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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월평■
기억, 성찰의 시간을 만나다
박해림(시인․ 문학박사)
-강회진,「숨쉬는 나무」(『우리시』10월호)
-엄하경,「범천동 산1302번지에 피는 꽃」(『열린시학』가을호)
-김명희,「그네」(『정신과표현』 9-10월호)
-김인육,「후레자식」(『다층 』여름호)
-최정애,「그의 눈동자 위에서」(『유심』 9~10월호)
-나종영,「가을에」(『열린시학』 가을호)
-조병기,「이별연습」(『우리시』 10월호)
-유승도,「푸른 세상」(『열린시학』 가을호)
오늘 날, ‘나’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건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물음이 되어버렸다는 어느 철학자의 외침이 실감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自我)’ 곧 주체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비롯되는 반성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는 나로서 반성되기보다 설명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적 존재자로 이해되는, 즉 주체가 객체가 되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를 말할 땐 어디까지나 반성적 주체로서 우뚝 설 때 참된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 날 참된 주체가 사라지고 객체적 존재로서만 이해될 때 어떤 문제가 남는 것인가.
현대에서 인간중심주의는 자기혐오를 넘어서 조롱하고 멸시하며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 횡행하고 있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물질의 대량 홍수 사태와 물질적 가치에 매도된, 이른바 물질이란 새장 속에 갇힌 채 ‘나는 행복해요’하고 외치는 시대가 아닌가.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고급을 지향하고 차별화된 물질의 가치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인간 군상 속 주체적 사유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반성적 사유는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현대의 고도로 물질화된 세상은 어쩌면 인간에게 반성적 사유의 자리에 사물적 인식을 올려놓았는지 모른다. 사물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반성적 사유보다 더 가치 있다는 세계인식을 불러왔다.
그러나 인간은 한갓 물건이 아니므로 사물적 반성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참된 주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직 자기반성과 끊임없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만 자기 인식이 가능하고 자기 인식 속에 참된 주체가 감각되어 지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작금의 현대문명의 물질화는 자아로 하여금 특별한 반성 없이 다만 대상을 지향하는 욕구에 함몰되어 오직 밖으로 드러나는 일과 현상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있다는 혐의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때 시인은 성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기억’이라는 대상을 통해 자기 반성적 성찰을 꿈꿀 수 있다는 말이다. 나를 설명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적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참된 주체가 되기 위한 저 너머에 있는 ‘기억’의 불러냄은 이러한 맥락 아래 자기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몸속에 경험되고 저장된 기억을 통해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반성적 사유를 끌어내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참된 주체로서 반성적 자아로 현현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시간을 함의한다. 아버지의 시간과 어머니, 그리고 현재의 나의 시간을 교감한 다음 몇몇의 작품들은 나름의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군불을 지피려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무심코 나이테를 세었더니 쓰러진 굴참나무와 그는 공교롭게도 동갑이었다 산을 내려온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사십년이 지나서야 그가 말해주었다
조각난 나무들 딱딱하다 솟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나무의 옷을 벗겨야 한다 옷을 벗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나무, 계절에 따라 자신을 지키는 법이 다르다 봄 나무는 부드럽고 연한 속살을 가졌으나 겨울나무는 온 몸 불을 껴안고 있다 뭉텅 잘려나간 옆구리에 가만히 손을 대면 뜨거움에 손보다 먼저 마음이 데일 것 같다 아버지는 겨울에는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그랬지, 잠을 자고 있는 겨울나무를 베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라 했지
