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배하는 이미지들
김명원(시인.대전대 겸임교수)
전건호, 「홍도동」(『시와정신』, 2008년 겨울호)
고성만, 「여러움」(『우리시』, 2009년 2월호)
정일남, 「무궁화」(『시와정신』, 2008년 겨울호)
이 경, 「풀뿌리」(『유심』, 2009년 1/2월호)
안시아, 「꽃 -사랑」(『우리시』, 2009년 2월호)
유정이, 「부엌을 주세요」(『현대시학』, 2008년 12월호)
박유라, 「봄의 해부학」(『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이기철, 「삼월처럼 분주하고 싶다」(『우리시』, 2009년 2월호)
어둠도 창을 열어 오랜 침묵을 닦아내고, 겨우내 얼어있던 온 산하가 활짝 기지개를 폅니다. 차갑게 지쳐있었을 살얼음 계곡이 굳은 몸을 풀어내며 해빙의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곧 동면에 들었던 동물들의 기상 울음소리가 싱싱하게 들리고, 세상을 공평하도록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 아래서 꽃들이, 떡잎들이, 싹눈들이, 푸른 눈동자를 켜겠지요. 생명의 빛을 따라 쑥 쑥 저들 키를 키워 가겠지요. 봄,이라고 발성해 봅니다. 입 안 가득히 상큼한 푸성귀 냄새가 납니다. 민들레 꽃씨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간지럽습니다.
봄의 초입, 3월 월평은 봄 이미지들을 찾아 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봄을 보고 싶은 열망 탓이겠지요. 남녘으로부터 북상하는 꽃지도는 하루에 11km씩 이동한다고 합니다. 소설가 윤대녕은 자전적 소설「상춘곡」에서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그녀의 집 마당에 있는 벚꽃나무에 꽃이 피는 때를 기려 꽃구경을 오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서술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꽃 소식이 없자 급한 마음에 선운사 동백꽃이라도 보러 하경합니다. 붉은 동백꽃잎 그림자에 그리움을 적시며, 사랑하는 여인 집 마당의 벚꽃이 빨리 피기를 간곡히 기원하는 마음을 달래 봅니다. 그 심정을 알겠습니다. 꽃이 피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사랑을 참아내는 시간이고, 벚꽃이 피는 때 만나자는 그녀의 제안은 그대로 시적(Xr)입니다. 누구든지 가슴 타는 인고의 과정 없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고, 겨우내 언 땅을 머리로 박으며 제 몸을 땅을 향해 분출시키는 고통 없이 꽃은 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 속에서도 봄은 무궁하게 꽃으로 피어납니다. 봄을 기리는 시에서 ‘꽃 이미지’는 으뜸인 까닭입니다. 시 안에서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시인들은 전달하고 싶은 관념이나 상상적 체험 등을 미학적인 형태로 형상화시킬 수단으로서 이미지를 만듭니다.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수행 매체인 까닭에 주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러하니 봄과 꽃은 이미지 제작 상 잘 어울립니다. ‘봄’은 ‘본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생명체들이 세상을 ‘보기 위해’ 눈을 뜨는 계절 이미지이고, ‘꽃’은 자신의 성기마저 활짝 드러내어 수정을 시켜줄 곤충들에게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 이미지입니다. 그러하니 ‘봄’과 ‘꽃’은 한짝입니다. 그 꽃들이 봄 속에서 어떠한 결합 이미지로 피어나는지 만져 보겠습니다.
