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r a h a
미학적 분절 단위로서의 2000년대
유 성 호
1.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설명한 이는 카(E. H. Carr)다. 가령 이러한 비유적 정의에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어떤 흐름이나 국면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지난 시간의 그것들이 유력한 참조항이 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점에서 역사에서 파천황의 신국면이 전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과거에 이미 출현했던 것이, 나선형이건 직선형이건, 일정하게 진화와 변형을 치러 새삼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역사는 이미 있었던 것들이 일정하게 ‘반복 속의 차이’를 통해 생성되고 재현되는 현장이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시단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른바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담론적 지형 역시, 우리 시사에서 충분하게 실험되고 이미 맹아를 보였던 것들이 다양한 변형을 입어 분출한 양상일 것이다. 이제 2000년대라는 시대적 분법分法 단위도 어느새 10년을 축적했으니, 2000년대라는 지평 역시 역사의 한 국면을 드러내는 성찰적 대상이 된 듯하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를 귀납적으로 살피는 일은 이제 문학사의 몫이 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2000년’ 이후라는 물리적 조건은, 한때 담론의 무한 증폭을 가져왔던 이른바 ‘미래파’ 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적지 않은 시인과 비평가들이 ‘미래파’라는 수사가 제언되고 확장된 비평적 문맥을 살피지 않고, 그저 전복적이고 해체적이며 시의 기본을 와해하는 일군의 세력 정도로 그들을 오인하거나 애써 그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젊은 시인들 내부에 만만찮게 존재하는 차이의 스펙트럼은 간과되었고, 그저 난해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동류항으로 치부해버렸으니, 참으로 이만저만한 비평적 무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왕성하게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등단 10년 내외의 시인들을 주목하여, 그들이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분할을 훌쩍 넘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시적 물결조차 지나서, 자신만의 목소리들로 새로운 인식론적, 방법론적 모색을 해가는 흐름에 대해 문학사적 의미를 알아볼 계제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그들의 목록은 하염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설문조사가 있었고, 그동안 10년간 좋은 성취를 보였고 앞으로도 자신만의 진경進境을 예감케 해주는 시인들을 정선하였으니, 이들이 가지는 미학적 분절 단위로서의 2000년대의 의미를 살펴, 이들이 우리 시단의 지형에 어떠한 공통적 균열을 보여주며 이들 내부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흔히 ‘젊은 시인’ 하면, 핍진하고 구체적인 감각 경험을 환유적으로 발화하는 방식, 의도적으로 소통을 불편하게 하면서 의식 안에 존재하는 분열과 유목의 리얼리티를 쿨하게 보여주는 방식, 혼성적 문화 의식과 분열 의식을 높은 밀도로 어울려 나타내는 방식 등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속성들이 생태적 상상력과 은유 중심의 사고를 위주로 했던 기존의 문법에 충격을 가했고, 그만큼 그것은 문학사적으로 새로운 전위前衛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들의 시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새로움’의 감각과 형식을 비교적 전면화한 집체적 속성으로, 그리고 풍요롭고도 다양하고 실물감 있게 전해준 바 있다. 이제 설문 조사에서 추려진 시인들을 대상으로 그 세계를 두드려보자.
먼저 새로운 언어와 발상과 이미지로 시적 문법을 새롭게 쓰고 있는 이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가령 김경주는 엄연하게 세상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온갖 ‘기형畸形’의 영혼들이 음악이나 여행 같은 물질성 속에 가볍고도 탄력 있게 존재함을 탁월한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그의 시에서 가벼운 ‘영혼’과 가벼운 ‘바람’은 한 몸으로 펄럭이면서, ‘바람-음악’이라는 물질 형태를 통해 시인의 유목적 생의 욕망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황병승은 매우 다양한 논의가 축적된 시인인데, 그동안 그의 시에서 하위문화적 감염이나 환각, 잔혹극을 동반한 내러티브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보아왔지만, 우리로서는 그 안에서 다중의 주체가 설정되면서 그들로 하여금 구성케 하는 새로운 발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시에는 탁월한 이미지와 탄력 있는 음악, 그리고 생기발랄한 유머 같은 것들이 새로운 물질성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이들의 시에서는 자아를 극대화한 장르로서의 시적 속성이 일그러진 방식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야말로 새로운 기층 언어를 통한 외적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비교적 형식에 대한 의지보다는 정통적인 서정적 발화를 택하고 있는 그룹도 있다. 박성우, 신용목, 길상호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시적 시선을 우리 시대의 외곽 혹은 주변의 타자들로 돌려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복원하는 데 공력을 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젊은 날의 흔들림에 대한 뼈아픈 기억뿐만 아니라 내면 깊숙이 숨겨 있는 어둑한 폐부를 감각적 밀도를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박성우가 지닌 능청스러움, 신용목의 기억이 보여주는 지속과 단절의 긴장, 길상호가 가지는 도저한 내면의 폐허 등이 확연한 차이를 지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이들 시편은 상처의 내력을 되불러오고 그것을 심미적 비애로 견뎌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밀도 있는 기억으로의 회귀와 그것을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성찰로 연결하고자 하는 욕망을 견고하게 결합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들에 의해서 내적 감각으로의 경사傾斜만이 우리 시대의 주류가 아님을 선명하게 목도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미세한 감각에 대한 발견과 표현을 통해 새로운 사물의 의미와 생의 형식을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 여기서 이들이 미세한 감각의 파동을 발견하여 표현하는 목적은, 감각적 구체성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삶의 어떤 비의秘義를 매개하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들이 보여주는 동시대의 징후들은, 직접적인 현실 비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일상의 감각 운동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일례로 이근화는 일상에 대한 태연하고도 심드렁한 묘사 속에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상상력을 결속하여 산문적으로 봉합되어 있는 일상의 마디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지속한다. 일견 동화적으로까지 보이는 그 세계에서 그녀는 사물과 내면의 유추적 결합의 특장을 확연하게 발산한다.
