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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 시적 계시-1

by 丹野 2010. 4. 25.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 시적 계시-1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가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란 대목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에 혹시 다른 분들께도 그러한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옮긴이들이 먼저 읽으라고 권해주신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2부를 올려드립니다.

시에 앞서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의 당혹과 두려움, 고뇌와도 같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원초적인 정서 체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인용들이 넘칩니다. 「랭보는 말하기를,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다.」 334

옮긴이의 글

『활과 리라』는 파스가 가장 애착을 느꼈던 책이다. 젊은 시절 고민하던 '존재의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이 진지하다. 이 책은 1부 시란 무엇인가? 2부 시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3부 시와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명증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그 중에서 2부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동양 사상을 인용하면서 시적 경험에 대해 써 내려간 그의 글이 우리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옮긴 우리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책이다. 오늘의 우리를 키워준 책. 평생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현대가 어떤 시대인지……


『활과 리라』는 파스를 격동의 대륙 중남미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 결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단순한 시론서詩論書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안목을 열어주는 고전 같은 책이다. 또한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씌어진 대표적인 산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책의 문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글은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매우 시적이어서 존재의 내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흐름에 취해 현기증이 일 때가 많다. 백척간두에 선 듯한 아찔한 현기증. 때때로 책갈피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의 이면이 홀연히 드러나고, 그때 시간과 공간은 역류逆流하기도 한다.


활과 리라

제1판 서문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책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 책에 씌어진 나의 대답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부응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일반적인 동의를 얻을 것인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된 내 대답의 깊이와 유효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필연성에 충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씌어지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할까?


1942년에 호세 베르가민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사백 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이 강연회는 내게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질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다듬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 글은 잡지『탕자El Hijo Prodigo』5호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ia de soledade y poesia de comunion」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책은 그때의 글이 성숙되고 발전된 것이며 어떤 점에서는 바로잡은 것이다.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진 빚이 엄청난 것이어서 책 속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애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폰소 레예스*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Alfonsd Reyes(1889~1959). 멕시코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던 지식인 운동 가운데 하나인 '1910년 세대'에 속했다. 희랍의 고전과 유럽, 스페인 그리고 중남미의 문학, 사회학, 지리학, 문화,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친 박학함으로 중남미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가 보여준 우정과 모범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그가 썼던 책들 『문학적 경험La experiencia literaria』, 『경계 설정El deslinde』그리고 다른 작품들 속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많은 귀중한 에세이들이 내게 모호했던 것을 명료하게 밝혀주었고 불투명했던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으며 복잡하게 얽힌 것을 쉽고 가지런히 바로잡아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멕시코, 1955년 8월 옥타비오 파스

 

 

 

 

  


2부

시적 계시La revelacion poetica


피안彼岸



인간은 그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인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스스로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의)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시를 낭송하자마자, 그 이미지는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창조적 반복인 리듬의 작용으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의미들의 다발인 이미지는 참여로 통하는 문을 연다.

시 낭송은 축제요 교감交感1)이다.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만든다.

하지만, 원시적 의식 구조에서부터 유행, 정치적 광신, 심지어 범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성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신분석학이나 역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된 '신성한'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함은 우리를 최악의 혼란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영접 교섭 혹은 가톨릭의 의식인 성찬식을 뜻하는 단어인 comunion을 교감이라고 번역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진의를 살려 되도록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서 파스 자신이 언급하듯, 현대시의 과업은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 신성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를 낭송하며 공감하는 것은 미사에서 예수의 몸인 성체聖體를 신도들이 나누어먹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존재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성이나 윤리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하는 모든 것은, 그 옛날 소위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재實在 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태도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애써 무시해도 자기 무의식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인류학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나 신경 쇠약에 빠지지 않고도 꿈과 상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 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온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交戰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류학자들이 호주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회 제도를 연구하거나 혹은 고대 부족의 민속과 신화를 분석할 때, 마치 원대인의 눈에는 이성의 도전으로 보이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현상을 굳이 설명해보려는 의욕으로, 몇몇 인류학자들은 인과론을 잘못 적용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해석했다.

