모신을 아르테미스Artemis라 부르고, 종전의 종교의식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것이 에베소 인들의 디아나 Diana 여신의 기원이다. (디아나라는 aaaaa말은 라틴어로, 아르테미스에 해당된다. 희랍어 성경에서 언급된 여신은 아르테미스인데, 우리는 디아나라고 번역하고 있다.) 기독교는 이 모신을 童貞女 마리아로 변형시킨 것으로, 이 동정녀에게 「신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을 허용한 것도 에베소의 종교회의에서였다.


종교가 한 국가의 정부 당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경우에는,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그 원시적 특질이 변모된다. 신이나 여신들은 국가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어 풍작을 가져오게 하여야 하고, 전쟁을 승리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자인 사제 계급은 여기에 합당한 의식이나 신학을 생각해 내고,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요소를 神格化하여 多神敎를 만들어 내었다.


이어서 신들은 이러한 국가와의 연결을 통하여, 도덕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立法者는 그 법전을 신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법을 어긴다는 것은 그대로 신을 공경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법전은 BC 2100 년 경에 바비론의 함무라비Hammurabi 법전이라고 하며, 왕이 마르덕Marduk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라고 한다. 고대의 종교는 점점 도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게 되었다.
바빌론의 종교는 이집트의 경우와는 달리, 내세의 행복보다 현세의 번영에 더욱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마술이나 점, 占星術따위는 바빌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서 더욱 발달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미신이 h대 후기에 기반을 얻게 된 것도, 바빌론을 통하여 된 일이다.
한편 과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들도 바빌론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원을 360도로 구분하거나, 일식과 월식의 週期性의 발견 등이 그것이다. 이 월식에 대해서는 분명히 예언할 수 있었으나 일식에 대한 예언은 蓋然性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탈레스는, 우리가 나중에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빌론의 이러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농업문명이었다. 그리고 이곳 원주민들의 문명은 처음에는 遊牧文明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업이 차츰 발달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요소가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주로 배로 장사를 하였다. 무기는 BC 1000년 경 까지는 銅으로 만들었는데, 자기 나라에서 필요한 쇠붙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민족은 장사에 의해 그것을 얻거나 약탈해 오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약탈은 응급 수단이며,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된 곳에서는 상업이 이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상업은 크레테 섬이 개척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약 11세기 동안 그러니까 BC 2500년에서 BC1400년까지, 크레테 섬에는 미노아 문명이라고 해서 예술이 한결 발전한 문명이 존재하였다. 이 크레테 예술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명랑한 인상을 준다. 거기서는 퇴폐적인 사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집트의 神殿이 두려운 침울감을 느끼게 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 중요한 문명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으나 아더. 이반스 卿과 그 밖의 인사들의 발굴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해상문명 이었으며(히크소스 시대는 제외하고) 이집트와 밀접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이집트와 크레테 사이에 상당히 대규모의 거래가, 크레테의 수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집트의 그림을 보고 잘 알 수 있으며, 그 거래는 BC1500년 경에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크레테의 종교는 시리아나 소아시아의 종교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술은 이집트의 그것에 더욱 가까웠었다. 하긴 크레테 예술은 매우 獨創性을 갖고 있었으며 활기에 충만하였다.
크레테 문명의 중심은 크노소스에 있는 이른바 「미노아의 궁전」이었다. 이 궁전에 관한 기억이 고대 희랍의 전통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매우 화려하였으나 BC 14세기 말 경에 희랍 침략자에 의해 파기된 것 같다. 크레테 역사의 연대는, 그곳에서 발굴된 이집트의 유물과, 또한 이집트에서 발견된 크레테의 유물에서 추리할 수 있다. 아무튼 (크레테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考古學的인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크레테 인들은 한 여신을 숭배하였다. 아니 어쩌면 몇몇 여신을 숭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가장 분명한 여신은 「동물의 여신 Mistress of Animals」이었다. 이 여신은 한 사냥꾼으로, 고전에 나오는 아르테미스의 前身으로 생각된다( 이 여신은 한 남자 同侶, 혹은 配偶者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물들의 신 Mistress of Animals」으로, qquf로 유명하지는 못하였다. 아르테미스를 소아시아의 母神the Great Mother과 같은 신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후일의 일이었다. 이 「동물의 여신 Mistress of Animals」이외의 한 여신은, 어머니이고, 「동물의 여신 Mistress of Animals」이외의 남자 신은, 단지 그 어머니의 어린 아들 뿐이었다.

(크레테인들은) 사후의 생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죽은 후에 생전에 있은 지상의 행위에 대해 보수와 징벌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집트의 신앙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레테인은, 대체로 그들의 예술에서 보건대, 상당히 명랑한 민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미신의 압력을 별로 받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鬪牛를 즐겼으며, 그것은 종교적인 祝典으로 남자 투우사 뿐만 아니라 여자 투우사도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아더. 이반스 卿의 말에 의하면 이 曲藝師들은 최고의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림들을 보면 활동력과 재주가 충만하다.   크레테인들은 문자를 갖고 있었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判讀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여 성벽을 쌓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해군에 의해 나라를 방위했던 것 같다.


