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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쓰기 / 신경림 시인

by 丹野 2009. 11. 30.

 

 

 

 

떠도는 자의 한평생 시쓰기 / 신경림 시인

 
계간시인세계
글 / 김광일
 
신경림과 외손주


● 외손주 자전거 지키는 할아버지
인사동 한식집 ‘동루골’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쪽 방 저쪽 방에 스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큰마루 쪽에 상을 펴놓고 목계牧谿 신경림(申庚林·67)을 기다린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신경림이 “약속 시각보다 정각”에 나타났다. “어, 벌써들 와 있네?”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를 맞이한다. 주인도 나와 인사를 건넨다. 신경림은 요즘 외손주 최헌(8) 군과 보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글쎄 녀석이 날 찾아와 할아버지 자전거 좀 봐주세요, 라고 말하면, 내가 그냥 자전거를 보고 있는 거야. 다른 놈들이 손대지 못하게. 아파트에서 녀석이 뛰어도 아무 말도 못해. 혼내키기라도 했다가 놀러 오지 않으면 어떡해. 걔 때문에 내가 자장면, 스파게티, 피자도 참 잘 먹어요. 먹다 보니 맛있데.”
 
축구 좋아하십니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마침 어제 저녁에 한국과 이탈리아 경기가 있었지요. 후반전을 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손주가 전화해서 계속 축구를 보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연장전을 보게 됐지요.”

▶ 요즘 1998년에 나왔던 시선詩選 해설집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MBC에서 소개된 덕도 없진 않겠으나, 그보다는 “좋은 시”에 대해 설득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간곡함이 많은 독자들의 귀에까지 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합니까?
“좋은 시란 독자와 의사소통이 돼야 합니다. 또 1회성보다는 오래가야 합니다. 내가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어떤 시든 그 시를 읽자마자 머리 속에 그림이 박혀 퇴색하지 않는 시가 좋은 시더군요. 많이 읽힌다는 것이 좋은 시의 기준은 아닙니다. 대중가요의 가사는  널리 읽히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시는 깊이 읽히는 것이라고 봅니다.”

▶ 의사소통이란 무엇입니까?
“감동을 주는 것이지요. 시는 뜻으로만 읽는 게 아니고, 느낌으로도 읽는 것입니다. 느낌으로도 훌륭하게 의사는 통합니다. 이것은 쉬운 시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난해시도 상징시도 마찬가지입니다.”

▶ “시를 잘 이해하려면, 그 시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조건 아래서 살았으며, 그 시를 쓸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의도와는 달리, 시만 별도로 떼어내서 독자의 취향대로 제멋대로 시를 읽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물론 아닙니다.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경을 알아야 도움이 됩니다. 시인의 의도하는 바를 안다는 것과 독자가 자기 나름대로 아무렇게나 해석한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즉 자기 취향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라도 시인의 환경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령 김종삼의 「묵화」라는 시가 있다고 할 때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 했는가를 알고, 그가 살아온 환경을 아는 것은 시 이해에 결국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독자가 자기 나름의 상상력을 보태서 읽는 것이고, 행간을 읽는 것이기도 합니다.”
 
 
묵화墨畵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인사동에서 문우와 술을, 등산은 북한산
▶ 70년대 서슬 퍼렇던 시절, 이호철, 한남규, 구중서, 염무웅, 조태일, 황석영 등과 어울려 술판을 자주 벌였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 분들과 자주 어울리십니까?
“지금도 비슷합니다. 구중서, 염무웅과 자주 어울리는 셈이죠. 이호철도 가끔 보고요. 인사동에서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안종관, 현기영, 정희성, 이시영도 자주 보는 문우들입니다. 또 산에도 갑니다. 현기영, 정희성 등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산에 갑니다. 주로 일요일이지요. 대개 북한산인데, 점심 먹고 술도 먹습니다. 특별한 계획이 있으면 좀 멀리 있는 산에 가기도 하고요.”

