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 전통 서정의 새로운 흐름에 대하여
김 수 이
1. 다시, 서정이란 무엇인가?
‘시의 새로운 서정성’이라는 주제는 많은 의문부호로 시작될 필연성을 안고 있다. 서정은 명확 히 정의할 수 없는 대상이며, 인간의 내밀한 영역에 관계하는 서정이 새롭게 혁신될 수 있는지도 의문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수락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체화해 온 삶의 방식이다. 삶과 죽음, 시간과 타자, 세계와 운명 등의 ‘미지(未知)’는 해독되지 않은 채로 인간 의 일부가 되어 있다. 삶의 주체인 인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능숙하게 ‘사용’하며 살아간다.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의 목록 가운데 하나인 서정은 시대를 초월한 ‘지속’과 시대에 부합하는 ‘변화’의 이중적인 속성을 지닌다. 서정은 존재와 세계의 미묘한 관계가 집약된 가장 미세한 결정(結晶)이며,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다채로운 결정이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서정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에 기초한 서정의 지속적인 측면과, 이 시대가 촉발한 서정의 변화의 측면을 두루 성찰해야 한다.
한 편의 서정시가 시대와 사회를 넘어 빛을 발하는 한편, 서정시라는 장르의 외장(外裝)과 내용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현상은 서정의 근본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서정이란 역사적이면서도 초역사적인 것,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것,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것이다. 서정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그것도 여러 쌍의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라고 할 수 있다. 서정의 다채로운 얼굴은 시간의 무화를 꿈꾸면서 시간에 의해 풍화되고 또 새롭게 생성된다. 서정의 얼굴은 시간을 견디면서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의 얼굴을 닮아 있다. 시간을 견딘다는 것은 주체의 내부에 있는 ‘동일성의 지속’을 뜻하며,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주체의 내부를 변화시키는 ‘타자성의 유입’을 의미한다. 새로운 서정은 주체가 세계를 장악한 결과인 동일성과 외부 세계가 침투한 흔적인 타자성의 조율에 의해 형성된다.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감각과 새로운 사유가 새로운 서정을 움트게 하는 것이다. 종래의 서정시에서 이 이질성은 주체의 내면에 흡수되어 주체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영향력 또한 크지 않았다. 최근의 시에서 주체의 외부에서 유입된 타자성은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고 재편성하며, 서정적 주체의 동일성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확보된다.
우리 시대의 서정적 주체는 타자성의 한가운데서 타자와 분열된 채로 같은 처지에 놓이는 ‘부정적인 동일성’ 동일성의 체험은 주체와 대상의 긍정적인 일치와 부정적인 일치로 나뉠 수 있다. 서정 장르를 자아와 세계의 조화로 보는 조동일이나, 서정의 본질을 ‘동일성의 미학’으로 해명하는 김준오는 동일성의 체험을 주체와 대상의 긍정적인 일치로 규정한다. 이는 두 사람의 독특한 관점이라기보다는, 수천 년간 서정시가 암묵적으로 지켜온 미학적인 규범에 주석을 단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에 와서 주체와 대상의 긍정적인 일치는 실질적으로 어려우며 시의 중심담론에서도 점차 밀려나고 있다. 지금 문제는 주체와 대상의 분열과 소외이며, 그 부서지고 깨어진 시적 현실에 대한 주체의 복잡하고 모순된 반응이 다. 시적 주체는 부정적인 현실과 대립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의 풍경이라는 발견에 이르면서 씁쓸한 ‘부정적 동일화’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고도기술문명의 현대사회에서 시인이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일화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와 타자의 부정적 동일화는 “나와 타자는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똑같이 부서져 있다”는 진술로 요약된다. 주체의 동일성은 자기 자신이나 타자와의 행복한 화합이 아닌, 불행의 공유라는 동병상련의 인식을 통해 확보된다. 이 동일화는 소통이 단절된 상태의 동일화, 현장에서의 교감이 아닌 격리된 상태에서의 상상력 에 의해 달성되는 동일화이다.
이제 서정시는 ‘거리의 서정적 결핍'보다는 오히려 ’거리의 서정적 과잉‘, 즉 분열을 통해 탄생한다. 거리의 서정적 결핍이 시적 주체와 세계를 밀착시킨다면, 거리의 서정적 과잉은 서로를 밀어내게 한다. 오늘날 시인은 세계를 완전히 흡수할 수 없으며, 전존재를 걸고 세계 속에 투신할 수도 없다. 시인과 외부 세계는 치명적으로 어긋나 있다. 기묘하게도 거리의 과잉은 세계가 넓어진 탓이 아니라, 세계가 좁아진 까닭에 발생한다. 인간과 물질과 문학이 넘쳐나는데도, 정작 ’인간‘과 ’물질‘과 ’문학‘은 귀해지는 현실을 생각해 보라. 전체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개체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현상 이 범람할수록 본질은 실종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세계의 ’안‘은 복잡해지면서 좁아지고, ’밖‘은 밀려나면서 더욱 넓어진다. 세계는 축소되는데 존재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고, 존재들은 단절된 상태에서만 서로 동류임을 확인한다.
