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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이용악 시의 인물형상에 대하여 / 이은봉

by 丹野 2009. 6. 24.

 

                      이용악 시의 인물형상에 대하여

 

                                                                                                                     이은봉


1. 머리말

문학을 가리켜 흔히들 인간학이라고 한다. 결국은 인간 문제를 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면은 그 하위 장르인 서정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서정시 또한 인간 현상의 하나이고, 따라서 그 구체적인 모습이야 어쩌든 인간의 면면을 담아낼 수밖에 없기 대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면면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뜻은 인간의 정신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되지만 인간 자체의 인물형상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뜻도 된다. 서정시의 창작 주체 역시 구체적인 인물형상이니 만큼 그 주체로서의 측면이나 대상으로서의 측면에 인물형상이 자리잡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서정시의 하위 장르 중의 하나인 이른바 리얼리즘 시에 항용 어떤 방식으로든 인물형상이 다루지는 것은 짐짓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창작의 주체나 대상의 측면에서 사회적인 관점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리얼리즘 시라면 그것이 인물 형상을 포괄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면은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이용악 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리얼리즘 시에서 인물형상이 포섭되는 방법은 지난 1990년대 초 이른바 '리얼리즘 시 논쟁'이 한참 불거졌을 당시에도 수 차례 논의된 바 있다. 김형수, 오성호, 윤여탁, 최두석, 필자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즈음의 시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 논쟁의 전말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로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들 논쟁을 통해 합의된 것을 간략히 요약하면 마가렛 하그네스의 노동소설 {도시의 처녀}를 대상으로 정초한 엥겔스의 리얼리즘에 관한 고전적 명제를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서정시의 창작과 연구에 적용할 수는 없다는 점 등이라고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엥겔스에 의해 주장된 리얼리즘의 주요 개념은 세부의 진실성, 전형적 상황, 전형적 인물로 나누어 요약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유보사항을 두는 가운데 필자와 최두석이 당시에 주장한 것은 '전형적 상황'과 '전형적 인물'의 개념 정도는 적절히 변형을 가할 때 서정시에 구현되어 있는 리얼리즘의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방편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 정도이다.
물론 리얼리즘이라는 고정된 관점을 이용해 이용악 시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을 검토하려고 하는 것이 본고의 의도는 아니다. 리얼리즘과 관련할 때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인 전형의 개념으로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기보다는 좀더 폭넓은 시각으로 그의 시 일반에 실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의 전모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일련의 특징을 점검해보려는 것이 본고의 주요 목적이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리얼리즘 시 논쟁'을 통해 획득된 노하우를 아주 폐기하거나 방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졸저 {한국현대시의 현실인식}에서 거론되고 해결된 많은 문제들도 과감하게 받아들여 논지를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그렇다면 일단은 먼저 필자에 의해 정리된 서정시 일반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 형상화의 방법부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용악의 시라고 해서 서정시 일반(리얼리즘 시를 포함해서)에 실현되어 있는 인물 형상화의 방법으로부터 특별히 유리되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를 간략히 요약하면 첫째 시적 주체로 드러나는 경우, 둘째 시적 대상(시적 객체)으로 실현되는 경우, 셋째는 주체와 객체로서의 이들 인물이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며 구현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주체(화자)로 드러나는 인물형상은 시인 자신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지만 시인에 의해 가공된 배역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용악의 시에서 특별히 가공되어 드러나는 인물형상, 다시 말해 배역으로 구현되는 인물형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시적 대상(시적 객체)으로 나타나는 인물형상은 사실적인 인물형상으로 직접화되는 경우와 비유적인 인물로 간접화되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의 사실적인 인물형상이 직접적으로 대상화되는 예이고, 후자는 추상적인 인물형상이 객관상관물로 드러나거나 감정이입의 상징물로 드러나는 예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면서 드러나는 예는 각각의 무게 중심에 따라 그 면모를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주체가 강화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 객체가 강화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 이들이 각기 좀더 정확한 비율로 구현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이 그 예이다. 이처럼 섬세하게 인물형상의 모습을 분류, 고찰할 수 있는 것도 이용악 시의 한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시에 구현되어 있는 이들 인물형상을 가리켜 리얼리즘적 전형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다소간 망설여지는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들 인물형상을 자세히 분류, 분석해보는 것도 그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현대시에서 인물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가를 이용악 시를 예로 들어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의미가 있으리라는 뜻이다.