▶ 바둑은 몇급이고 얼마나 자주 두십니까?
“3급입니다. 헐거운 3급이예요. 인사동에 있는 기원에 자주 다녔는데, 지금은 그 기원이 이사를 가서 자주 못 갑니다.”(※‘선생도 한때는 관철동의 한국기원에서 정근상의 물망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신의 그 수더분하고 후더분한 품성과 여유작작한 풍신을 바둑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생의 문학에 대한 신념은 만패불청이다.’ 이문구)

▶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칼럼니스트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꽉 찬 삶을 살아 오셨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열정과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시가, 때로는 지겹지 않습니까? 등단이 1956년이면 시와 더불어 벌써 46년인데…… 혹 생존하는 시인 가운데 시력詩歷으로 치면 선배가 거의 없는 셈 아닌가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 김남조, 김춘수, 조병화, 황금찬, 홍윤숙 선생들이 계시죠.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시는 어떤 면에서 그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입니다. 시라는 것이 사회 요청에 대한 응답이라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그 시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민주화 운동 비슷한 것에 참여하게 된 이유지요. 만약 시인이 직관력과 감성이 뛰어나고, 그러한 점이 남하고 다르다면 시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남에게 먼저 말해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입니다. 알려주는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요. 나는 시가 사회 정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시는 항상 올바른 소리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기도 해야 한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시가 올바른 소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객관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지식인은 사회정의를 우선해야 할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을 방문한 귄터 그라스를 보면서 좌파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상업주의의 월드컵에 와서 축시를 하는 것을 보고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너무 정치적인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대표적 민중시인 혹은 참여시인의 한사람이라는 세평을 얻은 신경림의 시편이 당대의 선행 시편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대범하게 말해서 5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추문화醜聞化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경림의 작품인 「겨울밤」의 경우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방치되어왔던 소재를 깔끔하고 환정喚情적으로 정리해놓은 작품 성취의 단아함이다. 작품의 됨됨이에 굳이 구애받지 않으련다는 듯이 공적 감정이나 도덕적 열의를 앞세워 자칫 복음주의적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일종의 부재증명 작성으로 끝나는 것이 지난날 현실주의 지향의 시들이 공유하고 있던 취약성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위의 작품 「겨울밤」은 도전이자 하자보수모형이 되어준 것이다.’ 유종호)
(※ ‘저는 신경림 선생님의 「농무」를 비롯한 뛰어난 민중시들을 그냥 단순히 사회시의 부활로만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생님 시와 아류적인 사회시들을 구분하는 점이 되겠지요.’ 최원식)
 


● 문학은 문학이어야 한다
▶ 그 오랜 세월을 시를 쓰고 살아 오면 때로 시가 지겨울 때는 없습니까?
“굳이 그렇게 말해보라면 80년대가 제일 지겨웠습니다. 시인이 시를 안 쓸 수는 없고 쓰긴 쓰는데 사회적으로 요구가 많다 보니, 즉 노동과 통일을 주제 삼아야 한다는 강압적 분위기가 있다 보니 시 쓰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가 시적 성취도가 가장 떨어져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그때 민요기행을 내기도 했지요. 시가 지겹고, 그 때문에 빚어진 영향도 있었기 때문에 민요를 통해 내 시의 새 축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내 시의 출구가 없으니 출구를 찾자는 의미도 있었구요. 그 뒤 90년대 들어와 시를 편하게 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시도 좋아지고 내 자신도 즐거워졌습니다. 시는 시여야  되고 문학은 문학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러자 후배들이 나보고 ‘문학주의자’라고 비난하더라구요. 그런 것을 극복하는 데, 아니 비켜가는 데 민요기행이 한몫했습니다.”(※ ‘신경림 시의 특장인 평명성平明性도 우의적인 시에서는 취약성으로 역전될 공산이 크다. 교훈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서정적 투명성과는 달리 우의적 명료성은 정서적 전염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유종호)

▶ 등단 직후 십년 동안 시 작업을 쉬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농사, 공사판, 광산일, 장돌뱅이 등등으로 전전했던 것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선택한 바닥의 길이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한 7~8년 했지요.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으로 일부러 그랬던 것이 아니고,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일부러는 할 수 없는 경험을 제대로 경험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지게만 지면 할아버지가 펄펄 뛰고, 나무도 못하게 하고, 논에도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 『농무』 1973년, 『새재』 1979년, 『달넘세』 1985년, 『가난한 사랑노래』 1988년, 『길』 1990년, 『쓰러진 자의 꿈』 1993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년, 그리고 장시 『남한강』을 1987년에 발표했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이해하는 일반 독자들의 뚜렷한 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민중 현실”, “민중 소재”, “민중 가락”이라는 “민중”,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리얼리즘적 표현”입니다.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이 문학연표에 내재적인, 혹은 시 표현기법에서, 혹은 문학관에서, 시를 바라보는 눈에서 어떤 분기점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글쎄. 분기점이라고 꼭 집어 말할 것은 못됩니다. 잘 생각이 안 나는군요. 일관된 입장이 있었다고 봅니다. 다만 시집 『농무』에서 『새재』로 넘어올 때 문학이라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학의 본연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따지고 보면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인식의 문제일 뿐 시 표현에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나의 경우도 어떤 시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쓴 시는 하나도 없으니까. 내 안에서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 재구성해서 쓴 것들이지요. 리얼리즘은 인식의 문제이지 표현의 문제는 아닙니다.” (※ “시에서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문법,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자기 시를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일텐데 그걸 찾으려다 보니까 민요 속으로 들어가서 허둥대기도 하고, 장시에 매달려서 세월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내 시는 어제의 나, 그리고 어제의 내 시와 싸우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신경림)

