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으로 본 현 단계 우리 시의 지형과 가능성
최서림(시인, 서울산업대학교 교수)
1. 세계 인식과 구성 방법으로서의 수사학
현 단계 우리 시의 지형도와 그 가능성을 살피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것이다. 중앙문단과 지역문단의 역학관계를 논제로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생태주의시, 해체주의시, 몸시, 에로티시즘시, 정신주의시, 자연서정시, 페미니즘시, 탈식민주의시 등과 같이 시에 담겨진 사상이나 내용을 분류기준으로 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는 세대론적인 관점에서 연령대별로 나누어 보는 관점도 있을 것이고, 매체인 잡지별로 세력분포를 나누어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요즘은 바야흐로 모든 잡지가 동인지화 됨으로써 이 방법 역시 현실적인 유효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규명되어 왔기에 방법적으로 새롭지 못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수사학적으로 현 단계 우리 시의 지형도를 살펴보고 그 미래적 가능성을 조심스레 짐작해 보고자 한다. 수사학은 원래 고대 그리스이래 비유를 통한 도구학으로 발전해 왔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 표현 방법으로 논의되어 왔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로만 야콥슨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수사학이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폴 드 만 같은 사람들에 의해 수사학은 단순한 도구학에 머물지 않고 세계인식 방법으로까지 그 외연과 내포가 확장되고 있다. 이에서 더 나아가 본인 같은 사람은 수사학을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으로까지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이제 수사학은 새로운 세계인식 방법이나 표현방법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구성 방법으로까지 끌어올려지게 된 것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미 그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은유를 미메시스의 관점에서 정의하려 드는 것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메시스나 은유라는 용어는 이미 본질과 현상을 일치시키고 사회적 통합에 의한 공동체적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치밀하게 계산된 담론의 생산물인 것이다. 그런데 근대라는 심한 몸살을 겪으면서 수사학의 이데올로기성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옛날부터도 원래 수사학은 논쟁의 무기였지만, 오늘날 그것이 지닌 무기적 성격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의 수사학적 방법에 의해 우리는 현 단계 우리 시의 세력 분포와 그 힘의 논리, 그리고 그것들간에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이념적 공방에 대해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낙원회복을 꿈꾸는 은유주의자들
은유에의 의지니 은유적 욕망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그것들이 근대적 욕망임을 드러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있어서도 은유가 공동체적 통합을 목적으로 했듯이, 근대에 들어 그것은 사회적 통합을 위한 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부상한다. 근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와 그것의 변질 형태인 제국주의 내지 파시즘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급진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근대적 은유의 유형들이다.
은유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해서 근대 이후 은유는 동일성 회복을 지향한다. 근대 경험 이후 이미 잃어버린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 은유주의자들의 꿈이요, 삶의 목표다. 그래서 ‘은유의 회복’이란 말도 동시에 성립된다. 이미 자본의 폭력과 인간의 이기심과 죄에 의해 파괴되고 해체된 은유를 회복하여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다른 사물들의 구원을 도모하자는 게 그들의 논리의 핵이다.
그들은 이성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물들 사이의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도구화된 이성은 부정하지만, 건전한 이성, 온전한 이성에 의한 사물들간의 통합은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이 꿈꾸는 사물들간의 통합은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해체의 힘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해체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이성적 논리에는 중심적이 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계몽적 주체가 될 수도 있고, 낭만적 자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집단적 주체가 중심핵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고, 형이상학적 존재, 초월적 대상이 중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오늘날 환유주의자들과 제유주의자들이 맹공격을 퍼붓는 은유는 심히 왜곡된 은유이다. 그들 비판론자에 따르면 은유는 사물들 사이에 차이성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동일성만 강조한다고 한다. 사실 차이성을 인정하지 않고 동일성만 강조하는 것은 상징이지 은유가 아니다. 그런데 상징 또한 넓은 의미에서 은유적 세계관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들이 공격의 목표로 삼는 것은 제국주의나 파시즘 같은 왜곡된 은유적 사고방식이거나 사회체제이다.
