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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정유화 시집 <청산우체국소인이 찍힌 여름 편지> 해설 / 차창룡

by 丹野 2009. 6. 14.

                  

                                                                                 p r a h a

 

                           

                              시인은 이슬의 문 열고 들어가 / 차창룡


                             - 정유화 시집 <<청산우체국소인이 찍힌 여름 편지>> 해설

 

 



꿈은 현실을 터무니없이 왜곡하기도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존재의 근원에 파고들어가 원초적인 삶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은 늘 꿈을 꾼다. 꿈이란 어쩌면 동심(童心)과 관계가 있다. 어린이의 마음은 현실 논리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훨씬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시인들은 자연스럽게 동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정유화의 이번 시집의 시들을 ‘어른을 위한(어른이 읽는) 동시’라고 명명해본다. ‘동시’란 어린이의 마음이 담긴(또는 어린이의 발상법으로 씌어진), 주로 어린이가 읽는 시라면, ‘어른을 위한 동시’는 어린이의 발상법으로 씌어진, 어른들이 읽기에 적당한 시라 하겠다.

저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저렇게 몸이 가벼울 수 있다니
하늘, 구름, 나무, 돌, 건물, 사람, 자전거
육교를 들여놓고도 또 기웃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나가던 소나기가 파놓고 간
공사장의 세숫대야만한 웅덩이
얼마나 많은 살림들이 있나 싶어
얼굴을 살짝 들이밀면
양푼만한 내 얼굴만 달랑 들여놓는 웅덩이 -<세숫대야만한 웅덩이> 전문

그리스 신화에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요정 레이리오페의 아들인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등장한다. 나르키소스의 어머니는 나르키소스가 스스로의 모습만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러나 신들의 노여움을 산 나르키소스는 결국 샘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한 사랑이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나르키소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망하면서 죽어간다. 그가 죽은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 P. 내케는 1899년 나르키소스 이야기를 응용하여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정신분석 개념으로 확립하여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상태로 규정했다. 프로이트는 또 나르시시즘을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에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만 쏠리는 1차적 나르시시즘과, 유아기가 지나면서 리비도의 대상이 나 아닌 남에게로 향하지만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오는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했다. 이처럼 나르시시즘은 대체로 유아기의 정신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물웅덩이를 보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가?

이 시에서 물웅덩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은 일단 나르시시즘과 연결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반대로 나타난다. 먼저 시인은 웅덩이를 바라보며 “저렇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나르시시즘과 다른 차원의 동심에 따른 발견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몸이 가볍다는 발상도 동심에 따른 것이다. “하늘, 구름, 나무, 돌, 건물, 사람, 자전거/육교를 들여놓고도 또 기웃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진술에 이르면, 시인의 순진한 마음에 미소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의 마음이 아니라면 하찮은 웅덩이에 빠진 그림자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2연에서는 동심에 의한 행동이 더욱 극단으로 치닫는다. 웅덩이가 얼마나 많은 살림들을 갖고 있나, 시인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본 것이다. 그랬더니 웅덩이는 “양푼만한 내 얼굴만 달랑” 들여놓는다. 나르키소스라면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될 터인데, 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마음이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웅덩이가 수많은 살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림자요 환(幻)에 불과하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묘하게도 정유화의 시를 깊게 만들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시인 스스로 깊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얼굴만 들여놓는 웅덩이를 발견하고는 시적인 상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설령 자신의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자유롭게 나래를 펴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현실을 발견하는 순간 시적 진술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천상의 연주-귀뚜라미>나 <길을 몸 속에 지니고 다니는 나비>에서도 발견된다. 시인은 뜰을 무대로 삼고, 조명은 달빛이 맡고, “서서 듣는 단풍나무와 앉아서 감상하는 풀잎들의 객석”(<천상의 연주-귀뚜라미>)으로 이루어진 귀뚜라미의 공연이 너무 좋아서, 뜰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무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을 시인은 ‘침묵의 낭떠러지’라고 표현하며, 그 낭떠러지 덕분에 귀뚜라미의 연주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지면 귀뚜라미의 연주가 다시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길을 몸 속에 지니고 다니는 나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나비의 몸에서 길이 태어나고 있지만, “내가 마냥 따라나서면/그 길이 금방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시들도 이처럼 현실을 발견하는 순간 시적 진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시작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이 이 시들을 ‘어린이가 읽는 동시’가 아니라 ‘어른을 위한 동시’로 만들어놓는다.

