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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생의 기웃거림, 단절을 넘어서 / 박해림

by 丹野 2009. 9. 11.

                                                                                                                                   p r a h a

 

 

 

         생의 기웃거림, 단절을 넘어서

 

                                                                                        박해림(시인)

 

 

 

 

1. 익숙함과 낯섦의 단절의 현장

 

8월. 여름의 정점이다. 이럴 때 이른 아침부터 고속도로를 꽉 채운 차량의 행렬을 보면서 휴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평소 휴가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아닌가 생각했다. 바쁜 일상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휴가를 필요로 하기보다 짐스러운 것쯤으로 여기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일상에 찌든 감각의 재생을 위해서라도 일 년에 한 번쯤 가능한 한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생각과 마음과 몸에 덕지덕지 끼인 때와 먼지와 이물질들을 떼어버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낯선 곳이 선물하는 정서를 한껏 받아들여서 신선하게 변모된 모습으로 귀가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부담이다. 비싼 돈 들여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는 강박증이 어쩌면 화려한(?) 여름휴가를 곱게 접어버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거리와 속도를 뛰어넘어 경험할 수 있는 ‘세계 테마 기행’이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여행프로와 미술관과 박물관 기행에 열을 쏟는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든지 삶이 지속되는 곳이면 소통 또한 넘쳐난다. 소도시건 대도시건 활달한 생이 넘실대며 경계를 넘어선다. 내밀한 안방까지 침투한다. 24시간 쉬지 않고 방영하는 와이드 엘시디 티브이는 가정 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열차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도심의 빌딩 숲에도 내걸려 있다. 심지어 대형마켓과 백화점, 은행, 음식점이나 택시, 개인 승용차에도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은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 우리 곁에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예전과 달리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너그럽다. 손만 뻗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소통을 내걸고 확대된 문명의 이기는 양방 통행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다. 와이드 화면이라는 것과 개체수의 확대, 공간의 다양성과 시간대의 자유로움이라는 장점만 부각되었을 뿐 대체로 일방적으로 소통하고 있음을 파악한다. 상호화법이 아니라 일방화법, 즉 화면 속 사람들은 지들끼리 끊임없이 서로 웃고 떠들고 화면 밖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만 들지 개개인과의 의사소통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해서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아야 한다. 한 예로 지하철 안은 어떤가? 젊은이일수록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손에 든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동행한 이와 대화하기보다 각자 편한 자세로 기대거나 앉아서 손 안에 든 문명의 이기에 온통 관심이 꽂혀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소통이란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가? 각 가정에서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를 한 적이 한 달에 몇 번이나 되는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쫓기는 직장생활과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육열에 가장과 자녀, 그 뒷바라지와 생활비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알바에 목을 맨 주부가 공존하는 시대에 가족끼리 얼굴을 마주하기란 어쩌면 사치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영화 「마더」의 ‘아무도 믿지마. 엄마가 구해줄게’라는 문구를 보고 왜 가슴이 철렁했을까. 하나는 너무 익숙한 말마디에서 잊고 있었던 유년의 향수를, 다른 하나는 현대인의 극단적인 단절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라는 단어는 콘크리트에 묻힌 고향의식을 불러오는 동시에 상실감도 불러일으킨다. 이제 엄마 말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비극적인 세상이 되어버려서인가. 아래의 시편들은 이러한 단절의 시대에 분명 따뜻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개인의 서정에 탄탄히 기대면서 생활 깊숙한 곳에 단절의 상흔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소통이란 산 자의 몫이지만 삶의 저쪽에 놓인 존재와 자연물과 상호 관계성을 맺을 때 비로소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2.생의 경계를 기웃거림

 

조정인의 「문신」은 이러한 맥락에서 고양이와 독거노인과의 소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손때에 길들여진 고양이는 온기로 가득하다. 비록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통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식탁의 다리에 일방적인 언어가 아닌 양방소통의 언어를 노인과 주고받는다. 오늘 날의 시대는 사랑엔 국경도 초월한다는 말보다 소통엔 국경도 초월한다, 아니 시공간을 초월한다가 더 적절할 듯하다. 열린시대에 웬 소통인가 의아할 법하지만 혼자 따로 노는 시대가 아닌가.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였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정인,「문신」(『현대시학』7월호)