▶  많은 사람들이 시 「파장罷場」의 첫줄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무릎을 치며 매료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구는 어떻게 얻었던 것이었습니까?
“실제로 그런 것을 느꼈고, 모델도 있습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는 시골에서 노는 총각 건달들이 많았어요. 워낙 취직이 안 됐으니까. 그날도 친구들과 술추렴을 하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앞서 걷는 두 사람을 배경으로 맥반석만한 달이 떠오르는 거예요. 마치 그 사람들이 달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들이 달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광경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인데 내가 가서 꽉 붙잡았지요.”
 

파  장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고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농사를 짓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어떻게 닮았고, 어떻게 다릅니까?
“전혀 다릅니다. 비슷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난 농사 잘 짓는 사람이 시 잘 쓰는 것을 못 봤습니다. 시는 역시 쟁이가 하는 짓입니다. 농민 자신, 노동자 자신을 시의 주체로 주장한 적이 있으나 헛된 소리들입니다. 역시는 프로는 프로입니다.”
 

● 지명수배당하고 붙잡힌 곳이 목계장터
▶ 「목계장터」를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선생님의 시 「목계장터」에 대해, 이시영은 “이 땅의 근대시 개업 이후의 전시사에서도 이만한 가락의 흐름과 언어 울림을 갖춘 시를 찾기는 어렵다. 겨레말의 아름다움을 이처럼 드높은 숨결로 형상화해낸 시를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염무웅은 “어느 한 군데 흠을 잡거나 틈을 노릴 여유를 주지 않는 꽉 들어찬 작품이며, 안에서 솟구치는 정감과 바깥에서 물결치는 가락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 절정적 서정시”라고 격찬했습니다. 이 시에 얽힌 얘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고향 벗어나 큰 마을을 본 것이 목계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른바 강장江場이라는 것이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줄다리기가 유명했지요. 내가 처음 본 대처였습니다. 시골에서 안 살고 그런데서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청주시를 보기 전이었습니다. 내가 한때 지명수배를 당했던 때가 있는데 도망다니다가 어리버리 잡히고 만 곳도 목계장터입니다. 그러나 「목계장터」라는 시 역시 리얼하게 표현한 게 아니고, 상징적으로 내용을 많이 감춘 시입니다. 목계는 나에게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순화의 고장이기도 하고, 또 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목계는 잊어버리고 싶은데 가끔 꿈에 나타납니다. 벗어나고 싶은데, 한 발자욱도 못 벗어나는 곳이지요. 그 정서도 추상적이고 상징적입니다.” (※ “그와 비슷한 예의 하나로 선생은 시중의 추어탕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생이 치는 추어탕은 토방 툇마루에서 민물새우가 끓어넘는 시 「목계장터」의 풍경처럼, 뜰팡에서 뜬숯이 끄느름하게 핀 풍로불로 오갈뚝배기에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찌개를 안쳐서 끓인 것으로, 예전부터 충청도에서 먹어온 시절 음식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동네의 노은장터보다 더 사랑했던 장터는 목계장터이다. 목계나루를 보고 장이 섰던 목계장터는, 노은장터가 광부들의 등골을 빼먹던 장터였다면, 뗏목을 몰려 남한강을 흘러다닌 떼꾼들의 진을 빼먹던 장터였다. 선생은 목계장터를 ‘꿈의 고향’이었다고 말한다. ……이곳은 빗장이 걸린 객주집 앞에 색주가가 열렸고, 주막거리 나그네 드문 봉노방에도 투전꾼이 붐볐다. 또 옛날부터 하던 풍속이라 나루터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궂판이 잦았다. 선생이 꿈의 고향처럼 그리워했던 이유였다.” 이문구)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먼저 시 「노래」를 한번 보겠습니다. 문학평론가 김윤태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계장터」에서 보인 현실성이 힘없는 농민들의 원망이 서린 비가였다면, 「노래」는 김남주에게서 볼 수 있었던 혁명적 낭만성으로 변화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시 흐름에서 70년대와 80년대의 간극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김남주와 나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남주는 혁명적이었던 것이고, 나는 혁명적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겁이 많아 데모할 때도 항상 뒤에 처졌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나는 잘 잡혀 갔습니다. 