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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생태시와 생태주의 시학

by 丹野 2009. 8. 17.

     

 

 

월간 《시문학》2008년 7월

 

 

            특집/ 대담(對談) 생태시와 생태주의 시학” / 신진 . 송용구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걸쳐 환경파괴의 심각성과 더불어 ‘생태시’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습니다만, 이 장르는 많은 문제점을 내표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의 중요성을 화제로 신진과 송용구 두 시인의 이메일 대담을 마련했습니다.

송용구(1965~ , 고려대 독문학과 연구교수) 시인은 독일 생태시를 번역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시문학사, 1998)를 비롯하여 「독일의 생태시」(1995) 등 많은 논문과 작품을 발표하여 이 방면의 대표적 선구자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한편 신진(1949~ , 동아대 교수) 시인은 시집 <강>(시와 시학사, 1994)을 비롯하여 많은 시집을 상재했지만, 특히 시집 <강>에 수록된 일련의 리얼한 생태시는 생명존중과 환경보호 문제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두 시인은 생태주의의 ‘시적 복음(福音)’의 중심점에 서 있는 사도적(使徒的) 에콜로지 시인이라고 할까요. 다음과 같은 화제로 두 시인의 대담을 마련합니다.  - 편집자.

 

(1) ‘생태시’(生態詩)의 지향점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송용구: ‘생태시’는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한 현대인들의 의식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태시’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불러 일으키는 정치적 원인 및 사회적 원인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의 비판의식을 일깨우려는 목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생태시’를 ‘정치시’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생각하는 ‘생태시’의 지향점을 네 가지로 제시해보겠습니다.

 

첫째, ‘생태시’는 자연과 인간의 생명이 파괴되어가는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둘째, ‘생태시’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생명파괴의 원인을 찾아내고 규명합니다.

셋째, ‘생태시’는 환경오염의 원인들을 비판하면서 그 원인들에 대한 개혁과 극복을 호소합니다.

넷째, ‘생태시’는 현실극복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간의 상생(相生)이 이루어지는 대안사회를 모색합니다.

 

제가 제시한 ‘생태시’의 4가지 지향점을 놓고 볼 때, ‘생태시’는 자연의 생명력을 객관적으로 진단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사실적으로 인식하는 문학입니다. 또한, ‘생태시’는 생태계 파괴의 원인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 간의 상생(相生)의 출구를 모색하는 사회참여의 문학으로 볼 수 있겠지요. 미국의 생태철학자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생태문제는 곧 사회문제”라고 말하였듯이 ‘생태시’는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 정치의 현실을 비추어보고, 언어의 청진기로써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진단하고자 합니다. 정치 및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환경오염의 원인들을 찾아내려는 시인들의 현실인식이 ‘생태시’의 사회참여적 지향성을 확고히 노정(路程)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진 : 서구의 기계론적 과학과 자본주의는 지난 몇 백 년 동안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지배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해왔습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과학지식과 기술의 힘으로 지구를 통제했을 뿐 아니라 미립자 세계와 인간생명, 우주 세계마저 통제하려 들 만큼 거대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번영과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만 자연훼손으로 인한 이웃생명의 상실감과 위기의식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들 실감하시는 바이겠습니다만 축복이 저주의 형상으로 얼굴을 바꾼 것입니다. 공기와 하천, 바다와 하늘의 오염, 자원고갈과 지구의 온난화 그리고 기상이변 등 탐욕 어린 개발과 소비가 불러온 재앙들은 어떤 과학기술로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을 백팔십도 전환하지 않는다면 1천년 내에 자연과 인간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은 공상과학이 아닌, 실제 상황에 가까운 일이 되었습니다. 자연을 오직 인간의 기술적 조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갖은 재앙에 직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여 진정한 관계를 찾으려는 것. 다시 말해 왜곡된 근대적 삶의 양식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에 자연을, 자연에 인간을 포괄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생태주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고, 생태시는 이를 시적으로 실천한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은 1990년대 들면서 본격적으로 파급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들어 생태의식을 담은 시, 소설, 비평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에 동감합니다. 시 장르에서 가장 선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 장르의 순발력과 시인의 섬세한 촉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정시 자체가 본원적으로 역동적 생명력의 소산이자 그를 지향하는 유기성을 지향점으로 하기 때문일 터입니다.

 

이렇게 보면 생태시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 자아와 세계의 합일, 세계와 세계의 합일을 지향하는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를 총체성, 유기성을 가진 것으로 형상화하는데, 이는 서정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와도 맞닿은 지점이라 하겠습니다.

 

(2) 생태시가 가지는 문제점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송용구: ‘생태시’의 문학적 수준은 한 차원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술방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미학적 장치 혹은 예술적 기교가 매우 부족한 ‘생태시’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생태계 파괴의 실상이 은폐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인들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비유, 상징, 수사(修辭) 등을 풍부하게 가미할 경우에 환경오염의 실태를 독자에게 알리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들의 편견이 아닐까요? 예술성과 미학을 포기한다면 ‘생태시’의 교육 목적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자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파수꾼이 되게 하려면 독자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언술방식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생태시’에서 도외시되었던 미학적 언어와 예술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은유, 상징, 수사(修辭), 리듬, 음향 등은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낼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시’를 쓰는 작가들은 자연의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메시지의 예술적 표현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인식과 정서적 감동이 결합될 때에 독자의 저항의식도 강화될 수 있을테니까요.