프레이저Frazer는,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사 과학이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레비-브롤Levy-Brujl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前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들을 논리적, 인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을 인과의 사실로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들로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점을 원시 사회 제도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과 보편적 신화 원형론에 근거하여, 고대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 던진 첫번째 거역(NO)인 근친상간에 대해 연구했다.

뒤메질Dumezil은 아리안족 신화를 연구하여 그들의 봄 축제(혹은 그의 책에서 시적으로 명명한 "불멸의 향연")에서 인도유럽어족들의 신화와 시의 원형을 발견했다. 카시러는 신화, 마법, 예슬 그리고 종교를 인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말리노 보스키는 또한…… 하지만 계속해서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그 넓은 세계를 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현상과 그에 대한 가설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은 소위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라칸돈 부족은 지금도 실제로 고대의 생활 조건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던 가장 복잡하고 풍요로웠던 마야문명의 직계후손들이다. 라칸돈족의 사회 제도는 문화의 발생기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잔재에 해당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前논리적도 아니고, 그들의 마법 의식儀式 또한 전前종교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칸돈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일 뿐, 더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다.

토인비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에스키모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그것이 쇠락하는 것이든, 화석화된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53-156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 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적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은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시적 사고방식과 진보라는 개념은 양적 시간 개념의 산물이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레비-브롤은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원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의사 전달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논리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깊은 차원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예증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단 시인, 광인狂人,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직업적, 사회적,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이 모든 현상들에게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대인이나 어린이들만의 것 혹은 정신 이상 증세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53-157

어떤 사람들은, 의식儀式이나 제의의 주체가 원시인이나 정신병자처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제도라고 본다.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의, 신화, 축제, 전설 등 '물질화'되었다고 적절히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견이 현실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성함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 제도가 진정 폐쇄되고 유일한 무엇을 구축한다면, 축제나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인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은 신격화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춘화春花를 볼 때의 감정과 티벳의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접상을 볼 때의 감정과 역시 서로 다르다. 158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양쪽 다 그것만으로는 신성한 것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 포용하여야 할 것이다.

신성함의 세계는 인간을 배제한 사회 제도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제도와 절연된 인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적인 것의 경험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 것도 역시 불충분하다. 그 경험은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표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2)

2) 이 글이 씌어지고 난 후 10년 뒤, 『야생의 사고』(1962)가 출판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중요한 저서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 못지 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성聖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로 이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터부는 그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계에 금지된 일들이 다른 세계에선 가능하다. 순결이라든지 혹은 불경不敬이라는 개념은 이 구분으로 인해 생겨난다. 단지, 위에서, 우리 자신을 배제한 단순한 사실은 표피적인 자료만 양산할 뿐이다. 또한 모든 사회는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각각의 영역에는 다른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규칙과 금기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상속세법의 운영 체계는 형법에 적용되지 않으며(비록 그 옛날에는 적용되었겠지만), 사회 관습에 따라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만일 공무원 사회에서 행해진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외교 규범은 가정 내에선 적용되기 어렵고, 반면 가족끼리의 규범은 국제 통상 세계엔 적용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 내에서 인간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규범에 따라 처리된다. 따라서 성(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선,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이나, 스페인어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salto motal'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의 중국 선사(禪師) 혜능(慧能)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ㅡ지혜ㅡ피안ㅡ도달의 뜻이다…… 마하란 무엇인가? 크다는 뜻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지혜라는 뜻이다…… 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피안에 이르다(到彼岸)의 뜻이다. 차안(此岸)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浮沈)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ㅡ'피안에 이름'이다.
많은 바라밀다 계열 경전들의 끝부분에는 여행 혹은 도약의 개념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오,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버린 이여(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비록 영세, 영성체, 각종 성사 혹은 통과 의례들이 모두 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도약'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他者)'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의례들은 흔히 우리가 막 탄생했거나 혹은 중생(重生)했다고 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새 이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초적으로 경험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태아로서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스페인 희곡은 이 갈등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61