산 아래 불빛 다 잠든 다음에야
홍도동 골목은 부산해지곤 했는데요
십 년만의 한파에
쪽방촌 하숙생들 볼 얼어붙어
홍도 같았던 그 겨울
기차 칼바람 가를 때 마다
양철지붕 피리를 불고
비 오면 콩 볶는 소리 요란하던 끄트머리집
홍도 한 그루 철길 아래 떨곤했는데요
십구공탄에 끓이던 라면처럼
쫄깃쫄깃 배배꼬인 그 골목
한 눈 팔다 스무 해만에 돌아와보니
푹 퍼진 면발 같이 넓어지고
사륜구동 바람 일으키는 데요
주인집 딸 속옷 걸린 빨래줄에
얼굴 붉히던 홍도화 대신
도화살 만발한 벚꽃 피어나는 데요
양철지붕 못질하던 빗방울
후두둑 차창에 달라붙어
호기심 가득 낯선 사내 들여다보고
깔깔대는 랩송 제멋대로 아스팔트 구르네요
- 전건호,「홍도동」일부 (『시와정신』2008년 겨울호)
봄꽃이 전건호가 안내하는 회억의 공간에서 피어납니다. 그것은 실제의 꽃이 아니라 시인이 제조한 이미지의 꽃입니다. 남루하고 가난하던 스무해 전 청년 시절 하숙하며 살았던 화자 자신이 어느 봄날 추억의 장소를 찾아 갔겠지요. 바로 그 공간은 “산 아래 불빛 다 잠든 다음에야” 부산해지던 “홍도동 골목”이며, “십 년만의 한파에/ 쪽방촌 하숙생들 볼 얼어붙어/ 홍도 같았던” 하숙집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숙집이 “기차 칼바람 가를 때 마다/ 양철지붕 피리를 불고/ 비 오면 콩 볶는 소리 요란”하던 골목의 “끄트머리집”이었는데, 아슬아슬한 지형적 위치에 처소해 있는 ‘끄트머리 하숙집’을 “철길 아래 떨곤했”던 “홍도 한 그루”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집 딸 속옷 걸린 빨래줄에/ 얼굴 붉히던 홍도화”들이 살던 하숙집이었던 연유입니다. ‘홍도’라는 기의에서 유추되는 ‘붉은 꽃’은 청년의 붉은 얼굴을, 붉은 심장을, 붉은 청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붉은 시절을 ‘붉은 꽃’으로 지내게 했던 홍도동을 찾아 갔을 때, 이제는 “도화살 만발한 벚꽃 피어나”고 있습니다. 벚꽃은 화려한 이미지입니다. 온 몸을 다하여 격정적으로 타오르고 온 몸을 다하여 몰락을 향해 한꺼번에 지는 꽃인 것입니다. 하숙집 딸의 속옷을 보고 남몰래 애태우는 소극적인 부끄럼이 아니라, 이제 화자는 그런 예쁜 여성을 만나면 무슨 큰 일을 도모할, 묘사한 그대로 “도화살 만발한” 중년이 되어 있습니다. 스무 해 전 추위에 떨며 감내하였던 인생의 스산했던 겨울이 지금은 화사한 봄이 되어 있습니다. 겨울 아슬한 홍도의 시절이 이제는 거침없는 봄 벚꽃이 되어 있습니다. 머물지 못하는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이것이 생애의 지도입니다.
여러워 정말 버스 타려고 동일약국 앞에 줄지어 선 자줏빛 교복의 여고생들 사이를 지날 때 귓불 먼저 달아오르던 기억 맨 처음 대중탕에서 사타구니 거웃 드러낸 것 같이 홧홧한 부끄러움 저절로 커져버린 중심을 잡고 탕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쑥스러움
한 올 한 올 가닥이 쥐어지는 겨울 햇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던 시선 움틔우려고 봉긋 도드라지는 붉은 꽃눈
정말 여러워 고 계집애들 왜 그리 쿡쿡 웃어대는지
백지 위 푸른 댓살 붙인 연 바동바동 쑤욱 솟아올라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산 너머 바다 건너 눈물 떨어뜨린 자국마다 돋아나는 산벚꽃
펄펄펄…… 흩날리던 날
- 고성만,「여러움」전문 (『우리시』2009년 2월호)
고성만의 시「여러움」은 전건호 시「홍도동」과 닮아 있습니다. 싱그러운 여학생을 대상화하여 붉어지는 청년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성만의 시 제목인 ‘여러움’이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전라도 사투리라는 것을 보아도 금세 직감됩니다. 그러나 두 시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건호는 화자 자신을 ‘붉은 꽃’으로 환치하고 있는데 반하여, 고성만은 시적 자아에게 ‘여러움’을 선사하는 “자줏빛 교복의 여고생들”을 “붉은 꽃눈”으로 비유합니다. 누구에게 묘사描寫라는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는지에 따라 꽃의 위치와 각도와 색채가 바뀌면서 각기 다른 시의 맛을 내게 됩니다. 자신이 붉게 물드느냐, 상대가 붉게 물드느냐, 그러할 때 독자는 언제 즈음 붉게 물들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되네요.
