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치열한 예술혼(藝術魂)의 부활을 꿈꾸며 / 송용구

by 丹野 2009. 8. 17.

 

 

       

 

-2007년 계간 <문학미디어> 여름호 시론-  

 

                     치열한 예술혼(藝術魂)의 부활을 꿈꾸며

                                                     - 윤후명, 황형철의 시를 중심으로


 

                                                                                                       송용구

 


  ≪문학미디어≫ 2007년 봄호에 발표된 윤후명의 시 「두 개의 도자기를 기림」중 첫 번째 작품인 「용 그림 항아리」와 황형철의 시 「우물」을 눈 여겨 보았다. 두 작품은 창작의 예술혼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오늘의 작가들에게 치열한 작가정신의 회복을 요청하고 있다.


  온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을 본 적이 있는가. 어느날, 그날이 화안한 날인지 어둑신한 날인지 기억은 아득한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무엇인가 가슴 뻑벅하게 밀려오는 걸 보듬었다. 무엇일까. 오래 전에 가버린 사람의 마지막 말일까. 아니, 무지갯빛 어디엔가 아련하고 지워진 건 아무것도 없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그리움의 비늘.   

  구름을 품은들 무엇하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그것만으로도 와락 달겨드는 마음을 어쩌지 못 해 용은 겸연쩍기조차 하다. 한쪽 눈은 살포시 비끼고 온하늘을 안겨주면서도 못다한 그리움에 마냥 콧날이 아려온다. 어쩔 수 없이 머리갈기를 온통 날리며 맨얼굴을 마주 들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그 모습으로 다시금 가슴 가득 삶을 낳는다.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품은 사랑의 새 얼굴이다.

            - 윤후명의 「두 개의 도자기를 기림」중 「용 그림 항아리」,

                       《문학미디어》 2007년 봄호.

                                                 

  '항아리'는 한계 없는 '하늘'을 나타낸다. 그 '하늘'을 '용'이라는 시적 자아(詩的 自我)가 막힘 없이 날아다닌다. '하늘'의 넓이를 잴 듯이 '용'은 그리움의 '온하늘을 날아다'닌다. 시들거나 마르지 않고 '새록새록 살아나는 그리움의 비늘'처럼 님을 향한 '용'의 그리움은 결코 넓이를 잴 수 없는 '하늘'이 된다. '용'의 그리움은 항아리의 둥근 곡선을 그리면서 무변(無邊)의 하늘로 확장되고 있다.

  '용'의 몸은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온통 '사랑'의 '비늘'을 옷으로 입었다. '용'은 시적 자아이자 도공(陶工)의 분신이기도 하다. 도공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비늘'옷을 온 몸에 두르고서 비취빛 백자(白磁)의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는 손으로 흙을 빚어내듯 그리움의 '하늘'을 빚는다. '용'은 그리움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둥근 곡선의 하늘을 빚는다. 자신의 하늘과 님의 하늘을 갈라놓았던 사각(四角)의 경계들을 사랑의 힘으로 허물어버린다. 마침내 모든 경계들이 무너지고 모든 한계들이 녹아들면서 둥글어지는 '온하늘'이여!

  '그리움의 비늘'을 몸에 입은 비취빛 '하늘'이 여인의 둔부처럼 넉넉한 곡선의 항아리가 되어 '머리끝에서 꼬리끝까지' '용'을 품어안고 있다. '용'은 사랑의 힘으로 '하늘'을 점령하여 '하늘'의 끝을 항아리 속으로 빨아들이고 한껏 구부려서 '그리움'의 집을 지어놓았다. 그 집 속에 '용'이 세 들어 살고 있다. 시적 자아(詩的 自我)   이자 도공의 분신이었던 '용'은 자신의 몸을 붓으로 삼아 절실한 그리움을 하늘의 캔버스에 형상화하였다.

