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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무위(無爲)에 대하여

by 丹野 2010. 3. 21.

 

 

 

무위(無爲)에 대하여 

 

명상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바로 무위(無爲)이다. 명상의 실천은 무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된다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문제일 수 있다. 그리하여 무위에 대해 느끼는 내 나름대로의 얘기를 조금 언급하고 싶다. 즉 무위를 이해하면 명상의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명상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갖출 수 있을 것이다.

 

  무위에 대한 대표적인 언사는 노자의 것이 유명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무위의 자리에 머물며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라는 내용을 보여준다. 이때의 무위는 흔히 유위(有爲)와 대비하여 표현하기도 하는데, 흔히 해석하기를 유위는 ‘인위적인 실천’, 혹은 ‘억지로 함’ 이라는 해설로 쓰기도 하고 무위는 ‘함없는 함’, ‘인위적이지 않은 실천’ 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나 잣구와 문자적인 것에 너무 얽매인 해석일 수 있다. 즉, 해석의 내용조차도 어느 정도 깨달은 이가 아니면 결국엔 알쏭달쏭한 얘기인 것이다.

 

  무위에 대해 흔히 표현하는 ‘함없는 함(action without action)'이라는 표현은 문학적이고 멋있는 표현은 될 수 있어도 무위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려는 이에겐 아리송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런 것들이 명상이라든가 무위에 대한 생각에 대해 일반인들이 다가가고 싶어도 어렵게 만드는 난관이 된다면 성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위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무위란 간단하게 한마디로 하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의식만으로 하려는 활동의 총체’이다.

 

  이것을 좀더 길게 얘기하면 ‘몸을 굳이 움직이거나 쓰지 않고 자신의 내부적인 것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외부적인 것으로 깨달음을 확장하여 자신의 영역(마음이 도달할 수 있는 시공간의 모든 것을 포함)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조절하려는 정신활동의 총체’이다.

 

  즉 무위는 정신의 의식을 모든 심적, 물적인 것에 적용하는 활동이고, 명상이란 실제적인 무위의 구현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실천방법이다. 무위로 가는 왕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위로 가는 지름길은 바로 명상을 하는 것이다. 무위가 가지는 철학적, 종교적 측면의 양상으로 보자면 인간 삶의 어떤 활동이라도(일상적인 것을 포함해서) 무위와 조금이라도 관련되지 않은 것은 사실 없다. 그러나 명상은 그것에 온전히 가기 위한 지름길의 하나인 것이다.

 

  무위와 유위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도 간단히 쉽게 받아들이면 될것이다. 우리의 몸을 쓰거나 몸에 보이는 물리적인 활동을 위주로 하는 것은 모두 유위의 영역에 속하며 정신으로 모든 것을 조절하는 것은 무위에 속하는 것이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통하여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그것을 권투라든가 헬스 등의 활동으로 푼다면 유위에 가까운 것이고 음악감상이나 독서로 해소한다면 이것은 무위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유위와 무위의 중간에서 어느 곳으로 약간 치우친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거칠게 말한다면 육체적 활동은 유위에 가깝고 정신적 활동은 무위에 가깝다.

 

  그러나 명상은 ‘무위의 순도에 가장 가까운 형태인 정신적 활동’중의 하나이다. 즉 무위의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기 위한 활동인 것이다. 무위의 가장 순도높은 활동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여기에서 몇몇 이들은 당연히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면 무위에 가까이 하면 유위는 무위에서 멀어지게 되는가. 단순하게 표현해서 정신적 활동의 정점에 이르면 육체적인, 물질적인  활동은 결여되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흔히 이 부분도 학자들간에도 이분법적으로 설명해서 가장 오해가 심한 부분이나 그 오해는 전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즉 ‘무위는 유위의 반대거나, 유위와 대칭점에 서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무위는 유위를 완전히 포섭한다’.

 

  또다른 차원으로 얘기해 보자.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완전히 대칭점에 서있는 개념이 아니다. 물질문명은 그 자체로도 발전하는 듯 하지만 정신문명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물질문명은 정신적 측면에서 영향을 더 받거나 덜 받거나 할 수는 있어도 아예 안 받을수는 없다. 말하자면 지금의 시기는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으로부터 영향을 적게 받는 시기이다. 그러나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의 조절과 통제에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물질문명 자체의 발전을 더 많이, 더 비약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의 또다른 형태의 이해를 위해 과학 공식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과학적으로 자세한 것은 후에 근대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의 특성을 얘기할 때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중에서 아인슈타인이 창안했던 E=mc2이라는 공식이다. 이것은 매우 유명한 공식인데,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물질이란 에너지의 또다른 형태이며, 그것이 에너지이든 물질이든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우주를 포함한 이 세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모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임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시 현미경으로, 혹은 천체망원경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것으로도 안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요약하면 우주는 ‘에너지와 물질로 모여져 있으며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런 형태중에서 물질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냥 우주에 흩어져 있는 상태, 즉 에너지로(이것을 氣로 표현할수도 있을 것이다)만 있고 아직 물질화되지 않은 상태를 ‘무극(無極)’이라고 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나, 쉽게 표현하자면 물이 100도 이상의 기체인 상태는 무극이고(에너지 상태이고), 영하 이하인 얼음 상태는 고체인 물질이다. 즉 에너지와 물질은 우주의 실체가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것과 더불어서 완전 별개인 그 무엇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인 것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말하자면 이 에너지, 기의 상태보다는 물질, 고체화된 것에 너무 치중한 문명이다.

 

  무위란 무극 상태의 우주를 이해하고 그것을 조절하는 활동이며 명상은 그 무위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인 것이다. 무위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의식의 활동이다. 무위는 물질보다 기의 흐름을 읽고자 하는 활동이다. 무위는 우주의 원천과 본질로 다가가기 위한 마음의 활동이다. 그리하여 무위를 위해서 우리는 명상에 드는 것이다.

 

  명상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가만히 앉아서 의식이 깨인 상태로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호흡만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드는 것은 아니다. 잠이 들면 쉬는 것이지 무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은 가지면서 호흡만을 유지한채 그 깊은 의식의 본질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언제까지나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의식의 활동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기의 세계, 에너지의 세계, 파장의 세계를 볼수 있는 길로 접어든다. 그리하여 무위란 목표없이 활동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점도 무위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다. 명상은 어떻게 보면 가장 적극적인 의식의 활동이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인 의식의 활동은 육체적으로 호흡만을 길고 오래 유지하면서 모든 몸의 움직임을 자제하는 것이다.

 

  명상의 목표는 자신의 본성을 찾는 길이다. 그러나 그 본성은 일상적인 활동,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물질적인 활동을 통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본성을 위해서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고요한 곳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의식이 필요하다.

 

  명상은 자신의 본성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그 하나이고 그 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실제모습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그 하나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자신의 세계와 우주에 공헌할 기회도 함께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명상과 문명에 대한 공헌이란 별개의 것이 아니며 결국 자신과 우주를 위해 모두를 위한 가장 가치적인 활동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무위란 비세속적이면서도 세속을 포섭하는 활동, 정신문명적 차원이면서도 물질문명을 포섭하면서 더욱 발전시키는 활동이며 이는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완성으로 가는 활동이다.

 

  결국 무위는 그냥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가만히 있음으로써 마음, 그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찾고, 모든 세계를 읽고, 얻고, 결국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정신적 활동이다.

 

[출처] [펌] 무위(無爲)에 대하여|작성자 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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