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슬픔’이라는 이름의 집 / 송용구

by 丹野 2009. 8. 17.

 

 

 

-계간 <문학미디어> 2007년 봄호-  

 

 

                     ‘슬픔’이라는 이름의 집

                                          - 노향림, 맹문재, 정철훈의 시를 중심으로



                                                                                                  송용구



   시인은 이 세상과 불화를 겪으면서 큰 상처를 받는다. 때로는 그 상처의 독이 해독(解毒)되지 않아서 육체의 생명이 단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와 싸우면서 시인의 내면에 상처의 문신이 겹겹이 새겨질수록 오히려 그의 시는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상처는 시를 키우는 양식인가! 시인이 받는 상처는 그의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독일의 시인 횔덜린은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자문하였다. 시인의 상처는 이 ‘궁핍한’ 세상 속에서 시인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 필자는 지난 겨울에 세상의 부조리와 부단히 싸우면서 얻은 시인들의 상처가 그들에게 집이 되고, 시가 되고 있음을 똑똑히 목격하였다. 시인은 상처 속에 존재의 집을 짓는다는 것을 노향림, 맹문재, 정철훈의 시에서 확인하게 된 것은 내면의 잠행(潛行)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강남 신사 주유소 뒷골목길

길 끝에 미망처럼 놓여 있는 간판 한 점

딱히 만날 사람도 없이 그곳으로 간다

건물에 가려진 하늘은 더욱 작아져서

바다 한 가운데서 격랑 치는 흰 포말로 흩어지고

그 아래 사람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심해어로 떠다닌다

먼지로 붉게 충혈된 나의 눈은 먼 곳을 향해

수족관의 열대어처럼 떠간다

어디선가 코 앞을 스치는 비릿한 내음

꽁꽁 언 채 묶여 있는 생물들을 몇 박스씩

내려놓은 텅 빈 화물 트럭 한 대

긴 장화를 신은 굴밥 주인의 사투리가

골목에 톡톡 튀며 나를 깨운다

하늘 건물에 가려져 빛바랜 구조신호기를
매달고 파랑 치는 통영굴밥집 간판

오래된 폐선에 겨우 승선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주방 쪽에선 연신 농담 섞인 칼도마 치는 소리

자, 굴밥이요. 이 한 마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귀를 때리는 한낮.


                -노향림의 「통영 굴밥집」전문. 《문학미디어》 2006년 겨울호.


   ‘화물트럭’의 ‘박스’ 속에 ‘꽁꽁 언 채 묶여 있는 생물들’과 ‘형체를 알 수 없는 심해어’, ‘수족관의 열대어’는 이 시대의 물질주의적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당하는 현대 도시인들의 은유이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인간조차도 상품으로 취급당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의 ‘격랑’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심해어’들이 바로 그들의 자화상이요, 시적 자아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포말처럼 흩어’져가는 ‘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난파의 위기에 처한 작은 배와 같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오래된 폐선’ 속으로 ‘형체를 알 수 없는 심해어들’이 하나 둘씩 ‘승선’하여 ‘자리를 차지’하고 지친 몸을 의탁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영 굴밥집’은 이 시대의 물질주의와 성장제일주의가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대열로부터 소외되거나 이탈한 도시인들의 도피처이다. ‘더욱 작아’지는 ‘하늘’의 한 귀퉁이처럼 아무 희망도 없이 몰락해가는 ‘오래된 폐선’ 속으로 ‘심해어들’이 몰려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통영 굴밥집’의 ‘오래된 폐선’에 ‘승선’하면서 자신들의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존재의 집 한 칸을 ‘차지’한다. ‘꽁꽁 언 채 묶여 있는 생물들’처럼 물질, 물건, 상품의 단계로 전락해가고 있는 그들은 사람답게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으로 ‘열대어’처럼 꿈틀거린다. 사람다운 삶을 회복하려는 투쟁의 몸부림에서 풍겨나오는 ‘비릿한 내음’이 역하지만 눈물겹다. 비정한 물질주의의 ‘격랑’ 속에서 ‘빛바랜 구조신호기를 매달고 파랑 치는 통영 굴밥집’처럼 그들은 물질과 상품이 아닌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남기’ 위해 ‘오래된 폐선’ 같은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마지막 구원의 보루로 끌어안는다. 세상의 ‘격랑’ 속에 휘말려 난파하기 직전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할 수 있는 구원의 집은 스스로의 내면세계가 아니겠는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였듯이 시인에게는 시가 존재의 집이다. “시”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면 시인의 내면세계는 시의 또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맹문재의 시에 나타난 ‘의자’는 노향림의 ‘통영굴밥집’처럼 시인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은유로서 읽혀진다.