 

 

 



2. 주체로서의 인물형상

동시대에 활동한 백석이나 오장환의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주관적 정서가 좀더 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이용악의 시이다. 형상의 자질 가운데 정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그의 시에 시적 주체로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이 적잖이 나타나는 것도 어쩌면 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거친 듯 싶지만 매우 독특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인데,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세계보다는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도 그의 시가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용악의 시에 드러나 있는 시적 주체(화자)로서의 인물형상은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야말로 '주인공'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작품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인물형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그 자신이 하나의 인물형상으로 작품의 전면에 나타나 있는 것이 그의 시의 한 특징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지적을 이용악의 시가 별다른 허구적 가공 없이 그 자신의 현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아무리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인물형상을 제재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품 속에 구체화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모습으로 전이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적 자아는 창작의 과정에 일정한 정도 변형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을 담아내고 있는 이용악의 시라고 하더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그의 시에서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항용 지식인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이용악 자신의 현존적 자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인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강한 자기 연민으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시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깊은 상실의식을 바탕으로 한 비관적 전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시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당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그의 오랜 고뇌와 고민의 표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러러 받들 수 없는 하늘
검은 구름이 쏟아져내린다
왼몸을 굽이치는
병든 흐름도 캄캄히 저물어 가는데

예서 아는 이를 만나면 숨어버리지
숨어서 휘정휘정 뒷길을 걸을라치면
지나간 모든 날이 따라오리라

썩은 나무다리 걸쳐 있는 개울까지
개울 건너 또 개울 건너
빠알간 숯불에 비웃이 타는 선술집까지

푸르른 새벽인들 내게 없을라구
나를 에워싸고
외치며 쓰러지는 수없이 많은 얼골은
파리한 이마는 입설은 잊어바리고저
나의 해바라기는
무거운 머리를 어느 가슴에 떨어트리랴

이제 검은 하늘과 함께
네거리는 싫여 네거리는 싫여
히 히 웃으며 뒷길로 가자
―[뒷길로 가자] 전문

이 시에 시적 화자의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은 말할 것도 없이 이용악 자신이다. 그 자신의 현존적 심리상태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따라서 이렇게 창출된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가 그다지 건강하게 생각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일제강점기 말 극도로 폐쇄된 상황하에서 시인 이용악이 지닐 수 있는 심리상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의 기본 정서가 무력감·절망감·상실감 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그러한 정서는 생명의 정서라고 하기보다는 죽음의 정서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이 예의 죽음의 정서를 아무런 반성 없이 있는 그대로 수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그러한 정서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라는 뜻이다. 이는 특히 제4연의 "푸르른 새벽인들 내게 없을라구"와 같은 구절에 의해서 확인이 된다. 아직은 그가 새벽에 대한 기대, 즉 해방의 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보여주는 그러한 면은 이 시의 제목 '뒷길로 가자'의 뒷길의 의미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뒷길은 일단 먼저 네거리의 대립 개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광장과 대립되는 밀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네거리가 일제 말의 지배세력이 허용하는 합법적인 길을 뜻한다면 뒷길은 결코 그들이 허용하지 않는 비합법, 반합법적인 길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네거리는 싫여 네거리는 싫여/히 히 웃으며 뒷길로 가자"에서도 이는 충분히 확인이 된다. 이 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오히려 "히 히 웃으며" 기꺼이 "뒷길"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비합법, 반합적인 길로 나가기를 작정하면서 느끼는 심리상태를 기반으로 하고 작품인 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은 의심할 바 없이 이용악 자신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가 전혀 보편성이 없는, 전적으로 특수하고 개별적인 이용악 자신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모든 시적 주체는 창작의 과정에 수식되고 가공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얼마간은 허구적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의 서정적 주인공은 이용악 개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당대 현실의 보편적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용악의 시에 이러한 방법으로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구현되어 있는 작품으로는 [벌판을 가는 것] [해가 솟으면] [하나씩의 별] 등을 더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도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은 여전히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들 인물형상이 어느 작품에서나 매번 이처럼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배역으로서의 화자를 차용함으로써, 다시 말해 가공된 탈(Persona)를 차용함으로써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구현되고 있는 작품도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벗어나 임의로 창조된 인물형상을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화자의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용악의 작품 중에서는 이러한 방법적 자각이 응용되어 있는 예가 매우 드물다. 구태여 찾아보자면 [나를 만나거든] 등에서 겨우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시는 앞의 작품과는 달리 시적 화자로서의 인물형상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취하고 있어 주목이 된다. 이 시에서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공사장의 일용 노동자로 가공되고 있는 셈이다.