솟대를 깎다가 모로 누운 밤, 어디선가 쩡, 쩡 얼음장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가만 보니, 채 날개를 달지 못한 새의 몸뚱이가 불뚝불뚝 숨 쉬고 있다 아버지가 빈손으로 내려온 그 저녁, 차거운 윗목 콩벌레처럼 누워있던 어린 내가 천천히 등을 편다
-강회진,「숨쉬는 나무」(『우리詩』 10월호)
기억이란 한 개체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 태생과 성장의 근간이었던 부모와 집의 공간은 기억이 생성되고 바닥에 스미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곳이며 이 방 저 방의 벽화로 새겨지는 곳이다. 실제적 공간으로서 기억과 몸속의 공간으로서의 기억은 거미줄과 칡덩굴처럼 서로 얽혀 있어 쉽게 분리하거나 떼어낼 수 없다. 가슴에 귓속에 뇌리에 몸에 스민 기억들은 때론 땅 위의 뿌리처럼 불거져 현재의 나의 심기를 툭 건드린다. 솟대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한 시적 화자는 ‘나무’를 통해 기억 속 아버지를 불러낸다. 작업의 행위를 통해 전위된 기억에의 행로는 어린 ‘나’에게 맞춰져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억을 떠올린다. 일테면 아버지의 벌목 현장이 그대로 전이된 채 솟대를 만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솟대를 만드는 행위가 ‘나’의 반성적 행위인 것이다. ‘군불을 지피려 산에 올라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무심코 나이테를 세었더니 쓰러진 굴참나무와 그는 공교롭게도 동갑이었다 산을 내려온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에서 그 때의 아버지가 ‘나무’를 통해 자아성찰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십년이 지나서야 그가 말해주었다’에서 보여지듯 솟대를 깎고 있는 ‘나’에게 전이된 반성적 자아의 모습은 ‘솟대를 깎다가 모로 누운 밤, 어디선가 쩡, 쩡 얼음장 터지는 소리가…(중략) 아버지가 빈손으로 내려온 그 저녁, 차거운 윗목 콩벌레처럼 누워있던 어린 내가 천천히 등을 편다’에서 화해로 이어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맥락 아래 이해되어질 수 있다.
아버지의 집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골목은 구불텅 구불텅 뱀처럼 휘어졌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야 보이는 그 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대신 꽃을 키웠나 보다
등나무 줄기가 지붕을 감아나가고
철따라 꽃들은 내력도 없이 피었다 졌다
집에서 내려가는 길을 잃은 아버지 대신
가파른 골목길을 시지푸스처럼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그 꽃들의 이름, 한 번도 호명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꽃밭이 무성해질수록 집은 낡아갔고
우리는 사막처럼 건조해 졌다
그래서 아버지의 꽃이 될 순 없었나 보다
차례로 식구들은 집을 떠났고
꽃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여름 아침엔 나팔꽃이 아버지를 깨웠고
가을 저녁엔 꽃대 실한 국화가
홀로 술잔 기울이는 아버지를 지켰다
선거 때마다 나돌았던 공약으로
마침내 철거계고장이 날아든 봄날
아버지는 맨 먼저 꽃밭을 허물었다
닫아걸었던 내 기억의 문틈 사이로
동백 목련 사르비아 채송화 나팔꽃 줄장이 국화…
그제야 철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엄하경,「범천동 산1302번지에 피는 꽃」(『열린시학』 가을호)
어린 날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외형은 변모되었지만 내적인 기억의 형태는 그대로인지 모른다. 아무 때나 툭 불거지는 어린 날의 추억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분명 성인이 된 자신을 거울 속에 비춰볼 때 의심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머리를 매만지고 옷을 바로 잡고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 어린 날의 무수한 ‘나’와 만난다. 낯선 ‘나’의 발견은 기억의 생성을 일으킨다. 생의 어느 굴곡 지점, 아버지와의 불화는 ‘꽃’으로 대입된다. ‘아버지의 집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골목은 구불텅 구불텅 뱀처럼 휘어졌다/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야 보이는 그 집에서/ 아버지는 우리 대신 꽃을 키웠나 보다/ (중략)집에서 내려가는 길을 잃은 아버지 대신/ 시지푸스처럼 오르내리는 동안/ 나는 그 꽃들의 이름, 한번도 호명하지 않았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엉뚱한 대상인 ‘꽃’을 키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악한 동물의 대명사인 ‘뱀’을 골목에 투사시킴으로서 극대화한다. 그런대로 ‘꽃’들이 아버지와 함께 했으나 어느 날 철거계고장으로 더 이상 집을 유지할 수 없는 아버지는 스스로 꽃밭을 허물어버리게 되고 아버지의 반성적 성찰 행위는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서 부정의 의미인 아버지가 철거됨을 확인하게 한다. 아버지가 허문 부정의 상징적 ‘꽃밭’이 시적 화자의 기억에서 철거된 아버지의 자리에 비로소 생성과 치환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부정의, 의미 성찰적 공간 속에 놓인 아버지에 비해서 비교적 긍정적이다. 다만 ‘나’와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하는 몸짓을 보인다. 앞부분에서 보인 아버지의 반성적 성찰이 나의 반성적 성찰을 끌고 왔다면 여기서는 ‘나’의 반성적 성찰이 주류를 이룬다.