BC1600년 경, 그러니까 미노아 문화가 아직 파괴되기 전에, 이 문화는 희랍으로 전파되어차츰 쇠퇴를 거듭하다가 BC 900년 경까지 남아 있었다. 희랍 본토의 문명을 「미케네 문명」이라고 부르며, 왕들의 무덤이나 언덕 위에 건조한 要塞를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크레테에서 보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나타내어 보여 주고 있다. 이 무덤과 요새들이 지금도 남ㅇ 있어, 희랍에서의 옛모습을 상상케 한다. 각 궁정에서 이루어진 예술품들은 실제로 크레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같다. 그처럼 크레테인의 작품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미케네 문명은 전설의 안개 속에서 호머의 묘사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이 미케네 문명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 이 문명은 그들이 크레테인에게 정복되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이 희랍어를 사용했는지 도는 전부터 살아온 토착민인지 분명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아마도 희랍어를 사용한 정복 민족으로, 적어도 귀족계급은 북방에서 쳐들어온, 머리털이 아름다운 침입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북방에서 쳐들어올 때에 희랍어도 함께 갖고 온 것 같다.( 마르틴 피닐쓴 『미노아. 미케네 종교와 그 희랍 종교의 여파』p11이하 참조)
희랍인들은 세 차례에 걸친 침입을 통하여 정착하였다. 즉 처음에는 이오니아족이 침입해 오고, 그 다음에 아케이아족이, 그리고 나중에 도리아족이 침입해 왔던 것이다, 이오니아족은 정복자였으나, 크레테 문명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마치 후에 로마인들이 희랍문명을 받아들인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이오니아족들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케이아족이 침입으로 큰 혼란을 일으킨 끝에 떼를 지어 추방되었다. 바가즈쿠이에서 발견된 히팀족의 석판에 의하면 아케이아족은 BC 14세기경에 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미케네 문명은 이오니아족과 아케이아족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쇠퇴하여 갔는데, 다시 도리아족의 침입을 당하자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도리아족은 희랍의 마지막 침입자였다. 이전의 침입자들은 대체로 미노아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이와는 달리 도리아족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인도-유럽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케네 시대의 종교는 여전히 남아, 하류계급에 침투해 들어갔다. 고대 희랍의 종교는 이 양자를 혼합한 것이었다.


이상의 설명이 사실과 부합될 가망이 많더라도 미케네인들이 희랍인이었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의 문명이 쇠퇴했으며 그 문명이 사라져깔 무렵에 鐵이 銅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과, 또 언제부터인지 制海權을 페니키아인들이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케네 시대의 말기와 그 시대가 지나간 직후에 이 침입자들 중에서 일부는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더욱 전진해서 여러 섬들과 소아시아로 침입해 들어갔고, 이윽고 시실리와 남부 이탈리아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많은 도시를 세워,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다. 이 바닷가의 여러 도시에서 희랍인들은 문명에 새로운 공헌을 하게 되었다. 아테네가 유력하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며 그것은 해군의 힘이었다.

희랍 본토는 산악지대로, 땅은 메말라 있었으나, 골짜기는 기름진 곳이 많았다. 그들은 바다로 진출하기는 쉬었으나, 피차의 내왕은 산악으로 말미암아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이런 골짜기마다 작은 공동체가 이루어졌으며, 주민들은 대체로 바다에 인접한 도시의 주변에서 농사를 지어 살아갔다. 그런데 이 중의 어느 공동체의 인구가 팽창하여, 내부의 자원이 달리게 되자, 그냥 눌러 살 수 없던 사람들이 해외로 진출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본토의 여러 도시들은 보다 실기 쉬운 고장에 식민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새 소아시아와 시실리, 이탈리아 등지의 희랍인들은 본토 사람들 보다 더 풍부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희랍의 사회제도는 지역에 따라 달라졌다. 스파르타에서는 귀족들이 이 민족 가운데서 억압을 받고 있는 農奴들의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점점 가난해 가는 농업지대의 주민들은, 대체로 가족들과 함께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작농들이었으나, 상업이나 공업이 진흥된 지역에서는 자유민들이 노예를 고용하여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광산에서는 남자 노예를 고용하고 섬유공업에는 여자 노예를 고용하였다. 이오니아의 노예들은 부근의 야만인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처음에는 전쟁포로였다. 살림이 점점 늘어감에 따라 훌륭한 가문에 속하는 부인들의 孤立化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들은 스파르타 이외에서는 희랍인의 개화와는 인연이 먼 존재가 되고 말았다.

政體는 일반적인 경로를 더듬어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군주정치에서 귀족정치로, 다음에는 폭군정치를 거쳐 민주정치로 발전되었다. 왕들은 이집트나 바빌론의 경우처럼 絶對權을 소유하지 않고 元老院의 諮問을 받게 되었으며 마음대로 종전의 관례를 어길 수는 없었다.
폭군 정체는 반드시 나쁜 정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속받지 않은 통치자를 폭군이라 불렀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에 의한 정치를 가르킨다. 이 시민 속에 노예와 부녀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초기의 폭군들은 메디치 가문과 마찬가지로 부유층에서는 돈이 제일 많기 때문에 그 권려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金銀鑛을 해서 재산을 모았으며, 새로운 화폐제도에 의해 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이 화폐 제도는 이오니아의 이웃에 있는 리디아에서 본받은 것이었다. ( 피.엔 얼. P.N.Ure: 『폭군 정치의 기원』참조) 이 화폐제도는 BC 700년 직전에 시작된 것 같다.