 

 

고양이가 나무식탁 다리에 하고 싶은 말을 새기면 노인은 투박한 손으로 답변한다는 발상은 하나도 특별할 것 같지 않다는 선입견 탓에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준다. 살아 있을 때 소리로 몸으로 노인과 소통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을 터이지만 제 죽을 줄 알고 미리 식탁다리에 숱한 언어를 새겨놓았다는 휴머니즘은 따뜻함을 넘어서 눈물을 만난다.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는 실체는 없지만 남겨진 발톱자국으로 소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 아니라 시인은 고양이 자리에 하느님을 슬쩍 옮겨 놓는다. 인간 사유의 초석은 고독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고 고양이=하느님=할머니의 등식을 부감으로 조망하면서 정작 소통불능의 시대에 개입되는 고독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고독이야말로 타자와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의 문임을 깨닫게 해 준다. 절대고독이 두려운 현대인들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 아니겠나.

사람은 누구나 혼자를 두려워한다. 가족을 떠나보내 본 사람은 안다. 결국엔 혼자 남게 된다는 사실이 머지않음을. 소통의 일차적인 대상이 가족이기에 소통부재의 순간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세상을 하직한 어떤 이의 흔적을 통해 지상의 한 때를 감각하고 소통하는 문을 만난다. 무덤의 나무 문패를 매개체로 하여 삶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본다. 세상의 저쪽에 있는 이도 한 때는 귀를 열어 세상과의 소통을 했을 터이고 가족과 주변의 이웃들과 끊임없이 정을 주고받았음을 유추한다.

 

 

청계사 기슭 비탈진 무덤 앞 쓰러질 듯한 비목 하나

가늠할 수 없는 희미한 문자

 

나무 문패 헐렁하게 걸어놓고 나무 집에 누운

익명의 어느 생이

머리맡의 산등성 여울진 물소리 품고 누웠네

 

봉분 흘러내린 잡풀 사이

쉬었다 사는 새들의 깃털 툭, 떨어지고

깃털, 허공에서 지상까지

백년처럼 찰나처럼

허물이 떨어지며 가볍게 산을 흔드네

 

이름자 흔적조차 밋밋해진 나뭇결

결 따라

지상의 목숨 한 가닥 읽어 보네

-장순금,「해독불명의,」(『문학․ 선』여름호)

 

 

지금은 비록 단절의 공간에 누워 있지만 여전히 귀는 살아 ‘머리맡의 산등성 여울진 물소리’를 듣고 있다. 그 뿐 아니다. 주변의 자연상관물과 여전히 소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상은 청계산을 찾은 시의 화자가 소통은 산자의 몫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산자들 간의 소통의 진정성을 찾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기에 삶의 경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소리’는 생성의 어휘다. 생의 저쪽의 존재가 감각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신선하다. 이것 또한 화자의 염원일 테지만 새들의 깃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허공에서 지상까지/백년처럼 찰나처럼’허물이 떨어지며 가볍게 산을 흔드네//로 이어지는 이미저리를 살펴본다. 시공간을 초월한 겁怯의 세계로 대변되는 허공. 이곳에서 화자는 존재의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가 반문하면서 생의 이쪽과 저쪽에서도 소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깃털=허물’로 보아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김길나의 시는 어떻게 읽혀야 될지 살펴보자. 그의 시는 단단하다. 단단하다 못해 강한 역동성으로 모서리가 느껴진다. 소통은 애초부터 필요 없어 보인다. 이미 소통을 초월한 지도 모른다. 허공 한 가운데서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새’는 끊임없이 솟구치는 행위를 통해 삶의 역동성을 재현한다. ‘떠나서 닿는 곳, 텅 빈 허공’의 도입 부분은 그 다음 ‘날아서 딛는 곳, 밀집의 영역인 땅’으로 환치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는 허공과 땅, 아디에서도 오래 머물지/못한다. 날카롭다 새의 눈, 부리, 발가락…/나는 단 한 번 새의 눈과 마주쳤다/내 눈은 날선 칼에 찔렸다.’의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차적으로 화자가 감각한 세계는 공간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개체로 이행하는 과정이 밀도를 추동하며 변환한다는 데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끌어낸다. ‘새’는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떠나야 하고 도달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사실 ‘새’, ‘안개’, ‘꽃’ 등등은 시인이 즐겨 다루는 대상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다. 그럴만한 이유를 들라하면 안착과 이동을 쉬지 않고 감행하는 속성 탓이라고 볼 수 있다. 타자와 자아와의 대립 또한 극명하게 표출할 수 있다는 데서 쉽게 접근된다.