 

신진: 생태시가 다른 시에 비해 특별한 문제점을 지닌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름의 딜레마가 있다면 생태주의 사유체계와 문명사회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요즈음의 인간은 결실을 얻기 위해 계절적 생산주기를 지키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배아복제를 통해 불로장생을 꿈꾸기도 하는 정도로 편의성과 풍요로움에 길들여져 있지 않습니까. 이 손쉬움과 풍요로움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생태주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인간이 지금부터 과거를 반성하고 자연의 일부로, 겸허한 태도로 존재하겠다 하더라고 어느 정도는 문명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싫든 좋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문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문명은 인간의 생태적 속성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어떤 생물․ 무생물을 어느 정도 보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상존합니다. 생태의 세계를 염원한다 할지라도 그 지경과 기준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에 한정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문제는 시인의 개인차를 허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파리나 모기, 들쥐 같은 동물들의 생명도 존중하면서 공생할 것인가, 손바닥이나 몽둥이로 퇴치할 것인가. 보다 화학적인 과학으로 퇴치해야 마땅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개인차가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시 창작상의 문제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근대시가 제고하여온 미사여구나 기법적 장치들을 생태시는 어느 정도 허용하고 어느 정도를 버려야 할 것인가. 시에 있어 어디까지가 조작적인 장치이며 어디까지가 인간의 생태에 준하는 진솔한 언어인지. 아니 도대체 시라는 장르 자체가 인간의 생태적 정신을 자동화하고 조절하는, 작위적 문화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나 아닐지. 고민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의 발상과 상호간의 교환은 분명 인간 본래의 생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연발생이 아닌, 기술과 전략으로 오염된 시를 거론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이고 그 기준을 마련하는 일도 지금으로서는 극히 어렵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의 개인적 고민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생태문제에 고민해본 시인들에게는 응당 고민을 주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튼 문명을 등진다거나 생태환경을 복원한다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생태시는 끝없는 탐색만이 반복되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유와 인식과 가치관의 혁명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언제나 이상일 수밖에 없는, 추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3) 생태시의 방법이나 기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송용구: ‘생태시’의 사회적 역할은 생태파괴의 원인들에 대하여 독자의 비판의식을 이끌어내고 독자와 시인 간의 연대의식을 유도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시인들은 독자에게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인류의 파멸을 경고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독일어권 지역의 ‘생태시’에서 르포, 다큐멘타리와 더불어 묵시록(黙示錄)의 언술방식이 자주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르포와 다큐멘타리는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될 수 없는 비문학적(非文學的) 언술방식인 까닭에 예술성과 미학을 포기하는 문학적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육적 효과를 높이는 데 주력하다 보니 예술성이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시인들은 ‘묵시록’이라는 언술방식을 사용하여 미학적 실험을 꾸준히 시도하였습니다. 생태시의 예술성을 회복하고 현대시의 영역 안에서 미학과 교육을 조화시키는 작업을 강화해나갔습니다. 랄프 슈넬(Ralf Schnell)이 언급했던 “미학의 저항”을 실현하는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의 묵시록과 ‘생태시’의 묵시록은 그 의도와 성격에 있어서 상이합니다. 종교의 묵시록이 인류의 종말을 선포하는 ‘예언’ 그 자체에 내용의 중심을 두고 있다면, ‘생태시’의 묵시록은 교육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언어적 수단으로써 ‘예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시인 귄터 쿠네르트(Günter Kunert: 1929~생존)의 「라이카」는 ‘묵시록’적 기법을 사용한 대표적 ‘생태시’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가장 좋은 금속으로 만든/ 공 안에서/ 죽은 개 한 마리/ 날마다 우리의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 우리가 소유한 가장 좋은 위성/ 지구가/ 어느 날 저렇게/ 죽은 인류를 싣고/ 해마다 태양 주변을/ 돌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내면서.”

- 귄터 쿠네르트의 「라이카」전문.

 

1957년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를 인공위성 ‘슈프트닉 2호’에 태워 역사상 최초로 우주 공간에 생명체를 띄워 보냈던 사건이 시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지구의 종말을 나타내는 은유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개’를 싣고 ‘지구 주변을 도는’ 인공위성은, 멸망한 인류를 싣고 ‘태양 주변을 돌게 될 지도 모르는’ 지구의 은유인 것입니다. 시인은 ‘죽은 개’를 통해 ‘죽은 인류’의 미래를 예언함으로써 ‘지구’의 죽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위성’이었던 ‘지구’ 안에서 모든 생물들이 시체로 변해버리는 종말의 상황을 ‘묵시록’적 기법으로써 묘사한 것이죠. 이러한 묵시록적 기법은 한국 시인들의 ‘생태시’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이 일어날 때의 시간인데도/ 산의 그늘만이 길게 뻗쳐 있다/ 햇빛이 해골의 눈 속을 통과하여/ 바람이 불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구는 혼자 외로이 겨울을/ 빠져나가면서 공중에 떠 있을 뿐/ 인류는 모두 어디에 갔는가/ 빈 지구만이 태양을 돌면서 또/ 태양은 지구를 데리고 멀고도 먼/ 움직이는 우주를 따라가는 은하/ 그 은하계를 따라 사라져 간다/ 지구는 모든 조상의 묘를 싣고/ 밤과 낮을 끊임없이 통과하리라” - 고형렬의 「지구墓」 전문.