여기서 은유의 원래 의미를 호출할 필요가 있다. 은유는 차이성을 전제로 한 가운데 ‘유사성’을 찾는 정신적 행위이다. 이 유사성이 동일성의 다른 이름이다. 은유적 사고의 미덕은 이질성이 강한 사물들간에 유사성을 발견하는 데 달려 있다. 오늘날 같이 사회적으로 해체가 극단화되어 있는 경우, 올바른 은유는 사회적 통합을 위한 성숙한 마인드를 제공해 준다. 은유란 기본적으로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발전되어온, 대화를 통한 사회적 통합 내지 합의에 이르는 성숙한 시민정신이 그 속에 들어있다.
사회적 통합과 합의에 이르는 변증법적 사고는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적 중심을 전제로 한다. 현상과 본질간의 일치, 기표와 기의의 일치, 주체와 객체의 합일 같은 통합적 사고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다. 흔히 진리로 표현되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존재는 모든 사물들간에 조화와 질서를 부여하고, 선험적인 기의를 보장한다. 언어기호로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진리의 시학인 서정시학은 그래서 전통적이다. 전통적인 서정시학은 미메시스를 기본원리로 삼고 있다. 진리인 초월적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그것과 합일되고 부박한 현상계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 에로스적 욕망이 그 근저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낙원회복이란 말은 낙원상실이란 용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낙원이란 바로 현상과 본질이, 기표와 기의가, 주체와 객체가 행복하게 일치하고 있는 시공간이다. 그 곳에서는 신과 인간이 다른 사물들과 함께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행복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은유적 욕망이란 신이 떠나버린 시대, 신의 도래를 기다리며 낙원회복을 꿈꾸는 미학적 행위인 것이다.
낙원회복을 꿈꾸는 은유주의자들의 문학은 낭만적인 시와 리얼리즘적인 시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요즘 들어 그 세력이 현저하게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공동체적인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시적 감동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시인들이 상당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창작과비평』이나 『실천문학』, 『작가』 등의 잡지를 중심으로 하여 포진하고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의 구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국민의 정부’ 이후 현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과 유착되어 있는 관계로 많은 딜레마와 함께 한계점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그들의 입지를 많이 좁혀버린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작가회의 쪽 시인들이 정통 리얼리즘보다는 다소 낭만적인 시풍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알고 보면 낭만적 사고와 리얼리즘적 사고는 근대적 쌍생아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낙원상실과 낙원회복이라는 미학적 개념틀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리얼리즘 내에서도 낭만성은 공존하는 것이다. 교조적인 리얼리즘에 빠져 입지가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들은 낭만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민주화와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어쩌면 지난 80년대보다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진 불평등구조에 대해 그들은 심대하게 무기력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많은 노동조합이 이익집단으로 탈바꿈 하는 과정에 더 큰 회의가 왔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들은 요새 리얼리즘이란 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친다.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이지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그것은 올바른 진전이다. 과거 그들은 리얼리즘을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교조적으로 파고들었다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리얼리즘은 아무래도 어떤 첨단 이론보다 작가의 사회적 양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사회적 양심을 강조하고 동시에 신축성 있는 문학 이데올로기를 유지해온 신경림 같은 시인은 지금도 유연하게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연대 과격한 계급시는 현저하게 한 풀 꺾였음에 비해 신경림의 시 같은 온건한 민중적 서정시는 지금도 신축성 있게 변신함으로써 시적 진정성과 감동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시집 『뿔』에서 신경림은 낭만적 비전과 현실비판 내지 사회적 양심이라는 두 개의 축 사이를 오가며 번민에 찬 시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서 보이는 낭만적 비전과 현실주의적 상상력은 기실 둘 다 근대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나온 대응방식인데, 방법은 다르나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집으로 가는 길」, 「陋巷遙」, 「그 길은 아름답다」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향수의 미학은 단순히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옛집, 옛길, 고향은 시적 화자가 본받고 합일하고 싶은 미메시스의 대상이다. 이 소중하고 이상적이고 완벽한 진선미의 통합적 근거인 옛것들은 복잡하고 산만하게 해체된 정신분열증적인 현실의 폭풍 속에서도 마모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실제 그것들은 이미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관념 그것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겐 실체로 존재한다. 실체로 존재하면서 미래적인 의미를 생산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근원적인 그것들은 미래적 목표로 존재한다. 과거가 현실을 비판하고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는 근거로 부상한다.
