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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물렁물렁한 말들 / 최서림

by 丹野 2009. 5. 29.


 

 

 

 

                          물렁물렁한 말들


 

                                                                                                                 최서림

 

 

 


* 중심


 

어릴 때 동양화, 그것도 산수화를 그리는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본 산수화 그리는 사람들은 평생 한 고장에서 그것도 몇 개의 한정된 자연물을 대상으로 그렸다. 내가 보기엔 그게 그것인, 차이나 변화가 거의 없는 그림들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 같았다. 지겹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꼭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화가들이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젠가 TV를 통해 중국에서 산수화를 그리는 한 화가를 본 적이 있다. 그 화가는 동정호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일평생 동정호에 대한 그림만 그리고 살아왔다. 그 화가를 취재하는 기자가 나와 꼭 같은 의문이 들었는지, 맨 날 동정호만 그리면 지겹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시 중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그 화가는 아침에 보는 동정호가 다르고, 낮에 보는 동정호가 다르고, 저녁에 보는 동정호가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보는 동정호가 다르고, 내일 보는 동정호가 다르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양화에 대한 눈이 열리고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유학자들은 우주 자연이 날마다 변하고 변한다 보고 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생명과정 속에 미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조화와 질서를 갖춘 미가 객관적으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자연 가운데서 발견하고 그것으로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약간의 변주를 통해가면서 평생 일정한 자연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진리 그 자체였고 본받고 닮고 베끼고 싶은 대상이다. 그들이 동화되고 싶어 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자연은 미메시스, 곧 모방의 대상이다. 미메시스 철학이란 참으로 행복한 미학이다. 예술가나 학자가 자신이 모방하고 본받고 닮고 동화되고 싶은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고전주의적 삶이란 우리 영혼에게 빛을 가져다주고 안식을 가져다준다. 미메시스의 대상은 믿을 만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하늘의 별과 같다. 이 별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한, 어디서나 고향에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우 주관적인 미를 지향하는 김소월의 낭만주의 시에도 미메시스적 측면, 고전주의적 측면이 강하게 들어있다. 김소월이 지향하는 자연은 일종의 선험적 고향, 동일성의 고향과 같다. 근대 이후 모든 분열되고 해체되고 병든 존재들을 불러 모아 통합해주고 치료해주고 생기를 북돋우어 주는 원초적인 자연, 신과 같은 절대적인 자연이 김소월의 시에 들어있다. 이 신과 같은 완벽한 자연을 찾아 헤매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진 낙원으로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근대인 소월에게 신은 이미 숨어버렸다. 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원리이자 지표인 ‘숨은 신’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근대문학의 본질이다. 그런데 숨은 신은 숨어 있는 대로 신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요즘은 反미메시스 철학이 삶과 문화, 학문과 예술 일반을 휩쓸고 있는 시대이다. 반미메시스란 삶의 목표, 꿈의 상실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이든, 자연이든, 이성이든 그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어있는데, 현대인들은 그 모든 믿음의 대상을 상실해버렸다.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를 완전히 분리해버린다. 언어 속에 신이 부여한 선험적 기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험적 기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과 의미를 생산해내고 의미와 의미간의 관계망을 생산해내는 초월적 중심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시대 중심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해체화가 가속화될수록 중심은 더 필요하다. 우리들 삶에 빛과 방향을 제시하는 중심,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중심, 해체로 인해 병들고 피로해지고 초라해진 것들을 통합해주고 치료해주는 중심.

 

 

 



* 거짓 또는 진실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이 내뱉은 말이다. 이 언표행위 그 자체도 하나의 퍼포먼스다. 다른 학자나 예술가들도 흔히 농담조로 그 비슷한 말을 할 때가 있다. 누군가 자신의 작품이나 논문에 대해 칭찬해 올 때 “다 거짓말인데 뭘 그래”라며 겸연쩍어 한다. 맞는 말이다. 모든 논문과 작품에는 거짓말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거짓말이란 진실에 이르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것이다.

신학을 제외한 모든 인간적인 학문이나 예술은 거짓말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적인 학문과 예술에는 허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조차 허구의 산물이다. 그것 역시 하나의 가설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 허구라는 장치는 학자나 예술가가 좀 더 진실에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허구는 하나의 사상이요 이데올로기다. 허구의 크기와 그것의 치밀함이 학자와 예술가로서의 성패를 좌우한다. 예술은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위대한 거짓말이다.

 

 

 

 


 

* 재미


 

사람들이 시를 쓰는 이유는 다양하다. 교훈적 목적이나 쾌락적 목적이라는 문학개론에 나오는 이유들은 유치해서 어느 시인도 그걸 외워가지고 써먹지 않는다.