시인은 시 서두에서 “여러워 정말”이라고 푸념을 털어 놓습니다. 왜 그러한지는 그 다음에 금방 드러나지요. “버스 타려고 동일약국 앞”으로 가고 있는데, “줄지어 선 자줏빛 교복의 여고생들 사이를” 지나야만 했겠지요. 그 때 “귓불 먼저 달아오르던 기억”이 났던 것입니다. 기억의 도화선은 “맨 처음 대중탕에서 사타구니 거웃 드러낸 것 같이 홧홧한 부끄러움”까지 이어지고, “저절로 커져버린 중심을 잡고 탕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쑥스러움”으로 연결됩니다. 극도로 남성성을 자극하는 원인은 “한 올 한 올 가닥이 쥐어지는 겨울 햇살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던 시선 움틔우려고 봉긋 도드라지는 붉은 꽃눈”들 탓이며, “고 계집애들” “쿡쿡 웃어대는” 웃음 탓입니다. 자줏빛 교복의 여학생들이 붉은 꽃눈들이 되어, 그녀들이 흘려내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봄이 흥건하게 와 있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나선 화자의 바람 든 심정이 그러하고, 겨우내 칩거했던 여학생들의 부푼 수다가 그러하고, 숨어있던 남자의 동물성향이 발현하는 발정 냄새가 그러하고, 그야말로 남성을 향해 현혹하는 여학생들의 붉은 꽃눈빛이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동일약국’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이라는 약국 이름은 비범합니다. ‘여학생’과 ‘나’와 ‘버스정류장에서의 풋풋한 기다림’을 하나의 ‘동일성(identification)’으로 묶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경을 서정적으로 모두우려는 듯 시의 말미에 “돋아나는 산벚꽃// 펄펄펄… 흩날리던”이라는 특수 효과가 시의 봄 기운을 한층 북돋웁니다. 상큼한 꽃 이미지가 맛 나는 시입니다.
나무의 몸이 할 말이 있어 꽃을 밖으로 내보냈다
한 송이의 꽃이 상징하는 의미가 여러 겹이다
많은 말의 봉오리가 매달려
어제 피었던 아침이
오늘 여전히 날빛으로 피어난다
저것이 유구한 대물림이다
(중략)
가장 약한 존재를 문장처럼 표현하는 것
꽃 피고 꽃 지는 하루가 유정하고 무궁하다
너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으니까
오늘 해가 떨어져도 내일 다시 필
봉오리의 힘이 터질듯 팽팽하다
- 정일남,「무궁화」일부 (『시와정신』2008년 겨울호)
이미지에 대한 종래의 개념은 일종의 모방론의 산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이 ‘정신은 곧 언어’라고 여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어가 실재實在를 형성한다는 믿음이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즉 언어의 사고는 언어 사용 능력에 의존하며, 언어 사용능력이란 바로 추상화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인은 철학자와는 달리 타고난 언어 능력에 의하여 인위적이고 현학적인 관념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창조합니다. 관념적인 허상들을 감각적이고 정밀한 세공의 이미지들로 변용시킵니다. 가장 순수하고 진솔한 언어 표현은 원시인이나 아이들의 언어가 갖고 있는 상징적 기능을 확보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고, 언어의 상징적 기능은 이미지 형태로 획득되는 원초적 감성을 통해 발휘된다는 것이 현대철학의 언어관입니다.