한편「뿔」, 「隣人」, 「개」 같은 비유적인 작품들에서는, 거대한 자본의 폭력 앞에 무너지고 비굴해진, 이기적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는 하층계급에 대해 증오와 연민을 동시에 지닌 채 괴로워하면서도 미래적인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는 시적 화자가 보이고 있다.
이재무는 시집 『위대한 식사』에서 생태시 내지 생명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생태시가 여타의 전통서정시인의 그것과 다른 점은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자연을 찾고 존중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간의 생태학적 관계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간의 사회적인 관계를 보다 근본적으로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생태시를 쓰면서도 그는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과 그 가치를 더 높이 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여전히 사회학적 상상력을 중시하고 있는 이재무의 생태시나 자연서정시는 제유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유적인 총체성, 총체적 동일성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은봉 역시 생태시학을 내세우며 제유적인 측면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나, 인간의 주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거나 사회학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은유적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노동자 시인인 김해화나 정인화의 경우, 다분히 과거 80년대적 사회과학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노동자 중심의 공동체, 총체적 동일성, 강력한 은유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은유적 동일성의 삶을 꿈꾸고 있는 주요 시인들로 이상국, 이중기, 박영근, 전남진 등이 있다.
나희덕의 서정시 역시 전통적인 은유적 세계관으로 되어 있다. 최근 그의 시에 나타난 생태페미니즘 역시 전통적인 서정적 동일성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시가 둥근 원처럼 안정된 질서와 생명적 충만감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보이는 은유적 동일성은 직․간접적으로 바로 그 초월적 존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태수의 시집 『내 마음의 풍란』에도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그’가 나타난다. 그가 둥글고 환한 세상을 그리워하고 모방할 수 있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 ‘그’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도 생태시학적 관점이 보이지만, 그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제유와는 다르다. 그도 인간과 자연, 자연물과 자연물 사이에서는 제유적 관계를 읽고 있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은유적인 총체적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
마종기 역시 최근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에서 형이상학적 존재를 향해 기도하는 자세로 초월하려는 욕망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당신’, ‘하늘’ 따위로 비유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는 시적 자아로 하여금 둥글고 완벽한 서정의 세계, 생명력으로 충만한 은유적 동일성의 세계를 지향하게 해주는 원동력이자 목표로 존재한다.
필자인 본인 역시 이러한 초월적인 존재를 은유적 동일성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필자는 은유적 동일성의 기본 원리를 미메시스의 철학에서 찾고 있는데, 이를 주체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필자는 서정적 동일성의 원리인 미메시스에서 시적 통합과 시적 구원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
미메시스를 기본 원리로 깔고 있는 은유적 동일성은 결국 관념론적이거나 유물론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시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믿으면서 시적 통합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인격적 통합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이 방식은 마치 탁류를 거슬러서 시원에 이르고자 하는 무모함과도 같다. 그래서 서정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인 것에 가깝지 않고는 금방 무너지고 만다.
은유적 세계관과 그것에 의해 빚어지는 총체적 동일성이라는 전통적 서정시형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세계를 열어 가는 시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문단에서 대종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유나 제유적 세계관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이들 은유적 서정시들이 이 시대 유행하는 담론과 거리를 두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것들을 분석해 주고 지원해 줄 수 있는 비평적 도구들이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은유적 서정시형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주요 시인들로는 홍윤숙, 김남조, 허영자, 천양희, 문정희, 이시영, 허형만, 노향림, 한영옥, 최문자, 이인원, 이사라, 김상미, 손진은, 이승하, 최춘희, 박현수, 전동균, 정영선, 권혁웅, 김태형 같은 이들이 있다.