희랍인들의 상업 또는 해적행위 - 처음엔 이 두 행위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를 통하여 초래하게 된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문자를 얻게 된 것이었다. 문자는 이미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사용해 왔으며, 미노아, 크레테인들도 문자(이것은 독파되지 못하였다)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희랍인들이 BC 10 세기 경 까지 문자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페니키아인들로 부터 쓰는 법을 배웠다. 페니키아 인들은 시리아의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이집트와 바빌론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이오니아, 시실리, 이탈리아 등지에 도시가 생기기 이전에는 언제나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14세기에 이크나톤(이집트의 황제)에게 편지를 쓸 때, 시리아이;s들은 바빌론의 楔形文字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투르의 히람 Hiram 969 - 936은 페니키아 알파벳 문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이집트의 문자에서 발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인들은 처음에 繪畫文字를 사용하였으나, 그 그림이 차차 정형화하여 綴字를 나타내게 되고 (그려진 사물의 명칭이 첫째 철자를 나나낸다)이윽고 하나하나의 문자가 되었다. 예컨대 개구릴를 쏘고 있는 아취 Archer-활쏘는 사람)가 A자로 되고, 발음은 아취의 아로 되는 따위이다. (가령 히브리 문자의 글자 김멜은 카멜(낙타)을 뜻하고, 그 표지는 낙타의 그림이 정형화된 것이다). 그런데 문자의 이 마지막 단계는 이집트인들이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것은 페니키아인들의 손에 의해 비로소 완성을 보아 알파베트의 모든 장점을 갖추게 되었다.
희랍인들은 페니키아인들에게서 이것을 빌어다가 자기들의 말에 맞도록 알파베트를 변경시켜, 자음에 모음을 첨가해서 크게 개혁하였다. 희랍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분명히 이와 같은 편리한 문자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희랍 문명의 중요한 첫 열매는 호머였다. 호머에 대한 것은 다 추측해서 비롯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견해는, 호머가 한 개인이 아니라 시인들이라는 것이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사이에는, 완성되기까지, 아마도 200년쯤 걸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BC750년에서 BC 550년 사이라고 말하고,(벨룩크의 「희랍역사」12장)어떤 사람은 호머는 BC 8세기 말까지는 거의 완성되었다고 한다(로스토브체프: 『고대 세계사』1-399) 현존하는 호머의 시는 페이시스라투스가 아테네로 가져온 것이다. 그는 BC 560년부터 BC527 년 (중단된 시기를 포함하여)가지 통치하였다. 그 후로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호머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교육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희랍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호머가 나중에까지 줄곧 이런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시는 중세기 후기의 소설처럼, 개화된 귀족계급의 견해를 대표하고 있다. 거기서 대중들 사이에 성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미신을 서민적인 것이라 하여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이 미신들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햇빛을 보게 된다. 현대의 학자들은 人間學의 도움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호머는 원시적인 미개상태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한 개혁자였다. 그는 18세기에 고대 신화를 합리화한 사람들처럼 권위있는 敎權을 수립하려는 상류 계급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호모에 있어서 종교를 대표하는 올림푸스 신들이 그의 시대나 그 후의 희랍 사람들에게 유일한 경배의 대상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희랍인의 지성이 전성기에 있을 때에는 억제되고, 지성이 약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표면화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락된 시기에는 호머가 내버린 신앙이 거의 매몰된 채, 고전시대에 존속되어 있었다. 이것이 여러 가지로 불합리하고 기이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설명해 준다.


원시 종교는 어느 곳에서나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 종속적인<색채가 짙은>것이었다. 어떤 종교의식 특히 곡식이든 가축이든 인간이든 간에 풍족한 생산을 위한 종교 의식은 종족의 이득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그럴듯하게 집행되었다.


冬至에는 태양이 더는 그 힘이 감소되지 않도록 고무되어야 하는 시기이다. 봄과 가을도 각자 계절에 맞는 의식을 올릴 필요가 있다. 이런 때에는 집단적으로 커다란 흥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그들의 個體意識을 상실하며, 자기들의 종족들과 일체임을 느끼게 된다.
세계 어디서나 종교가 발전하는 일정한 단계에서는, 의식에서 神에게 동물이나 사람을 죽여 바치고, 그 고기를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에 도달한 시기도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그 제물을 먹지 않게 된 후에도 오래 계속되었으며, 희랍에서는 역사가 시작될 무렵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잔인한 의식이 따르지 않는 豊作의 숭배는 희랍 지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으며, 특히 엘류시스 신비종교는 그 상징부터가 농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호머의 종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신들은 매우 인간적이다. 다만 인간과 다른 점은 그들이 죽지 않고 초인간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며, 도덕적으로는 신에게서 조금도 특이한 면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신들이 어떻게 인간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후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어떤 문장에서는, 볼테에르와 같은 경건치 못한 태도로 신을 대하고 있다.


호머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독특한 종교 감정은 올림푸스의 신들과 관련이 있다기 보다 宿命이나 必然性, 운명과 같은 음울한 것들과 관련 있다고 하겠다. 제우수까지도 이것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숙명은 희랍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이 자연법칙의 존재를 인정하게된 이유의 하나이다. 호머의 신들은 정복을 일삼는 귀족 계급의 신들이며, 농부들에게 유용한 곡식의 신은 아니었다. 길버트 뮤레이의 말대로 (「희랍 종교의 5단계」p67) 「어느 민족의 신이든 다 세계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올림푸스의 신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세계 정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네 왕국을 정복하고 나서 무엇을 하였는가? 정치 참여인가? 농업 발전인가? 상.공업 종사인가? 그들은 이런 일은 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들은 세금으로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벼락으로 친다. 그들은 정복한 酋長이요, 왕권을 손에 넣은 海賊이다. 그들은 싸우고 축하하고 노래를 부른다. 마시고 취하며, 자기네의 심부름을 듣는 절름발이 裝飾工을 보고 요란스레 웃는다 그들은 자신의 왕 이외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애와 전쟁 이외에는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다」(『희랍 종교의 5단계』p67)