자신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직접적인 욕망이 시를 쓰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물론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단순히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시를 쓰기엔 시 쓰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오십 살이 되던 작년부터인가 나는 시 쓰는 재미를 조금씩 맛보고 있다. 시는 재미있어서 쓴다는 게 요즘 나의 시 쓰는 이유다. 시 쓰는 재미에 맛을 붙이다 보니, 시 쓰는 고통도 견딜만하다. 또 그 고통도 점점 줄어든다. 어깨에 힘이 덜 들어가기 때문이다.

 

 

 


* 구멍


 

젊어서 한때 나는 아무도 넘어지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밤 부엉이처럼 어두운 눈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다니곤 했다. 국문과를 다니던 그 시절 나에겐 전공서적 한 권 없었고 오로지 사회과학서적이나 역사책밖에 없었다. 그만큼 비문학적이었다. 아무도 넘어지는 일이 없는 세상, 철저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세상을 만들겠다던 헛된 욕망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다. 그러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나라들은 모두가 넘어지고 마는 세상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런 나라들은 숨구멍 없는 질식할만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내가 시를 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구멍 많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열 번 넘어져도 먼지 탈탈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내 시가 존재했으면 하는 것이다. 넘어지고 깨어진 사람들이 내 시 속으로 들어와 언 마음 녹이고 소줏잔이라도 기울일 수 있는 큰 구멍이 들어앉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다. 정말 다친 영혼들이 들어와 치료받을 수 있는 푸른 산, 그리운 시냇물이 흐르는 시를 쓰고 싶다. 물렁물렁한 말들로 비에 젖은 돌같이 촉촉한 시, 구멍 많은 돌 같은 시를 쓰고 싶다. 구멍 많은 젖꼭지 같은 시. 빨아먹어도 빨아먹어도 계속 먹고 싶은 시. 허기를 메워주는 시.

구멍이 뚫리면 살고 구멍이 막히면 죽는다. 우리의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사람의 몸만이 그런 게 아니라, 우주 만물이 다 그러하다. 양의의 기본인 내과에 입원하게 되면 맨 날 체크하는 게 변을 봤느냐, 소변은 얼마나 누었느냐, 방귀는 뀌었느냐 등 생명 유지에 가장 필수적인 것만 묻는다. 내과에서 하는 일이란 그저 구멍 잘 뚫어주고 잘 관리해주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한의에서도 주로 하는 일이란 구멍이 잘 뚫려있는가 아니면 막혀 있는가를 점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명의란 눈에 보이는 구멍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까지도 잘 체크해주고 치료해주는 사람을 두고 일컫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혈과 같이 우리의 몸 안에 있는 구멍도 있지만, 사회학적인 구멍도 있다. 너무도 빈틈없는 사회,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상하의 변동이 거의 불가능한 새로운 신분사회 같은 세상은 구멍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마음에도 구멍이 거의 막혀있다. 마음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마음에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남이 들어와 놀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시는 이 막힌 구멍을 뚫어 새로운 소통이 일어나게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과거 80년대 리얼리즘 시에는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80년대 운동권에 속한 주체들은 대상을 타자화시키면서 주체 중심, 이성 중심으로 빈틈없는 논리로 구멍을 다 메워버렸다. 즉 아무도 넘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다가 모두가 넘어질 세상을 만들 뻔 했다. 그에 비해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아예 구멍 없는 허무주의를 노래했다. 후기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영혼에도 바깥 사회조직에도 그 어디에도 숨구멍은 없거나 다 막혀있다는, 그 누구도 다시 뚫을 수 없다는 허무주의가 그 속에 도사려 있다.

막힌 구멍은 뚫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구멍이든, 사회조직에 있는 구멍이든 막힌 구멍은 뚫어내야 한다는 게 이 시대 서정시의 임무가 아닐까? 서정시는 부드럽고 물렁물렁한 혀를 가지고 있다. 부드럽고 물렁물렁한 말들은 칼날보다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서 우리들 마음속에 막힌 구멍을 뚫어낼 수 있다. 우리들 마음에 막힌 구멍을 뚫어낼 때 사회조직에 있는 막힌 구멍도 뚫어낼 수 있다. 사회조직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망인데,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물렁물렁한 혀로 그 관계망 속에 있는 막힌 구멍을 뚫어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열 번 넘어지고도 열 번 먼지 탈탈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서정시의 위대한 힘이다. 그렇기 위해 먼저 서정시 속에 크고 촉촉한 구멍이 많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최서림 약력

1956년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작품은 가급적 제가 배열한 순서에 따라 편집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