티르소 데 몰리나는 그의 작품 『믿음이 없는 죄인』에서, 구원을 찾아 10년 간 동굴에서 고행을 실천하는 수도자 파울로를 등장시킨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죽어 신 앞에 출두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심판 내용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깬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악마가 천사로 변장하여 그의 앞에 나타나, 신이 그에게 나폴리로 떠나라는 명령을 했다고 알린다. 그곳에 가서 엔리코란 사람을 만나면, 그를 통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를 만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당신도 똑같이 겪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엔리코는 효자이며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 엔리코라는 모델을 보자 파울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잠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그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울로가 본 모습은 단지 그의 외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악한이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신의 품에 자신을 맡길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엔리코는 속죄하고 즉시 스스로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바친다. 그는 치명적 도약을 하고, 구원받는다. 고집이 센 파울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치명적 도약, 즉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내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심이 그의 내부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울로의 죄는 무엇인가? 신학자인 작가 티르소에 의하면, 불신과 의심이 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만이 그의 죄였다. 그는 결코 신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신성에 대한 그의 불신은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즉 악마로 변한 것이다. 파울로는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자는 신뿐이며,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자신을 신에게 온전히 맡긴 엔리코는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었으나, 자기 자신을 믿은 파울로는 파멸했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2

『믿음이 없는 죄인』이 내포하는 신학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주인공들이 겪는 본성의 급격한 변화와 순간적인 전이가 주목할 만하다. 엔리코는 금수(禽獸)였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참회 속에 죽는다. 파울로 역시 갑자기 수도사에서 방탕한 자로 탈바꿈한다.

미라 데 메스쿠아4)의 『악마의 노예』에서도 심리적 변화가 급격하고도 전면적으로 일어난다. 희곡의 앞부분에서 돈독한 신앙을 가진 선교사 돈 힐은, 우연히 어느 청년과 마주치는데, 그는 애인 리사르다의 발코니로 올라가려는 중이었다. 성직자는 그 젊은이를 설득하여 물러가게 한다.

혼자 남게 된 성직자는 자신의 선업에 대한 교만에 들떠, 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번개 같은 독백을 통해 돈 힐은 치명적 도약을 한다. 기쁨에서 교만으로, 그리고 교만에서 호색(好色)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젊은이가 오르던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어둠과 욕망에 신분을 감추고, 애인을 기다리던 아가씨와 동참한다.

다음날 아침 리사르다 아가씨는 그 남자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의 순간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는데, 그 긍정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이의 사랑이 그녀를 외면해서, 악을 껴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기증이 둘을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그들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사람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훔치고, 죽이고 마침내 리사르다의 부모까지 죽였다.

4) Mira de Mescua(1574~1644). 로페 데 베가 학파의 스페인 극작가로 종교극을 많이 썼다. 163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파울로와 엔리코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어두운 열정을 설명한 마땅한 이유는 없다. 자유롭게 동시에 무엇엔가 떠밀려 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을 유혹하는 심연으로 전락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적 결정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다른, 엉뚱한 힘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엔가 홀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타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가능하다. 그들 역시 엔리코와 파울로처럼 도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떠미는 힘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를 이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행위이다.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첫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찾아 헤매던 것으로부터 도망한다. 또한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성 후안 크리솔로고san Juan Crisologo의 말 "정신이 고양될수록, 더욱 뜨거워진다Plus drdebat, quam urebat"을 제사(題詞)로 따온 소네트에서 케베도는 순교자의 열락(悅樂)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렌초는 석쇠 위에서 불타며 즐긴다.
황색 불길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순교자의 항구적인 가치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폭군은 로렌초를 통해 불타며 고통 겪는다.


숯불은 황홀하게 번져 나가고
석탄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순교자의 갈비짝은 요리가 되어
사형 집행인에게 바쳐진다.