정일남은「무궁화」에서 꽃이 가진 내재성을 시의 언어 능력으로 변용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나무의 몸”은 ‘시인’이며, “할 말이 있어 꽃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행위는 시작(X�을 의미합니다. ‘꽃’으로 현현한 시는 얼마나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까. 이를 두고 시인은 “한 송이의 꽃이 상징하는 의미가 여러 겹”이라고 강조합니다. 중의성을 지닌 시어들로 피어나는 “많은 말의 봉오리가 매달려/ 어제 피었던 아침이/ 오늘 여전히 날빛으로 피어”나는 것, “저것이 유구한 대물림”이라는 정의는 시를 규정하는 함축적인 수사가 됩니다. 시는 수천 년 동안 언어 예술 양식의 전범을 보여 왔습니다. 간결하고 응축된 언어 형태로 리듬을 타며 상징이라는 두터운 의미 구조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러하니 “가장 약한 존재를 문장처럼 표현하는 것”이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으니까/ 오늘 해가 떨어져도 내일 다시 필/ 봉오리의 힘이 터질듯 팽팽”하게 됩니다. ‘시의 기능’을 ‘꽃’을 통하여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관념이 구체성을 갖추게 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게다가 시 제목이 ‘무궁화’인 것은 아마도 시인이 잘 부려 사용하는 시어인 ‘모국어’를 지칭하기 위해서 한국화인 ‘무궁화’의 고결하고도 끈질긴 꽃 이미지를 빌려오고 있는 듯합니다.
마디를 꺾지 않고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것들
오래전 땅을 차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들
그들만의 노래로 비를 부르는 것들
아픈 마디마디 꽃피우는 것들
가늘고 강하고 모질고 질긴 것들
꽃의 주소를 알고 싶어
뿌리들이 써 내려오는 금서를 열고 싶어
겨드랑이 잡고 한 포기 뽑아 올리면
꽉 거머쥔 손마디 풀지 않고
품고 있던 흙 덩어리째 들고 나오는 뿌리
제 목숨이라 말하는 흙 한 덩이
차마 털어버릴 수 없어
눈 뜨고 볼 수 없다 뿌리가 쓰는 글자
저것들을 발가벗길 수 없다
- 이 경,「풀뿌리」일부 (『유심』 2009년 1/2월호)
화분에 촘촘이 흙을 메운 뒤
내안에 뿌리를 들여 놓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드러나지 않게
서로를 지탱해 가기로 합니다
우린 누구나 씨앗으로 웅크린
태초의 둥근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통째로 시간을 암묵한
모든 기억의 원형原形 당신처럼
가장 먼저 도착한 언어입니다
내안의 뿌리를 틔우며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있습니다
- 안시아,「꽃 -사랑」전문 (『우리시』2009년 2월호)
극도로 논리화되고 과학화된, 나아가 이데올로기화된 현대 사회에서 시인이 갖는 의무는, 언어가 갖고 있는 원시적 본질성, 즉 사물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신이 찍어 둔 수많은, 발견되거나 발견되지 않은 지문들이 있습니다. 그 지문의 의미를 시어詩語로 해석해 내는 일, 인간이 반드시 찾아야 할 진정성의 가치를 찾게 해 주는 일,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미약하고 버림받는 존재들을 일깨워 세우는 일, 그 존재들을 분명하게 명명하는 일, 이것이 시인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경은「풀뿌리」에서, 안시아는「꽃 -사랑」에서 풀을 지탱해 온 뿌리의 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간 작품을 통해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들은 많습니다. 꽃이 뿜어내는 색채와 향기에 취해서, 오로지 꽃이 드러내는 매혹의 외모에 반하여 꽃을 칭송한 시인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송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힘겨이 버티고 있었던 뿌리를 노래한 시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피어있는 양지의 꽃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목숨을 다하고 있는 음지의 뿌리를 칭송하기는 수월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경과 안시아는「풀뿌리」와「꽃 -사랑」에서 우리가 어디에 마음의 방점을 찍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풀뿌리’가 ‘꽃’보다 얼마나 더 고결함을 지녔는지를 증거해 보입니다. 풀뿌리의 생명력은 가히 실존을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이경의「풀뿌리」에서처럼 “꺾일 줄 미리 알고 마디를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디를 끊으면서 앞으로 가는 것들”이며, “오래전 땅을 차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들”이기에 뿌리가 생존의 법칙을 생래적으로 터득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보입니다.