“인간도 언젠가는 멸종하리라는 것/ 그 숱한 생명체들을 멸종시킨 죄로// 지구는 도는데 나는 사라지고 없으리/ 지구는 도는데 나는 무덤속에 누워 있으리/ 지구는 도는데 나는 흙먼지가 되어 날리고 있으리/ 언젠가는 반드시” - 이승하의 「생명체에 관하여」 일부.

 

귄터 쿠네르트의 「라이카」에서 묘사되었던 ‘죽은 인류’의 공동묘지인 ‘지구’를 고형렬과 이승하의 시에서 또다시 만나게 됩니다. ‘지구’는 인류의 ‘해골’과 ‘멸종’된 ‘생명체들’을 싣고 ‘태양’ 주변을 도는 거대한 ‘묘(墓)’로 전락하리라는 예언이 한국 시인들의 목소리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시인들의 비관적인 목소리가 슬픔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이처럼 비관적인 예언은 현대인들을 향해 ‘경고’의 옐로우 카드를 뽑아들어 ‘종말’을 막아내자고 호소하는 반어적(反語的)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묵시록적 표현기법에서 나타나는 ‘반어’의 기능이 독자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효과를 증폭시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진: 생태시라 해서 특별히 다른 방법이나 기법으로 창작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태시는 순수시(pure poem)라기보다 의미전달의 의도를 가지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100년 전의 아방가르드들처럼 내면의 음성, 본래적이고 역동적인 음절 배열의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느 시처럼 묘사적일 수도 있고, 서술적일 수도 있고, 풍자ㆍ비판적일 수도, 긍정ㆍ낙관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단지 시적 사유와 표현상의 진정성과 긴장성이 문제될 뿐입니다.

 

저 개인적인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자연생태적 언어를 위하여 가능한 한 이미 세속화된 기법이나 표현방법을 버리고, 수식어는 물론 텍스트의 언어를 최소화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노자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배움을 더하면 나날이 더해가지만 도를 행하면 매일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 무위에 이르게 된다.(僞學日益, 爲道日損. 損至又損, 以至於無爲.)”고 합니다. 의도적인 학습으로 익힌 전략보다 무위적인 표현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원래적 생태에의 꿈은 무엇보다 탐욕 버리기에서 비롯되듯 그를 향한 시 쓰기에 있어서도 가장 생래적이고 절제된 언어를 쓰는 것이 옳겠다 싶은 것입니다.

 

현실생활에서도 가능한 한 문명의 이기와 명리(名利)를 위한 전략을 버리고자 노력해야하듯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특정 문예사조를 고집하거나 그 제작 방법을 빌어와 써먹는 데서 위안을 삼는 일은 작위적인 허세요, 장식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하나 생태시와 관련하여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점은 생태주의 담론이란 계층간 억압과 수탈의 문제와도 긴밀히 얽혀있다는 것입니다. 여성문제, 빈부의 문제, 제3세계와 같은 국가간의 문제, 인간의 욕망과 지배/피지배와 관련한 문제 등이 얽혀있습니다. 따라서 생태시는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혁에 확고한 신념의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라야 생산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회적 상상력과 생태적‧ 본원적 상상력 사이의 긴장 위에서 우러나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4) 한국의 생태시의 계보나 중요한 생태시인들의 작품 경향을 말씀해 주세요.

 