  '그리움'이라는 정념(情念)은 도공의 치열한 장인정신을 통해 예술작품의 형상을 입는다. 도공이 흙을 빚어 비취빛 '하늘' 모양의 '항아리'를 갈무리하듯이, 시인은 언어를 빚어 시의 '항아리'를 갈무리한다. '도자기'에 빛이 흐르지 않는다면 예술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듯이, '녹물 든' 언어를 갖고서는 훌륭한 '시'를 창조할 수 없는 법이다. 이 점에서 시인 황형철은 생명력이 강한 시를 낳을 수 있는 자궁은 시인의 내면세계임을 강조하면서, 그의 내면세계를 '우물'에 비유하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안에는 좀처럼 길어 올려지지 않는 말들이 가득했다 두레박을 내려도 파장만 일으킬 뿐 좀처럼 퍼낼 수 없었다 우물 안과 밖의 경계는 가까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속으로만 깊어지는 내면은 열 수 없는 문처럼 단단했다 궁리 끝에 긴 호스와 양수기를 연결하고 수도꼭지를 달았다 우물의 오랜 내력보다도 동력은 우월했다 그 후론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만큼 말을 끌어 올 수 있었다 행복한 날들이라며 연방 키득거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녹물 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을 탕진할수록 살들이 켜켜이 쌓여 몸은 비만이 되어 갔다 우물 깊은 곳에선 알 수 없는 말들이 귀신처럼 웅웅거렸다


                - 황형철의 「우물」 전문. 《문학미디어》 2007년 봄호. 

 

     

  '좀처럼 길어 올려지지 않는 말들이' '내면'의 '우물' 속에 '가득' 차 있다. 고뇌의 '두레박'과 상상의 동아줄로 '우물' 속의 '말들'을 '길어 올려'야만 비로소 시인은 이 '말들'을 재료로 삼아 시의 '항아리'를  빚을 수 있다. '내면'의 '우물' 속으로 고뇌의 '두레박'을 드리울수록 '우물'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시인의 고뇌는 그의 내면세계를 이전보다 더욱 확장시키는 마법의 힘을 발휘한다. '우물'은 깊어질수록 청정한 물이 고여들고, 시인의 내면세계는 사색이 깊어질수록 진실한 언어들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겐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무서리’가 내리는 시련의 ‘밤’을 내면의 사색을 통해 견뎌내고 ‘천둥’치는 절망의 ‘먹구름’을 고뇌의 힘으로 인내하면서 ‘한 송이의 국화꽃’이 열리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참조).

  '내면'의 '우물' 속에서 사색의 효소를 먹고 자연스럽게 발효된 '말들'이 고뇌의 '두레박'에 담기어 마침내 '길어 올려지'는 필연적인 창조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긴 호스와 양수기를 연결하고 수도꼭지를 달'아 기계의 '동력'을 통하여 '우물' 속의 물을 끌어올린다면 '녹물'이 '쏟아져' 나오기 쉽다. 그 '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게 된다.

  '내면'의 '우물'로부터 아직 발효되지 않은 '말들'을 추상적인 관념의 '동력'을 통하여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만큼' 기계적으로 끌어 올려서 시를 작위적으로 조합해나가는 시인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이렇게 끌어 올려진 시의 '물'은 독자의 정저적 갈증을 해갈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정서적 환경에 공해를 유발할 수 있다.

  황형철은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곡진한 인생체험과 녹녹치 않은 습작 경험을 통하여 이점을 이미 알아버린 듯 하다. 추상적인 관념의 '호스'와 순간적인 착상의 '수도꼭지'에만 의존하여 '녹물 든 말들'을 먹고 마시면서 시의 몸을 '비만'처럼 부풀려 나갔던 지난 날의 창작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시적(詩的) 참회록을 쓰고 있다.

  그의 참회록은 잠들었던 예술혼을 일깨워서 진정한 장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시인의 내면적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고뇌로운 출사표이다. 또한 황형철의 시 「우물」은 사이비시가 우후죽순처럼 번성하고 있는 오늘날의 창작풍토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종의 잠언시(箴言詩)이기도 하다. 시 「우물」은 이론과 사상의 틀 속에 '말들'을 작위적으로 끼워 맞추는 마리오넷 같은 시들이 '녹물 든 말들'처럼 쏟아져 나오는 오늘의 문단현실에 경종을 울려준다.

 

                                              - 송용구(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출처/ 현대시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