3.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는 환유주의자들
앞서 살펴본 은유가 전통적인 비유적 이미지, 상대적 심상으로 이루어짐에 비해, 환유는 ‘서술적 이미지’1)(김춘수), ‘날이미지’(오규원), 절대적 심상으로 이루어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은유가 상이한 두 사물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을 강조한다. 은유가 두 사물 사이에 동일성의 필연적 근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면, 환유는 바로 그 동일성의 회피를 지향한다. 따라서 환유는 우연성을 강조한다. 차이, 다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물들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근거인 형이상학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실체, 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사물들간의 논리적 연속성을 인정할 근거가 사라진다. 신의 부정은 또한 선험적인 기의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모든 진리와 도덕과 미는 절대적으로 보편적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통적으로 시를 가능케 하는,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던 ‘시적인 것’이 공기 중에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이제 시는 더 이상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라, 비루한 일상처럼 권태롭고 소망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환유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를 완전히 분리한다. 그들에 따르면 바람직한 문학작품은 단순한 기표놀이여야 한다. 사회적 정치적 의미가 들어있는 선험적 기의는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억압과 구속의 기제로 작용한다고 그들은 간주한다. 따라서 일상적인 현실적인 모든 의미가 배제된 절대적 심상으로 만들어진 인공물로서의 시는 ‘무의미시’(김춘수)가 되거나 ‘비대상시’(이승훈)가 된다. 무의미시나 비대상시들은 언어의 자기준거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데, 그 무의식 세계는 현실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의 해방구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이미지, ‘태초의 언어’(김춘수)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쏟아 붓고 있다.
결국 그들 환유주의자들은 현상과 본질을 분리한다. 아예 초월적인 본질, 선험적 기의, 신 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기댈 곳은 비루한 자본주의적인 일상뿐이다. 루카치가 말하는 선험적 좌표로서의 별(진리)을 애시당초 부정하기 때문에 아예 나아갈 길이 없다. 이 ‘길없음’의 절망적인 미학은 상대주의 내지 다원주의에 기초하여 ‘자유와 민주’를 이념으로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이르고 만다.
이런 우울증의 시학(이승훈)은 처음부터 낙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낙원도 없고 회복할 낙원도 없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없으니, 그것을 근거로 한 변증법적인 통합의 논리가 없다. 변증법적 통합의 논리가 사라지니, 대화도 상실되고 우울한 독백만 존재할 뿐이다. 서정시학은 대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화의 추방은 곧 서정의 추방을 초래하게 된다. 독백의 시학인 환유는 대화의 전제조건인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부정하는, 소위 ‘무의미시’나 ‘비대상시’를 지향하는, 다시 말해 反미메시스를 표방하는 이들 해체시는 주관과 객관의 일치를 회피한다. 그들에겐 모방할 만한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시적 행위의 대상은 불안하고 우울한 분열증세를 보이고 있는 주체의 내면 세계로 한정된다. 우울하게 분열되고 해체된 주체의 내면을 반영하는 환유주의자들의 미학은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이러한 비동일성의 시학, 반서정의 시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잡지로는 『문학과사회』, 『현대시』, 『포에지』, 『시와반시』. 『다층』, 『시와세계』, 『시와사상』 등이 있다. 최근 이승훈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더니즘시학회가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으나, 이들 환유주의자들은 최근 부각된 제유적 상상력에 밀려나 소수집단화 되고 있다. 그들은 90년대 은유적 총체성을 거세게 비판하면서 문단이나 학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21세기 들어 한 풀 꺾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이승훈, 황현산, 박재열, 정과리 등을 들 수 있다.
이승훈은 첫시집 이후 『너라는 햇빛』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해체시를 추구해왔다. 그는 현실적인 의미가 배제된 언어, 자기지시적인 언어로 구성된 자신의 분열되고 해체된 내면을 시적 대상으로 잡아오고 있다. 해체시와 해체시론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이승훈은 김춘수를 상징적 존재로 내세우면서 모더니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채호기, 김영승, 박찬일 등 남성 중진 시인들이 오규원이나 이승훈의 맥을 이어받으면서 환유적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오고 있다. 그 다음 세대로 서정학, 성기완, 함기석, 성미정, 심재상, 김행숙, 이수명, 이원 같은 젊은 시인들이 맥을 이어받으면서 다양한 변주를 보이고 있다.
부산에서는 『시와사상』을 중심으로 정영태, 김종미, 김경수, 김형술, 박강우, 정익진, 김혜영, 조말선, 김언, 김참 같은 시인들이 조향, 허만하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환유적 세계인식을 토대로 부산 독자적인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강현국, 박재열, 박미영 등이 김춘수의 맥을 이어받아서 『시와반시』 등을 중심으로 하여 지금까지 줄곧 환유론의 전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중앙의 김춘수, 이승훈 등과 제휴하면서 은유주의자들에게 줄기차게 맹공격을 퍼부어 왔다.