송용구: 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의 시단에서는 전통적 서정시풍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박두진의 시집 『인간밀림』,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등 소수의 작품만이 생태의식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도 이하석, 이건청 등 소수의 시인들만이 환경오염의 문제를 작품의 소재로 수용하였을 뿐,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현상은 1960년대 이후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이 안고 있었던 군사정권하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말 이후에 비로소 국민들은 환경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지요. 이 시기에 군사정권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언론 통제와 여론 조작이 다소 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폐되어 왔던 환경오염의 현상들이 속속 드러나는 분위기를 따라 한국 문단에서도 생태계의 위기를 경고하는 작품들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생태시’의 창작과 문학적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범문단적 문학운동으로 상승하진 못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작과 평론 양 분야에서 생태문제에 대한 문인들의 공감대가 확산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문학의 풍토를 반영하듯, 1991년에 시인 고진하와 평론가 이경호가 엮은 생태사화집 『새들은 왜 녹색별을 떠나는가』(다산글방)의 출간은 ‘생태시’ 가 한국 문단에서 현대시의 조류를 형성하는 데 큰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화집의 출간이 자극제가 되어 지금까지 환경오염의 문제를 소재로 다룬 시집들이 지속적으로 문단에 반향을 일으켜 왔습니다. 생명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는 김지하의 『중심의 괴로움』․고진하의 『우주배꼽』, 생존의 위기의식을 일깨우는 이선관의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 고형렬의 『서울은 안녕한가』․최승호의 『세속 도시의 즐거움』․이승하의 『생명에서 물건으로』․신진의 『강』․강남주의 『흐르지 못하는 강』 등의 출간은 생태문제를 문학의 테마로 다루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증시켜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들어 《시문학》, 《현대시학》, 《현대시》,《시와사람》, 《시와생명》등 각종 시전문지들이 ‘생태시’에 관한 창작과 평론 특집을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저는 문예지들의 ‘생태시’ 특집을 읽어가면서 한국의 참여문학의 성격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생존권을 유린하는 지배세력에 맞서 싸우던 1990년대 이전의 참여문학이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파괴하는 사회적 요인들에 대해 저항해야만 하는 새로운 참여문학의 유형으로 바뀐 것입니다. 참여문학의 성격을 변화시킨 가장 큰 이유는 자연과 인간의 공생(共生)을 지켜내야 한다는 작가들의 위기의식이었죠. 고형렬의 다음과 같은 시작품은 생존의 위기에 대한 작가들의 연대의식을 반영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거대한 하수구이다/ 저 팔당 아래에서부터/ 저 아래 성산다리 행주다리까지는/ 드넓은 쓰레기의 강이다// 한강은 강이 아니다/ 그저 우리들의 오물을 실어나르는/ 콘베이어 벨트다/ 잠실에서 난지도까지는// 한강은 죽었다/ 그것은 내장이다 죽어서도 우리들의/ 삶을 옮겨다주는 물체다/ 눈 먼 마음이다// 복개하지 않은 거대한 하수구/ 한강은 흐르고/ 한강은 멈추지 않아도/ 서울에 와서 죽는다.”- 고형렬의 「한강 下水」전문.

 

고형렬의 생태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앙갚음을 가하는 복수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생명의 젖줄로 예찬 받던 ‘강’은 어제의 ‘강’이 아닙니다. 외관상으로는 생명의 자양분을 실어 나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들의 ‘오물’과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콘베이어 벨트’로 변한 것입니다. ‘강’을 죽음의 ‘하수구’로 타락시킨 ‘오물’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현대인들의 물질적 욕망이 아닐까요? 시인은 생태계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인간의 물질적 탐욕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한강은 멈추지 않아도 서울에 와서 죽는다’ 라는 발언은 자연의 보복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우리의 현실을 암시합니다. 최승호의 생태시는 생태계 파괴로 인하여 자연과 인간에게 닥쳐온 위기상황을 더욱 충격적으로 재생해주었습니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최승호의 「공장지대」 일부.

 

최승호의 생태시는 독일의 시인 위르겐 베커가 말하였듯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을 증언해주었습니다. ‘산모’의 모유는 아이를 키워낼 수 있는 생명력을 상실해버린 모유입니다. 중금속으로 오염된 강물처럼 철저히 변질된 모유입니다. 시인은 이 객관적 사실을 독자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자에게 충격을 안겨줌으로써 의식을 각성시키는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모유’를 ‘허연 폐수’로 변용(變容)시켰습니다. 생명을 이어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탯줄이 생명의 연결고리로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탯줄을 ‘비닐끈’으로 변용시킨 것입니다. 최승호의 생태시는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면서 생명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생태시’의 교육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고형렬, 최승호 등의 생태시에서 노출된 자연의 실체는 위르겐 베커의 말처럼 철저하게 “망가진 자연”입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로 변한 것이 아닐까요?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까지 읽혀졌던 시가 ‘한강’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찬가였다면 오늘부터 읽어야 할 시는 ‘한강’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悲歌)가 되겠지요. ‘자연시’에서 ‘생태시’로 변이(變異)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신진: 저로서는 난감한 질문입니다. 저는 아직 한국 생태시의 계보나 중요 시인을 거론할 만한 독서나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대다수 시인이 생태주의적인시를 몇 편씩은 쓰고 있는 현실에서, 극히 제한된 수의 독서에 만족해온 제가 한정된 몇 몇 시인을 거론한다는 일이 마땅해 보이지도 않고요.

