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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詩월평■
타인의 시선, 타인의 목소리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 강호정,「상황들」(《다층》, 2009년 가을호)
- 조유리,「지난밤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우리詩》, 2009년11월호)
- 유홍준,「사람을 쬐다」(《유심》, 2009년 11/12월호)
- 이대의,「연하장 그리는 청소부」(《우리詩》, 2009년11월호)
- 채호기,「만년필」(《서시》, 2009년 가을호)
시는 오랫동안 일인칭의 장르였다. 시인이라는 한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해 왔다. 그래서 시를 일컬어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계를 일인칭의 주관성으로 파악하고 재창조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인칭의 장르가 역사적으로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주관과 객관의 합일이 서정시의 이상이었다. 일인칭의 주관성이 세상의 보편성을 담지해낼 때 바로 서정시의 의미가 존재했다. 그후 ‘생각하는 주체’라는 근대적 의식이 서정시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해왔다. 세상을 주체의 눈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형상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시의 언어에 객관성을 부여했다.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는 주체의 분열의 시대이다. 주체는 무수한 타자들의 모자이크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다. 나의 욕망,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타자들의 욕망이고 타자들의 투영이다. 나는 무한한 타자들의 다른 모습으로 쪼개질 뿐이다.
이런 시대에 자신의 주관성을 절대화한 서정시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일인칭의 비현실적 유토피아로의 도피이거나, 좁은 자신의 견해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몽매한 편견에의 고착이 감히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목소리가 있는 시들이 좀 더 절실하게 읽혀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달의 월평에서는 그런 시들을 눈여겨보고자 한다.
두 군데의 모임이 있었는데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이쪽에는 저쪽, 저쪽에는 이쪽 핑계를 댔다. 대신 인천공항에 가서 저물 무렵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았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이라는 비유가 가능할까 생각했다.
할 일이 많았지만 술집에 갔다. 할 일이 없어져서 손바닥의 손금을 세었다. 잔을 비울 때 마다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3개월의 순수한 시간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할까.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지우고 있었다.
- 강호정, 「상황들」부분(《다층》, 2009년 가을호)
타자들의 삶일 뿐인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사는 일이 가기 싫은 모임에 나가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다. 나는 없고 모임에서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나, 타인들과 함께 하는 나만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게 싫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인천공항에 간다. 가서 비행기를 본다. 그런 현실에서 떠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게다. 그리고 술을 마시러 간다. 할 일을 하지 않고 잠시의 쾌락 속에 자신을 맡기고자 한다. 오직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그 짧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자신만의 시간 3개월을 생각하는 것마저 전혀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 나는 없다. 그저 내가 존재하게 되는 상황만 있을 뿐이다. 그 상황에는 모두 타인들이 존재하고 또한 그것은 타인들이 만든 것이기도 하다. 순수한 자아, 주체적 인식과 욕망이 가능한가를 시인은 진지하게 묻고 있다.
다음 시는 훨씬 극적으로 이러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시상영 극장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공포와 멜로와 판타지
공포는 무서웠으나
숨을 죽였으므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 없는 귀신을 애인처럼 옆에 앉혀놓고 팝콘을 씹었다
한 개의 빨대로 콜라를 나눠 마시며
시퍼런 댓잎에 휘감겨 있는 바람과
수천 개 붉은 눈알이 박힌
거울 속에 목을 디밀고
숨을 쉬면 죽을 것만 같아 숨통을 틀어막은 채
귀신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이 장면이 진짜 클라이맥스라고?
얼굴을 문지르는 잠깐 사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 찾아온 첫사랑
짧은 사랑 끝에 사람의 생간이
까마귀의 귀두로 둔갑하는
세 편의 영화가 시차도 없이 동시상영 되고 있었다
이번 생은 분명, 리허설에서부터 잘린
내 청춘의 속편이겠다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눈 뜬 새벽
자막에 입술을 부비는 씬-에서
하룻밤 새 분장을 지우는 시나리오
나는 어느 대목에서 혀를 꺼내 문 채 퇴장 당했을까
- 조유리, 「지난밤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우리詩》, 2009년 11월호)
시인은 동시 상영된 영화를 세 편 보았다고 한다. 영화를 본 것이 시인의 삶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삶이 이 영화이기도 하다. 동시상영된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처럼 우리의 삶, 그 삶을 살아가는 나라는 인물은 사실 다 분열되어 있다. 각기 다른 영화들의 주인공처럼 타인들의 삶이 내 삶을 형성하고 타인들의 존재가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의 모습과 존재 조건이 한 편의 영화, 아니 세 편의 영화로 환원되어 결국 “공포와 멜로와 환타지”라는 도식적인 영화공식으로만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니고 결국 “새 분장을 지우”고 “혀를 꺼내 문 채 퇴장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아의 완전한 소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타인의 존재를 통해서만 인간이 된다. 다음 시는 바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마당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유홍준, 「사람을 쬐다」(《유심》, 2009년 11/12월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책 제목이 있듯이 노인이라는 존재는 현대 사회에서 잊혀진 존재이다. 욕망과 그것을 실현할 물질적 힘에 대한 숭배가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욕망만 존재하고 그것을 실현할 힘을 갖지 못했기에 사회에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독거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들 노인이 아직 죽지 않은 인간이라면 타인들을 보는 것만이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슬픈 현실이 그려져 있다. 시인은 이를 “사람을 쬐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유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유물론적 설명만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가 허물어진 시대에 주체의 힘든 실체를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 조건을 힘들게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며 독거해야 하는 노인들의 모습으로 겹쳐 떠올릴 수 있다. 이 시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주체가 허물어진 타자의 시대에 이제 시를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서정적 주체가 일인칭의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거짓 위안이 되고 현실 도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시가 현실을 그리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타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예를 다음 시가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시간이 따스하게 흐른다.