예전의 서정적 주체가 누렸던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은 이제 모두가 파편화된 존재라는 사실 확인의 차원으로 축소된다. 동일성의 붕괴를 견디고, 타자 와 내가 똑같이 부서진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서정적 주체의 새로운 동일성의 내용이 된 것이다. 주체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저항함으로써 간신히 주체가 되는 주체! 이 시대의 서정적 주체는 이렇게 위태롭고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의 시에서 서정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서정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갈등에 기인한다. 근대적인 것은 서정적인 것의 속성을 변화시키면서 전통 서정의 미학에 균열을 만든다. 전통 서정의 미학이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일성의 미학으로 압축된다면, 대상과 세계의 불신에 기반한 현대 예술은 주체와 대상의 분열을 포착하는 타자성의 미학으로 응집된다. 현대사회에서 자아와 세계의 근원적인 합일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타자성의 미학은 정교한 시스템이 인간을 통제하는 현실에서 동일성의 실현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서정적 가치가 동경하는 신화적 아우라와 근대가 추구하는 기술적 비전은 정반대의 지점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화해하기 힘든 간극이 가로놓여 있다. 현실적인 시각에 서 볼 때도 기계와 실체 없는 이미지로 뒤덮인 근대의 제국에 물기를 머금은 서정의 꽃이 피어날 땅 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서정/서정성/서정시는 많은 질문에 둘러싸인다. 분열된 세계에서 분열된 언어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일은 가능한가? 존재의 내면을 말살하려는 현실 세계와 존재의 내면에서 싹트는 서정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자연의 시대의 산물인 전통 서정은 전자시대의 치밀한 통제망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가? 시의 위상이 점차 옹색해지는 현실에서 이런 물음은 서정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칼이 된다. 이제 시는 ‘잘 빚어진 자아의 노래’가 아닌 ‘부서진 타자의 노래’를 불러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기계- 신(神)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잘 빚어진 자아’는 신화나 허구의 땅에 유배된 지 오래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타자가 되어 버렸다. 자아와 세계의 서정적 일체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에 따라 메마른 현실에서 씁쓸한 서정의 즙액을 추출하는 아이러니가 시의 발생적 지반이 되고 있으며, 그 생즙의 쓴맛을 달콤함으로 느끼는 이상한 쾌락의 관습이 형성되고 있다. 황폐한 세계에 수분을 빼앗긴 서정시 전반에 이런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특히 전통 서정이 뿌리내릴 자리가 위축되어 가는 것은 서정시 자체의 존립 문제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사태의 전모일까? 전통 서정이 새롭게 거듭나는 장면들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서정의 새로운 혁신은 오래된 것의 바탕과 쇄신이 없 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2. 서정적 주체의 모호한 정체성과 ‘개인/시인’으로 존재하기
최근 젊은 시인들은 앞 세대와의 미학적 차이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 시의 새로운 서정성이라는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논의의 대상을 축소하여야 한다. 이 글은 전통 서정과 친화력을 보이면서도 그 변주를 시도한 젊은 시인들로 논의 대상을 한정하기로 한다.
전통과 모더니티 양자 모두에 일정한 거리를 둔 시인들은 하나의 선명한 범주로 묶이지 않는다. 이들은 한 편의 시에서도 단일하지 않은 서정적 주체를 내세우며, 자연과 세계와의 합일보다는 균열된 현실과 내면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전통을 고수하거나 전위적인 실험을 행하지도 않으며, 자연에 귀의하거나 도시의 일상에 편입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본질적인 세계와 조각난 현실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이 바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모호한 존재 지점은 현실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이탈하지도 않는 시적 태도와 의식으로 표출된다.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고자 하는 시인들은 세계 밖으로 도피하거나 섣불리 화해하지 않으며, 자율적인 미학의 영토를 개척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시적 목표는 세계를 자아의 내부에 전유하는 몰입의 경지도, 경쾌하고 현란한 미적 유희도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내적 지향에 있어서는 동일성의 미학을, 현실을 포착하는 데는 타자성의 미학을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근원에 대한 따뜻한 꿈을 간직한 채 싸늘한 현실을 차분히 응시하고, 시적 열망과 시적 현실의 간극을 직시하면서 감싸안으려 하는 것은 오늘의 젊은 시인들이 지닌 두 개의 상반되는 열정이다.