 

오래전에 「녹색시와 그 가설적 유형」(『시문학』,1995.5)에서 유형을 분류해본 적은 있으나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서 해석의 4유형에서 빌어온, 함축적인 의미전달시의 언술적 장치에 관한 가설일 뿐 생태시의 계보학적 고찰을 위한 것은 못된다 하겠습니다. 근래에 생각하기는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생태시’ 즉 생태주의(ecologism) 시는 다시 좁은 의미의 생태시, 생명시, 환경시, 자연생활시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는 우리나라 생태시의 계보를 마련하는 데에도 유용한 기본항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는 했습니다. 이중 생태시는 인간중심적, 개발위주의 사유를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환경의 유기적 관련성을 찾습니다. 자연 혹은 우주적 현상의 생태 질서와 정신과 미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생명시는 일체 사물의 생명성, 생명 현상의 존귀함과 본질과 가치를 추구한다 하겠습니다. 환경시는 문명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파괴에 따르는 소외감과 위기감을 통해 생태회복을 지향하는 시로 생태적 환경 개선을 목표로 한다 할 수 있습니다. 자연생활시란 제가 설정해본 생태시의 한 갈래입니다. 생태시란 추상적인 차원에 머문다기보다 실제 실천에 의해 그 진정성이 고양되지 않겠습니까. 자연 또는 전원(田園)에 완전히 묻혀 살지는 못한다 해도 그 체험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생태시가 실제로 적잖게 발표되고 있고 생태적 감응도 키우고 있습니다. 반세기 너머 전에 있는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같은 데서도 근대적 원형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음풍농월이나 안빈낙도를 추구한 전통적 서정의 자연시, 회화적 이미지즘 혹은 사물시적인 자연시 같은 데서는 생태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으나 저는 일부 수긍하면서도 이에 견해를 달리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당대적 문명에 대한 회의․ 절망을 딛고 자연 생태의 품에 포용되고자하는 염원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서입니다. 자연시의 관점에서 보면 생태시도 자연시의 범주에 넣어 생태적 자연시라 할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더이상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듯해서 줄이겠습니다.

아무튼 생태시, 생명시, 환경시, 자연(생활)시 등 세 항과 세계에 대한 서정적 반응의 네 유형-대립, 교통(交通), 동화, 거부 등을 이용한다면[문덕수,『시론』(시문학사), 27-29면, 신진,「시의 4유형 고」,『한국시학연구』제16호 참조] 생태시의 계보 파악을 위한 체계를 마련하는 데 참고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생태의식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자아 또는 화자가 현실세계에 대립․ 갈등하는가, 적응을 위해 상호 교통하고 있는가, 세계와 자아가 온전 동화, 일체화 되었는가, 아예 현실을 거부․ 외면하는가에 따라 시적 계보가 나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5) 국내에 소개된 외국의 생태시집이나 논저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저서나 시집의 경우, 출판사와 연대를 밝혀주십시오.

 

송용구: ‘생태시’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단행본은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입니다. 독일 뮌헨 대학교의 ‘정치생태학’ 전문가인 페터 코르넬리우스 마이어-타쉬 교수가 단독으로 편찬한 이 생태사화집은 독일어권 지역의 대표적 생태시집입니다. 1981년에 뮌헨의 체 하 베크(C. H. Beck)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생태시’의 문학적 성격, 주제의식, 언술방식, 사회참여의 양상 등을 총체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시집입니다.

 

저는 이 생태사화집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하여 ‘생태시’의 유형과 성격을 문단에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1995년부터 월간《시문학》지에 6월부터 11월까지 詩論「독일의 생태시」를 5회 연재하였죠. 이 연재 시론에서 저는 두어스 그륀바인, 위르겐 베커, 에리히 프리트 등 독일어권 지역의 대표적 생태시인들과 작품세계를 소개하면서 생태시의 주제의식과 표현방식을 구체적으로 부각시켜 보았습니다. 또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에 실려 있는 약 50여편의 생태시를 우리말로 옮기고 분석함으로써 1998년 1월부터 3월까지 월간《시문학》에 詩論 「독일 생태시의 지평」을 3회 연재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98년 4월 ‘시문학사’에서 생태사화집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의 번역본을 국내에선 처음으로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생태시 206편 중 대표시 50여편을 번역하고 주해(註解)와 해설을 통해 ‘생태시’의 다양한 테마들을 소개해보았습니다. 또한, 개별적인 테마와 언술방식 간의 상관성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어 학술적 가치를 확보하고자 애를 써보았는데 저의 의도대로 독자층에 수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 ‘생태시’에서 드러나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들은 어떤 언술방식들에 의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2. 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실험적 언술방식이 ‘생태시’의 메시지를 파급시키려는 교육적 의도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는가?

 

저는 이 두 가지 관점에 천착하여 ‘생태시’의 테마와 언술방식 간의 상관성을 분석하면서 ‘생태시’와 사회운동 간의 연계 가능성을 전망해보았습니다. 시문학사에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독일의 생태시 1950~1980』을 출간한 이후에도 저는 ‘생태시’의 문학적 함의(含意)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나름대로 의욕을 가지고 ‘생태시’ 평론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왔습니다. 1999년 6월부터 월간《시문학》지에 5회 연재된 시론「새로운 문학운동으로서의 생태시」, 1999년 7월《시와생명》창간호에 발표된 평론 「서유럽의 생태시」, 2000년 2월 월간《현대시》에 발표된 「생명주의와 자연 -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 2001년 《시와사상》지에 3회 연재된 「독일의 생태시와 시론」, 2007년 《시와반시》봄호에 발표된 평론 「독일의 생태시에 나타난 엽기적 묘사와 아이러니 - 한국 생태시와의 비교」등입니다. ‘생태시’가 갖는 참여문학의 함의(含意)를 개방하고 확대하려는 저의 문학적 비전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이었다고 회고해봅니다.