시 이미지에서도 이경은 풀뿌리의 끈질긴 생명력을 스스로의 내면 풍경으로 성공화시킵니다. 시의 중반부에서 풀뿌리가 수행하는 것은 “그들만의 노래로 비를 부르는” 일이며, “아픈 마디마디 꽃피우는” 일입니다. 갑자기 풀뿌리에게 향하는 정서가 환기됩니다. 풀뿌리의 노래로 비를 부르고, 아픈 마디마디 꽃을 피우다니요. 비를 부르는 노래 소리가, 꽃을 피워내는 마디마디 물결이 자극하는 상황이 온몸에 질서화 된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선명하게 두드러진 이미지들이 의식을 달굽니다. 이는 곧바로 “꽃의 주소를 알고 싶어”하는, “뿌리들이 써 내려오는 금서를 열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전이됩니다. 꽃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결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풀뿌리가 꽃을 피워 올리는 시원이 됨을 단단하게 고지하는 시입니다.
안시아는「꽃 -사랑」에서 아예 ‘꽃’은 그 자체가 ‘뿌리’임을 피력합니다. 꽃의 생명은 뿌리라는 것을, 그래서 오히려 뿌리가 꽃이었음을 노래합니다. 시인은 “화분에 촘촘이 흙을 메운 뒤/ 내안에 뿌리를 들여 놓습니다”라고 독백하고 있네요. 이는 그대로 사랑의 고백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이 순간부터 우리는 드러나지 않게/ 서로를 지탱해 가기로 합니다”라는 다짐 때문입니다. 뿌리는 무리로 존재합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면서 서로 엉겨서 서로를 받들어 줍니다. 뿌리의 생존 법칙이고, 상생의 힘입니다. 이를 주목하여 노래할 수 있는 원천은 보편적인 진리를 수용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데, “우린 누구나 씨앗으로 웅크린 태초의 둥근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생명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랑’이겠지요. 사랑을 통하여 모든 생명들은 후대로 그 생명성이 전수되었으며, “통째로 시간을 암묵한/ 모든 기억의 원형原形, 당신처럼/ 가장 먼저 도착한 언어”로 그 사랑을 증거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기저基底인 “내안의 뿌리를 틔우며/ 또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있”는 것을 화자는 시로 꽃피웁니다. 뿌리를 기리는 시 전체가 한 송이 꽃으로 발현하는 순간입니다. 사랑의 향내가 자욱합니다.
꽃 이미지에서 맡았던 봄 시들을 내려놓고 이제는 시인들의 부엌을 들여다 봅니다. 몇 해 전 김석환 시인께서 중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식사 준비 차 파를 자르는데 파 안쪽에 연둣빛 싹이 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는, 그래서 더 이상 파를 자를 수 없었다는, 결국 요리를 더 이상 진행 할 수 없었다는, 메일을 보내주신 적이 있습니다. 봄은 주방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시간을 품었던 감자에서 잔인하도록 초록 싹잎이 나아 자라고, 따뜻한 봄이 준비되는 예열의 냄새가 식탁 주변 가득 풍겨납니다. 겨울을 걷어낸 조리대에서부터 부엌은 분주해지고 소란해집니다.