물론 첫 시집에도 ‘어른을 위한 동시’류의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양상이 분명하게 다르다.

얼마나 그리움이 컸으면
몸 속에 등불을 환하게 켜고
날아다닐까
얼마나 그리움이 더 크면
나의 몸 속에도
상처받은 마음을 싣고 날 수 있는
등불 하나 달 수 있을까

몸은 깜깜한 절벽이고
마음은 폐차장이니
떠도는 영혼의 집
거처 없어라 -<개똥벌레> 전문

이 시는 첫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나남출판, 1999)의 서시에 해당하는 시이다. 개똥벌레가 등불을 환하게 켜고 다닌다는 발상은 동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등불을 그리움과 연결시키는 것은 동심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물론 어린이에게도 그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상처받은 마음과 연결되는 그리움은 어린이에게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반딧불이가 등불을 밝힌다는 발상이 발전하여 이번 시집의 시세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는 있다.

첫 시집의 시들은 부조리한 세상과 희망 없는 스스로의 영혼에 대한 절망감이 표출되어 있다. 인용한 시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여실히 나타난다. 떠도는 영혼의 집이란 시적 화자, 곧 시인 자신일 터이다. 자신이 곧 집이므로 거처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거처가 없기 때문에 미리 영혼의 ‘집’이라 규정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정유화의 세상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역시 ‘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시 한 편을 보자.

석류네 집 창문이 열리자 알알이 영글은 석류알들의 눈빛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윤기가 반들반들하게 빛나던지 그 눈망울 보기 위해 나뭇가지로 오르던 나의 마음도 가다 말고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석류네 집 창문에는 한 다발의 이야기가 동그랗게 매달려 있습니다. 석류네 집으로 이사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재미나는 이야기가 없는 이 아파트 골목을 떠나 몸만 챙겨서 이사하고 싶었습니다. 발을 들여놓을 자리라도 없다면 문간방이라도 얻어 가을 한철을 월세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석류알 가족 중에서 어느 한 놈이 철없이 집을 뛰쳐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재미를 지어낼 줄 아는 호젓한 그리움의 시간입니다. -<어, 석류가 익었네> 전문

석류는 내부에 수많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독특한 과일이다. 그 알맹이를 담은 껍질을 시인은 집으로 보고, 과일이 익어서 껍질이 벌어지는 모습을 석류네 집 창문이 열렸다고 표현한다. 창문이 열리자 집의 내부가 보이고, 집 안에 석류알들이 붉고도 투명하게 빛났을 것이다. 그것들이 어찌나 윤기가 나던지 시인은 마음속으로 그 눈망울을 보기 위해 나뭇가지를 오르다가 미끄러지고 만다.

그 투명하게 빛나는 석류의 눈동자들을 시인은 ‘한 다발의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시인은 석류네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시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 골목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재미나는 이야기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골목에는 왜 재미나는 이야기가 없을까?

삶은 원래 집이라는 공간으로부터 출발하고, 다시 집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집은 밖으로 나가면 개방적인 공간이고,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면 폐쇄적인 공간이 된다. 그러기에 집은 안온한 공간이면서 역동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더욱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집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프랑시스 잠은 <식당>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오래된 가구들에 영혼이 있음을 노래했다. 그러기에 프랑시스 잠은 혼자 살면서도 결코 혼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오래된 가구들과 영혼의 대화를 나누면서 일상을 즐긴다. 그런데도 정유화는 자신의 아파트 골목에 재미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유화가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의 삶에 염증을 느꼈다는 말이 된다. 곧 “떠도는 영혼의 집/거처 없어라”라고 절규하던 첫 시집의 현실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정유화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했듯이, ‘석류’로 대표되는 자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첫 시집에 비해 이 시집이 훨씬 경쾌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원동력이다.