동일성과 타자성의 미학은 이분법적 구분이지만, 서정의 토대와 새로운 맥락을 잘 드러내기에 상술될 필요가 있다. 두 미학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의해 서정의 속성을 규정한다. 자아와 세계의 신화적 일체감을 추구하는 동일성의 미학은 서정이 동일화의 순간에 자연스럽게 ‘유출(流出)된다’고 보며, 현대사회의 분열 상황에 주목하는 타자성의 미학은 찢겨진 자아와 세계의 틈으로 서정이 폭발하듯 ‘분출(噴出)한다’고 본다. 자아와 세계의 근원적 일치를 노래하는 동일성의 미학은 상응correspondence과 일치harmony의 행복한 의식에 도달하고, 자아와 세계의 분열을 증언하는 타자성의 미학은 찢겨진 파토스pathos의 불행한 의식으로 귀결된다. 두 미학의 차이는 은유와 환유의 원리와도 설명될 수 있다.
주체와 대상의 마법적인 일치를 지향하는 은유는 동일성의 미학과 상통하고, 세계의 파편들 사이를 옮겨다니면서 현실의 분열을 드러내는 환유는 타자성의 미학과 궤를 같이 한다. 이로 인해 은유의 원리는 긍정/조화의 세계관과 공감의 서정으로 전환되며, 환유의 원리는 부정/위반/해체의 세계관과 반서정의 미학으로 변주된다. 부정의 사유인 타자성의 미학은 신화시대의 마법적 유산인 동일성의 미학을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로 치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의 신비로운 아우라는 상실되었고, 인간은 갖가지 억압과 상실 속에 놓여 있으며, 눅눅한 일상은 싱그러운 서정의 정원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동일성의 미학의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말할 만한 근거는 현실적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최근의 시인들은 ‘거리의 단축shortening of distance’이 아닌, ‘거리의 확대’와 ‘거리의 파탄’ 속에서 시를 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를 굴절과 해체의 미학으로 변용하여 미적 자율성의 기반으로 삼았지만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근대를 향한 미적 응전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자해를 통하여 새로움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래서 현대시는 스스로 보인 온갖 부정의 언어들, 난폭한 언어들로 궁극적으로 근대를 닮아가게 되었다.”(구모룡, 「시와 시선 Ⅱ」, <신생>, 2000, 겨울, p. 139.)는 주장은, 모더니즘의 자기 해체의 미학을 단순화한 면이 있음에도 적잖은 타당성을 지닌다.
이제 동일성의 서정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자아와 세계의 닮은꼴을 발견하는 방식으로(만) 실현된다. 권력과 기계-신 앞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한 비루한 세계는 시인들의 염오의 대상이지만, 불순한 세계를 그들 역시 알게 모르게 복사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시인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동일화되며, 서로 단절된 채로 동일화된다. 세계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인 일체감은 친화력이 아닌 거부감으로 이어져, 그러한 세계와 자신을 다시 부정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부정적 동일화의 뚜렷한 예를 우리는 배용제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밤새 고양이가 할퀴고 간 쓰레기 봉투 안,
내가 헝크러진 채 쏟아진다
몇 장의 고지서이거나 구겨진 낙서 조각으로
또는 삼키지 못한 음식물 찌꺼기가 되어
역겨운 냄새를 풀풀 날리고 있다
그것은 살이 뜯긴 앙상한 과거이거나
버려진 기억의 나,
― 배용제, 「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 부분 배용제,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민음사, 1997.