적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의 지고한 노력을 닮은
성사(聖事)의 불타는 재현.
하늘이 인간을 영원케 하는 것을 보라.
패배가 영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타락한 군주는 타들어가고 있다. 165

로렌초는 불타면서 자신의 순교를 블긴다. 폭군은 괴로워하며 적 속에서 스스로를 태운다. 이런 영광스런 순교와 비속한 고문 사이의 간극을 밝히기 위해선, 사드 백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세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희생양은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방탕자의 고독은 깨어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쾌락은 순수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것은 쾌락이라기보다, 차가운 분노에 가깝다. 사드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는 의사불통의 세계다. 각자는 자신의 지옥에 외롭게 갇혀 있다.

케베도는 그의 소네트에서 교감comunion의 이중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석쇠는 고문과 요리의 도구이며, 로렌초는 요리와 태양으로 이중적으로 변한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폭군의 승리는 패배가 되고, 로렌초의 패배는 승리가 된다. 어디서 고통이 끝나고, 어디서 쾌락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뒤섞일 뿐 아니라, 로렌초는 교감의 힘에 의해 폭군의 가해자가 되며 폭군은 그의 희생양이 된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聖)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한다. 공간은 더 이상 연장(延長)이 아니라 질(質)이다. 어제는 오늘이다.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시간과 사물들의 그 특이한 존재 방식을 들여다보면, 밀고 당기고, 고양시키고 추락시키며, 움직이고 멎게 하는 어느 중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우주는 자장(磁場)으로 변한다. 어떤 리듬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감정과 사고를, 판단과 행위를 각각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하나의 천을 짠다. 166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구토와 감미(甘味)로 엮인 천을 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이다. 모두가 현존한다. 모두가 존재하고, 모두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충만 속에서, 요행으로 믿었던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로렌초는 태양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타버린 잔혹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느 날 오후, 힌두교 성지인 무트라Mutra의 줌마 강가에서 거행되는 작은 의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 의식은 매우 간단했다. 석양녁에 한 사제가 조그마한 사원 모양의 나무 더미에다 성화를 붙이고, 강가의 거북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종을 치고 노래하며 향을 사르는 동안, 그 사제는 송가를 읊조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는데, 그날 그 의식에는 크리슈나를 믿는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사제가 불을 당겼을 때(우리 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밤의 장막 앞에 그 불빛은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던가!) 신자들은 노래하고, 고함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지러운 동작과 고함소리는 나에게 역겨움과 고통을 주었다. 167

그 무절제한 열광은 너무나 엄숙하면서도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불쌍한 고함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몇몇 벌거숭이 애들은 깔깔거리며 뛰놀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무심히 낚시를 하거나 또 다른 이는 헤엄치고 있었다. 어느 촌부는 꼼짝 않고 서서 흐린 물에다 오줌을 누고 있었다.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그대로 지나가고 있었고, 유일하게 신이 난 것은 목을 길게 빼고 먹이를 쫓는 거북이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거지들은 시장으로 돌아가고, 순례자는 여관으로, 그리고 거북이들은 강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크리슈나에 대한 경배의 전부인가?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representacion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은 마치 연극 공연 중의 배우와 같다. 그는 동시에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 역시 재현된다. 저 산은 용왕은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그렇다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그 크리슈나의 경배자들도 재연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어느 종교극의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평상시대로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 삶이 너무나도 통속적이라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은 성유(聖油)에 젖어 있다.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때때로 그 이중성은 유머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똥막대기"라 대답했다. 선(禪)수련자는 엉뚱하고 자칫 무의미한 대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간화(看話)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에 이른다. 168


반야바라밀다 계통의 어느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리를 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어느 제자가 물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쳐서 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까?" 스승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아뇨, 못 들었습니다." 이 말에 스승이 응답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게 쳐달라고 청해보지 그러냐?"

낯설음이란,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은 소위 '명백함의 땅'이 우리 눈앞에서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래, 나는 에이다가 아니야. 그 앤 머리가 곱슬곱슬한데, 내 머린 생머리거든. 난 확실히 메이블도 될 수 없지…… 어쨌든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야. 맙소사, 이 모든 게 얼마나 희한한지!" 앨리스의 의심은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의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처럼 앨리스도 스스로 놀라움을 느낀다.