호머의 영웅들도 그들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훌륭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중요시하는 가문은 펠로프스 가문이다. 그러나 이 가문이 행복한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시아 王朝를 처음으로 세운 탄탈로스는 당초에 신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는 신들을 속여 사람들에게 자기 아들 펠로프스의 고기를 먹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펠로프스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이번에는 이 펠로프스가 신들의 노여우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유명한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와 兵車의 경주를 해서 이겼는데, 그것은 피사의 왕의병차를 모는 미르틸로스와 공모한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는 그 공모자에게 약속한 보수는 안 주고 오히려 그를 바다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저주는 그의 아들에게 미치게 됐다. 즉 그의 두 아들 아트류우스와 티에스테스는 희랍인들이 말하는 소위 아테라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것은 범죄를 하고 싶은 충동으로 전혀 항거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강하게 작용한다.


티에스테스는 형수를 타락시켜 그 집 「행운」을 표시하는 금양털의 山羊을 훔치려고 공작을 한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아트류우스가 동생을 유배시키고 나서, 화해를 하자고 불러내어 그에게 자기 자식들의 고기를 먹인다. 그러자 이 저주는 아트류우스의 아들 아가메논이 물려받게 된다.
아가메논은 신성한 사슴을 죽여,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딸 이피게네를 제물로 바쳐, 그 여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트로이까지 안전하게 도망을 친다. 이번에는 자신을 배신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이며, 티에스테스의 살아 남은 아들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살해당한다. 아가메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와아이기스토스를 죽여 부친의 원수를 갚게 된다( H.J .로오즈 『초기 희랍문화』1925, p 193 참조)


이와 같은 시기에 세계의 곳곳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자나 석가, 조로아스타가 생존했다면, 아마 이 세기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로아스타의 연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책에는 BC 1000년 까지 소급해 올라간다.『캡브리지의 고대사』4rnjs p207 참조)
키루스는 이 세기의 중엽에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 세긱 끝날 무렵에 이오니아의 희랍의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에서 제한된 自治를 허용한 관계로 힘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하고 다리우스 황제에게 진압되었다.


이 세기에 피란을 떠난 철학자들은 헬레니즘 Hellenism세계 중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을 방황하면서, 아직 이노니아에 국한되어 있던 문명을 전파하였다. 이들은 이런 방랑 생활을 하면서도 환대를 받게 되었다. 크세노파네스는 BC 6세기 후반에 활동한 사람으로 이 피란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하였다.


「우리는 겨울에 행길 가에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드러누워 푸지;a한 식사를 마친 끝에 단술을 마시고 이집트 콩을 씹으면서 이런 말을 나누는 것 이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또 연세는 몇이나 되오, 그럼 메데 사람이 읻곳에 왔을 땐 몇이시구요?」
이오니아 이외에 희랍의 여러 도시들은 tfaltm와 플라테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후에 이오니아도 한 때 해방이 되었다(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배되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은 소아시아의 해안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 암ㄴ탈키타스의 평화조약 (BC 387-386)에서 그들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그후 약 50년이 지나서, 이 소아시아의 해안지대는 알렉산더의 제국에 예속되었다)


희랍은 여러 조무라기 나라로 나눠져 있었다. 이 여러 나라들은 한 도시와 그 부근의 농토로 되어 있었으며, 문화수준도 희랍세계의 분포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몇몇 도시들만 희랍문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러 모로 언급하고자 한다. 고린도는 재력이 풍부하여 크게 번성한 무역의 중심지엿으나, 위대한 사람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유명한 아르키디아처럼 농사를 위주로 하는 촌락사회도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이런 곳을 田園的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옛날의 야만적인 공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주민들은 반 神을 섬기고, 여러 가지 豊作 숭배의 의식을 지켰다. 이 의식에서는 신의 조상 대신에 네모난 기둥을 세워놓고 경배하는 일이 많았다. 염소는 풍작을 상징하였다. 농민들은 너무 가난하여 소를 가질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양식이 떨어지면 판 신의 조상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먼 중국 농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그들은 귀신들린 인간 Werewelf족속 - 머리 속에 그린 -을 믿고 있었다. 이 족속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누구나 제물로 바친 인간의 고기를 먹으면 「귀신들린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하였다. 제우스, 리카이오스(이리- 제우스)를 모신 동굴이 있었는데, 이 속에서는 아무도 그림자가 따르지 않았으며, 한번 들어간 사람은 1년 안에 죽어 버린다는 미신이 고대에는 성행되고 있었다(로오즈 『원시 그리스』p 65)
판 신은 본래 「파온」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양치는 사람 또는 목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이 BC 5세기의 페르시아 전쟁후에 이것을 경배하는 법을 배웠을 때, 「모든 신들」이라는 의미로 널리 알려진 「판」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J.E 해ㅑ리슨: 『희랍의 종교에 대한 연구서설』p651) 그러나 고대 희랍에는 우리가 흔히 종교라는 이름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교도 많았다. 이런 종교는 올림푸스 신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 또는 바카스 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신을 불명예스럽게 술과 酒酊의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희랍사상의 발전 에 대해 연구하려는 사람은 이 신의 경배에서 어떻게 심오한 神秘主義가 생겨나고 그것이 여러 철학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또 그것이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한 몫을 담당한 경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 잘 알아야 한다.