서정적 주체는 세계라는 “쓰레기 봉투 안”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썩어가는 오물과 등가화된다. 온갖 것이 뒤섞인 쓰레기더미로 환유된 ‘나’는 복수를 가장한 단수이며, 부패 중인 자아의 다발은 주체의 내적 차이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배용제는 파멸과 죽음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더 지독하게 파멸할 수 있는 자유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본래의 길을 가지 않는다.”(「폭주, 그 황홀한 파멸」)는 ‘저항적’인 문장은 ‘진정한 생’의 ‘봉투’에서 “헝크러진 채 쏟아진” 자들의 생의 슬로건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배용제의 시는 ‘본래의 길’을 가지 않는/못하는 자의 아픈 비명이자, 그 길에 대한 열망의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세계와 자아의 부정적인 공통점을 응시하면서도 여전히 본래적 세계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않는다. 세계와 자아의 ‘부정적인 동일화’는 파탄과 허무주의를 견제하는 자의식(이 자의식마저 버릴 때, 주체는 완전히 파멸하게 된다), 생에 대한 열정과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용제처럼 세계와 자아의 ‘부정적인 동일화’를 모던한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최근 시의 보편적인 흐름에 속한다. 그렇다면, 전통 서정에 친화력을 지닌 시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을까? 이문재는 배용제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다른 언어와 자의식을 선보인다.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이문재, 「마음의 오지」
2연 이문재,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서정 시인은 자신을 전유하면서 망각한 몰아의 상태를 열망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믿는다. 이런 점에서 “내가 그립다”고 말하는 ‘나’는 서정적 주체의 전통적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미달형의 주체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을 들여다보는 반성적 자아 역시 전통 서정의 기율보다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흡수하고 있다. 전통 서정의 현재적 변용은 이처럼 본래의 자아를 꿈꾸는 복수화된 서정적 주체의 등장과, 동일성의 미학과 타자성의 미학의 혼융으로 나타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과 ‘나를 그리워하는 나’는 자기 동일성의 열망을 간직 한 채 고통받고 있는 자아이며, 동일성과 타자성이 혼재된 자아이다. 분열된 채 뒤엉킨 여러 개의 자아는 본래의 자신을 그리워하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것은 인간과 문명에 의해 살해당한 ‘자연’이다. 따라서 이문재에게 ‘나’를 그리워하는 일은 자연의 부활을 꿈꾸는 일과 같은 일이 되며, 그는 ‘자연의 장례’를 통해 인간과 자연, 자아와 세계의 끊어진 핏줄을 이으려 한다.
저 낙엽들은 뿌리로 내려가 실뿌리를 만나지
못하고 매립지로 실려가겠지요, 그런데 어디 낙엽만
그런 것일까요, 이번 가을만 그런 걸까요, 뿌리로,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무의 전생, 혹은 후생들
이 찬비 내리는 보도 블록에 착, 달라붙어 있습니다
농업박물관 앞, 깨진 보도 블록 한 장을 들어내
고 작은 낙엽 한 장을 집어넣어주었습니다. 작은 장
례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당신의 이름을 부르
는 것인데, 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습니다, 모
르겠는 것입니다
― 이문재, 「농업박물관 소식 - 거리에 낙엽」
부분 이문재, 위의 시집.
전통 서정은 자연의 유기적인 질서를 원전으로 한다. 동일성의 미학이 추구하는 자아와 세계의 진정한 합일은 자연이라는 자족적인 생명 공동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장려하고 신성한 세계는 붕괴되었다. 끔찍한 붕괴의 현장은 바로 내가 밟고 있는 ‘보도 블록 밑’에 있다. 이문재는 문명이 자연을 살해해 암매장한 현장에 낙엽을 묻으며 혼자만의 장례를 치른다. 깊은 연민과 작은 생태적 실천이 어우러진 이 의식은 자연의 초토(焦土)인 도시에서 ‘나’의 무기력함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난감한 시인은 “나는,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는 것입니다”라고 비탄에 젖어 중얼거린다. 스스로를 “도시-자본주의 -근대의 사생아”라고 칭하는 이문재는 문명사적 위기와 인간의 실존, 시쓰기를 하나의 문제로 인식한다. 그에게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개인으로 존재하기’이다. 개인으로 존재하기란, 고도기술사회의 통제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며, 시적 사유의 영원한 원천인 ‘자아’를 지켜낸다는 의미이다. 이문재에게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은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며,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나는 ‘개인’이기 위하여, 개인을 옹호하기 위하여 시를 쓴다. 개인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선천이나 선험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의식, 즉 깨어있음만이 개인을 가능케 한다. 나에게 시쓰기는 개인으로 존재하기와 같은 말이다.