쌓인 눈으로 만든 듯한 화선지에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으로 연하장을 그리려 앉아있다.
화선지의 여백이 크다.
유년시절 즐겨 그렸던
크리스마스카드 모양의 그림을 그리려 든 붓
붓은 빗자루 닮았다.
빗자루로 눈 덮인 거리를 청소할 때 바닥 풍경이 들어나듯
붓의 움직임에 풍경이 살아날 듯하다.
긴장된다.
떨리는 순간, 화선지에 빗질하듯 그린다.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지만
물감이 번져 형체도 없이 흩어진다.
덜컹이는 창문에 들이치는 눈발
누가 온듯하여 그리기를 잠시 접고 창문 열고 내다본다.
까마득히 내리는 함박눈, 골목길 저편 끝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들려온다.
흐리마리한 산동네 불빛이 따스하다.
따스한 소식이 그리워지는 밤
올 한해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일 아침 누군가를 위해서 거리를 청소하듯
연하장 그릴 생각에 잠기다
창밖 함박눈 내리는 풍경에 빠져든다.
-이대의,「연하장 그리는 청소부」(《우리詩》, 2009년 11월호)
이 시를 보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기존의 시적 표현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연하장을 그리는 청소부를 보고 있다. 화면 속에 주인공의 행동이 보여지는 영화의 장면과 같다. 하지만 곧 시는 청소부가 그리는 그림의 모습과 그것을 그려내는 붓질의 묘사로 바뀐다. 영화의 클로즈업과 같다. 그리고 그 화면을 보는 것은 우리들의 눈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그림을 그리는 청소부의 눈이기도 하다. 시인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청소부의 시선으로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그 다음 다시 창밖의 풍경으로 묘사가 옮겨진다. 그런데 이때 창밖의 풍경은 우리가 보는 또는 시인이 보는 풍경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던 청소부가 보는 풍경이다. 캐롤송이 들려오는 것도 청소부의 귀를 통해서이다. “산동네 불빛을 따스”하다고 느끼는 것이나 “좋았던 사람을 생각”하는 것 역시 청소부의 느낌과 청소부의 생각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청소부의 퍼소나를 쓰고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인으로 존재하면서도 시인이 청소부의 시선으로 보고 청소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때로 시인과 청소부의 시선과 목소리가 교차하고 섞이기도 한다. 전통적인 일인칭 시점의 시적 진술 방식이 인물시점이라는 새로운 진술 방식으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을 통해 나 아닌 타인의 삶과 우리들의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연하장을 그리는 청소부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를 볼 때 나는 그가 되기도 하고 그가 나의 삶에 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청소부의 삶과 나의 삶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통해 진정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보게 하는 따뜻한 시이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나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할 때 시는 무엇이어야 할까? 다음 시가 이에 대한 대답을 준다.
만년필이 시를 쓴다, 아니다.
만년필이 글자를 뽑아낸다, 아니다.
만년이 말한다. 글자들에게,
같은 문장 안에 다른 단어들이 듣는다.
씌여진 단어가 씌여질 단어의
소리를 듣고 춤출 준비를 한다.
손가락이 소리의 제스처들에 응답하며
움직이고, 펜촉의 느린 스텝.
백지가 녹고 글자가 움튼다, 아니다.
글자가 만년필을 붙잡는다, 아니다.
만년필이 글자의 말을 듣는다, 아니다.
글자의 제스처가 손바닥을 유혹한다, 아니다.
글자가 시를 쓴다, 아니다.
글자의 뒤뜰, 만년필이 유영하는 심해, 눈 먼
마음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부딪쳐 울리는
소리의 음영에 짓다만 시의 구조물, 아니다.
구석에 버려진 포클레인, 아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멈춘 만년필, 아니다.
만년필이 손가락이다, 아니다.
만년필이 글자다, 아니다.
만년필이 시다, 아니다.
아님 말고.
- 채호기, 「만년필」(《서시》, 2009년 가을호)
만년필은 글자를 쓰는 도구이며 글자를 만들어내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언어를 시로 표현하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자기의 언어라고 주장할 수 없으므로 그는 도구가 된다. 그것은 제스처일 뿐이다. 나, 손가락, 만년필, 글자 어느 것도 시가 아니고 어느 것도 시가 아닌 것이 아니다. 주체의 주체적인 언술은 이런 타자들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연기될 뿐이다. 실체는 없고 진실은 묻혀 있거나, “아님 말고”식으로 알아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이 타자들의 관계 속에서 끝없이 연기되는 무언가를 찾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황정산 시인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2년『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2002년『현대시문학』으로 시 등단
*『정신과표현』으로 시와 수필 등단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격월간『정신과표현』편집위원
*저서로는『작가론 총서 김수영(2003)』『쉽게 쓴 문학의 이해(2000)』
『주변에서 글쓰기(2000)』『한국현대시의 운율론적연구(1998)』
* rivertel @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URISI) http://cafe.daum.net/urisi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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