디오니소스나 바카스 신은 본래 트라키아인들의 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희랍인들봊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희랍인들로부터 야만인이라고 불리웠다. 원시시대에 농사를 지은 사람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도 풍작 숭배를 촉진시키는 신을 갖고 있었다. 그 신의 이름이 바카스였다. 이 바카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들이 술을 만드는 법을 알아내었을 때. 술에 취하는 것이 신성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영예를 바카스에게 돌리기로 하였다. 나중에 그들이 포도나무를 알게 되고, 또한 포도주를 마시게 되자, 바카스 신을 더욱 존중하였다. 인제 풍작을 촉진하는 그의 능력은, 포도나 술을 먹고 마실 때의 성스러운 도취 상태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언제부터 트라키아에서 이 바카스 酒神을 경배하는 의식이 희랍에 전파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역사가 비롯되기 직전의 일이 아닌가 한다. 바카스의 경배는 전통적인 종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하나의 종교로 확립되었다. 이 바카스 경배는 많은 야만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 들짐승을 여러 갈래로 찢어서 날고기를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이한 여성 취미도 곁들여 있었다. 예컨대 가문이 좋은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언덕에서 반은 술에 취해 밤새껏 춤을 추며 황홀한 신비경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남편들은 이러한 행사가 두통거리였으나, 아무도 감히 종교에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카스 무녀들」에서 이 종교 의식의 아름다움과 야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


희랍에서 바카스 경배가 성행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급격히 개화된 사회는 의례 그런 것이다. 희랍에서도 적어도 그 일부는 원시적인 것을 그리워하고 보다 더 본능적이고 정열적인 생활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도덕에 구애를 받으며 사는 것이 지겨웠던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감정보다 행위가 억압되어 성장한 남녀들에게는 합리적인 것은 갑갑증을 느끼게되며, 도덕도 짐스러워 굴종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사상이나 감정 혹은 행위에 있어서 반동을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고찰해 보려는 것이 바로 이 사상적인 반동이지만, 이에 앞서 감정과 행위에 있어서의 반동에 관하여 좀 더 언급하고자 한다.  문명인과 야만인이 다른 점은 思慮에 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豫見이 있고 없는 것으로 구별된다. 문명은 앞날의 즐거움을 위해 즐겨 현재의 고통을 참는다. 설사 그 즐거움을 먼 앞날에 기대할 수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습성은 농업의 발달과 함께 비롯되었다. 돌아오는 겨울에 먹을 식량을 위해 봄에 일을 하려는 동물이나 야만인은 없을 것이며, 그들은 오직 본능에 따라 행동할 따름이다. 그것은 벌이 꿀을 만들고 다람쥐가 땅 속에 도토리를 파묻는 것과 같다. 일어한 행동은 어떤 예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본능에 따를 뿐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곁에서 보고, 그것은 후일에 유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예견은, 우리가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않고, 理性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면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행동할 때에만 있을 수 있다. 사냥 같은 것은 예견이 없어도 즐겁다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땅을 가는 것은 하나의 노동으로 순간적인 충동세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명은 충동을 억제한다. 자율적인 억제라고 할 수 있는 사려에 의해 억제할 뿐만 아니라 법률이나 습관, 또는 종교 등을 통하여 억제하는 것이다. 문명은 야만상태에서 이런 억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본능적인 성품을 점점 감소시키고 또 조직을 개입시킨다. 그리하여 어떤 행위에 대해서는 범죄라는 낙인이 찍히고, 처벌도 받는다. 또 어떤 행위는 법의 制哉를 받지 않더라도 악하다는 낙인을 찍어,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을 사회에 드러내어 비난을 사게 한다.
사유재산 제도는 흔히 부녀자를 예속시키게 되며, 노예 계급을 조성한다.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사회의 목적이 강요되고, 또 한편으로는 개인이 자기의 생애 전체를 내다보는 습성을 기르게 하여,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지나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守錢奴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配慮는 언제나 인생에 가장 바람직한 것 중에서 일부나마 잃게 하기 쉽다. 바카스의 경배자들은 分別에 대한 반동자라고 하겠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취되면 사려로 말미암아 억압된 격렬한 감정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가 즐겁고 아름다움으로 충만해 있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의 상상력은 先入見의 桎梏에서 갑자기 해방된다.


바카스의 종교의식은 이른바 종교적인 열광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語源的으로 따지면 신이 그 경배자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경배자는 신과 하나가 되어 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어느 의미에서는 陶醉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이것은 정신적인 도취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콜에 의한 도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열에 의한 분별을 일소해 버리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려는 바카스적인 요소가 없으면 싱겁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바카스적인 요소에도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분별과 감정의 鬪爭史에 언제나 개입해 온 투쟁이 있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우리는 어느 한 편에만 가담해서도 안된다.


사상의 영역에서의 건저한 문명은 대체로 과학과 일치한다. 그러나 과학만 가지고서는 불충분하다. 인간에게는 감정이나 예술 및 종교도 필요하다. 과학은 앎에 대한 한계가 있어도 좋다. 그러나 사상에 대해 제한을 해서는 안된다. 희랍 철학자들 중에도 - 후세의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과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인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종교적인 철학자들은 직접 간접으로 바카스 종교에서 얻는 바가 많았다. 특히 플라톤이 그러했다. 그리고 플라톤을 통해서 이 바카스 종교의 영향은 발전을 거듭하여, 나중에는 기독교 신학에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바카스의 경배는 본래 야만적이라 여러 모로 嫌惡을 느끼게 한다. 철학자들에게 바카스 경배가 영향을 준 것은 그런 본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올페우스에게 돌린, 정신적으로 보다 순화된 모습으로서였다. 그것은 금욕적인 경향이 짙으며 육체적인 도취 대신 정신적인 도취를 대치한 것이었다.