데모하자고 하면 안 나갈 수도 없어 나가긴 나갔습니다. 겁은 나는데 집에 가서 속으로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안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너무 섬약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노  래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래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진보와 보수의 나눔은 무의미
▶ 현재 한국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선생님의 자리는 어디쯤입니까?
“나는 중도 좌파쯤 될까? 그러나 예술·문화의 영역에서 진보―보수의 나눔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사회가 진보냐 보수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봐요. 그런 것을 피해가면 욕도 먹게 되지요. 그러나 소아병적인 진보주의도, 그러한 보수주의도 문제입니다. 그들은 남을 전혀 이해할 줄 모릅니다. 적어도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그러한 소아병적 입장은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습니다. 주위에서 강요하는 분위기도 문제입니다. 내 친한 친구로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진보적인 주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보수주의적인 입장이 강고합니다. 그는 우파 중에 중도적이고, 나는 좌파 중에 중도적이어서 통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가 간혹 친일파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충청북도에서 유명한 항일운동 집안이기 때문에 가능한 처신입니다. 말로는 반일反日한다는 사람이 옛날 실제 행동에서는 더했던 사람이 많습니다. 유종호는 친일을 어느 정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향에서 가장 존경받는 집안 사람입니다. 유종호에게는 동생이 있는데 그는 상당히 진보적인 민주교수협회를 이끌고 있는 유광호 교수입니다. 그에게 형이 보수주의자라고 말해주면 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나는 유종호와 함께 대학시절 하숙을 했습니다. 그가 나보다 한 살 위인데 그냥 말을 텄습니다. 싸움도 많이 했지요. 가령 밥 먹은 후 누가 상을 내갈 것인가로 다퉜습니다. 그는 집이 유족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이웃을 참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때부터 이어 내려온 습관입니다. 지금 보면 남을 위하는 마음 없이 진보주의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을 위해 손끝 하나 까딱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종호 같은 사람은 진보주의가 말로 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노무현 씨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는 것도 나는 이렇게 봅니다. 그 사람을 내가 잘 모르지만, 진보를 위해 몸바쳐 일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실망이 있는 것입니다.”

▶ 오늘을 기점으로 지난 1주일 동안의 행적을 소상히 좀 밝혀 주시겠습니까?
“아침엔 대개 6~7시쯤 일어납니다. 월요일은 강원도 원주시에 MBC가 주관하는 행사강연을 다녀왔습니다. 문학강연이었는데,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화요일은 동국대에서 종강 강의를 했습니다. 동국대에 내가 석좌교수로 있는데 지난 학기는 1주일에 3시간씩 강의했습니다. 시창작 강의입니다. 수요일은 그냥 집에서 글쓰면서 푹 쉬었습니다. 목요일은 6·13 총선 투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는 김지하와 같이 밥 먹었습니다. 김지하와 친합니다. 일산에 있는 찻집이었는데 그냥 잡담했습니다. 금요일엔 도스토예프스키를 제대로 섭렵해볼 요량으로 전집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집어든 책은 『카라마조프네의 형제』입니다. 죽을 때까지 다 읽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은…… 뭐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이때 질문자가 끼어 든다. 혹시 데이트했던 것은 아닙니까? 그의 얼굴은 붉어진 듯했으나 술 때문인지 정곡이 찔렸기 때문인지 불분명했다.) 일요일은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작가회의 후배인 시인 장대송의 결혼식이었는데 유종호가 와서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 왔습니다.”