땀 마른 얼골에
소금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
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
내 손을 쥐지 말라
만약 내 손을 쥐더라도
옛처럼 네 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아다오

주름잡힌 이마를
石膏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
먹었냐고 묻지 말라
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고
꿈 같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한 마디도
나의 沈默에 侵入하지 말어다오

폐인인 양 씨드러져
턱을 고이고 앉은 나를
어둑한 廢家의 回廊에서 만나거든
울지 말라
웃지도 말라

너는 평범한 表情을 힘써 지켜야겠고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어다오.

일찍이 백철이 지적한 것처럼 이 시는 이용악 특유의 침통한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침통한 서정이 밝고 건강한 생명의 정서, 자유의 정서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시가 그러한 정서를 담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시 일반이 함축하고 있는 비애의 정서, 상실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은 공사장 일용 노동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땀 마른 얼골에/소금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과 같은 구절에 의해서 이는 확인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물형상이 건강한 모습으로 공사장의 노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石膏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이기도 하고, "폐인인 양 씨드러져/턱을 고이고 앉은 나"이기도 한 것이 이 시에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도의 인물형상이라면 이용악 자신의 자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시를 쓰던 시절 일본의 상지대학 신문학과에 다니던 그가 갖가지 품팔이 노동꾼으로 최하층 생활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는 증언이 있고 보면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을 가공된 허구적 화자, 즉 배역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렇다. 필자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점을 십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적극적인 노동의식을 지니고 있다든지, 노동자로서의 자아를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다든지 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적잖이 가공되고 꾸며진 인물형상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시에 드러나 있는 모든 자아는 어차피 시인이 추구하는 진실과 관련하여 적절히 분장되고 수식되기 마련이다. 미적 여과과정을 밟다보면 자연스럽게 가공되고 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시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역으로서의 인물형상은 그것이 이루고 있는 정도의 편차에 따라 그 실제 여부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용악의 시에 드러나 있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은, 곧 배역은 아주 소략한 정도의 가공에 그쳐 있는 셈이다.


한편 [冬眠하는 昆蟲의 노래]에서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땅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미래를 준비하는 곤충으로 비유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둥글소의 앞 발에 의해" "갖은 학대를 체험"했기에 "깊이 땅속으로 들어"가 "날카로운 무기를 장만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에 곤충으로 비유되어 있는 인물형상이다. 이러한 인물형상은 이용악 자신의 생애를 알게 하는 개인적인 가치로도 작용하고 있지만 일제 강점기 지식인 전체의 삶을 알게 하는 보편적 가치로도 작용하고 있다. 당시의 지식인 모두가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곤충의 동면과 같은 인내의 시간을 겪지 않을 수 없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객체로서의 인물형상