은박지 같은 햇살이 공터 한켠으로 구겨지는 가을,
여자 아이 하나 일식과 월식을 타고 있다
무료한 오후, 방금 올라간 공중을 사선으로 그으며
여자 아이 하나 그네를 탄다
물컹한 허공과 순간 교차된 태양 사이의 거리에서
비스듬히 가늠해 보는 일직선의 세상은 모두가 하나다,
그녀가 급해질수록 구름은 일몰 쪽으로 홀쭉해지고
풍경 안으로 일찍 외출한 낮달이 아이를 따라 회전한다.
아이의 전신을 널빤지처럼 밀어내는, 바람
내 성장들도 늘 그만큼의 위치에서 저 소녀처럼
공전과 자전의 운명들을 통과하는 사이 어머니는 내
그림자를 통과하고 관절 속에 그늘이 커질수록
내 속에선 보름달 같은 희망 몇 둥그러진 시절이었다.
회전을 놓친 절기들은 그믐 안쪽에다 몸을 부리는지
별똥별처럼 떨어진 중년의 오후가 공터그늘에 기대앉는다.
어머니 같은 삶은 살지 않겠노라
푸념의 공식만 키워오던 여인 하나, 물기 빠진 달거리를
곰곰 되짚어 보지만 잡히는 건 모두 빈 쭉정이 뿐
그 여인, 음력의 궤도를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김명희,「그네」(《정신과표현》 9,10월호)
중년 여성의 시야엔 어린 날의 내가 있다. 공터에서 그네를 타는 ‘여자 아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공중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 기억 속의 ‘나’가 교차되고 부정의 공간 속에서 희생된 어머니의 존재를 불러내고 있다. ‘공전과 자전의 운명들을 통과하는 사이 어머니는 내/ 그림자를 통과하고 관절 속에 그늘이 커질수록/ 내 속에선 보름달 같은 희망 몇 둥그러진 시절이었다/’에서 확인된다. ‘어머니 같은 삶은 살지 않겠노라’를 외치나 자아가 감지한 것은 ‘빈 쭉정이 뿐’이다. 기억이란 긍정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정의 공간으로 기능할 때가 더욱 많다. 시적 화자의 반성적 성찰은 결국 어머니를 불러내는 행위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공터그늘이 함의하는 현재의 자아는 철저히 부정의 공간에 놓여 있다. 화해보다 반성의 골짜기에 철저히 자신을 밀어 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시 역시 이러한 알레고리에 놓인다.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성찰적 의미를 시의 전편에 깔아놓고 시적 화자는 철저히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희생적 어머니다. 여든 셋이 되도록 고향집에서 홀로 살았다. 자식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버티다 치매를 앓아 비로소 자식에게 봉양의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상황은 지극히 나쁘다.
고향집에서 더는 홀로 살지 못하게 된
여든셋, 치매 앓는 노모를
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보낸다
시설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거기가 외려 어머니 치료에도 도움이 돼요
1년도 못가 두 손 든 아내는
빛 좋은 개살구들을 골라
여기저기 때깔 좋게 늘어놓는다, 실은
늙은이 냄새, 오줌 지린내가 역겨워서고
외며느리 병수발이 넌덜머리가 나서인데
버럭 고함을 질러보긴 하였지만, 나 역시 별수 없어
끝내 어머닐 적소(適所)로 등 떠민다
애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 되나?
