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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스크랩] 시인의 출신 │ 황정산

by 丹野 2009. 9. 3.

                                시인의 출신

  

                                                                        황정산(시인, 본지 부주간)

 

 

   얼마 전 잘 아는 시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자신의 등단지가 너무 약해서 다시 등단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쓰기를 배우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시 배우고 노력한다는 것 역시 권장해마지 않을 일이다. 더욱이 그 시인이 상금이라도 타게 되면 술이라도 한 잔 살 게 분명하니 나에게는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오래오래 불편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대체 등단지가 약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쉽게 말해서 시인으로서 출신이 미천하다는 말일게다. 시인에게 반상이나 적서의 구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웬 출신 타령이라는 말인가. 시인이 시만 잘 쓰면 되지 출신이 무슨 소용일까? 출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과연 문학적인 일일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 보지만 그 시인의 상황과 고민이 현실적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문단 행사나 문학 모임에 가서 처음 본 시인들과 인사를 하면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된다. 처음에 그 말의 의미를 잘못 알아듣고 내 고향을 말하기도 하고 또 “잘 모르는데 양반 출신은 아닌 것 같아요.”하는 뜬금없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등단지를 물어보는 말이었다. 그 질문을 통해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나 이른바 메이저 잡지를 통해 등단한 실력파인지 아니면 B급 시인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나같이 등단 절차를 제대로 밟지 못한 사람에게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 질문 하나에 나는 별볼일 없는 삼류 시인이 되고, 왠지 내가 끼어들 수 없는 자리에 온 것 같은 안절부절함을 겪어야만 했다.

   출생지나 출신 대학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문학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을 그 사람 자신의 특성이나 실력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붙어있는 간판과 상표로 평가한다는 것은 소외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 이해나 교류보다는 그 사람의 외적 조건을 이용해보겠다는 사악한 마음이 깔린 속물적 가치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리가 문학을 하고 시를 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속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속물성을 거부하고 나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자라나는 속물적인 생각들을 반성하고 털어내기 위한 정신적 고투가 바로 시인의 길이라고 대부분의 시인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출신으로 시인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속물성에 스스로 굴복하는 것과 같다. 시인이 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출신지나 활동무대의 후광으로 행세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파는 장사꾼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속물적 태도가 문학판에 만연하여 돈으로 문학상을 사는 파렴치나 스스로 자기 시비를 세우는 후안무치한 만행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이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그 옷의 색상이나 디자인이 그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를 말하지 않고 목덜미를 까뒤집어보고 레벨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옷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상표를 확인하지 않고는 그 옷을 평가할 안목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인을 평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오직 시로 평가된다. 어떤 시를 어떻게 쓰는지 또 얼마나 진지하게 문학적 성찰을 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실천하는지가 시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일 게다. 그런데 시인의 출신을 알아내 그것으로 시인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시인의 시를 읽어줄 애정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시인의 시를 평가할 실력이 없다는 무식을 드러내는 일이며 또 그 무식을 감추려는 비겁한 행위이다.

   많은 잡지들에서 작품을 실을 때 시인의 약력을 함께 보여준다. 거기에는 00년 00지 등단이라는 것이 항상 등장한다. 그리고 등단 년도에 따라 작품 배열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 관례화 되고 있다. 그 점은 우리의 <우리詩>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등단지와 등단년도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시인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7살 때 자기집 강아지가 죽은 일이나, 11살 때 옆집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 본 경험이 훨씬 더 중요한 약력이 아닐까?

   시인들이여 간판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말 지어다. 계급장이나 상표를 떼고 오직 시로 맞장을 뜨자.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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