문명에 대한 염증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어찌나 절실했던지 시인은 석류네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하고, 방이 없다면 문간방이라도 얻어 가을 한철을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인은 석류알 가족 중에서 한 놈이 집을 뛰쳐나가기를 기다린다. 석류알이 뛰쳐나간다는 것은 농익을 대로 농익은 석류알이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이다.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의 아름다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시인은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재미를 지어낼 줄 아는 호젓한 그리움의 시간이라 한 것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자연 법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바라보기 위해 기다린다는 것은 곧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일임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정유화의 동심이고, 이번 시집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유화는 어떻게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정유화가 여러 편에 걸쳐서 쓴 ‘문장론’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는 꽃잎과 오래도록 눈 맞추고 있노라면
지는 꽃잎 속에 가려진 꽃의 문장이 보인다
나는 그 문장 속으로 들어가
문장님이 강의하는 문장작법을 듣고 있다

또 피는 꽃잎과 눈 맞추고 있노라면
피는 꽃잎이 던지는 눈짓 속에는
문장을 허물어버리라는 소리가 담겨져 있다
나는 그 눈짓 속으로 들어가
문장을 버리고 육신으로 살 수 있는
눈짓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피는 꽃잎이 던지는 눈짓 속에 지는 꽃잎의 눈짓도
보이고 그 문장도 보이지만 -<숲속에서 자라는 문장 1> 전문

지는 꽃잎과 피는 꽃잎이 있다. 시인은 먼저 지는 꽃잎과 눈을 맞춘다. 그 결과 시인은 지는 꽃잎 속에 가려진 ‘꽃의 문장’을 발견하고, 그 문장 속으로 들어가 ‘문장님’이 강의하는 ‘문장작법’을 듣게 된다. 이어서 피는 꽃잎과 눈을 맞추니, 피는 꽃잎은 문장을 허물어버리라는 ‘눈짓’을 보낸다.

시인에게 문장이란 곧 시의 문장일 터, 정유화는 지는 꽃잎을 보면서 시의 문장을 생각한다는 것을 우선 알 수 있다. 지는 꽃잎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마침내 흙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지는 꽃잎 속에는 그러한 꽃의 미래가 보이고, 그 꽃의 미래가 시인의 일차적인 관심거리다.

그러나 시인은 피는 꽃잎을 바라보면서, 문장을 허물어버리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문장은 지는 꽃잎이 이미 구축해준 것인데, 왜 그 문장을 허물어버리라고 할까? 여기서 문장은 ‘육신’의 상대 개념이 된다. 문장은 지는 꽃잎이 구축해준 관념의 세계였던 것, 그 관념의 세계를 버리라는 것이 피는 꽃잎이 던지는 ‘눈짓님’의 메시지다.

마지막으로 정유화는 피는 꽃잎과 지는 꽃잎을 절묘하게 통합한다. 피는 꽃잎이 던지는 눈짓 속에 지는 꽃잎의 눈짓과 문장도 보인다고 했다. 피는 꽃잎은 언젠가는 질 것이므로 지는 꽃잎에 다름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은 또 시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가를 암암리에 암시한다. “그 문장도 보이지만”이라고 마무리한 것은, 그래도 “문장을 버리고 육신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겠다는 뜻을 내포한다. 곧 관념(문장)의 세계보다는 본질(육신)의 세계를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시집의 많은 시들은 이러한 시인의 시론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문장이 없다면 시인의 뜻을 어떠한 그릇에 담겠는가? 시인은 필연적으로 문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이 ‘육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정유화가 문장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쓴 이유이다. 정유화는 다른 시에서 “섹시한 여자들을 보면/풍매화처럼 꽃씨를 뿌리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육체의 문장”(<시퍼렇게 멍든 육체의 문장>)이라는 말을 썼다. 꽃씨를 뿌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육체’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은 ‘문장’이다. 그러나 시인이 더 강도 높게 추구하는 것은 ‘육체’이므로, 시인은 ‘육체의 문장’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출한다. 여기서 정유화의 시론이 좀더 분명해진다. 곧 정유화의 생각은 ‘육체’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장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 그 둘을 종합하여 ‘육체의 문장’을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은 것이다. <숲속에서 자라는 문장 1>의 3연이 암시하는 정유화의 시론이 바로 그것이다.

