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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누구를 위한 문학상인가 / 황정산

by 丹野 2009. 6. 4.

             

 

 

                              누구를 위한 문학상인가?


                                                                                      
황 정 산 (문학평론가·대전대학교 교수)


20년 이상 문학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았지만 나는 문학상 시상식장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내 자신이 문학상을 받는 영광을 한 번도 누린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지인이 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도 참석하여 축하해 줄 마음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타지 못한 상을 남이 타서 생기는 질투심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문학상을 받는 것이, 시간을 내서 진심으로 축하해 줄 만한 기쁜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도 문학상 소식이 하나 둘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선후배 동료들의 문학상 수상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올해도 나는 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은 참석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문학상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말하고들 한다. 문학상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문학상을 제정한 주체가 가진 사회적 힘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위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상이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문단권력이 강화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문학상들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몇몇 단체나 출판사가 문단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체가 다양해지고 문학 활동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더 이상 소수의 문단 권력이 문학판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는 발전이면 발전이지 결코 우려할 사항은 아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문학상의 객관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객관적 기준을 정해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타당한 주장처럼 들린다. 또한 최근 몇몇 수상자의 면모를 떠올려 보고, 해당 매체 중심으로 자기 사람에게 돌아가며 상을 주는 풍토를 생각해 볼 때 이해가 가는 지적이다.


하지만 문학상을 주는 데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는 것일까?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상을 줄 수 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 이기고 골을 많이 넣거나 점수를 많이 얻으면 상을 받는다. 보험 외판원이 많은 가입 건수를 올리면 역시 상을 받는다. 여기에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

하지만 문학이나 예술에 이런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 정해진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양산한 작가가 상을 받아야 할까? 그 작품을 읽은 독자수를 파악해서 상을 주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모든 잡지나 출판사를 등급 매기고 A급 잡지나 출판사에 작품을 게재하거나 출판한 건수를 점수화해서 점수가 많은 작가나 시인에게 상을 내린다면 객관성이 보장될까? 문학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학술진흥재단 같은 기관에서는 이런 식으로 등급과 점수를 산정하여 학술연구자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이런 식으로 숫자화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학술을 진흥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하물며 이런 객관적 기준이 문학이나 예술에 적용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더 이상 문학도 예술도 존재하지 않게 될것이다. 90점짜리 시인, 88점짜리 소설가들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문학상의 문제는 앞서 설명한 권위의 하락이나 객관적 기준의 부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위의 두 문제를 지적하며 비판들을 하지만 문학상이 객관적 기준을 확보하고 예전에 가졌던 권위를 회복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문학상이 그런 것보다는 상업성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점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잘 팔릴 작가에게 유명한 상을 주어 그것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상업적 성공으로까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작가에게 상을 줌으로해서 상을 주는 잡지나 출판사의 인지도를 높여 상업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유명 시인의 경우에는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잡지에서 자기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상금 액수를 묻고는 수상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이쯤해서 상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상이란 국어사전에 따르면 "잘한 일을 칭찬하기 위해 주는 표적"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그 일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해 주고 칭찬해 줄 누군가의 판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나 교육기관에서 상을 내린다. 또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면 그 성과를 판단하는 회사에서 상을 주어 보상해 줄 것이다. 이렇게 상을 주기 위해서는 그 상을 받는 대상 위에 존재하며 그것을 평가할 절대적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에 상은 항상 교육과 하사의 의미를 가진다. 자기보다 높거나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칭찬함으로써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따르게 하고 기존 사회 관계에 편입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일반적인 상의 의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문학이나 예술에 상이라는 제도가 필요하고 가능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두 가지 경우라면 문학상이 필요하다.

첫째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기 위해 시나 소설을 쓰는 경우이다. 잘 팔리는 시나 소설을 써서 출판사나 작가자신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다면 그 사람은 상을 받아야 한다. 목표로 했던 것을 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기법으로까지 작용할 수 있으니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한다.

 

두 번째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강력한 문학적 이념을 가지고 있는 집단에 들어가야 자신의 문학적 가능성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라면 그 집단에서 요구하는 문학적 경향을 착실히 수행하여 그 집단의 인정을 받고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이 바로 상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문학하는 사람이 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황정산 : 문학평론가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고려대 불문학과 및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저서로『쉽게 쓴 문학의 이해』『주변에서 글쓰기』등이 있다.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rivertel@hanmail.net

 

출처 - 우리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