올페우스(하프의 名手) 는 매우 모호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흥미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실재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신이 아니면 想像的인 영웅이라고 한다. 그는 자고로 바카스와 마찬가지로 트라키아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그는, (또는 그의 이름으로 발생된 종교운동은) 크레테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확실성이 있을 것 같다.
올페우스의 敎理는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생겼으리라고 생각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리고 이집트는 주로 크레테를 통하여 희랍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올페우스도 한 종교가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바카스 신봉자의 선동을 받고 흥분한 바카스 무녀들에게 찢겨 죽었다고 한다. 그가 음악에 열중했다는 전설은, 초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나중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본래 司祭요, 도한 철학자였다.
올페우스가 실제 인물이라면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종교의 교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신도들은 인간의 영혼이 輪廻한다는 것을 믿었다. 영혼은 지상 생활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서, 來世에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또는 영원히 고문을 당하거나 한동안 고문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목표는 마음이 정결해 지는 것이었다. 마음은, 淨化를 위한 종교의식을 통해서나, 어떤 종류의 不淨을 피함으로써 깨끗해지게 된다. 그 가장 정통적인 가르침은, 육식을 피하며, 다만 종교의식으로 먹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그들은 인간은 땅의 것과 하늘의 것으로 되어 있으며 깨끗한 생활을 하면 하늘의 것이 증가되고, 당의 것이 줄어들어, 나중에는 바카스와 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그는 바카스라고 불리운다.


이 종교가 고심하여 꾸민 신학에 의하면, 바카스도 두 번 태어났다는 것이다. 즉 한 번은 그의 모친 세말리에게서 태어나고, 또 한 번은 부친인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바카스 신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의 한 신화에 의하면, 바카스는 제우스와 퍼어세파니의 아들이며, 일찍이 소년시절에 타이탄에게 찢겨, 그 살은 모조리 먹혀버리고, 심장 밖에 남지 않았다. 제우스는 이 심장을 세말리에게 주었다고도 말하고, 제우스가 그것을 삼켜버렸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되어 바카스는 두 번 태어났다.


바카스의 무녀들이 들짐승을 잡아 찢으며 그 날고기를 먹는 것은 타이탄들이 바카스를 찢어 먹는 것을 종교 의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 동물들은 이런 의미에서는 바로 바카스의 化身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타아탄들은 본래 땅의 태생이지만, 그 신을 찢어 먹고 나서는 神性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땅의 것과 신의 것으로 되며, 바카스의 儀式은 인간을 더욱 神的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유리피데스는 올페우스 사제의 입을 통하여 이런 종교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

트로아의 유로파 Europa의 혈통를 지닌 군주
제우스의 소생인 그대 발 아래 크레테의 여러 城들을 다스리도다
어두운 사당 속에 그대를 찾으니

힘차게 아로새긴 들보와
칼리브의 강철과 황소의 피로 지붕을 삼고
매듭진 키프레스 나무가 빈 틈 없이 둘러선
사당 속으로 그대를 찾았노라

그곳, 맑은 흐름 속에 나의 하루하루가 흘러가도다
그대의 종, 이다이아의 조오브 Jove에 歸依한 자
나는 깊은 밤 자그레우스가 방황하는 곳에서 서성거렸노라
우레같은 그의 부르짖음을 감당하도다
(이다이아의 조오브는 바카스와 신비스럽게도 동일시되고, 자그레우스Zagreus는 바카스의 여러 명칭의 하나이다)


붉은 피로 물든 그의 제전은 대자연의 품에서 불꽃에 싸여
바카스 사제의 이름으로 하여
나는 자유를 누리노라

천한 태생과 관 속에 들어갈 시체에서 멀리 떠나
깨끗한 흰 法衣를 몸에 걸치고
신성한 고기들을 입에 대지 않도다
나는 바카스 사제의 이름으로 하여 자유를 누리노라


올페우스 종교의 석판들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방법과, 거기 가서 자기가 구원을 받을 만한 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석판들은 거의 다 파괴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성한 것(페텔리아 석판)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黃泉의 집> 왼 편에 샘물이 흐르고
그 곁에 흰 키프루스 나무가 서 있으면
샘 가까이 가지 말라
< 기억이 호숫가>에 또 하나의 샘이 있어
찬 물이 흐르고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리라
그에게 일러라 「나는 땅과 하늘의 외아들이로다. 그러나
나는 그대가 알다시피 하늘의 족속이로다
보라, 나는 목이 말라 죽게 되었노라
어서 나에게 <기억의 호숫가>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을 달라」
그는 그대에게 신성한 샘물을 마시게 할 터이니
그대는 영웅들의 왕이 될지라

또 다른 석판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그대에게 영광이 임하였도다
그대는 인간으로부터 신이 되었도다

또 하나의 석판에는

행복하고 축복받은 자여
그대는 죽지 않고 신이 되리라

영혼이 마셔서는 안되는 것은 레테의 샘물로, 이 물은 忘却을 일으켰다. 또 하나의 샘물은 모네모쉬네Mnemosyne로, 想起의 샘물이다. 영혼이 내세에 가서 구원을 얻으려면 망각해서는 안되며 초자연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올페우스 종교는 금욕을 주장한다. 술은 그들에게 유일한 종교적 象徵이며, 이것은 후에 일어난 기독교의 성찬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이 구한 <도취>는 狂信的인 것으로, 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일반적인 방도에 의해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신비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신비로운 요소는 피타고라스와 함께 희랍철학에 도입되었다. 올페우스가 바카스 종교의 개혁자라면, 피타고라스는 올페우스 종교의 개혁자였다. 올페우스의 요소는 피타고라스를 통하여 플라톤의 철학에 도입되었으며, 다시 플라톤을 거쳐 그 후의 철학에 인계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 어느 정도 종교적인 색채를 띤 철학은, 거의가 이 요소를 내포하게 되었다.