어머니, 이곳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이에요
나는 껍질도 안 깐 거짓말을 어머니에게 생으로 먹이고는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돌아온다
고려장이 별 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끼리 쓸리어
못 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려장이지
어머니의 정신 맑은 몇 가닥 말씀에, 폐부를 찔린 나는
병든 개처럼 허정거리며
21세기 막된 고려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
-김인육,「후레자식」(『다층』 여름호)
노령화 시대에 흔히 접하게 되는 비극적 가족사다. 문제는 누구나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현대의 가옥구조와 생활리듬, 맞벌이 또는 가치관의 차이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일회성이 아닌 연속성의 구조를 가진다. 누구나 맞게 되는 노구=어머니=나의 상태를 시적 화자는 읽어낸다.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돌아온다/’ 효도에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한다지만 그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리는 비극적 상황은 ‘고려장이 별 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 끼리 쓸리어/ 못 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려장이지/’에서 극대화된다. 시적 자아는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의 철저한 성찰의 공간에 놓인다. 반성의 공간 속으로 자아를 밀어 넣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고발하고 있다. 백주 대낮에 벌거벗은 불효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아가 놓인 부정적 공간은 더 이상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이 상황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모든 개체들의 공간이 된다.
앞의 시들이 몸 안에서 체득된 시간의 기억을 개인적 시간 위에 환치시킨 것이라면 아래에서 살펴볼 시들은 의미적 공간인 몸 밖, 즉 철저히 시적 자아의 개인적 삶의 지평에서 투영된 환치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424 차에서 사라진 시계를 생각한다
창으로 사라진 마론 인형의 모자를 생각한다
환풍기 속으로 사라진 레몬 향을 생각한다
정오 속으로 사라진 골목을생각한다
월트 휘트먼의 《풀잎》을 생각한다
하얀 드레스가 나부끼는 카페트 위에서, 커튼 사이로 안개비 떠다니는 백야(白夜) 위에서. 크림 빛 케이크, 밤이 만발한 촛불 위에서, 레드 와인을 마시는 뜨거운 입김 위에서, 무수히 낭비한 금빛 구두 위에서, 그이 눈동자 위에서
빗소리에 부서진 잉크 방울을 생각한다
비누 위로 흘러내린 불면의 밤을 생각한다
포크 레인에 찍힌 머리핀을 생각한다
곤돌라를 타고 간 달을 생각한다
방에서 사라진 나를 생각한다
-최정애,「그의 눈동자 위에서」(『유심』 9~10월호)
주체가 있다면 타자가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타자화된 주체를 엿보게 한다. 이사를 감행하면서 사라진 주체를 확인하고 있다. 일상의 다름 이름인 ‘시계’, ‘마론 인형의 모자’, ‘환풍기’, ‘레몬 향’, ‘정오’, ‘골목’, ‘휘트먼의 시’ 등이 일차적으로 주체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얀 드레스가 나부끼는 카페트 위에서, 커튼 사이로 안개비 떠다니는 백야 (白夜) 위에서. 크림 빛 케이크, 밤이 만발한 촛불 위에서, 레드 와인을 마시는 뜨거운 입김 위에서, 무수히 낭비한 금빛 구두 위에서’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뛰어 넘어 ‘그이 눈동자 위에서’ 타자화된 ‘나’를 주시하고 있다. ‘그’라고 하는 객체를 끌고 와서 타자화된 주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억이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어서 예속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생성해 내는 기억의 알레고리 속에 성찰적 공간을 ‘그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시적 자아의 반성적 행위는 무수한 시간 위에서 ‘나’를 끊임없이 떠올림으로써 확대된다. 몸 밖의 시간에서 생성한 경험이 몸 속 시간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경험이 밖에서 안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적 발로에 의한 기억 또한 있다. 어릴 적 기억 속의 공간이 내 의지보다 가족에 의해 강제된 것, 즉 수동적 입장임을 감안할 때 성인의 상황은 내 의지가 우위에 놓이면서 생성된다. 시간의 기억은 이제 몸 밖의 시간에서 몸 안의 시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아래의 시 역시 그 선상에 놓여 있다.