 

신진: 역시 미안하고 부끄러운 답이 됩니다만 저의 독서량은 얼마 되지 않아서 생태시와 관련해서 외국의 시집이나 저서를 통째 읽은 일이 없습니다. 1990년경부터 지금까지 짤막한 북리뷰나 평론 몇 편을 통해서 생태시에 관한 나름의 정리를 해왔을 뿐입니다. 단지 1971년과 2년 사이. 대학 시절의 저는 학보 편집의 일과 데모, 그리고 사회적 갈등에 치여 무척이나 바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낸 편인데 그 와중에 노자와 장자 그리고 불교는 저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존재양식인가 소유양식인가』에도 깊이 젖은 경험이 있습니다. 1974년 저의 『시문학』초회 추천시 <유혹>은 “이젠 오너라/ 잠시 의자를 밀어놓고// 이름 있는 것들의 낭하를 건너/ 이젠 오너라// 올 때는 아무도 더하지 말고/ 강만 보면서 오너라” 하고 시작되어 문명사회를 건넌 자연 속에서 나뭇잎처럼 흔들리기도 하고 음악이 되기도 하라고 권유하는, 생태시적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생각됩니다. 첫시집 『목저 있는 풍경』(1978)도 자연 만물의 생명성과 인간이 교류하는 생태적 질서, 그리고 억압받는 인권에 대한 풍자와 연민으로 엮어졌었는데 저는 당시에 ‘절대의 개체적 자유와 절대의 공동체적 평등이 절대의 질서에 의해 통합되는 세계’를 꿈꾼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면 70년대 젊은이로서의 고통과 비애, 독서 취향을 볼 때 내면에 그럴만한 까닭을 안고 있었다고 자인합니다.

 

제가 생태주의를 직접 거론하는 글들을 본 것은 1990년대에 와서입니다. 지금껏 평론, 논문 몇 편을 읽은 것이 고작이지만 필요할 때 읽어야겠다 하고 메모를 남긴 외국의 생태주의 관련 저서가 몇 권 있기는 합니다. 『시문학』 독자들을 위해 굳이 소개하자면 미적인 것이란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시키는 패턴, 즉 생태적 패턴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것이라 한 예지의 과학자 배이트슨(G.Bateson)의 『정신과 자연』,(박지동 역, 까치, 1990). 환경보호와 함께 사회, 정치적 생활양식에 근본적인 변혁을 전제할 때라야 생태적 삶에 다가갈 수 있다는 관점의 앤드류 돕슨(Andrew Dobson)이 쓴 『녹색정치사상』,(정용화 역, 민음사, 1993). 사회적 실현이란 일대 변혁을 거치지 않으면 생태주의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전제하는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의 철학』(솔출판사, 1997), 그리고 같은 저자의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민음사,1998). 모든 존재들 내부의 영성(靈性)을 인정하는 데서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의 출발을 보고 생태학적 인식을 영적‧ 종교적 인식으로, 나아가 우주적 소속감으로 본 카프라(F. Capra)의 『생명의 그물』, (김용정 역. 범양사. 1998)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6) 생태시 또는 생태주의와 종교(기독교나 불교)의 교리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세요.

 

송용구: 살생(殺生)을 금하고 사람의 식생활에서도 육식을 금하는 등 불교는 자연의 생명권(生命權)을 존중하는 종교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런 까닭에 생태계 파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한 언급은 훗날로 미루고 오늘은 생태파괴의 책임에 있어서 무수한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967년 린 화이트는 자신의 논문에서 오늘날 생태적 위기를 낳은 인간중심주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던 기독교의 성경 창세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린 화이트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 생태파괴와 환경오염의 근본 원인이 기독교에 있다는 견해는 적잖은 동조자들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가 인간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지배적 견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영어 성경과 한글 성경에서 번역상의 미흡함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질적 의미를 재고함으로써 기독교와 환경문제에 관한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대 독일어 성경에서는 기독교의 神이 ‘물고기와 새들과 그 밖의 모든 생물들을 보호할 책임을 너희 인간들에게 맡긴다(Ich vertraue sie eurer Fürsorge an)’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 및 한글 성경과 비교해볼 때 내용상의 상당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의 神은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 대한 소유권을 정당화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주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자연으로부터 가져올 것을 인간에게 허락하면서 동시에 자연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청지기의 권한을 인간에게 위탁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공생의 관계를 유지해나갈 것을 인간에게 명령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상생(相生)의 울타리 안에서 동등한 생명권(生命權)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죠..

