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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스크랩] 시의 위상 │ 김석규

by 丹野 2009. 9. 3.

 

                                  시의 위상

 

 

                                                                                    김석규(시인)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확실히 지금은 시의 위기시대이다. 그러면서도 날로 시는 범람하고 시인은 홍수를 이루고 있으며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시집들은 여전히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다. 독자들은 더 이상 시를 찾고 또 시를 읽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지난 날 시인에게 보냈던 선망과 찬사를 중단한 지 오래고 자비출판으로 쏟아지는 시집들은 대형서점에서조차도 진열되기를 거절당한다. 저속하고 야비한 통속문화권 속으로 쉽게 함몰해 가는 맹목적인 중론의 대중과 독자들을 탓하고 원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읽지 않는다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전가하기에는 시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잠시 유행으로 떠돌다 만 대중가요의 가사보다도 못한 시, 인간의 농밀한 육성과 삶의 진정성(眞正性)이 결여된 채 한갓 언어의 유희로 타락한 채 만화보다도 울림이 없는 시를 놓고 과연 독자와 시인 사이에서 그 책임의 소재와 한계를 따질 수 있겠는가.

 

   흔히, 시가 없는 곳을 사막에다 비유한다. 최선의 정신이자 최상의 가치에 다름 아닌 시는 삶을 윤택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체험하게 하며 신선한 감동을 맛보게 함으로써 행복에 값할 뿐만 아니라 시는 삶을 창조하고 영위하는 힘이자 삶을 향하여 진취적으로 진입해 가는 정신적 실제적 수단이며 내면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인간성의 회복과 진실한 사랑의 실천을 통한 행복의 추구, 행복의 분배이며 이의 실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기도 하다.

 

   시는 언제나 시대 사회의 중심에서 하나의 풍향계였고 나침반이었으며, 지향하는바 정신적 가치가 확대된 공감력과 건강한 생명력을 획득하고 지속함으로써 소중한 정신문화의 유산인 고전의 권좌에 오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 시는 먼저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치열한 시대정신과 청렬(淸冽)한 에스프리를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달마다 각종 지상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시 가운데 이러한 작품이 몇 편이나 되는가? 중․고등학교의 교지에도 실리지 못할 시들이 수두룩하다면 지나친 독단이라 할까? 거의가 개인적으로 사소한 신변잡사의 나열에서부터 의미와 언술(言述)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 난해함을 넘어 무잡의 극치를 이루고 있거나 모던과 실험을 빙자하여 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격마저도 일탈(逸脫)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언어를 비틀리게 혹사시키거나 아니면 일상적인 언어에서조차 낙인찍힌 비어나 속어를 남용함으로써 시의 위의(威儀)를 훼손시키는 작태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시가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언어의 성찬을 집전(執典)하는 사제(司祭)로서 모국어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항시 겸허함과 겸손함을 않지 않아야 한다. 오염되고 병든 언어로 쓴 시는 역시 썩고 병들 수밖에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또한 시는 언어로 구축된 사원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시들에서 쓰여 지고 있는 시어들이란 한결같이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거나 그와 정반대 현상으로 빈곤하고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시어의 운용 또한 생경(生硬)하리 만치 외국어의 언어 관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낯설게 하기’라는 서구의 문예 이론을 차용하여 은근히 자기 시를 현시(顯示)하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시인이라면 모국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무차별적으로 유입되는 외래어로 날로 오염되고 혼탁해져 가는 모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일은 시인에게 부여된 특권이자 사명이기도 하다. 겨레의 얼과 민족혼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모국어로부터 정련(精鍊)된 시어들만이 국민의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언제나 열어놓고 있는 의식의 촉수는 민감하고 섬세하다. 그 촉수에 걸려 든 사물과 물상들의 선연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언어로 포착해 내는 것이 시가 아닐까? 그러므로 그 언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적확해야 하는데도 정련되지 않은 채 조잡하고 외설스럽기까지 한 시어들이 난무하고 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연유로 해서 결국 시의 품격과 위의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높은 정신의 가장 순수하고 빛나는 한 마디 말이야말로 시의 본령인 서정의 깊은 세계가 가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는 최대한의 상상력을 가동시켜야 한다. 예술의 어느 분야나 영역 할 것 없이 상상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겠지만 특히 언어로 빚어지는 시에 있어서의 상상력은 가히 진수요, 요체인 것이다. 그것은 시가 곧 정신세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질의 시는 상상력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찌들고 형편없이 구겨진 일상에서 빛을 잃고 날로 삭막해져 가는 삶에 더는 어둡지 않도록 한 줄기 희망과 함께 축축이 젖어 흐르는 윤기를 보태기 위한 노력은 시적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상상이야말로 절망과 암울을 희망과 환희로 좌절과 실의를 용기와 신념으로 치환해 내는 위력을 지닌다. 또한 상상은 우주를 단숨에 소요할 수 있는 비상의 큰 날개를 가지고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 과거는 추억의 화려한 의상을 걸치며 미래는 온통 설레임의 동경과 희구로 해서 잠을 설치게 한다. 때로는 이것이 현실에 대한 도피나 은둔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그 허황됨에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간절히 갈망하는 바의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염원과 함께 소원을 성취함으로써 현실을 타개해 보려는 강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의 상상력은 언제나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보다 한 차원 높은 곳을 내다보는 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추구하는 신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보들레르의 말과 같이 현실의 초월 의지로서의 시적 상상력이야말로 비애로 그늘진 일상에 원초적인 진솔한 삶의 원형과 건강함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생활의 활력과 창조적인 삶을 영위해 가려는 강렬한 의욕을 불어 넣어준다.

 

   시의 효용가치를 두고 논할 때, 시는 영원한 구원이 될 수도 없으며 정치도 경제도 아니며 또한 도달해야 될 목표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뚜렷하게 대안을 제시한다거나 최선의 해결책을 내어놓을 능력도 없다.

그러나 시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한 가닥 길이거나 수단이 될 수는 있으며 도달해야 할 최상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힘과 용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시는 한 곳에 정체되거나 어느 한 쪽으로 경도(傾倒)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쉽게 매너리즘 속으로 빠져들어 안주하거나 아집과 편견의 견고한 껍질 속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주의나 유파에 휩쓸려 마침내 시를 잃어버리고 마는 경우나 평생을 실험정신에 매달리다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내어보지 못하는 시인들을 많이 보았다.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서정의 튼튼한 바탕 위에 일상적 삶의 진솔함과 건강함이 용해된 시적 진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통틀어서도 참신성을 잃지 않고 항존적 가치를 누려 왔다.

 

   시의 대량생산은 시인의 대량생산과 함수관계에 있고 함량미달의 시는 함량미달의 시인과 상관도에서 정비례한다. 시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인간과 역사와 삶 앞에 보다 진지하려는 정신의 준열함이다. 항시 깨어있음으로 하여 시인의 삶의 도처에는 가열함으로 충만 되어있어야 한다.

   언어의 질곡 속에 신음하는 시의 해방과 차원 놓은 시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빛나는 시인들이여, 한껏 분발하라.

 

 

[김석규 시인]

 

196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196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파수병』『풀잎』『청빈한 나무』외 다수 있음.

현대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부산시인협회장상 수상.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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