올페우스 종교가 영향을 준 곳에는, 반드시 바카스적인 색채가 남아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여성주의 Feminism이다. 피타고라스에게는 특히 이러한 색채가 농후하다. 또한 플라톤도 여성에게 정치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性的인 면에서는 여성들이 훨씬 敬虔에 가깝다」고 말하였다.


바카스적인 요소의 하나는 激情을 존중하는 것이다. 희랍 비극은 디오니소스의 종교의식으로 말미암아 발달되었다. 특히 유리피데스는 올페우스 종교의 두 주요신, 즉 바카스와 에로스를 존중하였다. 그는 냉엄하고 독선적self-righteous인 탁월한 행동가를 존경하지 않았다. 그의 비극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은 미쳐버리거나 不敬虔에 대한 신들의 분노로 하여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희랍인들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언제나 훌륭하여 그들은 감정을 객관적으로 觀照할 수 있으며, 감저이 나타내는 美를 인식하면서도 냉정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올림푸스 신들의 통속성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을 이와 같이 간주하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이러한 견해는 호머나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게는 해당되지만, 바카스적 또는 올페우스적인 영향을 받은 신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는 해당되지 않는다. 엘류시스인들의 신비로운 종교는 아테네 國敎의 가장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그곳에는 이런 讚歌가 있다.

잔을 높이 흔들며
미칠 듯한 환락으로 하여
엘류시스의 꽃을 피우는 골짜기로
그대 바카스여 오라!
파이안歌를 부르자, 만세....
(파이안가는 아폴로신에 대한 축가의 노래이다)

유리피데스의 비극 「바카스의 무녀들」에 보낸 그녀들의 노래로, 시와 야만성이 합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침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들은 짐승의 고기를 찢어 날로 먹으면서 그 기쁨을 축하한다

오, 즐거운지고, 여기는 산마루
뛰노는 祭典도 한고비 지나
신성한 제물도 껍질 뿐
이제 남은 것은 나른한 피로일세

솟구치는 붉은 샘의 기쁨
찢겨진 山羊의 피의 기쁨에로,
산봉우리 새날을 맞이하는 곳
야수를 찢어 먹는 영광을 향해
프리기아의 리디아 산 속으로
끌려가는 자는 브로미오스

브로미오스Bromios는 바카스의 여러 가지 이름 중의 하나이다. 바카스의 부녀들이 산기슭에서 추는 춤은 열광적이다. 그것은 文明의 짐과 걱정에서 비인간적인 미의 세계와 바람과 별들의 자유에로 몸을 피하는 동작이기도 하였다. 다음에 보는 노래는 격정이 좀 식었을 때의 광경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다시 추려나, 긴 춤을. 어두운 밤 희미한 별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슬에 목을 축이고,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흰 발길이 어스름 땅 위에 뛰는 긴 춤을.
오, 푸른 숲 속으로, 뛰어가는 사슴의 발이어,
홀로 숲 속으로 아름다운 고장으로
사냥꾼을 피해 뛰어가며
두려워 할 필요가 없도다
함정도 뛰어넘고, 공포에서 벗어났도다
그러나 아직도 먼 곳에서 울음소리 들리누나
사냥개의 달음질치는 소리
오, 사납게 악을 쓰는 맹렬한 달음질 소리
아직도 저 강변과 골짜기에서
기쁨이랴, 또는 공포이랴?
폭풍같이 재빠른 발들이어,
인간의 고뇌에서 떠나 즐겁고 쓸쓸한 땅,
고요에 묻힌 그늘진 녹음 아래
숲 속의 미미한 생물들이 숨어사는 쓸쓸한 땅에

희랍인들이 침착하였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말하기 전에, 유진.오네일의 연극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필리델피아의 가정 부인들을 생각해 보면, 잘 알 것이다.  올페우스 신비 종교는 개혁되지 않은 바카스 종교보다 결코 온전Screne하지는 않다. 이 올페우스 종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으며, 인간은 생사의 끊임없는 週期를 되풀이하고 있는 하나의 수레바퀴에 매어서 산다. 우리들의 진정한 삶은 별과 같은 것이지만, 우리는 땅에 속해 있으므로 오직 淨化와 克己와 금욕을 통해서만이 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드디어 신과 합일된 황홀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을 쉽고 즐거운 것으로 보는 사람의 견해는 d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흑인 頌歌와 유사하다.