 

기독교가 ‘생태주의’적 사고방식을 옹호하고 있다는 견해는 『성경』에서 객관적 근거를 얻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동식물)도 죽음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발언은 독일어 성경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과 의미의 연결성을 갖습니다. 神으로부터 부여받은 청지기의 권한을 망각하고서, 인간이 자연을 노예로 지배하는 주인의 행세를 했기 때문에 자연의 생명이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神은 인간의 손으로부터 ‘피조물들’을 구원하여 이들에게도 영생(永生)의 권한을 인간과 동등하게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연 속의 모든 피조물을 神의 자녀로 인정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생태학적 낙원을 건설할 계획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이사야서 11장 6-9절)

 

이사야서 11장에서 기독교의 神은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는 묘사에서 드러나듯이, 기독교에서 지향하는 이상향은 생태학적 낙원인 ‘에코토피아’와 일치합니다. 에덴 동산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에코토피아’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혜택과 보호를 주고받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1963년에 발표된 박두진의 시 「인간밀림」은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에코토피아를 회복하려는 전망을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암표범이여!/ 내가 너를 사랑하는/ 암표범이여!// 숫사자와 능구리와/ 두꺼비와 독나비/ 모두가 모두 내 새끼 같은/ 내 새끼 같은 사랑이어!// 암표범을 쓰다듬어/ 자장갈 불러 잠재우고/ 숫사자들을 나란히 거느리고/ 산책을 한다.// 능구리와는 햇볕에 누워/ 창세기를 읽고/ 독나비 나래를/ 이마로 먹고/ 폭포 앞에 가/ 씻는다.” - 박두진의 「인간밀림」중에서.

 

신진:  종교는 생태주의적 사유에 다가서는 교량이 되기도 하고, 그 정신적 원천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종교성을 가질 때, 그는 자신을 개인적인 존재에서 사회적인 존재로, 사회적인 존재에서 자연적인 존재로, 자연적인 존재에서 우주적인 존재로 확대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이 우주 속에서 가장 화해롭고 조화롭게 사는 것인가 고민하고 답을 구하고자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지구상의 환경오염과 생태 파괴의 주요 원인인 근대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정신적 근거는 상당부분 기독교에서 제공했다고 보는 견해에도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가 근대의 인간/자연, 주관/객관, 이성/감성, 정의/불의 등 이분법적 합리주의을 이끈 원동력이며, 따라서 생태파괴의 주요원천의 하나란 견해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생명창조 과정-“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의 생력이 된지라.”에서도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관점이 내재되어 있어보입니다만 그리스도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한 데 대한 부작용이라 할만한 것도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신의 권위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위로 전이시킨 나머지 자연을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서구적 사고를 조장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인간의 귀중함에 비해 새나 들풀들의 물권(物權)은 훨씬 격하되고 있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생태주의 세계관에서는 조물주도 피조물도 언제나 이웃일 뿐입니다. 서로가 존중되고 서로가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부여하며 함께 오늘이 되고 내일이 되는 세계입니다. 기독교가 오늘의 화를 자초한 원천의 하나인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생태적 세계관의 제공처요, 그 실천을 독려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도 종교이기에 가능한 역설이라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사상은 바로 부활의 사상이 아닙니까. 단순히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이라기보다 부활의 사상은 이 땅의 삶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 섭리, 구원의 역사를 바탕으로 합니다. 파멸과 타락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신의 창조의 정신-사랑과 구원의 뜻에 비추어 변질되고 타락한 이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훼손된 신성을 이 땅에서 부활하려는 노력이 기독교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원래 현실욕망의 덧없음을 일깨움으로써 버림과 비움의 윤리를 가르쳐 왔거니와 이는 생태주의와 관련, 불교가 보여주는 태생적 미덕이라 하겠습니다. 나누어지고 떨어져 있는 일체의 것이 삼세윤회 속에서 얼기설기 관계 맺어진 존재들이라는 생각은 나와 남의 구별이나, 자아와 대상, 주체와 객체라는, 명료한 이분법적 사고를 애초에 부정합니다. 생명중시 사상은 불살생(不殺生)의 정신으로도 요약됩니다. 불살인(不殺人)이 아닌 불살생입니다. 동양문화의 바탕이 된 불교적 윤리는 애당초 자연생명과 인간 생명의 가치를 차등화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의 존엄함을 가르쳐 왔습니다. 선사(禪師)들은 산하대지와 자연 속의 무수한 무정물(無情物)에게도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진리를 설법하는 존재들로 여겼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닌 하나라고 하는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사

유는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같은 법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생태중심적 윤리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緣起的) 관계성에 눈 뜸으로써 자연 속의 모든 존재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됩니다. 산천초목과 유정물, 무정물이 모두 살아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나무나 돌에도 불성(佛性)이 있고, 무정들에게도 지혜가 있고, 무정들도 진리를 설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불교는 도교와 함께 우리가 오늘날 꿈꾸는 생태주의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하는, ‘버림’과 ‘비움’, ‘낮춤’ 같은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태주의는 삶의 모든 것을 찰나에 지나지 않는 공허(空虛)로 치부하는 데 그치지 않는, 자족과 상생으로 어울린 삶을 지향합니다. 함께 버리고 비우자는 관념이 아니라 그야말로 상생(相生)하는 이웃으로서 살기 위한 실천적인 덕목이라는 점이 유념될 필요가 있다 하겠습니다.