 

떠나서 닿는 곳, 텅 빈 허공

날아서 딛는 곳, 밀집의 영역인 땅

새는 허공과 땅, 어디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날카롭다 새의 눈, 부리, 발가락…

나는 단 한 번 새의 눈과 마주쳤다

내 눈은 날선 칼에 찔렸다

 

새가 날아오를 때 허공은 새의 날개 끝에서 접혔다

펼쳐진다. 접힌 허공은 캄캄하다

밀도 짙은, 접힌 바람 속에서 터져 나오는

죽은 새들의 날개. 허공이 펼쳐지는 것은,

그러므로 바람을 껴안고 가는 날개의 힘이다

바람으로 포장된 죽은 날개를 떠안고 날개를 펴는 새의

길, 고독에 벼린 차가운 칼날이 새의 눈에서 시퍼렇게

뻗쳐 나온다. 새가 칼날로 양털구름 몇 조각을 포 떠낼 때

살이 다 녹아버린 구름포 아래서 나는 배가 고프다

 

새의 눈에서, 부리에서 예각으로 번득이는 것은

새의 시푸른 긴장, 그곳에서 내려오는 것은 섬뜩한 폭풍

이제 새는 궁창의 길 한 가닥을 눈으로 베어내어

지름길을 내고 있다. 지름길에서 새는 땅의

구도를 잡아채 땅 위에 점 하나를 찍어 놓는다

내가 살아서는 넘나들 수 없는 두 세계를 잇댄 동선이

새의 날개와 맨발에서 길게 풀려나오고, 마침내

새는 궁창과 지상을 관통한 제 기하학을 완성한다

칼날이 꽂힌 점에 새의 부리가 꽂힌다

점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새는 점 찍어놓은 먹잇감을 삼킨다

-김길나,「새의 눈」,(『문예연구』여름호)

 

 

떠나서 닿는 세계는 새의 날개 끝에서 접히고 펼쳐지는 순간을 포착할 때 캄캄한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시의 화자가 감각한 이 세계는 심연 저쪽의 세계를 끌어낸다.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새는 꼿꼿하다. 흔들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꿈꾸는 세계가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날개를 펼치고 접을 때마다 감각된 그 경계는 부리에 의해 확인된다. ‘궁창’과 ‘지상’이 하나의 점으로 관통되는 순간 존재를 자각하기 때문이다. 새가 감지한 ‘점’이 함의한 것 또한 그렇다. ‘내가 살아서는 넘나들 수 없는 두 세계를 잇댄 동선’과도 동일한 이미지를 끌어낸다. 따라서 자아와 타자와의 소통은 바로 점과 날개의 접힘과 열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쓸쓸함의 경계를 기웃거림

 

윤용선의 경우, 일상은 결코 무겁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여전히 소통의 중심에 서서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며 휘청거리고 있다. ‘사람들은/까닭도 없이 쓸쓸해지는 순간에야/멀리 뒤처진 행복을 바라보게 된다/는 자아를 내세우기보다 타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천사’, ‘나비’, ‘영혼’,을 간단하게 통과하고 있다. 소통을 위해 예각을 세우고 있다.

 

 

사람들은

까닭도 없이 쓸쓸해지는 순간에야

멀리 뒤처진 행복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얼뜬 천사처럼

고운 나비 한 마리가 눈 속에 갇혀

희디흰 영혼으로 잠들어 있다는 걸

종종 잊고 있다.