산국 피어 있는 길 따라가는데
길이 끝이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일지라도
오늘은 쪽빛 하늘가에 핀
서리국화가 오래된 내 사랑 같습니다
지난날엔 그만 헤어지자는
가을 엽서 한 장에 울고
오늘은 가을 물색에 넋을 잃고
붉은 단풍잎 같은 사랑에 편지를 씁니다
돌아보면 굽이굽이 걸어온 길 위에
사랑받는 시간보다
가난하게 사랑했던 하루가 너무 많아
설움에 겨워 행복했노라고.
-나종영,「가을에」(『열린시학』 가을호)
지극히 단순한 내용을 통해 시적 화자는 반성적 성찰 행위를 재현하고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면 그 속이 환하게 다 들여다보이는 평범한 진술이다. 그러나 매 연마다 ‘사랑’이라는 어휘를 반복 형식으로 제시하면서 자기반성을 유도한다. 평이하고 직접적인 진술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이 행위는 ‘가을’이라는 계절적 의미에 만남과 이별이라는 중층적 의미를 더함으로써 반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산국’, ‘쪽빛 하늘가’, ‘서리국화’, ‘사랑’, ‘가을 엽서’, ‘물색’, ‘넋’, ‘단풍’, ‘사랑’, ‘설움’이라는 서정적 시어들이 이 시의 전편에 배치되어 시적 화자의 회한을 마치 수채화의 물감처럼 채색하고 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일지라도/ 오늘은 쪽빛 하늘가에 핀/ 서리국화가 오래된 내 사랑 같습니다/’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듯하다. 하지만 ‘서리국화’로 인식하고 발견한 기억의 대상은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해 연마된 소중한 사랑을 말하고 싶어 한다. 기억 속의 옥토에서 자라고 잘 여문 결과물인 것이다. 사랑의 지속성이 이루어낸 과거와의 화해가 이 한 편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랑받는 시간보다/ 가난하게 사랑했던 하루가 너무 많아/ 설움에 겨워 행복했노라고/’의 역설적인 진술에서 진정성을 획득한다.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이 그다지 어려울 필요가 없음을 한 편을 통해 확인한다.
다음 시 역시 이별을 말하고 있다. 짧은 시행을 대화체로 쉽게 엮어내었다. ‘우리’라는 절대 다수의 대상을 향해 시적 화자는 이별을 고하고 있다. 기억이라는 거대한 저장 창고를 둘러보며 그 속에 쌓인 것들을 천천히 헤아리고 있는 듯하다. 마치 간직할 것들, 누구에게 나누어 줄 것들, 없애버릴 것들 등을 곰곰 따져보고 있는 것이다. 나를 스쳐간 수많은 시간들을 직시하면서 그 흐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된 지난날의 삶의 여정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 행위는 단순히 기억 속의 풍경을 재현함이 아니다. 자기 반성적 성찰의 행위인 것이다. 이별이란 불가항력적 상황에 직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 즉 오욕칠정(五慾七情)을 한순간에 떠올리며 그 다음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어차피 예비된 일 아니었던가?’에서 이별은 갑작스레 닥친 이별이 아니라는 데 이별의 변별성을 주고 있다. 예고되었다는 것은 시적 화자의 준비 역시 사전에 준비되었음을 뜻한다. ‘머물었던 자리마저 치우고/ 빈 술잔도 이제 채울 일이 없겠네 그려/ 부질없는 악수랑도 그만 두고/ 전화번호도 지울 때가 되었나 보네/’에서 고백하듯 단단한 마음 준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읽은 시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이별을 하면서 역설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오히려 결별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에서 슬퍼야 할 결연한 이별이 슬프고 비극적이기 보다 오히려 행복한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철저한 반성적 성찰이 없고서야 이런 이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그만 떠날 시간이 되었나 보네
뒤돌아보지 않아도 괜찮겠지
마음 편히 그만 여기서 하직하세
어차피 예비된 일 아니었던가?
머물었던 자리마저 치우고
빈 술잔도 이제 채울 일이 없겠네 그려
부질없는 악수랑도 그만 두고
전화번호도 지울 때가 되었나 보네
오히려 결별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제 그만 여기서 잘 있게나
-조병기,「이별연습」(『우리詩』 10월호)
이제 아래의 시를 통해 주체는 다양한 실체를 꿈꿀 수도 있겠다. 현실의 시간 속에 철저히 침잠한 시적 화자는 일상을 생태적 세계에 두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벌레잡이를 통해 주체와 타자화된 주체의 모습을 반성한다.