― 「미래와의 불화」(시인이 쓰는 시 이야기)
이문재, 위의 시집, pp. 101~102. 중에서
개인으로 존재하려는 시인은 공동체의 정서와 신화적 세계의 비전을 노래하던 전통 시인과 구별되며, 역사의 목소리를 웅변하던 공인(公人)으로서의 시인과도 차이를 갖는다. 실체와 진실이 조작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체계에 대한 항거를 전제로 한다. ‘개인’은 기술제국의 노예로 전락해 가는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이며, 자유로운 상상력이 싹틀 수 있는 최소한의 생장 조건이다. 기술제국의 목표는 인간의 지배에 있는 까닭에 개인의 수호는 ‘기계-사회’에 대한 ‘인간-자연’의 마지막 저항선이 된다. 사실,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존재 증명을 위해 시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개인’은 최근의 소설이 즐겨 다루는 소외된 ‘사적(私的) 인간’과는 다른, 강인하고 주체적인 ‘단독자’를 뜻한다. 공동체의 위력이 사라진 자본주의의 거리를 배회하는 개인/시인은 자연의 마술적인 힘과 역사적 위엄은 잃어버렸으되, ‘개인’이 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억압된 열망을 대변한다. 개인/시인이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기이한 효과는 개인의 영역이 폐기되는 현대사회의 특 수한 정황에 따른다. 개인/시인은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소외된 개인들을 단절된 상태에서(연대한 상태가 아닌) 대표한다. 이 점과 관련해, 현대사회의 고독한 개인들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옥타비오 파스의 통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파스는 시의 과제가 부서진 세계와 단절된 존재들 속에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장소는 같은 장소이며, 천지 사방은 아무것도 아닌 장소들뿐이다. ‘나’가 ‘너’로 바뀌는 것 - 모든 시적 이미지를 포괄하는 이미지 - 은 먼저 세계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 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옥파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솔, 1998, pp. 339~340.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는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옥타비오 파스, 위의 책, p 351.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은 존재의 가치와 삶의 아름다움이 파괴된 무차별적인 상황을 뜻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너’가 하나가 되고, 언어가 은유의 능력을 회복하며, 세계가 재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열쇠는 타자(성)의 발견과 수용에 있다. 세계의 사라짐과 재출현은 주체와 타자, 언어와 실재, 존재와 세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사라진 세계가 재출현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고된 노동과 싸움이 필요하다. 본래 하나였던 것의 끊어진 선을 잇고, 타자와 진정으로 만나는 길을 찾는 존재는 바로 시인이다. 이문재가 온전한 ‘개인/시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고투의 한 방법이다. 최근의 시의 동일성의 미학과 타자성의 미학의 혼융 현상 역시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재발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의 폭력적인 질서 속에서 시인은 스스로에게 동일자이자 타자로서 합일과 분열을 반복하며 시를 쓴다. 그에게 시는 고투의 현장에서 쓰는 치열한 ‘존재하기’의 기록이다. 인간의 내면을 무한히 확장하려는 서정성과 인간의 내부를 치밀하게 제어하려는 근대성의 피할 수 없는 접전이 벌어지는 것도 이 부근에서이다.
3.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다’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시인들은 자신의 기원을 찾고 기억하는 일에 몰두한다. 기원을 투명하게 밝히려는 것은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시인들은 현대사회가 만들어 놓은 인식의 지도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비행을 시도한다.
그들은 현실에서 사라져 가는 세계를 복원하며, 심지어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를 탐사하기도 한다. 시간의 역행과 선(線) 흩뜨리기는 근대 세계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저공비행에 비유될 수 있다. 시인들은 근대의 체계가 통제하는 현실의 고도보다 낮게 날면서 부당하게 잊혀진 세계를 찾아 나선다. 잃어버린 세계를 탐사하는 일은 시간을 거스르는 ‘회귀의 여행’의 형태를 띤다. 그 중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김수영은 어두침침한 주술적 세계와 그 속에서 살찌워진 자신의 내면과 재회한다.
나보다 먼저 집에 와 있는 저 그림자들. 울타리
넘어 내가 잠든 장지문을 단숨에 열고 들어와 밤마
다 내 숨결을 훔치고 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잃어
버릴 때의 무서움, 이불을 덮고 누운 턱이며 목 뺨
언저리를 핥는 숨결에 오금이 저릴 무렵, 내 몸은
가볍게 저 밤하늘로 올라가 내 집이며 우물이며 산
너머 동네를 내려다볼 것 같은데…… 사철나무 울
타리 아래 묻힌 우리집 고양이 살찐이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가버린 살찐이 새끼들과, 산 너
무 어디엔가 뿌려진 할머니의 육신도 찾을 것만 같
은데……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내 눈은 할머니 눈을 닮
았고, 이마는 할아버지를, 발가락은 꼭 증조할아버
지처럼 벌어져 있다는 걸. 내 눈동자 또한 밤마다
하늘을 향해 칠흑같이 열려간다는 것을.
― 김수영, 「밤의 이야기」
전문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2000.