이용악의 시에 시적 대상으로 포착되어 있는 인물형상은 일단 사실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와 비유적인 인물형상을 취하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비유적으로 인물형상을 취한다는 것은 객관상관물을 이용하여 인물형상의 특징을 강화하고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 때의 인물형상은 생물로 또는 무생물로 상징되고 있어 좀더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그의 시 중에는 시적 대상으로 객관화되고 있는 인물형상이 시인 자신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우선은 [등잔밑]이라는 시에 시적 대상으로 표출되어 있는 '사나이'를 통해 그러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이용악 자신이 시적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형상의 예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그보다는 이들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을 통해 그의 가족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족들의 인물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품은 무려 10여 편에 이를 정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우리의 거리], 어머니와 누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드러나 있는 [달 있는 제사], 누나와 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다리 위에서], 누나와 누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버드나무], 딸 선혜와 아들 창, 그리고 아내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 [유정에게] 등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는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아버지의 인물형상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 두루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寢牀 없는 최후 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露領을 다니면서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 寢牀 없는 최후 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 시에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으로 구현되어 있는 화자의 '아버지'는 "우리집도 아니고/일가집도 아닌 집/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숨을 거둔다. "露領을 다니면서/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마는 것이 화자의 아버지이다. "때늦은 의원이 아모 말없이 돌아간 뒤/이웃 늙은이 손으로/눈빛 미명은 고요히/낯을 덮었다" 등의 구절로 미루어 보면 치료 한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한 것이 화자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 시가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는 까닭은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된다. 비록 압축되고 응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가 무엇보다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형상들의 행위가 깨어 있는 이야기를 형성하는 가운데 점차 그 면모를 갖춰 가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때의 이야기는 물론 형상의 중요한 자질로 작용하면서 저 스스로 유의미성을 갖는다. 이 때의 유의미성은 말할 것도 없이 시인의 세계관을 가리킨다.

 

여기서 정작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 시의 아버지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결코 개별적이고 특수한 차원에 멈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곧 이 시에서의 아버지가 당대 사회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충분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대 사회를 매우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인물형상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적 객체로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은 [제비같은 소녀야] [강가] [버드나무] [하늘만 곱구나] [나라에 슬픔이 있을 때] 등의 작품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강가]와 같은 작품은 그 시대 민족현실의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인 인물형상이 반영되어 있어 주목이 된다. 식민지 치하 민중 일반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은 그야말로 그 시대의 민족현실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들이 나오는 올 해엔 걸어서라두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 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이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쵠지
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

이 시에서 시적 객체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형상은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늙은이의 모습은 결코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벌써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청진의 "높은 벽돌 담" 안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 시만으로는 늙은이의 아들이 어떤 이유로 청진의 "높은 벽돌 담" 안에 갇혀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라는 당대의 사회상황으로 미루어보아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청년일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시가 보여주는 좀더 생생한 감동은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늙은이'가 "암소 따라 조이밭 저쪽에 사라진 뒤"에 나타나는 눈물겨운 풍경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쵠지/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라는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가 다름 아닌 그것으로, 이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준다. 그것이 무엇보다 밥을 지어먹고 살길을 찾아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 이농민들의 보편적인 삶의 궤적을 유추해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교적 길지 않은 시에서도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은 뜻밖의 감동을 산출한다. 물론 이러한 감동이 이 시에서처럼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에 의해서만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객관상관물로 선택된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서도 설득력 있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실현되고 있는 인물형상들은 당대의 사회현실과 인간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적잖이 기여를 하고 있어 주목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인물형상은 일단 먼저 [앵무새] [금붕어] [두더쥐] [오랑캐꽃] [흙] 등의 시를 통해 확인이 된다. 이들 작품에 구현되어 있는 객체로서의 인물형상들은 기본적으로 시인 이용악 자신의 '연민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객관상관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넓게 보아 이들 작품에는 비교적 긍정적인 인물형상이 드러나 있는 셈이 된다. 하지만 이들 시와는 달리 [앵무새]에는 부정적인 인물형상이 그려져 있어 좀더 관심을 끈다. 시를 통해 부정적인 인물형상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 그의 이러한 노력은 좀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청포도 익을 알만 쪼아먹고 자랐느냐
네 목청이 제법 이즈러지다

거짓을 별처럼 사랑하는 노란 주둥이 있기에
곱게 늙는 발톱이 한 뉘 흙을 긁어보지 못한다.