여태천은 불안과 죄의식으로, 자신의 내면을 몽상적으로 드러낸 첫 시집에서 탈각하여 최근에는 아름다운 무표정을 띤 일상의 속살에 접근하고 있다. 보기 드문 건실한 고전적 비극성의 시학이라 할 것이다. 장석원의 미학은 비교적 일관되게 연애시적 문법을 따르되, 새로운 주체와 타자에 동시에 가 닿으려는, 인식론적 의미에서의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그 점에서 그는 사랑 후의 폐허, 죽음 후의 재생, 죽음과 탄생의 결속이라는 운동이 바로 시의 운명이라는 의식을, 남다른 어법과 지속성으로 보여준다. 이민하는 첫 시집의 제목에 나와 있는 ‘환상’이라는 키워드를 남다른 미학적 극점으로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육체와 감각의 미학적 차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최금진은 도저한 부정성을 상상력의 기화 작용으로 끌어안고 있는데, 그 특유의 냉소와 그로테스크의 미학적 장치(device)를 통해 단단하게 결속된 시편들을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시편 하나하나에 인위적으로 봉합한 체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의 미적 자의식은 성장 과정에서 입은 트라우마의 기억들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거기에는 한 시대의 문화적 표지標識로서의 디오니소스적 자폐와 도취가 나타나기도 하고, 역으로 정체성 탐색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짊어진 힘겨운 자아가 출몰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시에서는 주체의 내면과 외계의 사물이 접점을 취하면서 새로운 일상의 구성 원리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취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공통의 지형으로 귀속하기는 어렵지만, 그들만의 개성으로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과 발화에 공들이고 있는 이들이 있겠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으로만 완결성을 취하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김이듬은 ‘얼룩’과 ‘상처’를 통해 자신의 유년을 복원하고(동시에 지우고), 우울한 몽유를 통해 자신만의 투명한 자의식에 도달하는 아름다운 도정을 보여준다. ‘명랑’과 ‘우울’을 활달하게 크로스하면서 빚어내는 욕망의 반복과 분절의 과정이 심미적인 시적 주체의 새로운 명명을 기다리고 있다 할 것이다. 진은영은 기왕에 ‘멜랑콜리’(권혁웅)라는 타당성 있는 초점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녀의 독자성은 첫째 시에 관한 메타적 성찰의 영역, 그 다음 사라짐의 운명과 새로운 존재 갱신을 욕망하는 원리가 대등하게 얽혀 있는 독특한 감각, 그 다음 환상적인 것이 한 축을 이루면서도 새로운 낭만적 부정과 초월을 견지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들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안현미는 동일성의 사유에 기반을 둔 은유적 사고의 시편과 그와는 전혀 다른 분열의 자의식을 그야말로 대칭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독특한 시인이다. 그 안에 가벼운 유희와 무거운 성찰이 함께 녹아 있고, 균열의 증언과 결속의 의지가 함께 농울친다는 점에서, 그녀 시편은 충실한 문자적 의미에서 다성적多聲的이라 할 것이다.
다양한 시적 형상과 방법이 그야말로 리좀(rhizome)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들의 시편은, 슬픈 몽상과 나르시시즘을 넘어, 우화寓話로의 조급한 귀속을 경계하면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더욱 지켜볼 만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3.