기계문명의 통제에서 비껴나 김수영은 전설처럼 아득한 유년기로 잠행한다. 그녀에게 과거는 낡은 책이 아니라 자아의 근원이 기록된 텍스트이며, 그 텍스트는 눈동자와 발가락 등 그녀 자신의 몸이다. 김수영은 기억의 텍스트인 자신의 몸에서 오늘의 시대가 상실한 것을 반추하고, 조용히 지속되는 과거의 시간을 만난다. 이는 근대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자의 회고적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 전통을 생활 세계의 구체적 체험으로 경험하고 형상화하는 것과, 시인의 내적 지향이 투영된 관념의 풍경으로 시화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의 과거는 그것을 내면의 힘으로 지속시키는 몇몇 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된다. 첨단 기계문명의 시대에 주술이 살아 숨쉬던 과거의 세계는 개인/시인의 기억력과 감각의 힘으로 보존된다. 시인들은 근대가 말살한 전통의 폐허에서 건져 올린 기억들을 시로 지은 ‘시간의 박물관’에 보존하며, 박물관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문태준에게 이 두 공간은 같은 곳인데, 기묘하게도 그 형상은 ‘빈집’이다.
이 방은 이물스럽다 저녁이 이울고
구석서부터 물오르는 소리들의 구근
장판 걷혀진 구들장으로 불기둥이
혹 지나간다 흔적은 얼마나 관능적인가
까마귀가 내려앉은 부적 위를 지나,
퉁퉁한 거미 문설주 저켠으로 금줄을 친다
처마 밑 망태까지 차올라
밤새 둥근 알을 낳는 닭의 難産
낡고 해져 이 집 흙담처럼 기울어도
검은 가죽나무에 터잡는 마음 다잡으면
빈집은 화려하다 소리들의 구근을 씹을수록
아, 떠나간 자의 파란만장함
― 문태준, 「빈집 3」
전문 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창작과비평사,
2000.
몰락한 농촌의 ‘빈집’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생활 습속을 고스란히 전시하고 있다. “구들장으로 불기둥이 훅 지나간” ‘흔적’, “퉁퉁한 거미 문설주”, 닭이 알을 낳던 “처마 밑 망태”, 낡은 ‘흙담’, “검은 가죽나무” 등은 과거의 삶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폐가가 된 농촌의 ‘빈 집’은 전통적인 삶의 흔적과 현재의 모순적인 실상이 뒤얽혀 있는 곳이다. “떠나간 자의 파란만장함”으로 가득 찬 ‘화려한 빈집’은 스러져 가는 전통의 박물관이자 근대의 거친 폭력이 자행된 현장이다. 버려진 물건만 즐비할 뿐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농촌의 폐가를 넘어 정주(定住)의 의미를 상실한 우리 시대의 집으로 확대 해석된다. 문태준은 전통과 근대가 부딪치는 지점을 ‘이물스러운’ 토속적인 정서로 형상화하면서 이면의 고통을 깊이 드러낸다. 1970년생의 젊은 시인이 전통의 정 서를 짙은 생활 세계의 감각으로 체화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문태준은 서정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부딪치는 삶의 현장을 가장 낡은 정서로 기록하는 젊은 시인이다. 그가 직조하는 언어와 비유 원리는 결코 낡아 있지 않은데, “구석서부터 물오르는 소리들의 구근”과 같은 표현은 감각이 추상이 긴밀하게 결합된 고도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문태준이 현실의 고통이 배어 있는 토속의 서정을 그린다면, 또 다른 1970년생 시인 김선우는 전통 생활 세계에서 몸으로 상속된 여성의 의식 세계를 형상화한다. 주술적 관능과 예민한 자의식, 상처와 치유의 욕망이 범벅된 김선우의 시는 어둠과 빛이 함께 물들어 있어 묘한 비애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를 지날 때 할머니는 합장을 하곤 했다. 어
린 내가 천식을 앓은 때에도 그녀에게 데리고 가곤
했다. 정한 물과 숨결로 우리 손주 낫게 해줍소. 그
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
키며 내 목덜미를 만져주곤 하였다.
오래된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할머니가 오줌을 누고 계셨다. 반가워 달
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 오줌 방울에 젖은, 반짝거리는
은행잎이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날 벼락을 맞았
다고 했다. 그 땅에 새 길이 포장될 거라고, 길이
나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은근히 힘주어 한 사내가
말하였다.
이상도 하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른 건. 꿈 없
는 길,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
러들였는지도 몰라. 부러진 가지, 그녀가 매달았던
열매 속에서 피흘리는 엄마들이 걸어나왔다.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은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아 있었지만, 오래된 은
행나무, 그녀를 몸 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
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
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
「어미木의 자살 1」 전문 김선우, 『내 혀가 입 속
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작과비평사, 2002.