▶ 가족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두번째로 만난 아내와 2년 전 헤어졌습니다. 아마도 김형이 우리 집에 전화했을 때 여자가 받았다면 내 누이동생일 겁니다. 첫아내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큰아들 병진(37)은 컴퓨터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다음이 딸아이 옥진(33)이고 사위는 지금 《여성동아》 최호열 기자입니다. 나도 그렇고 딸네도 정릉에 살고 있지요. 그래서 외손주(최헌·8)가 일주일이면 사나흘은 나한테 와서 같이 점심도 먹고 놀기도 하고 그래요. 막내 병규(33)는 한국통신에 다니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4남 2녀 중 장남입니다. 둘째는 미국에 가서 살고 있고, 셋째는 여수에서 살고, 넷째는 미국 메릴랜드 대학 교수인데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 혼자 사시면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아침은 빵이나 계란으로 합니다. 점심은 손주와 같이 먹지요. 저녁은 밖에서 먹는 때가 많고, 또 요즘 인스턴트 식품이 워낙 좋아서 별 애로 사항이 없어요. 내가 정릉에 있는 단독 주택에서 17년을 살다가 최근 어머니를 여의고 6개월 전에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더니 지금은 편하고 좋아요.”
 
● 올 10월 프랑스 정부 초청 여행
▶ 앞으로 계획을 들려 주십시오.
“7월에 시집이 나올 예정입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뿔』이라는 제목입니다. 9월이나 10월쯤 우리교육에서 『시인을 찾아서』 속권을 낼 예정입니다. 10월에는 프랑스에 가서 한 1주일 머물 예정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시인들을 초청했습니다. 고은, 황동규 씨와 동행합니다. 그리고 8월 중에 경주에 가서 1주일~열흘쯤 머물면서 경주 구경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자세하게 보고 싶습니다. 강석경 씨의 산문집 『능을 찾아서』를 보고 난 후 경주를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로만 우리 거라고 했지, 언제 한번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년에는 여건이 닿는다면 외국에 나가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한 6개월쯤 살았으면 합니다. 중국이나 일본 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손주 녀석 헌이가 보고 싶으면 어떡하나 걱정입니다. 데리고 나가면 안될까?”
 
(※인터뷰가 있은 며칠 뒤 시집 『뿔』을 받았다. 지난 1998년 간행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이후 4년만이다. 정희성 시인은 헌사에서 “이번 시집을 보면서 이분은 천생 떠돌이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는 말이 아프게 와닿는다. 오래 고생을 하셨으니 이제 좀 마음 편하게 사실 때도 됐지 하면서도 왠지 또 그래서는 안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썼다.
신경림은 시집 말미에 ‘시인의 말’을 실었다. “나는 요즈음 시도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고 지나간다. 그래도 시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그냥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2차를 가자고 신경림은 말했다. “우리 어디 가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씩 하고 헤어지지.” 그는 맥주를 고집했다. ‘이제 나이 드니 독주毒酒가 싫어. 부담돼.” 그는 열흘만에 술을 마신다고 하면서도 곧잘 잔을 비웠다. 우리는 인근에 있는 ‘평화만들기’란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월드컵 여파 탓인지 한산했다(월드컵 때문에 잘 되는 집도 많았다지만).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이 자리에서 신경림은 서울시장 후보였던 김민석과 이문옥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혹 비공식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라고 알아 들을까봐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거, 써도 돼. 써.” 이문옥 씨에게 표를 던졌다는 그는 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전부 바쳐서 일한 전력前歷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따라 진보와 보수의 진정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주로 유종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자신은 좌파의 중도이고, 유종호는 우파의 중도이기 때문에 서로 상통하는 바가 많다고 했다. 유종호와 그는 고향이 비슷하고, 또 대학시절에 같이 하숙을 했기 때문에 오랜 친구 사이다.

신경림은 오래 전부터 컴퓨터로 시 작업을 하고 있다. 1988년, 당시 박태순 씨의 권유로 이문구 염무웅 이호철 씨 등과 함께 최첨단 워드프로세서인 대우 ‘르모’로 시작했다.
신경림은 자천自薦 자작시 5편을 소개했다. 「파장」 「농무」 「목계장터」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떠도는 자의 노래」이다. (※이곳에 인용된 말들은 구중서·백낙청·염무웅이 엮은 『신경림 문학의 세계』(창작과비평사, 1995)에서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본 기사는 과거 계간 시인세계에 실렸던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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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저널 21 http://www.mhj21.com/sub_read.html?uid=21926§ion=section37§ion2=[시인세계]ZOO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