우리가 잘 알듯이,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탈脫근대 담론들은 우리 시의 엄숙주의와 계몽성에 일정한 반성적 계기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기존 언어 권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 문학사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러한 담론들은 우리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요소이자 핵심 자질이었던 생의 비극성에 대한 천착과 공동체적 차원의 사회적 전망을 하나하나 지우는 폐단을 키워나갔다. 심지어는 시를 통한 인문적 통찰이 가장 낡은 방식으로 내몰리기까지 하였다.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심화된 이러한 미학적 근시성은, 이제 우리에게 시의 대안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청하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견고한 구조 속에서 시가 어떻게 개별화된 감각과 대중문화적 감염을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에 다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미학적 대망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러한 요청과 대망에 대한 가능성과 한계를 여기 조사된 ‘젊은 시인’들에게서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사에서 미학의 분절 단위로서의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란 어떤 함의를 띠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대의 평균적 미의식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감수성을 제기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전위前衛들을 뜻할 것이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들의 언어는 기존 문법에 비판적인 문제 의식을 가하였고, 새로운 언어 감각에 대한 실물적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언어는 전위로서의 자기 몫을 다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의 일부로 흡수될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물론 모든 전위가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문법들은 시적 후예를 일정하게 얻어 문학사적 자장磁場으로 편입되어갈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이들의 시는 수미일관하게 전복적이고 새로운 세계였다. 하지만 그들 시를 가로지르는 것들, 예컨대 새로운 희망의 원리를 찾으려는 의지나 새로운 주체를 욕망하는 시학적 갱신 욕구 같은 것은 이미 이들의 시를 고전적 속성으로 돌아보게 하는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거시적 전환을 요청받기에는 일정하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도 되지만, 시인들의 의식이 소소한 일상 감각의 쇄신 과정에 깊이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 중 일부는 사회 변혁에 대한 회의, 자연으로의 침잠, 사적私的 기억이나 감각적 내면으로의 퇴행을 서둘러 담론화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타자와 소통하는 사회적 울림보다는 소통 거부의 유폐감과 난해성의 회로를 시적 외장外裝으로 택하는 미적 고립을 선택한다든가, 가장 미시적인 관찰과 표현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편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량 있고 창조적인 시적 전위들에 의해 이러한 의구심과 비판은 부분적으로 혹은 가능성의 차원에서 하나하나 극복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4.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바이지만, 젊은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른바 반反미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움직임은 매우 광범위한 시적 지형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반反은유의 환유 원리는, 그동안 시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언어의 새로운 장場을 치열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이들은 오랫동안 시의 원리로 추앙받아왔던 동일성 논리에 창조적 균열을 내면서 우리 시대의 시로 하여금 원심적 확장을 꾀하게 하였다. 그 안에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보다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가 담기게 되었고, 대중문화나 새로운 매체 경향이 일상적 표지標識로 빈번하게 등장하게 됨에 따라 그것들이 시의 표면 물질을 장식하게 되는 일도 잦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들은 시적 의미론의 역사적 확장에 기여했으면서도, 시에서 이루어지는 힘겨운 주체 정립의 의지나 자기 회귀의 열망 그리고 타자에 대한 지속적 성찰에 대한 몰이해를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자기 망각과 소모의 열정으로부터 새로운 감각과 인지 능력을 복원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적 기율에 대한 섬세한 메타적 성찰을 이들이 더욱 근본화해주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잘 읽어보면, 우리 시대의 시에는 주체의 자기 표현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은유적 욕망을 경계하면서 사물과 내면을 결합하려는 이중적 소묘素描 기법이 잘 드러난다. 시간의 흐름과 소멸을 형상적으로 암시해주는 이러한 풍경들이, 오로지 시적으로만 재구성되는 인위적 공간인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여지없는 실체들이며 동시에 상상적 유추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이중의 시각들은, 예술을 실재와 대립하는 ‘비실재의 창조’로만 보는 시각과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균형 감각의 태도가 바로 ‘예술’과 ‘환영(illusion)’을 겹치게 하면서도 갈라주는 힘일 것이다.
결국 시라는 것에 대한 오랜 인식 관행은 “객관적인 실재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마음 속에서 일으키는 반향과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정조,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의 자각적인 감정”(헤겔)에 의해 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근대가 지워버린, 우리의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시적인 것’을 탈환하고 재구성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시적인 것’의 실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주체의 발견과 정립을 욕망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볼 때, ‘주체’라는 말조차 그 자체로 세계 전유의 폭력성을 내장한 개념이지만, 탈脫주체를 욕망하는 최종 규율의 언어 역시 주체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시적인 것’을 구성해가는 이들의 균형 감각을 여러 차원에서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들의 시적 언어는 새로운 주체를 욕망하고 상정하고 그것에 한시성과 연속성의 길항을 부여한다. 비록 ‘젊은’이라는 수사修辭의 의미망(시인들의 실제 연배가 아니라 시단에 나와서 자기 목소리를 발화한 연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이 세대론적 발상에 머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들의 시가 자기 복제의 유혹을 넘어, 한시적인 세대론의 전략을 넘어, 퀴어류의 주변부적 상상력을 넘어, 무국적의 상상력과 유목적 주체가 가지는 일회성을 넘어, 새로운 내면의 리얼리티를 확장하고 매서운 결의 언어를 통한 새로운 물질성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러한 경험과 반성 그리고 새로운 사유를 통해, 우리는 시적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재 형식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저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현대시 교육론』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등이 있음.
출처 / 인터넷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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