제주에서는 윤석산이 변종태, 정찬일, 강수, 서안나, 현희 등과 더불어 잡지 『다층』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김승희, 김혜순 등은 해체주의 계열의 페미니즘 이론을 내세우면서 그 쪽 계열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박서원, 김정란, 노혜경, 김언희 등으로 이어지는 이들 해체주의 계열의 페미니즘은 90년대 문단을 주도했으나 21세기 들어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된 감이 있다. 김상미 같은 시인은 해체주의 계열의 페미니즘으로 시작했으나 서정적 계열로 돌아서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김혜순 역시 21세기 들어 신화, 그것도 동양신화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가고 있는 형국이다. 김승희의 해체적 페미니즘은 탈식민주의와도 관련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4. 조화와 공생을 소망하는 제유주의자들
지난 80년대가 통합을 강조하는 은유의 전성시대였고, 90년대가 그 통합적 사유체계를 해체하는 환유의 전성시대라면, 21세기 벽두 지금은 바야흐로 유기적 관계를 표방하는 제유의 전성시대이다. 제유론자에 따르면, 은유는 물샐 틈 없는 총체성의 구조 때문에 숨이 막혀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의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파시즘적이라는 것이다. 이 물샐 틈 없는 총체성의 구조에 숨구멍, 틈새를 만들어주어서 자유를 구가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주체중심주의로 인해 초래된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사물들이 스스로 작은 중심들을 형성하게 하여 민주적 관계를 갖게끔 도모한다는 것이다.
제유론자들에 따르면 우주 내 모든 사물들은 각자 스스로 작은 중심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음양관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들은 환유주의자들이 보는 것처럼 완전히 파편화되고 해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내적인 연속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제유론자들에 따르면 모든 사물들은 동일한 질료인 氣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간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주체와 외적 사물 사이에 질적으로 우열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 주체조차 거대한 생명의 연속체인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주체중심도 대상 중심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동일화는 주체와 대상간에 대등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는 이상적인 자연 대상을 본받고, 대상 또한 살아있는 사물로서 대등한 관계로 주체를 본받는다. 은유에서의 미메시스가 대상 중심의 일방적인 관계라면, 제유에서의 미메시스는 주체와 대상간 상호 대등한 민주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탈근대적인 사유체계의 하나인 제유는 역시 탈근대 사유체계의 하나인 환유도 비판한다. 환유처럼 지나치게 파편화되어 있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반미메시스적인 것을 부정한다. 미메시스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유는 은유와 유사하다. 기표와 기의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환유와 다르다. 제유 중에서도 불교적 사유는 환유에 가깝고, 유학사상은 은유에 가깝다. 불교에서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적극적으로 부인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체계가 없다. 미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유학사상에는 소극적이나마 一者 개념이 있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개념이 어렴풋이 존재한다. 따라서 유학사상은 제유에서 출발해서 은유로까지 나아가는 측면이 있다. 그에 비해 노장사상이나 샤마니즘에서는 전형적인 제유적 사유체계가 보인다.
이들 제유론자들은 동일성이라는 용어를 폐기코자 한다. 동일성이라는 용어 속에는 근대 서구 주체중심주의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구모룡은 ‘조화’라는 용어로 김경복은 ‘物化’라는 장자식 용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들이 꿈꾸는 조화 내지 물화는 결국 전통 동양적인 동일화의 한 방법인데, 그것은 전근대에서 빌어온 방식이다. 제유론자들은 전근대에서 탈근대적 방법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 제유론자들에 따른다면 낙원상실 개념이 없다. 그들에게 낙원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이다. 대자연이란 말 속에는 종교적인 뉘앙스가 들어가 있다. 그들은 자연을 완벽한 신적인 존재로 본다. 피조물이 아닌 자연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보여진다. 인간 주체는 이 스스로 존재하는 대자연의 일부이면서 그것과 감응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본받고 배움으로써 자기발전을 꾀해간다. 산수시나 산수화의 이념은 인간이 산수자연을 본받고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나가는 데 있다. 그들은 낙원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들 주위에 도처에 널려있는 위대한 자연을, 그 생명력을 발견하고 깨닫고 그것과 교감하기만 하면 된다. 낙원발견은 주체의 마음 고쳐먹기에 달렸다.