“오래된 은행나무”인 '어미木'은 모든 “피흘리는 엄마들”의 신앙이며 의지처이다. 대지에 뿌리를 박고 오랜 생명력을 이어온 ‘어미木’은 여성들의 삶의 역사와 유구한 여성성을 상징한다. 이 시에서 김선우는 낙뢰를 맞은 ‘어미木’이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미木’은 전통 사회에서는 봉건적 억압으로 인해 “피흘렸”으며, 근대사회에서는 “새 길이 포장되”면 “땅값이 오를 거”라는 “꿈 없는 길, 인간에 절망”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어미木의 자살’은 남성과 물질 중심의 근대사회에 가하는 여성의 항거와 자연의 분노를
상징한다. 김선우는 이 항거와 분노를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 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에,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에 새겨놓는다. 그녀 역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이 땅의 여성들의 뼈아픈 삶을 기억하고자 한다. 여성의 역사는 수많은 여성의 몸을 상속받은 그녀의 몸에 그대로 농축되어 있다.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이”는 시간의 축약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선우의 시에는 선연한 핏빛 울음과 "이상스레 차분한 적멸, 같은 것"(「아나고의 하품」)이 공존한다. 그녀의 시는 늙은 고목과 오래된 우물 같은 것에서 태어났으면서도, 현재의 삶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김선우는 한 그루 나무에서 나무의 역사를 보고, 하나의 몸에서 몸의 역사를 읽어낸다. 홧홧한 열기와 수줍은 관능이 배인 김선우의 시는 존재와 삶의 오랜 비밀을 추적하면서 역사화되지 않은 역사 -- 예컨대, 여성의 몸과 의식의 역사 등 -- 의 심연에 직관의 그물을 펼친다. 늙고 낡은 것이 그녀의 시에서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바뀌는 것은 이러한 비법에 의해서이다. 오래된 것, 오래 침묵해 온 것을 현재에 부활시킴으로써 김선우는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먼 길을 돌아, 이제 우리는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다’라는 역설을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과거의 유산은 기억의 연금술사인 시인에 의해 새롭게 부활하며 시간의 묵은 때를 벗는다. 시인들은 잃어버린 것, 늙은/낡은 것, 은폐된 것에 대하여 ‘기억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우리의 세계가 파괴한 것들을 되살린다. 그들은 ‘시간과 존재의 신비’를 부정하는 현재의 세계를 향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은 미래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먼 과거부터 이미 존재해 온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는 유효기간이 지난 폐기물이 아니라, 발견하는 자의 시선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역동적인 세계이다.
우리의 존재와 삶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그 세계는, 이문재 식으로 말하면 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 김수영의 감성적 직관에 의하면 내가 나의 조상들과 우주와 한 핏줄로 숨쉬는 세계, 문태준이 그린 풍경으로는 근대의 귀퉁이에 스산하게 방치된 전통적 생활 세계, 김선우가 발설한 바로는 여성의 몸에서 몸으로 생생하게 계승되었으나 지금은 고갈된 오랜 여성성의 세계이다. 이 세계들은 근대의 표면에서 지워지면서 역으로 낯선 것이 되었고, 미래의 세상이 숙고해야 할 가능성의 가치로 이월되면서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다. 과거에는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없는, 그러나 미래에는 회복되어야 할 가치들은 시인들에게 버릴 수 없는 꿈이며 목표이다. 오래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세계는 여전히 찬란하고 매혹적인 빛을 뿜고 있다.