네 헛된 꿈을 섬기어 무서운 낭에 떨어질 텐데
그래도 너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다.

이 시는 우선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巧言令色 鮮矣仁'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른바 교언영색하는 사람들에 대한 화자의 비판적 인식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화자는 이러한 인물형상을 구태여 전통적인 유교 가치인 仁의 정신과 결부시켜 드러내지는 않는다. 말을 기교롭게 꾸민다는 '巧言'의 부분은 "제법 목청이 이그러지다"에 대응하고 있고, 낯빛을 영롱하게 꾸민다는 '令色'의 부분은 "거짓을 별처럼 사랑하는 노란 주둥이"에 대응하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앵무새로 상징되는 이 시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에 대해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이는 우선 그가 이러한 인물형상에 대해 "헛된 꿈을 섬기어 무서운 낭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적시하고 있는 데서 확인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하면 그가 "곱게 늙은 발톱"의 소유자라는 점도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다. 늙었다는 것은 낡았다는 것이고, 낡은 것은 결국 새것한테 자신을 내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은 사물이나 관념이 의인화되면서 구체화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더욱 관심을 끈다. '강'을 하나의 인물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天痴의 江아]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와 같은 작품, 고향을 하나의 인물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고향아 꽃은 피지 못했다]와 같은 작품, 죽음을 하나의 인물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죽음]과 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에 구현되어 있는 인물 형상을 정작의 인물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읽다보면 필자의 지금까지의 주장이 다소간은 설득력을 지닌다는 것을 이내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죽음]과 같은 작품에서는 죽음이라는 추상이 하나의 구체적인 인물형상으로 살아 있어 독자들의 상상력에 활기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아무도 이르지 못한 바닷가 같은 데서/아무도 살지 않는 풀 우거진 벌판 같은 데서/말하자면/헤아릴 수 없는 옛적 같은 데서/빛을 거느린 당신"이라는 생생한 인물형상으로 비유되어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추상이기 때문이다.

 

 

 


4.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

이용악의 시에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상호 침투되고 있는 경우도 적잖다. 상호 침투되고 있는 경우는 물론 상호 공존하고 있는 경우를 것을 뜻한다.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인물형상들의 실제 모습이다. 이들 인물형상들의 실제 모습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당연히 그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중요한 노력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상호 공존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관계가 각기 정확한 비율로 드러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창작과정의 심리상태에 따라 아무래도 주·객의 인물형상을 취급하는 비중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인물형상 가운데 어느 하나가 상대적으로 좀더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가운데서도 일단은 먼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좀더 강화되어 있는 작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냇물이 맑으면 맑은 물밑엔
조약돌도 디려다보이리라
아이야
나를 따라 돌다리 위로 가자

멀구광주리의 풍속을 사랑하는 북쪽 나라
말 다릉 우리 고향
달맞이 노래를 들려주마

다리를 건너
아이야
네 아비와 나의 일터 저 푸른 언덕을 넘어
풀냄새 깔앉은 대숲으로 들어가자

꿩의 전설이 늙어가는 옛성 그 성밖
우리집 지붕엔
박이 시름처럼 큰단다

구름이 희면 흰 구름은
북으로 북으로도 가리라
아이야
사랑으로 너를 안았으니
대잎사귀 새이새이로 먼 하늘을 내다보자

봉사꽃 유달리 고운 북쪽 나라
우리는 어릴 적
해마다 잊지 않고 우물가에 피웠다

하늘이 고히 물들었다
아이야
다시 돌다리를 건너 온 길을 돌아가자

돌담 밑 오지 항아리
저녁별을 안고 망설일 지음
우리 아운 나를 불러 불러 외롭단다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 전문