 

(7) 생태시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은?

 

송용구: 21세기에 ‘생태시’는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문학의 형태로 발돌움할 것입니다. ‘생태시’는 서구세계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저개발국을 비롯한 제3세계 내에서도 “참여문학”으로서의 문학적 함의를 갖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저의 이러한 전망에 대해 객관적 근거들을 제시해보겠습니다.

 

저개발국들과 개발도상국들이 서방세계의 군사적 기지로 이용되는 상황 속에서 반복되는 군사훈련과 무기실험 등은 제3세계의 생태계를 크게 위협해왔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바람에 휩쓸려 수많은 약소국가들이 강대국의 문화시장(文化市場)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도 생태계 파괴를 야기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문화’를 상품화하여 제3세계에서 자본주의 시장을 확대하고 저개발국들을 경제적 식민지와 문화적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현상이 ‘신자유주의’의 얼굴입니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격랑은 개별 국가들의 문화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생태계까지도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현시대의 생태문제는 사회문제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주장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견해는 오늘의 지구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만듭니다. 제3세계의 환경오염은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원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생태문제’의 심각성이 완화된 반면에 제3세계 지역의 환경오염은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생태시’는 비서구 사회 혹은 제3세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생태문제’들을 창작의 소재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화’의 폐단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문제’가 각국의 생태계 파괴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테마의 범주를 이전보다 더 폭넓게 확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견을 들려주신 신진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신진: 현대사회는 수행성과 효율성을 기분으로 인간을 판단하고 서열화합니다. 그로써 개인적․집단적 경쟁력이 평가되는 사회입니다. 시민들의 생태 환경의식이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는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 복제를 위한 은밀한 경쟁에서 보듯 개발과 건설, 핵과 전쟁, 기아와 인권 침탈의 문제는 더욱 교묘하게, 대규모로 진전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오존층의 파괴, 해일, 지진 같은 자연재앙도 말 그대로 자연의 현상이라기보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재앙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함께 평등한 권리와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태시가 오래동안 쓰여질 것이란 전망은 위기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가 할까. 생태시는 어떤 기능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착안하여, 분수에 넘는 일이긴 하지만 중․ 단기적인 범위에서 그 진로를 몇 개 항에 나누어 예측해 보겠습니다.

 

먼저, 물질위주의 삶을 정신적 가치위주의 삶으로 전환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일상시가 쓰일 수 있습니다. 번영과 축복의 문명사회에서 생태적인 정신과 꿈을 탈환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선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가족 시, 연시, 우정 시 등이 발표되고 주목받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둘째, 금욕의 아름다움, 나눔의 미덕이 많은 시의 주제로 부상하리라 생각됩니다. 인간사회에 생태 회복을 위한 자제력과 욕망을 갖추는 시스템이 가능할지,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지속가능할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태의 회복을 위한 과정에는 절제와 나눔을 통해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하게 되기 마련인 바 이 단계의 생태시라 하겠습니다.

 

셋째, 사회‧ 역사적 상상력에 의한 생태시도 쓰일 것입니다.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장벽, 즉 문화 제국주의의 형태, 불평등한 경제구조, 모순적인 정치구조 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역사적 상상력이 동원된 시도 마땅히 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그리고 탈근대주의 등도 이분법적인 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미 생태주의와 긴밀한 상관성을 갖고 있다 하겠습니다.

 

넷째, 자연과의 동화를 통한 생태공동체의식의 회복은 몇 마디 관념적인 교훈이나 추상적인 탐색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생태 생활자, 또는 자연생활을 실천하는 시인들이 많이 나와야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생활에서 실천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생태의식이란 또 하나의 자동화된 논리에 그칠 수 있습니다. 전원생활 내지 자연 생활에서 육체적인 노동마저 본래적인 것으로 기꺼이 안고 사는 시인들이 늘고, 그들의 언어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셔 주리라 기대됩니다.

 

다섯째, 생태시에도 심미적 차원의 전위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일군의 시인들이 미래파의 역동주의와 자유언어를 새삼 들고 나와, 언어적 동작성, 의성어, 의태어 등을 이용하여 음운의 실제 감각성을 자유롭게 부려놓습니다만 이는 시의 원천적인 생명성을 지향하는 시 양식으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반면에 일체 무정물은 물론 모기나 바퀴벌레, 바이러스의 생명마저 보호하고자 하는 극단의 생명시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 자체 생태적 사건이고 시적 충격이며 시인의 개성이 다다를 지점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질문에 답하느라고 항목화해보기는 했습니다만 예측은 언제나 예측일 뿐입니다. 저로서는 가능성 있다고 생각되는 시들, 또는 개인적으로 기대되는 생태시의 얼굴들을 늘어보았습니다.시문학사의 청으로 대담에 힘들게 응하긴 했습니다만 원래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해서 여러가지로 송구할 따름입니다. 우리 생태시의 든든한 한 버팀목이신 송용구 교수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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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대시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