느린 시간의 틈새에서도

괜히 바장이며

끊임없이 투덜거린다.

쓸쓸하단 말은 마세요.

그런 나도 미치겠으니까요.

너덜너덜하게 해진 옷처럼

고단한 사치도 흔들어 대면서

추워 보이는 비눗방울처럼

-윤용선,「어떤 사치」(『우리시』8월호)

 

세상 어디든 귀를 대이면 존재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시의 화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차가운 눈 속에 갇힌 나비의 영혼의 초월적 대상을 선택하여 자아의 소통의 창구로 삼았다는 것은 적막한 현재를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는 존재확인의 강박증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자의 투정어린 ‘쓸쓸하단 말은 마세요/ 그런 나도 미치겠으니까요./ 어쩌지 못하는 소통 불능의 자아는 스스로 진단한 ‘고단한 사치’를 끌어안고 있다. 고단한 사치란 역설적인 표현이다. 파도가 가라앉은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 한 가운데 둥실 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때 고단했던 지난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치열한 목표점이 자신을 단련시켰을 것이며 ‘행복한 결핍’에 영혼과 육신이 달구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중심부에서 떠밀려진 오늘, ‘느린 시간의 틈새’를 처럼 그토록 갈구한 여유와 넉넉함을 누리고 있지만 이게 아니라는 반어적 깨달음은 오히려 단절에 대한 인식에 다름 아니다. 소통의 창구는 누군가에 의해서 닫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리는 현실의 안위에서 수동적인 삶을 택했을 때 확인된다.

송영희의 경우는 윤용선과는 또 다른 쓸쓸함에 닿아 있다. 윤용선이 쓸쓸함을 관조하고 있다면 송영희는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시공간의 이동과 함께 ‘곤드레’를 통해 훨씬 치열하고 적극적인 소통의 전개를 추동하고 있다. 「소통」의 제목을 가진 이 시의 핵심어는 ‘곤드레나물’이다. 봄 한 철 잠깐 산에서 캐어다 묵나물을 만들면서 일 년 열두 달을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이 나물은 육질이 매우 부드럽다. 화자는 바로 이것을 소통의 창구로 삼았다. 이 부드러움을 감각한 순간 외부와의 소통의 창구로 활용한다. 현실은 혹한의 겨울이다. 불통의 세상, 단절은 곤드레 나물을 먹는 행위를 통해 확인된다. 동시에 자아와 타자와의 화해의 몸짓이면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창구로 기능한다.

 

 

겨울 깊으면 슬픔도 깊어진다지요

하남, 박순관 도예공방을 찾아가는 길목

곤드레 비빔밥집에서 곤드레 나물을 먹었습니다

섞이자 마자 금방 풀죽어 곤드레 되는 나물처럼

독하던 겨울 추위도 어느새 훈한 묵나물 되어

오호, 밖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네요

 

1300도 불꽃이라네요

사흘 밤낮을 훨훨 불바람으로 취해

뼈마디 사이사이

불꽃과 연기와 불티로 녹아내린 빛깔이라네요

 

몸과 정신이 겨울 그 깊은 추위에 견디지 않고서야

혼까지 곤드레로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의 마음을

어찌 저리 흑청 꽃잎으로 남길 수 있겠는지요

 

겨울 깊어서야

우리 서로 슬픔에 가 닿을 수 있듯이

비로소 서로의 어둠을 만져 볼 수 있듯이

오늘 작은 곤드레빛 화병 한 점

덜컥 품에 안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송영희,「소통」(『우리시』8월호)

 

 

도예공방에서 빚어진 화병은 소통의 핵심적 창구 역할을 한 ‘곤드레’의 빛을 띠고 있다. 1300도의 고열에서 정제되고 단련된 화병으로 동일시되는 자아는 유독 겨울에 단절을 심하게 앓고 있다. 외부와 내부, 고열과 혹한을 통해 자아와 타자의 대립적 양상을 파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겨울이 깊으면 슬픔도 깊어진다지요’하고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몸과 정신’은 ‘깊은 추위’를 견뎌야만 비로소 1300도의 고열에서 단련된 화병처럼 된다. 그러나 단지 단련만 위했다면 굳이 가슴에 ‘덜컥’ 안을 수 있겠는가. ‘흑청 꽃잎’의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 ‘겨울이 깊어서야/서로의 슬픔에 가 닿을 수 있듯이’ 자아와 타자의 진정한 소통을 이룬다. 자아의 간절한 소통은 사실 마음 깊은 곳에 닿아있다. 마음은 영혼의 또 다른 이름이므로.