  어두운 방안에 나와 의자가 가만히 있다, 창밖에는 겨울비에 언 길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들로 소란하다       

  의자는 내 앞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바람소리를 불안하게 듣듯 의자를 바라보고 있다

  의자와 동행하는 사이이면서도 내가 낯설어하는 이유는 오래되었다


  나의 노동은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야적장을 뛰

어다니며 호루라기를 부는 것이었다

  햇빛이 좋거나 바람이 시원한 날도 많았을 텐데 그 야적장에는 왜 항

상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비가 흩뿌렸다고 생각될까, 나는 의자와 다른

태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홧김에 야적장을 뛰어나와 의자에 앉았을 때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다

  의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사죄라도 하듯이 나의 요구대로 따

랐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처럼 다소곳이 방을

지켰다


  나는 의자의 눈길을 바라보면서 나의 불 같은 분노가 식지 않을까 우

려했다

  환절기 환자들 같은 우울증이 생기지 않을까도 걱정했다

  그렇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날이 늘어가면서 의자도 어쩔 수 없는

하수인이었다고, 나는 물을 마셨다


  어두운 방안에 나와 의자가 가만히 있다, 창 밖에는 겨울비에 언 길

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들로 소란하다

  의자는 내 앞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의자를 바라보고 있다.


                    - 맹문재의 「의자」 전문. 《문학미디어》 2006년 겨울호.   


   내면의 ‘창 밖’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세상은 ‘바람소리들로 소란하다.’ 이 ‘바람소리들’은 노향림의 시에서 시적 자아를 위기로 몰고가던 바다의 ‘격랑’과 같다. ‘바람’은 물질적 풍요, 윤택, 편리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직선적 메커니즘의 화신(化身)이다. ‘바람소리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괭음이 ‘창 밖’ 세상을 점령하였다. 괴물 메두사의 머리를 쳐다보는 모든 생명체들이 돌로 변하였듯이 직선적으로 질주하는 ‘바람’의 철각(鐵脚)에 밟힌 ‘길’마다 쇠붙이처럼 얼어붙는다. 시인은 ‘의자’에 앉아 ‘의자’의 눈이 되어 ‘바람소리들’을 놓치지 않고 읽어낸다. 그는 ‘바람소리들’이 일으키는 광란의 질주를 응시한다. 시인의 ‘의자’는 ‘창 밖’의 세상을 읽는 눈이다. 그의 ‘의자’는 ‘바람’이 안겨준 상처를 다독거리는 자위의 손길이요, ‘불같은 분노’의 칼날을 시적 언어로 다스리고 정련시키는 내면의 대장간이다.

   내면세계를 고수하기 위해 ‘창 밖’의 ‘바람소리들’과 싸워나가는 시인의 정신적 투쟁은 ‘불 같은 분노’가 암시하듯이 때로는 격정을 분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투쟁의 격정 속에 스스로 함몰되는 것을 거부한다. ‘바람소리’와 시인의 싸움은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승부이기 때문이다. ‘바람소리들’과 ‘의자’ 사이엔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 시인은 ‘바람소리’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바람소리’의 실체를 인식하려는 비판적 거리(距離)를 허물지 않는다. 이 비판적 거리는 ‘바람소리’와의 싸움에서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 정신적 무기이다. 시인의 존재를 물질의 단계로 전락시키려는 메커니즘의 폭력에 맞서 ‘겨울’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저항의 힘이기도 하다. 그는 ‘바람소리’와 ‘의자’ 사이의 거리에 의지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방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의 ‘의자’는 내면세계의 중심이다. ‘의자’는 시인의 정신적 실존을 가능케하는 “존재의 집”으로서 그의 “시”와 같은 얼굴을 가졌다.