이 시의 말미에는 "―시무라에서"라고 하여 작품을 창작한 곳의 지명이 밝혀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작품이 1930년대 후반 그가 일본의 상지대학 신문학과에서 유학하던 무렵에 씌어졌음을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이 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시인 이용악이 한 여자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일본 유학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동경으로 건너와 알게 된 이 여자는 함경북도 무산읍 최씨 가문 출신으로 당시 동경의 사립 명문 '오쯔마 기예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유정의 증언에 의하면 "태생을 짐작케 하는 귀인성스러운 동그랗고 새하얀 얼굴, 덧니 하나가 있는 옥니를 약간 드러내고 상냥하게 웃"고는 하는, "눈을 씻고 다시 보고 싶은 전형적인 북도 미녀"였다는 것이다. 이 여자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이용악의 시로는 [장마 개인 날]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 [꽃가루 속에] [그리움] [길] [유정에게]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위의 시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에 구현되어 있는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은 다름 아닌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때 그 실체가 좀더 분명해진다. 이와 관련해 생각하면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아이'가 곧바로 말 그대로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 다음에는 우선 먼저 시적 화자로서의 인물형상이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인 이 '아이'에게 "풀냄새 깔앉은 대숲으로 들어가자"라는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적 화자로서의 인물형상에 의해 "사랑으로 너를 안았으니/대잎사귀 새이새이로 먼 하늘을 내다보자"라고 청유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시는 일종의 연애시라고 해야 마땅하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가 "봉사꽃 유달리 고운 북쪽 나라"인 고향을 매개로 하여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인 '아이'에게 사랑을 구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이 시에 시적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인물형상, 즉 화자는 짐짓 딴청을 부리는 여유를 드러내고 있어 좀더 주의를 요한다. "돌담 밑 오지 항아리/저녁별을 안고 망설일 지음/우리 아운 나를 불러 불러 외롭단다" 등의 구절에 의해 특히 이는 확인이 된다. 이러한 여유는 그가 이미 "풀냄새 깔앉은 대숲으로 들어가" "사랑으로 너를 안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아이'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가 좀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을 포섭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인 셈이다.
이처럼 상호 침투되고 있으면서도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강화되어 있는 작품의 예로는 [하나씩의 별] [전라도 가시내] 등을 더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좀더 주관적으로 개입되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반대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인데, 물론 이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보다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강화되어 있는 예가 된다. 이러한 예, 즉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보다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있는 예로는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시골 사람의 노래] [낡은 집]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는 심미적 성취도 적잖아 두루 관심을 끌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해당화 정답게 핀 바닷가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머리 숙이고
숙아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네 애비 흘러간 뒤
소식 없던 나날이 무거웠다
너를 두고 네 어미 도망한 밤
흐린 하늘은 죄스런 꿈을 머금었고
숙아
너를 보듬고 새우던 새벽
매운 사람이 어설궂게 회오리쳤다

성 위 돌배꽃
피고 지고 다시 필 적마다
될 성싶이 크더니만
숙아
장마 개인 이튿날이면 개울에 띄운다고
돛단 쪽배를 맨들어달라더니만
네 슬픔을 깨닫기도 전에 흙으로 갔다
별이 뒤를 따르지 않어 슬프고나
그러나 숙아
항구에서 말러간다는
어미 소식을 모르고 갔음이 좋다
아편에 부어온 애비 얼골을
보지 않고 갔음이 다행타

해당화 고운 꽃을 꺾어
너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놓고
숙아 살포시 웃는 너의 얼골을
꽃 속에서 찾어보려는 마음에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