어제보다 푸른 오늘이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벌레를 잡아 죽이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포도 잎 뒷면에 다닥다닥 붙은 노랗고 검고 하얀 벌레들
털이 송송 난 벌레들을 장갑 낀 손으로 꾹꾹 누르거나 슥슥 문질러서 으깨 죽일 때, 벌레들은 갉아먹었던 포도 잎을 몸 밖으로 내보내며 제 몸 속의 푸르름을 증명한다 하얗거나 노랗거나 검었던 몸빛은 그저 허울이었노라고, 몸속은 푸른빛이라고, 그것이 내 빛이라고, 먹는 것의 빛이 곧 내 몸빛이라고
벌레들의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나는 내 몸을 바라본다 나도 꾹 눌러 터진다면 푸른빛으로 감싸일까? 누군가 나를 쓱 문지른다면 말없이 으깨져 푸른빛이 될 수 있을까?
푸르른 것들을 입안으로 넣으며 창밖의 푸른 세상을 바라본다
-유승도,「푸른 세상」(《열린시학》 가을호)
‘벌레’로 명명된, 타자화된 주체의 모습은 색채의 절대적 합일을 부른다. ‘푸른’, ‘푸르름’, ‘푸른빛’은 주체가 지향하는 형용이고 색이다. 그 전의 색은 ‘하얗거나’, ‘노랗거나’, 검었‘거나, 허울에 불과하다. 시적 화자의 세계인식은 생계를 위한 포도밭 경작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벌레잡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적 화자의 행위는 현재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먹은 대로 토해내는 포도잎사귀의 벌레들을 통해 타자화된 주체의 모습을 각인하고 내가 선택한 삶의 여정에서 벌레만큼이나 정직한 삶을 생성했느냐의 반성적 의미를 도출해내는 주체는 '벌레들의 소리를 온몸으로 들으며 나는 내 몸을 바라본다 나도 꾹 눌러 터진다면 푸른빛으로 감싸일까? 누군가 나를 쓱 문지른다면 말없이 으깨져 푸른빛이 될 수 있을까?//’라는 반성적 사유를 이끌어낸다. 기억의 저장고를 향해 이동한다. ‘푸르른 것들을 입안으로 넣으며 창밖의 푸른 세상을 바라본다/’의 행위를 통해 내 몸 밖의 경험된 시간, 즉 기억을 몸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현대문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오류를 범하게 한다. 오늘 날 거대한 물질의 가치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특권인 인간 중심의 사고를 잃어버렸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 비례하는 탈 인간 중심의 삶이 현대인의 삶을 예속하고 있으며 물질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른 채, 아니 알고 있으면서 보다 더 물질화를 꿈꾼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뻔하다. 끊임없는 인간 주체의 반성적 사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어느 틈에 타자가 되어버린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반성적 사유 없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참된 주체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이럴 때 시인들의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태어나고 성장한 어린 시절의 공간과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경험되고 각인된 내적 경험과 성장 후 자아가 주도한 외적 경험 사이를 타고 오르내리는 기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때론 피폐하게 때론 반성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기억 속의 세상은 무한히 넓고 끝이 없다. 그러나 주체의 반성적 행위를 끌어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화해를 불러오고 자기실현으로의 과정을 열어놓게 된다. 세상 속에서 함께 뒹굴며 세상을 염탐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 주체적 사유와 자아의 반성적 성찰을 실현한다.
박해림 시인
*고려대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시와시학』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1999년『월간문학』동시 당선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3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2008년 이영도 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격월간『정신과 표현』편집위원, 아주대 강사
시집
*1999년『실밥을 뜯으며』
*2003년『눈 녹는 마른 숲에』
*2004년『고요, 혹은 떨림』
*2005년『간지럼 타는 배』(동시집)
출처 / 우리시회(URISI) http://cafe.daum.net/urisi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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