낙원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개념이 없으니 회복이란 개념도 없다. 그들의 삶은 은유주의자들처럼 과거나 미래를 지향하지 않고 현재적이면서도 현세적이다. 그렇다고 환유주의자들처럼 무방향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환유주의자들처럼 시계를 죽이지 않는다. 무시간성을 지향하는 것은 비슷한데, 환유의 무시간성이 시간을 해체한 것임에 반해, 제유의 무시간성은 유토피아적인 영원성에 맞닿아 있다.
제유가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은유가 추구하는 그것과 다르다. 초월적인 중심,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총체적 동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기적 동일성을 지향한다. 초월적 주체가 없는 사물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 그것이 그들이 꿈꾸는 삶의 방식이다. 초월적 중심이 없기 때문에 제유주의자들에겐 변증법적인 통합에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목표를 정해놓고 존재들간 의사를 조정하는 적극적인 합의 과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은유처럼 목적론적인 삶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면서 상호 공존을 도모한다. 사회적 통합에의 적극적 의지가 없는 만큼 그들의 꿈은 사물들간 상호 간섭 없는 공존이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공존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조화로운 삶의 방식이다.
오늘날 대유행하는 대부분의 생태시 내지 생명시는 이 제유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최동호가 중심이 되어있는 소위 ‘정신주의 시’도 역시 그러하다. 동양학에서 말하는 氣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진규의 ‘몸시’도 제유적 공존을 꿈꾸고 있다.
이들의 이념을 대변하는 주요 잡지로는 수도권에서 발간되는 『현대시학』, 『서정시학』, 『시와시학』과, 부산에서 발간되는 『신생』, 광주에서 발간되는 『시와사람』, 마산에서 발간되는 『시와생명』 등이 있다.
대표적인 이론가로 최동호, 신덕룡, 이숭원, 정효구, 구모룡, 김경복, 이성희, 홍용희 등을 들 수 있다. 불교적인 사유로 생태시 내지 정신주의 계열의 자연서정시를 쓰는 시인으로는 오세영, 이성선, 임영조, 고형렬, 박태일, 최승호, 이정록 등이 있는데, 최근 이승훈이 이쪽으로 합류했다. 노장사상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 시를 쓰는 사람으로는 유하, 장석남 등이 있고, 이성복이 유교적인 생명사상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서정시를 독특하게 생산해내고 있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5. 보다 신축성 있는 통합을 위하여
한국현대문학사는 통합과 해체간 길항의 역사이다. 통합적 사고가 극단에 이르면 그 반대항인 해체의 논리가 발흥한다. 1980년대가 극단적인 통합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극단적인 해체의 시대였다. 지나친 은유와 지나친 환유는 억압 아니면 허무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21세기 벽두에는 그 중간항인 제유가 고개를 들고 대안으로 나왔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제유는 사물들간 부분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내적 연속성을 이루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통합에 대한 열망이 부족하다. 사물들간 합의점을 도출해내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잘해야 기껏 조화와 공존이다. 그것은 제유 속에 변증법적 대화적 사유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에겐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상호간 의견을 수정해 나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과 훈련이 부족하다. 마치 숲 속의 소나무들의 모습과 같다. 개개의 소나무는 독야청청 하지만 어울려 살 줄은 모른다. 소나무는 자기 그늘 안에 다른 소나무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회에서 제유는 대단히 소극적이면서도 미약한 대안으로 남을 뿐이다. 거대한 자본의 폭력 앞에 좀더 기능적으로 대처하려면 은유로 나아가는 게 온당하다고 본다. 개개 사물들 사이의 차이성을 인정한 가운데 유사성을 찾아나가는 성숙한 은유, 건강한 은유야말로 이 시대 보다 나은 대안이 될 것이다.
동양사상 중에서도 유가사상은 제유에서 출발하지만 은유로까지 고양되는 측면이 있어서 미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대상인 자연과 인간 주체간의 물아일체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주체의 창조적인 주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가사상은 새로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생태시와 같이 초월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도 생산적인 대안으로 꿈꾸어볼 만하다. 초월적인 중심이 안정되게 확보될수록 은유구조는 신축성이 있으면서도 탄탄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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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춘수가 사용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적확한 용어가 되지 못한다. 비유적 이미지에 대항해서 사용되는, 아무런 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이미지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묘사적 이미지나 절대적 심상에 더 가깝다.
김준오, 『시론』, 삼지원, 1997, p.167.
참조 /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해 행간을 넓혔습니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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