‘육체의 문장’의 세계는 곧 관념과 본질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다. <숲속에서 자라는 문장 2>는 시내 거리에 솎아낼 것이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간판이 너무 휘황찬란하게 많으니, 솎아내야 하고, 차량들도 너무 많아 길이 꽉꽉 막히니 솎아내야 하고, 신호등과 육교도 솎아내야 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도 솎아내야 한다. 현대 문명이 그만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숲에서는 솎아낼 것이 없다. “키 큰 나무를 솎아내면 산새가 외롭고/산새를 솎아내면 작은 나무의 귀가 서러워/작은 나무를 솎아내면 벌레들이 불쌍하고/벌레들을 솎아내면 꽃잎과 열매들이 서러워/바위를 솎아내면 계곡물이 투정을 하고 투정을 해서/죄 없는 산의 가슴만 텅텅 울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쩌지 솎아낼 것이 마뜩찮으면 나를 솎아낼 수밖에”라고 말한다. 결국 숲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는 ‘나’라는 인간밖에 없었던 것이다.

<숲속에서 자라는 문장 3>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매미와 쓰르라미, 멧새와 까치가 짓는 자연의 공장 내부에 ‘나’는 들어가면 안 된다. 이유는 ‘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모든 자연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에 이름을 붙여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상품에 이름을 붙이면 ‘서러울 것’이라고 말한다. 내일 낮에 이름 붙여줄 상품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다시 거둬주기도 한다는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름이란 단지 기호일 뿐, 본질이 아님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시인의 놀이일 뿐이다. 이미 자연은 ‘육체’ 그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육체를 어떻게 하면 손상시키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지, 시인은 이름 붙이기 놀이로 시도해보고, 그 이름을 버리기도 해본 것이다.

세상 밖의 긴 끈을 들고
길이 숲속으로 걸어오고 있다
길, 지워버리면 그리울 것 같고
품속에 거두어 넣자니 성가실 것 같아
나는 모르는 채 지난해에 모아둔
가을비를 불러서 싸리나무, 갈참나무
다람쥐 귀에도 뿌리다가
계곡의 허락을 받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물의 노래, 물 위에 떠 있는
단풍잎의 붉은 노래를 들었다 -<숲속에서 자라는 문장 4> 전문

정유화의 문장론은 이 시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1, 2행의 표현은 참으로 멋지다. 세상 밖의 긴 끈을 들고 길이 숲속으로 들어오다니,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동심의 상상 세계는 이토록 기막힌 직관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길은 태초에 탄생된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이 간 흔적이 곧 길이니, 길은 원칙적으로 세상 안의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밖의 긴 끈을 들고 길이 숲 속으로 오고 있다는 것은, 길이란 것이 인연(因緣)에 의해 탄생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사람이란 어떻게 태어난 존재인가? 조상 대대로 거스르고 거슬러올라가면 어떻게 되는가? 조상들은 신화가 되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까지 가게 된다. 그러므로 길은 세상 밖의 긴 끈을 들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길을 지워버리면 그리울 것 같단다. 길이 인연의 씨앗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품속에 거두어 넣자니 성가실 것 같단다. 그러기에 부처님도 인연을 만들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길을 지워버리지도 않고, 품속에 거두어 넣지도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정유화의 ‘육체의 문장’이다. 궁리 끝에 시인은 조물주가 되어 “지난해에 모아둔/가을비를 불러서 싸리나무, 갈참나무/다람쥐 귀에도 뿌리다가/계곡의 허락을 받고 세상 밖으로/나가는 물의 노래, 물 위에 떠 있는 단풍잎의 붉은 노래를” 듣게 된다. 자연의 조화에 따르니 아름다운 단풍잎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니 정유화의 시론은 노장(老莊)사상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정유화의 ‘육체의 문장’론이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노장사상과 일치하는 면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정유화는 한편으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에 적극적이다. 노자나 장자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정유화는 오히려 그런 욕망의 세계를 즐기고 있다.