이 시의 말미에는 "―어린 조카의 무덤에서"라고 하는 작품을 창작한 곳과 관련된 부기가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시는 세상을 떠난 어린 조카 '숙'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일종의 추모시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조카의 영혼에게 독백적으로 말을 걸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인 셈이다.
물론 여기서 이 시에 대해 주목하는 까닭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동시에 구현되고 있으면서도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좀더 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라고 할 때 당연히 그것은 '숙'이를 가리킨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보다는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숙'이와 관련된 시적 서사가 좀더 중심적인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인 것이다.
이 시에서 '숙'이는 아편에 얼굴이 "부어온 애비"와 "항구에서 피 말러간다는/어미"의 딸로서 미처 자신의 "슬픔을 깨닫기도 전에 흙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숙'이는 "장마 개인 날이면" "돛단 쪽배를 맨들어" 주던 이 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의 어린 조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에는 '숙'이라는 서정적 주인공 이외에도 몇몇 인물형상이 더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편에 얼굴이 "부어온 애비"와 "항구에서 피 말러간다는/어미"가 그 예이다. 이들 인물형상들이 이루는 관계를 생각하면 이 시에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은 작품 전체의 중심적 인물형상으로 기능하기보다는 화자의 차원으로 물러나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이 말을 화자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으로 전혀 기능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돛단 쪽배를 맨들어" 주기도 하고, "해당화 고운 꽃을 꺾어" '숙이'의 "무덤 작은 무덤 앞에 놓"기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화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의 캐릭터보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인 '숙'이의 캐릭터가 상대적으로 좀더 강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이처럼 동시에 드러나면서도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이 강화되어 있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품도 있을 수 있다.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좀더 정확한 비율로 구현되어 있는 작품도 익히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과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이 동등하게 공존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장마 개인 날]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에 실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은 대부분 너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상호 대조되는 가운데 우리라는 공동체적 존재로 환원되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은 대부분의 경우 이른바 '너/나'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장마 개인 날]과 같은 작품은 이러한 면에서의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너'를 매우 잘 드러내 주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해오리의 꿈처럼 푸르러
한 점 구름이 오늘 바다에 떨어지련만
마음에 안개 자옥히 피어오른다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모두 6행에 불과한 이 시는 대강 두 대목으로 나누어지는데, 앞의 3행까지를 전반부라고 할 수 있다면 뒤의 6행까지를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전반부에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 즉 화자인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그에 따른 심리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화자인 '나'와 관계하는 가운데 후반부에 이르면서 '너'는 하나의 구체적인 인물형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너'라는 인물형상은 일단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에 의해 "나의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너'는 곧바로 시적 주체로 구현되어 있는 인물형상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라는 구절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해바라기가 태양을 중심으로 얼굴을 돌려가며 웃는 것과 비교되면서 '네'가 '나'에게 반드시 매어 있지 않아도 좋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로서의 인물형상인 내가 보기에 "나의 사람"은 배가 고프고, 따라서 그는 우선 나의 "무릎에 엎디"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해바라기와 달리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일단은 나에게 굴복을 해야 한다는 뜻을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시의 경우 정서의 중심이 전적으로 '너'에게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의 '너'가 '나'의 '너'로 그려져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으로 보면 이용악의 이 시에서 '너'라는 대명사로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은 거의 제대로 된 캐릭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족하나마 '너'로서의 인물형상이 그런대로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는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 [꽃가루 속에] [월계는 피어] 등을 더 예로 들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는 좀더 명확하게 '너/나' 구조로서의 인물형상을 보여 주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 시에서 서정적 주인공인 너와 나는 "남으로 남으로만 달리는" 차의 안에 타고 있다. "보리밭도 없고/흐르는 뗏노래라곤 없는/더욱 못들을 곳을 향해/암팡스럽게 길 떠난/너도 물새 나도 물새인" 이들 인물형상은 끝내 우리라는 공동체로 묶여 "남으로 남으로만 달"린다. 이러한 면은 이 시의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가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인 너를 가리켜 "나의 사람아 울고 싶구나"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구절에 의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정서적 특징은 무엇보다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 역시 앞에서 논의한 바 있는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처럼 일종의 연애시 계열의 작품인 셈이다.