   맹문재의 시에서 ‘창 밖’의 ‘바람소리’를 읽어내며 ‘바람’의 힘에 맞서 팽팽한 대결구도를 보여주었던 ‘의자’는 정철훈의 시에서 또다시 시인의 “눈”이 되어 ‘플랫포옴’ 바깥의 차가운 풍경을 응시한다. ‘의자’가 말없이 ‘앉아’ 있다. ‘의자’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물질적 메커니즘과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시인의 자화상이 되어 쓸쓸히 ‘플랫포옴’ 안에 ‘앉아’ 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혼자라는 이름의 의자

딱딱한 의자만큼이나 나는 굳어간다

누구에게 내 슬픔을 이야기하나

내 안에서 슬픔이라는 벌레가 기침을 해대는데


담뱃불을 붙이다 말고 내가 자고 나온 집과

마을의 발목을 감고 피어오르는 안개와

밟고 지나온 길의 하얀 서리에 대해 생각한다

밟으면 없어지고 마는 것

뒤돌아보면 사라져 버리는 것


아직 어스름한 새벽

건드리면 주위가 쨍하고 갈라질 듯 무척이나 춥다

나는 허벅지에 두 손을 찌른 채 비벼대고

안개가 가로등을 타고 올라온다

백년쯤 켜지 않은 듯 가로등 불빛은 녹슬어 있다

까만 광목에는 찌든 디젤유 냄새


갑자기 첫 차를 타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삶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

가로등에서 유리공장 기술자의 입김이 새어나오고

철길에서 대장장이의 풀무질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이런 것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2월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해가 바뀌어도 새로운 나날은 없다는 것

용서할 것도 용서를 빌 이유도 없다는 것

성탄절 소리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


모든 게 안개에 녹아 흐물거린다

삶의 윤곽이 황산에 잠긴 듯 모호해진다


기차는 바람을 몰고 들어오고

안개는 자꾸 흩어지고

벌레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으니

누구에게 내 슬픔을 이야기하나


      - 정철훈의 「플랫폼에 앉아서」. 《현대시학》2007년 1월호.


   정철훈의 ‘의자’는 이 세상과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시인의 자화상이다.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외로움을 모래알처럼 씹으며 ‘슬픔’의 ‘벌레’에게 갉아먹힐 수밖에 없는 시인의 내면세계이다. ‘의자’에게 ‘혼자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부터 그 사실이 드러난다. ‘의자’라는 내면세계의 한 가운데에 앉아서 ‘기차’가 몰고오는 ‘바람’을 응시하는 시인의 눈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건드리면 주위가 쨍하고 갈라질 듯’한 추위, ‘백년쯤 켜지 않은 듯 녹슬어있’는 ‘불빛’, ‘찌든 디젤유 냄새’, ‘모호해’지는 ‘삶의 윤곽’과 ‘안개에 녹아 흐물거리’는 풍경은 시인의 고통을 대변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의 내면세계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맹문재의 시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결코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시인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지상으로 유배된 알바트로스처럼 저주받은 시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몰려오는 ‘바람’ 속에 휩쓸릴 수 없고 섞일 수 없는 것은 시인의 태생적 본능이요, 그가 지상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 살아내야 할 섭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인의 ‘슬픔’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하여 화해를 거부한 자의 전리품이요, 스스로 외로움의 길을 자청한 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슬픔’은 내면의 밀실(密室)에서 시인이 스스로 키워왔던 병(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슬픔’은 세상의 ‘격랑’ 한 가운데서 물질적 메커니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몰락해가는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의 집’인 “시”를 마지막 보루처럼 지켜낼 수 있는 실존의 뿌리인 것을 어찌하랴! 노향림이 앉아있는 ‘오래된 폐선’ 안에서, 맹문재가 앉아있는 ‘어두운 방’ 안에서, 정철훈이 앉아있는 ‘추운 플랫포옴’ 안에서 그들의 ‘딱딱한 의자’를 어루만져주던 ‘슬픔’에게 축복 있으라! 

   

                                    -송용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독일어권문화연구소 교수)  

         

 

출처 / 현대시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