왕잠자리가 공터 울타리에 앉아
지구본만한 눈을 이리저리 가볍게 돌리고 있다
나는 그 눈의 의미를 번역하기 위해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잠자리 역시 나를 번역하기 위해 요리조리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같은 침묵

가슴이 설레네

처음 만난 그대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그 마음을 번역하려고 애를 썼던 것처럼 -<번역의 즐거움> 전문

번역이란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나도 잠자리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요리조리 눈을 돌린다. 여기서 시인은 처음 만난 연인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려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긴장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긴장된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은 설렌다.

“봄쑥을 뜯어왔다/부엌에서도 쑥떡쑥떡/마당가에서도 쑥떡쑥떡/감나무가 나와 함께 강변구경 가자고/쑥떡쑥덕/내 마음에 씨를 뿌린 그녀와 함께/쑥밭이 되도록 한번 뒹굴어봤으면 하는/나의 마음도 꿀떡꿀떡”(<봄쑥>)이라고 말하는 시는 또 어떤가? 봄쑥을 통해서 숙떡을 생각하고, 마침내 쑥밭이 되어서 사랑하는 여인과 몸을 섞는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유쾌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마음은 “향수 냄새 풍기는 여자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로스구이처럼 부드럽게 구워먹고/싶은 질긴 욕망”(<시퍼렇게 멍든 육체의 문장>)이다. 이러한 시세계까지 오면, 정유화의 동시는 역시 어른을 위한, 어른이 읽는 동시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유화의 여인은 반드시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황금빛 연못 하나 마음에 짊어지고>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눈을 마주친 후 ‘나’의 마음에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황금빛 연못이 생기게 된다. 이는 영락없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욕망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 “문득 마주친 눈길처럼 내 시의 눈길도 그러했으면”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여인은 곧 시인의 시로 승화된다. 아름다운 여인이 나의 마음에 아름다운 연못을 팠듯이 나의 시도 나와 독자들의 마음에 잔잔한 연못을 드리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내포되어 있다. 시인이 그런 바람을 안고 있기 때문에,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욕정의 문을 열고 나가/물개들과 숨바꼭질하다 눈구덩이에 쉬고 싶어라”(<푸른 자전거를 타고>)라는 시구절을 낳기도 하고, “내가 꾸미는 문장의 내부에는 미인이 거처할 실내공간만”(<미인>) 있고 미인이 없다는 것을 서러워하기도 하고,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살덩이의 욕망/詩의 장작불로 태우면 해탈할 수 있을까” 하고 탄식하기도 한다.

시는 어쩌면 그러한 서러움과 탄식 속에 있다. 그러나 시인의 서러움과 탄식은 그것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이란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유화의 시 속에서 꿈은 두 갈래 길을 가고 있다. 한 갈래 길은 동심이자 환상의 세계요, 또 한 갈래 길은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의 세계이다. 동심의 세계에서 시인은 마음껏 뛰놀고, 시를 향한 열망의 길에서 시인은 고뇌한다. 그러기에 정유화의 시세계는 즐거우면서도 고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겹고, 해맑으면서도 음흉하다.

한 여자를 만날 때마다
꼭 하룻밤만 자고 싶고

그 황홀한 긴 밤처럼

시를 쓸 때마다
한 여자와 함께 까무러쳐진 것처럼
시와 섹스할 수 있다면 -<詩와의 섹스> 전문

영명한 몸으로 빛난다
풀잎에 닿으면 풀잎의 눈
풀잎이 영명하게 빛난다
이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눈 한번 깜박여 보고 싶어라 -<이슬> 전문

마지막으로, 정유화가 닦아놓은 두 갈래 길을 같이 걸어보자. 두 갈래 길이 의외로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시에 대한 욕망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길은 어쩐지 황량해 보인다. 두 길은 하나로 합쳐지려다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나는 여기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려본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다. 두 길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하나의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정유화는 조물주이다. 저녁놀을 받아다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게 선물할 수 있고(<저녁놀의 정거장>), 봄바람을 모아두었다가 다음해에 뿌릴 수 있는(<지난해 모아두었던 봄바람>) 시인은, 그러므로 평행선을 그으며 달려가는 두 갈래 길일지라도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눈 한번 깜박이는 것으로.

 
 
* 정유화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동서문학>신인상 당선.
중앙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시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천년의시작 2003

 

 

 

출처/다음 카페 지음루 http://cafe.daum.net/damatgiroo   -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