사슬이 풀려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
나는 이 모든 고통을 신에게 고하리

희랍인들은 거의가- 전체는 아니라도- 정열적이고, 불행하고 각자의 마음 속에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知性에 끌릴 때에도, 또 한편으로는 감정에 이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늘까지 미치는 공상 imagenation과 지옥도 만들어내는 멋대로의 자기 주장과의 갈등 - 이런 내부 분열을 거의 다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격언은 「무슨 일에나 지나치지 말라」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모든 일에 과격했다. 그들은 순수한 사상과 시와 종교에 있어서나 그리고 죄악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서 과격했던 것이다.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감정과 지성의 결합이었다. 그들은 이 중에서 하나만 갖고서는 세계를 변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두가지 요소가 걸합되어, 그들은 당대의 세계를 변경해 버렸던 것이다. 신화에 보면 그들의 신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올림푸스의 제우스 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불을 훔쳐서 땅으로 내려와 영원한 형벌을 당하게 된 프로메테우스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것만으로는 일반 희랍인들의 특징을 「냉철함」에 있다고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견해라고 하겠다. 희랍에는 실상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정열적이고, 신앙적이고, 신비적이며 내세적인 경향과 또 한편으로는 명랑하고, 경험적이요, 합리적이요, 지적이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즐거워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후자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으며, 초기 이오니아의 철학자들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하겠다 벨로호는 (상기 서적 1권 p434)올림푸스 종교에 대해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희랍 민족은 너무나 젊은 활기에 충만해 있었으며, 이 세계를 부정하고 참된 삶을 피안에 구하는 하나의 신앙만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올페우스 종교의 신도는 수가 비교적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아테네처럼, 신비종교의 의식을 국가의 祭典에까지 도입하여 법적으로 보호육성 한 곳에서도, 종교에 대해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념들이- 전혀 다른 신학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희랍세계를 다스리게 되기 까지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견해이며, 엘류시스 신비 종교에 대해서는 더둑 그렇다. 이 종교는 올페우스주의의 요소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올페우스주의에 기울어졌으며, 합리주의자들은 이를 멸시했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후반기와 19세기 초기에 있어서의 영국 메소디스트교Methodism의 처지와 견주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지식층에 있는 희랍인들이 그들의 부친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어렸을 때 모친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 수 없다. 당시의 어머니들은 남자가 즐기던 문명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양이 있는 아테네 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외면상의 심리 과정이 아무리 합리주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전통이나 어렸을 때부터 받은 더 원시적인 사고방식과 생활 감정을 갖;l고 있으며, 급할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요소들이 앞서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희랍인의 사고 방식에 대한 분석만 가지고서는 불충분한 결과가 생기기 쉽다.


희랍 사상에 끼친 종교의 경향 - 특히 올림푸스 종교를 제외하고- 에 대해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제인 해리슨 Jane Harrison의 (괄목할 만한 저서 「희랍 종교에 대한 연구 서설」에 보면 보통 희랍인의 종교에는 원시종교의 요소와 디오니소스 종교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F.M 코온포오드Cornford는 그의 저서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희랍철학의 연구가들에게 , 종교가 철학자들에게 준 영향에 대하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난점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인간학에 대해서도 같은 평을 할 tnn 있다. 가장 적절한 해명을 한 것은 내가 아는 바에는 존.버네트 John Burnet가 쓴 『초기 희랍 철학』이며, 특히 제 2장 「과학과 종교」가 그렇다고 하겠다. 그에 의하면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BC 6세기에 희랍 전역에 걸쳐 일어난 종교 부흥에서 비롯되었으며, 동시에 학문의 본거지가 이오니아에서 서쪽 l방으로 옮겨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헬라 대륙의 종교 발전은 이오니아에서의 그것과 판이하다. 특히 디오니소스 종교는 트라키아에서 전해 왔으며, 호머가 쓴 글에는 단지 그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종교는 그 핵심에 있어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갖고 있다. 트라키아인 자신이 매우 고매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잘못이지만, 희랍인들은, 그 無我境은 영혼이 약한 自我 이상의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영혼은 몸 밖에 있을 때에만, 참된 성격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희랍종교는 이때에 바야흐로 동방의 종교가 도달한 단계에 이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아니었던들 이러한 경향을 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희랍인의 종교가 동방적인 형태의 종교가 되지 않은 것은, 저들이 司祭制度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 주장이다. 사제들은 敎義를 만들어내지 않고, 단지 만들어진 교의를 보존할 뿐이었다. 그리고 동방 사람들도 그 종교 발전의 초기에는 사제제도를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희랍인들을 동방식 종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사제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며, 또 학원들이 존재하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 새로운 종교- 어느 의미에서는 새로웠지만 또 어느 의미에서는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옛것이었다-는 올페우스의 結社들의 창설과 함께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결사들의 發祥地는 아티카였다. 그러나 매우 급격히 퍼져나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애 전파되었다. 이 결사들은 처음에는 디오니소스를 경계하기 위한 연합체였으나 두 가지 특질로 말미암아, 구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희랍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요소들이었다. 그들은 우선 종교의 권위를 啓示에 두고,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신학을 포함하고 있는 신들은 모두 트리키아 사람인 올페우스에게 돌렸다. 그리고 올페우스는 몸소 黃泉에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몸에서 떠난 영혼이 내세에 가서 당하게 될 모든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안전한 안내자였던 것이다」

버네트는 계속해서 올페우스 신앙과, 당시에 인도에 전파되었던 신앙 사이에 뚜렷한 類似性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이 양자 사이에 아무 접촉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오지 Orgy라는 말은 원래 올페우스 숭배자들이 秘義의 뜻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숭배자의 영혼을 정화시켜 출생의 윤회에서 떠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올페우스 숭배자들은 올림푸스 종교의 사제들과는 달리 교회를 창설했다.  다시 말해서 종교 단체를 만들어, 秘傳을 받는 자는 어떤 종족에나, 또 남녀의 구별 없이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철학을 삷의 양식으로 보는 견해는 이들의 영향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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