하지만 대체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現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Otro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169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그리고 타자성의 느낌까지도―일종의 가공스러운tremendum 신비,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6) 이 독일 사상가는 가공스러움의 내용을 분석하여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공포이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두번째 요소는 현존 혹은 출현(出現)의 위엄이다. 이다.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엄 있는 힘에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 합쳐진다.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번째 요소로 등장한다. 한편 세 요소 중 나중의 두 개는 종교적 신성의 속성이며,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을 배제하고 논의를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로 집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신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 그 독일 철학자가 '신비mystetium'라는 용어를 그 체험의 '핵심적 개념'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첫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6)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70

무서움 안에는, 뒷걸음 쳐지는 공포와 현존과 합치되고자 하는 매혹이 포함되어 있다. 무서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현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이며,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잔혹미와 불규칙미에 대한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 미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례를 받은, 타자의 육화encarnacion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은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매혹에 빠지기 전에, 먼저 마비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몸이 굳어진다는 테마는 신화나 전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 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무(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에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입을 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한다. 현전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장면은 크리슈나 신의 현현(顯現)이다. 크리슈나는 영웅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 변신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 대화한다. 영웅은 망설인다. 그는 겁이 나서가 아니라, 애정 때문에 망설인다. 171

적장들이 이복형제, 스승, 사촌들이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는 같이 피를 나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상당수를 죽이는 것은 '카스트 제도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세계의 기저와 전 우주도 파괴될 것이다.

아르주나의 논리에 대해 크리슈나는 먼저 세속적인 논지로 맞섰다. 즉, 전사(戰士)에겐 전투가 그에게 주어진 '법dhama'이라는 것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이 전사라는 사실에 대한 배반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살인은 죄라고 믿는 아르주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살인은 끝없는 업業[karma]을 낳는 속죄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이 논리 못지 않게 강력한 논리를 세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판두족(族)을 패배와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군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주나가 처한 입장은 안티고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 긴박함은 아르주나의 경우가 훨씬 더하다. 안티고네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국사범을 매장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오빠를 땅에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법이나 인의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아르주나의 갈등을 풀지 못한다. 마침내 모든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리슈나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신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현현이 일어나면, 존재의 감춰진 모든 형태가 시각적으로 확연하고도 생생히 드러난다. 신의 출현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아르주나는 자기가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172

수많은 입과 눈,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여,
수많은 팔과 넓적다리와 발, 수많은 배와 수많은
끔찍한 송곳니를 지닌 당신의 위대한 형상을 보면서
세계는 전율하나이다. 그리고 저도 또한.
갖가지 색깔로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며
딱 벌어진 입과 작열하고 있는 거대한 눈을 지닌
당신을 보고서 저의 내적 자아는 전율하며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오 비쉬누시여!7

비쉬누는 '우주의 집'이며, 그가 출현할 땐 삶과 죽음의 모습 등 모든 형태가 뒤범벅되어 나타나기에 무서워보이는 것이다. 무서움은, 근접할 수 없는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크리슈나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는 나의 도구이다." 아르주나는 신의 손에 쥐어진 연장에 자나지 않는 것이다. 도끼는 자기를 부리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모른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행위―신적인 행위가 드러난 것이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에서도 신성은 꽉 채워지고 충만한 모습으로 조각된다. 하지만 무서움은 단순히 형상과 상징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한 모습 속에 존재의 두 면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광경은 존재의 내부를 보여준다. 코아틀리쿠에Coatlicue[神像]는 이삭과 해골 그리고 꽃과 발톱으로 꾸며져 있다.

7) 이 부분의 번역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길희승 옮김, 현음사, 175쪽)에서 인용함. 173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소화 기관은 동시에 파괴 기관이기도 하다. 크리슈나의 입으로 창조의 강이 흐른다. 그의 입으로 우주는 자신의 폐허를 향해 줄달음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과 동격이다. 실제로,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不在)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촛불이 꺼지고, 형상이 붕괴되며, 우주가 피를 흘린다. 모든 것이 공을 향해 뛰어든다. 벌어진 입, 구멍, 보들레르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실감했다.