이들 작품으로 미루어 보면 시인 이용악이 언제나 세계 일반과 참다운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추구해온 화합과 합일의 정신은 특히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를 통해서 잘 확인이 된다. 지금은 "내 곁에도 있지 않"고,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있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인 '식'이에 대해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가 느끼는 동일시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러한 점은 해방 직후에 씌어진 그의 시 [항구에서]를 통해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꽃이랑 꺾어 가슴을 치레하고 우리 회파람 간간이 불어보자요 훨 훨 옷깃을 날리며 머리칼 날리며"와 같은 밝고 건강한 정서, 생명의 정서, 자유의 정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세계이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조금은 낯선 시각, 즉 인물형상의 관점으로 이용악의 시세계 전반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본고의 노력이 이용악의 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얼마나 의미 있는 기여를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 견강부회한 부분이 없지 않았고, 따라서 적잖은 한계가 노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으로 이용악의 시를 읽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만은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할 것으로 믿는다.
물론 인물형상의 관점으로 시를 이해하는 것이 서정시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기를 풍미했던 백석 이용악 오장환 등의 시에 대해서만은 이러한 관점을 적용하더라도 충분히 일련의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변형된 모더니즘의 세계관이 또 다시 우리 시단을 풍미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필자의 이러한 작업은 얼마간 답답하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다. 보들레르 이후 랭보와 베르렌느, 말라르메와 발레리를 거쳐 영미 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로 이어져온 모더니즘 시에서는 시작의 전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흔적부터 지우려 해왔기 때문이다. 불협화, 탈규범, 비실제, 감각적 추상 등의 개념도 그렇거니와,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하고자 하는 탈자아, 몰개성, 비인간, 반형상 등의 개념을 생각하면 본고에서의 작업은 자못 당황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가 인간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아무리 탈인간을 추구한다고 하더라고 시 자체가 시인이라는 인간의 산물이라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시단의 현실이고 보면 대강 이러한 정도에서 필자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거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시가 당시의 현실에서 첨단적으로 보여주었던 고민을 검토해보는 것도 제법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까지 논의해온 바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용악의 시에서 인물형상이 포착되는 방법은 시적 주체로 드러나는 경우와, 시적 대상(시적 객체)으로 나타나는 경우, 주체와 객체로서의 이들 인물이 상호 공존하며 구현되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2. 시적 주체(화자)로 구현되는 인물형상은 기본적으로 시인 자신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도 하지만 가공된 배역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도 한다. 전자의 예로는 [뒷길로 가자]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지식인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의 예로는 [나를 만나거든]을 들 수 있는데, 이 시에서는 배역으로서의 시적 주체의 인물형상이 특별히 노동자의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시적 대상(시적 객체)으로 드러나는 인물형상은 사실적인 인물형상으로 직접화되는 경우와, 비유적인 인물로 간접화되는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와 [강가]를 들 수 있는데, 앞의 시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은 시적 화자로 드러나 있는 인물형상의 아버지이고, 뒤의 시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인물형상은 "세 해나 못본 아들을" 청진의 "높은 벽돌 담"에 두고 있는 유랑하는 늙은이다. 이들 인물형상은 공히 당대의 민족현실을 대표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이 된다. 후자의 예로는 [앵무새]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巧言令色의 인물형상이 비판적으로 객관화되고 있어 관심을 끈다.
4. 시적 주체와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이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예는 전자가 강화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 후자가 강화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 상대적으로 각기 좀더 정확한 비율로 구현되고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 자신과,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사랑하는 연인(아이)이다. 후자의 예로는 [검은 구름이 모여든다]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화자 자신과,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세상을 떠난 어린 조카 '숙'이다. 상대적으로 각기 좀더 정확한 비율로 실현되어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은 [장마 개인 날]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등의 작품에 의해 확인이 된다. 이들 시에 나타나 있는 주·객 공존의 인물형상은 시적 주체로서의 인물형상인 '나'와 시적 객체로서의 인물형상인 '너'이다. 앞의 시에서 '너'는 '나'의 연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뒤의 시에서 '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인 '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 8 이은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