 

 

배추잎 유마경을 읽는다 섬유질 행간마다 푸르게 돋는 경을 바람이 도반 되어 따라 읽는 길,

 

곱게 누벼진 논둑길 밭둑길 밑줄 치다가, 둥근 알 품은 구릉의 젖가슴 한나절 내내 읽다가, 들판에 걸터앉은 구름 한 자락 뭉게뭉게 받아 적다가, 소낙비 젖은 수풀 이슬 도르르 도로 외우다가. 눈부신 햇살 등에 지고 비탈진 고샅길 건너는 행과 생 사이, 등뼈보다 더 물렁한 발자국 따라

 

바람도 길도 배추 잎 되는 초록 빛, 저 불이법문(不二法門)!

-강영은,「유마힐 민달팽이」(『불교문예』여름호)

 

 

봄의 정경이 한 눈에 파악되는 강영은의 시는 자연상관물을 소통의 창구로 삼고 있다. ‘ 진리에는 내 것도 없고, 분별도 비교할 대상도 없으며… 모든 사물의 안에 들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본성과 같다. 진리는 사물 그대로의 모습에 따르고 어떠한 환경의 영향도 입지 않으므로 진실 그곳에 머문다. 또 진리는 육진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흔들리지 않으며,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오고 감이 없다.’라는 경전의 말씀을 배추잎이라는 자연상관물에서 읽어낸다.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것을 모두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평등한 진리를 나타내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은 우리의 작고 평범한 주변부에 쉽게 발견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이 시는 가벼우면서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추잎에 새겨진 ‘논둑길 밭둑길’, ‘구릉’, ‘구름’, ‘소낙비’, ‘햇살’, ‘고샅길’, ‘등뼈’, ‘발자국’등의 낯익으면서 신선한 시어들은 유마경의 이미지화에 다름 아니다. 단순하게 구성된 짧은 산문형태에 앉혀진 작고 보잘 것 없는 미물에 불과한 ‘민달팽이’를 통해 화자가 전달하는 깨달음은 세련미와 새로움이 ‘섬유질 행간마다 푸르게 돋는 경’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자아와 타자와의 소통은 짧지만 결코 만만찮은 길이를 가진 한 편의 시에서 단절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정진하는 모습일 때 극대화된다. 민달팽이의 길은 진리를 찾아 헤매는 고행의 길이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며 삶의 경계 이쪽저쪽을 쉬지 않고 기웃거리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순간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 사이를 넘나드는 환한 쓸쓸함이 자연의 회화적 이미지에 겹쳐 있어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길이 아니라 여유롭고 씩씩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소통이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통행일 때 가능하다. 현대문명의 혜택은 분명 양방 소통을 위해 발달된 것인데도 그것을 사용하는 도구적 인간은 일방통행 소통에 더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사회의 반영으로서 자아가 감각한 세계는 분명 이러한 정점에 놓여 있다. 익숙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낯섦의 단절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의 기웃거림이 끝나지 않는 한 단절 또한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 바로 위의 시들이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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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고려대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문학박사)

.1996년 <시와시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1999년 <월간문학>동시 당선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1년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3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수상

.2008년 이영도 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격월간 <정신과표현> 편집위원, 아주대 강사

 

시집

.1999년 <실밥을 뜯으며>

.2003년 <눈 녹는 마른 숲에>

.2004년 <고요, 혹은 떨림>

.2005년 <간지럼 타는 배> (동시집)

 

 

 

 

출처/우리詩회http://cafe.daum.net/uri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