파스칼에게는 거동을 함께하는 심연이 있었다.
―아! 모두 심연이다―행동, 바람, 꿈,
말도 역시! 쭈뼛 솟아오른 머리털 위로
'공포'의 바람이 수없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저 높은 곳에나, 낮은 곳, 어디에나, 깊은 수렁, 모래톱,
침묵, 그리고 무서웁고도 매료되는 공간……
내 밤의 바닥에 신은 그 날렵한 손가락으로
갖가지 형태의 악몽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큰 구멍을 두려워하듯, 어디론지 모르게 나를
몰아가는 막연한 공포로 가득 찬 잠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창마다 보이고 비치는 건 오직 무한뿐

늘 혼미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은
허무도 시샘하는 감각의 무덤,
―아! 절대로 수(數)와 존재를 벗어나지 못할 나여!8)

8) 인용된 시는 「심연Le gouffre」이다. 여기선 김기봉 교수의 번역을 인용한다. 현존한다. 『보들레르의 명시』, 세계출판사, 1944, 118쪽 174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번째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란 사실이다. '타자'는 우리의 머리칼을 쭈뼛쭈뼛 서게 만든다. 심연, 뱀, 환희,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괴물. 그리고 이 물러섬에 의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단애의 저 깊은 바닥을 향하여 몸을 숙인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無)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는 감정은 설명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합쳐진다. 뒷걸음질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175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 일상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顯身)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인다.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 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본 그 세계에는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 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의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前生)―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76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그것이 진짜 현현이라면,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리는 이전에 결코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먼 옛날과 혼동하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도 친밀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먼 남[他人]도, 더 가까운 자신도 없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177

사랑과 신성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같은 연원에서 흘러나온 현상들이다.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손쉬운 예를 들어보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자의 본성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성스러운 음식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본성이나 원초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지고한 육체적 먹거리다"라고. 성적 식인canivalismo erotico에 의하여 인간은 변화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종교의 행위와 모든 신화,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에서까지 등장하는 회귀의 개념은 사랑의 인력(引力)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인은 우리를 고양하여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원래의 우리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떨어지는 것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에 대한 허기는 죽음에 대한 허기이다. 에너지의 약동, 분출, 존재의 팽창은 곧 게으름, 우주적 무기력, 무한으로의 전락이다. '타자' 앞에서의 낯설음은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존재와의 궁극적 일치와 동일화의 경험이다.

사랑과 종교와 시가 공통된 연원(淵源)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은 시인들이었다. 근대 사상은 이 발견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차압하였다. 근대 염세주의는 시와 종교를 섹슈얼리티의 한 형태로 전락시켰다. 종교는 정신 착란이며, 시는 승화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시를 다시 다른 분야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경제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러 번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모든 가설들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연구 방식인 개체 분석법의 제국주의적 폐해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사랑과 시에서와 같이 초자연적인 경험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단절의 느낌에 이어, 낯설게 보였으나 이제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분리 불가능한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 온다. 이 모든 경험들이, 섹슈얼리티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 혹은 그 어떤 다른 조직보다도 오래된 무엇을 공통적인 핵심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근대 사상가들과는 달리―우리는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성은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사회 제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에로티시즘이지만, 성적 충동을 초월하는 무엇이며 또한 사회 현상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세 가지 경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낯설음과 친숙함, 상승과 하강, 외경과 경배, 거부와 매혹 등 그것이 표현되는 상반적인 운동과 그 화해를 엿보고, 우리는 그 운동들이 통일성으로 용해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일까? 진정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미래의 나를 앞당긴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그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을 이룬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성이나, 마차도가 말한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은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만일 인간이란, '그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는 욕망의 존재이며, 존재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우리는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과일이며 동시에 입인 것이다. 근대인들은,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간적인 존재는 긴장을 이완시키기를 원하고, 갈증을 해소시키기를 원하며,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기를 원한다. 시간적인 존재는 자기 충족을 위하여 샘처럼 솟아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하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180

 

 

 

출처 / 안드라의 그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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