근대의 망각의 전략에 대항해 ‘오래된 것’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결여와 미래의 지향을 성찰하는 정신의 작업이 된다. 인간이 소멸에 저항하는 방법은 기억 외에는 달리 없으며, 시의 진정한 내용물은 “아름답고 오랜 거기”에 대한 간절한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실재했던 것일 수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재했든 하지 않았든, 도달하고픈 세계에 대한 기억은 타자와 세계에 대해 자신을 ‘서정적 주체'로 정립한 시인에게는 내면의 가장 견고한 버팀목이 된다. 실재하지 않았던 세계에 대한 상상이거나 자신이 만든 간절한 열망일지라도, 시인들의 기억은 거대한 시간의 두께와 내면의 실재성을 획득하면서 이미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오래된 것을 간직하는 것, 지나간 시간을 현재형으로 사는 것, 없는 것을 소유하는 것은 서정적 주체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자 독특한 삶의 방식이다. 이 능력에 의해 시인들은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존재로 세계 속에 자리하며, 인간의 내면의 역사를 기술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4. 전통 서정의 새로운 영토
새로운 서정은 사유와 미학의 모험을 감행하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성취된다. 전통의 변용이든 첨단의 실험이든 모든 형태의 새로움은 창조하고 발견하는 자의 몫이다. ‘시적인 것’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에테르 상태의 가능성이자 발견의 대상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pp. 13~17, 217~234 참조.- 이라는 황지우의 말처럼, ‘서정적인 것’은 세계에 가득 차 있는 무형의 물질과도 같다. 독특한 미학적 장비와 섬세한 시선을 가진 시인만이 이 신비한 물질을 한 편의 시로 빚어낼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의 창조에는 파괴와 부정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바타이유가 말했듯이, “시는 파멸에 의한 창조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가장 덜 타락한 형태로 그리고 가장 덜 지성화된 형태로 활용되는 시는 소모의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시는 파멸에 의한 창조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의미는 ‘희생’의 의미와 이웃한다. (…) 시는 표현 기능을 떠맡는 사람의 삶을 담보로 잡는다. 시적 소모는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행위, 비참함, 절망과 현기증 또는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일관성 없는 환영을 추구하게 한다. 종종 시인은 오직 자신의 파멸을 위해서만 단어들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오물이 삶에서 배척받듯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운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하고 피상적인 욕구들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을 선택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조르주 바타이유, 위의 책, p. 35. 영역이다. 시의 창조적 원천이 파멸인 것은 시가 타락한 세상을 부정하고 그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치열한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동일성의 미학과 타자성의 미학의 혼융 현상 및 ‘부정적인 동일화’ 현상은 시가 본질적으로 수행해온 '파멸에 의한 창조'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모호한 실재인 서정에 대해 또 하나의 모호한 정의를 덧붙이면 이렇다. 서정은 역사적인 두께를 지닌 인간의 의식과 감각의 산물인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며, 그 다채로운 긴장관계의 화합물이다. 새로운 서정은 두 요소가 어떻게 화합하는가 혹은 화합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전통 서정에 친화력을 지닌 젊은 시인들에게서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이다’라는 역설을 추출해낼 수 있었다.
이 역설은 오래된 것이 오래된 것으로 존재할 수 없는 현세계의 비극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이 오래됨의 권위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오랜 삶의 감각이 상실되고, 당대의 경계를 뛰어넘는 궁극의 지향들이 사라지며, 지난 시간이 한낱 ‘죽은 나무’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억에 의지해 오래된 세계를 현재에 살고 미래의 지향성으로 열어 놓는 시인들은 오래된 것의 지속과 부활이 미래의 희망임을 믿는다. 또한 자아와 세계가 그림처럼 일치하는 전통적인 동일성의 미학이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음을 안다. 돌이켜 보건대, 20세기에 한국사회에서 일어난 일은 전통과 근대가 주체와 타자의 위치를 맞바꾼 것이었다.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전통은 근대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주고 근대의 타자가 되었다. 그 와중에 전통 서정시의 토대인 동일성의 지반이 흔들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소통과 화해의 동일성은 힘을 잃고, <부서진 자아?부서진 타자?부서진 세계>로 요약되는 부정적인 동일성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들이 넘치는 세계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오래된 것을 기억하는 시인들은 이 세계에 뚫린 ‘시간의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현재와 미래를 수정하고자 한다. 이문재가 추구하는 ‘개인/시인’의 존재론과 김수영의 주술적인 상상력, 문태준의 토속적인 감수성, 김선우의 비애에 찬 여성성의 세계는 그 구멍을 메울 훌륭한 재료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다.
끝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자. “인간이 자기 자신 너머로 가고자 하는 초월이라면, 시는 그 계속적인 초월하기의, 그 끊임없는 상상하기의 가장 순수한 기호이다. 인간은 이미지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옥타비오 파스, 위의 책, p 370. 전통 서정이 지키고자 하는 ‘오래된 것’의 실체는 인간이 자신과 현 세계를 초월하기 위해 상정한 오래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오래된 이미지야말로 인간이 최선을 다해 소유해야 할, 그리고 도달해야 할 세계의 밑그림일 것이다. 그 오래된 세계를 현재의 삶 속에 부활시키려는 시인들의 노력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새로운 서정이란,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시인들에 의해 열릴 ‘오래된 미지(未知/美地)’이기 때문이다.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열한 예술혼(藝術魂)의 부활을 꿈꾸며 / 송용구 (0) | 2009.08.17 |
---|---|
이용악 시의 인물형상에 대하여 / 이은봉 (0) | 2009.06.24 |
진정한 시의 죽음을 위하여 / 강동우 (0) | 2009.06.23 |
정유화 시집 <청산우체국소인이 찍힌 여름 편지> 해설 / 차창룡 (0) | 2009.06.14 |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시간 / 안도현 (0) | 200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