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로, <언어의 질감(質感)과 뉘앙스>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모든 시인들은 자신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잠시 그런 욕망을 덮어두고 우선 언어를 <사물>로 보는가, 자기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언어를 존재체(存在體)로 본다는 사람들은 어떤 표제어(標題語)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따른 하위 의미를 나타내는 말들을 열거한 다음 그 말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배경>을 거느리고 태어났으며, 그 말을 제시했을 때 그 옆에 어떤 사물들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가, 그리고 그런 풍경 속에 그 말이 지시하는 사물들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가령 '길'이라는 어휘만 해도 그렇다. '길'의 종(種)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도로', '신작로', '아스팔트 길', '인도(人道)', '차도(車道)', '페이브먼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다 같이 길을 지시하는 말이라도 탄생된 배경과 거느리고 있는 풍경이 다르다.
'길'이란 '산'이나 '언덕' 또는 '골짜기' 같은 것들과 구별하기 위한 표제어이고, 아마 언어의 탄생과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난 통로를 말한다. 이에 비하여 '도로'는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통로이고, '신작로'는 우리 나라의 경우 일제시대 만들어진 길로서 굵은 자갈이 깔려 먼지가 풀석풀석 나는 길이고, '아스팔트'는 60년대 이후 포장된 길이고, '인도나 '차도'는 도시의 소음을 거느리고 있으며, '페이브먼트'는 화강암을 네모나게 잘라 깐 서양의 중세 도시 감각을 지닌 어휘이다.
그런데, 이런 어휘에 다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화자의 심리 상태>를 첨가하면 또 달라진다. 다 같은 '아스팔트'라고 해도 비오는 날과 햇살이 쨍쨍 내려쬐는 8월 한낮의 아스팔트가 다르고, 비오는 날의 아스팔트도 무더위 끝에 소나기가 한 줄금 쏟아지는 아스팔트와 비에 젖은 가로수 이파리들이 쓸쓸하게 구르는 아스팔트가 다르고, 또 애인을 만나러 갈 때와 그로부터 헤어지자는 제안을 받고 돌아설 때의 아스팔트가 다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인들은 표제어나 종(種) 또는 유(類) 개념의 어휘를 구사하는 데 그치고 있기에 질문해 본 것이다.
여덟째로, 우리말에서 <리듬의 자질>이 무엇인가, 또 자기 시에서 <행(行)과 연(聯)>은 어떤 기준으로 나누어 왔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우선 우리말에서 리듬의 자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흔히 리듬은 운율(韻律)을 좀 풀어헤친 '내재율(內在律)'이라고(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기로 하자.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아마 이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이 막힐 것이다. 하지만, 리듬이란 '운'이나 '율'과 같은 물리적 음성 현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현상으로서, 텍스트의 조직에 참여하는 모든 요소들, 그러니까, <의미론적>·<통사론적>·<어휘론적>·<음운론적> 층위들을 비롯하여, 형태적 자질들이 이루어내는 질서감을 말한다. 그러므로, 운율의 입장에서 따지려는 것은 음운과 통사의 두 층위만을 염두에 둔 정형율적 발상이고, 내재율이라는 설명은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그 다음, 연과 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연의 유형은 <비연시(非聯詩)>와 <연시(聯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행의 유형은 ①<시행(詩行)=율행(律行)>, ②<시행≤율행>, ③<시행≥율행>, ④<산문시행>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시를 쓸 때, 화제에 따라 유형을 달리 선택하는가, 언제나 같은 유형을 선택하는가를 따져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화제에 따라 달리 선택한다면, 각 유형에 따라 채택했던 화제의 성질을 말씀해 보시기 바란다.
아마 대부분의 시인들은 머뭇거리면서 '시란 이론으로 쓰는 게 아니야. 그냥 그때 기분에 따라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연과 행은 기분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조와 리듬을 형성하는 장치로서, 숙고(熟考)되었거나 의미 단락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화제일 경우에는 연시 형식을, 순간적으로 떠올랐거나 비일상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화제일 경우에는 비연시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행의 설정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시행=율행>으로 나눌 경우에는 시행대로 읽는 것이 곧 율행대로 읽는 것이 되어 원활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시행≤율행>은 율행대로 읽으려는 관성으로 인하여 다음 시행의 일부를 끌어올리려 읽기 때문에 빠른 느낌을 주고, <시행≥율행>은 율행만큼 읽고 나머지는 끊어 읽기 때문에 치드런거리는 느낌을 준다. 또, 우리말은 음보(音步)와 음보의 대응(對應)에서 임의적 강약율이 형성되고, 제1음보의 마지막 음절과 제2음보의 첫음절에 임의적 악센트가(를) 부여된다. 그러므로, 둔중하고도 우울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말을 질질 끌 듯이 시행도 율행보다 크게 잡아야 하며, 원활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균등하게 잡고, 경쾌한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짧게 잡는 것이 훨씬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다급하고 혼란스러운 정서를 표현하려 할 때에는 불규칙하게 잡고, 제시한 어휘나 구절을 강조하려 할 때에는 강조할 말에 악센트가 가도록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어느 한 요소가 탁월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탁월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완벽한 구조와 조직을 갖춘 작품을 써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시인으로 존재하는 목적을 다 완수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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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로, 이런 점을 고려하여 쓴 작품이 과연 유기적(有機的)인가를 따져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영미 신비평(新批評)에서는 '생명체'와 동의어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나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시스템(system)'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 치차(齒車) 하나가 돌아가면 나머지 치차가 돌아가듯이, 또는 손톱 밑에 가시가 들면 겨드랑이 밑 임파선이 부어 오르듯이, 어떤 어휘를 택하면 그에 따라 문장도 단락도 플롯도 인물도 바뀌어야 하고, 반대로 어떤 인물을 선택하면 그를 둘러싼 배경과 상황에서부터 음운조직까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념적인 기준으로는 따지기 어려우니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화자를 중심으로 화자와 화제에 어울리는 배경과 상황을 부여했는가, 그런 상황에 부딪힌 화자가 무엇부터 말하고 싶어할 것인가, 그에 어울리는 비유적 구조를 취했는가, 화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경화시켰는가, 그에 어울리는 어휘를 선택했는가, 그 어휘의 의미와 뉘앙스가 일치하는 음운조직인가를 살펴보는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 열 번째로 내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나는 커다란 야심이 없이 쓰는 것이 즐거워 그냥 쓰여지는 대로 쓸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이 질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공적이며 사회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혼자 읽거나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동인회를 조직해서 돌려 읽을 게 아니라면 통시적(通時的)으로 그리고 공시적(共時的)으로 자기 작품이 어떤 변별성을 지녔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시인들 전체는 세계 문학 가운데 우리 시가 어떤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열 가지 문제를 검토해본 시인들은, 그렇다면 시란 시론을 공부한 사람만 쓰란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네 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건방을 떠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첫 번째 이의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책에 대해서는 '죄송스럽습니다' 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대와 동시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고, 그 작품이 좋다면 왜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자기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감수성과 문학관을 경신하라는 권유일 뿐이다.
문학 작품은 이론대로는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자기 작품 가운데에 어떤 요소가 모자라고 과잉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가다듬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시를 쓴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재검토하고 또 새로운 시학의 수립에 전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빈다.
'자기 시를 검토하는 열 가지 기준' 부분 / 윤석산
출처 / 우리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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