온화한 앞치마에
젖은 손을 씻으며
드디어 여자들의 연주는 시작된다
콩 튀고 팥 튀고
오늘은 정어리가 하나 더
눈 밝은 양파가 호드득 병아리를 깐다
곰치국은 멀리 속초항 뱃고동 위에 끓어 넘친다
통통배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날은
쓰윽쓰윽 수평선을 갈아 알레그레토 모데라토
허밍은 되도록 잘게 썰어 둔다
알레그로 프레스토 구불구불 붉은 골목을
콩 튀고 팥 튀고 오늘은 정어리가 하나 더
양파가 호드득 까놓은 병아리 금세라도 비둘기알 슬어놓는
있지도 않은 부엌의 엉덩이 되게 흔들린다
없는 농담 가늘게 찢어 걸쳐 놓은
며느리밥풀 한 끼 빈 그릇 소리 호되게
요란하다
온화한 앞치마에
젖은 손을 씻으며 리타르단도 라르고
다시 리타르단도 라르고
- 유정이,「부엌을 주세요」전문 (『현대시학』 2008년 12월호)
냉동고에서 민대구살을 꺼내다
방에는 두꺼운 책 한 페이지가 찢진 채 누운
창살 너머 뿌옇게 차오르는 아침
동쪽 난간에 얹어둔 유리병이 박살나다
예보도 없이 가루가루 떨어지는 눈
파랗게 불거진 손목 혈관 위로
번뜩이는 면도날처럼 봄빛이 내리다
깊은 바다 속
아지랑이 일렁이는 한류와 난류의 만남
- 박유라,「봄의 해부학」일부 (『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두 편의 인용된 시들은 부엌의 봄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유정이는「부엌을 주세요」에 서 박동감 넘치는 주방을 연출하고 있으며, 박유라는「봄의 해부학」에서 특출한 봄의 감흥을 만들어 보입니다. 유정이의 이미지는 요리하는 과정의 감각적인 체험을 연주 기법으로 반복 변주하고 있다는 것이고, 박유라는 소멸과 현존이라는 시간 차를 두면서 봄이 어떠한 기운으로 소생하는 지를 정신적 이미지로 현상화합니다.
우선 유정이의 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시적 자아는 “온화한 앞치마에/ 젖은 손을 씻”고 나서 “드디어 여자들의 연주”를 “시작”합니다. 앞치마가 ‘온화’하면 앞으로 연출할 연주곡의 격정이 더욱 돋보이게 되겠지요. 더구나 ‘젖은 손’을 씻었으니 요리 악기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부려질까요. 부풀린 기대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그녀들은 “콩 튀고 팥 튀고/ 오늘은 정어리가 하나 더/ 눈 밝은 양파가 호드득 병아리를 깐” 합주곡을 지휘하고 연주합니다. 게다가 “곰치국은 멀리 속초항 뱃고동 위에 끓어 넘치”고, “쓰윽쓰윽 수평선을 갈아 알레그레토 모데라토”로 연주 해가면서 “허밍은 되도록 잘게 썰어” 둡니다. 그러다가 연주 기법에 슬쩍 변화를 줍니다. “알레그로 프레스토 구불구불 붉은 골목” 다음에 반복하여서 “콩 튀고 팥 튀고 오늘은 정어리가 하나 더/ 양파가 호드득 까놓은 병아리”을 주제음으로 강조시킨 뒤 “금세라도 비둘기알 슬어놓는/ 있지도 않은 부엌의 엉덩이 되게 흔들린다”로 흔쾌하게 격앙시킵니다. 이제 부엌은 음악의 물결 투성이가 됩니다. 흥겹습니다. 시의 2연은 다시금 도돌이표마냥 시의 초입과 동일 반복 구조를 이룹니다. 즉 “온화한 앞치마에/ 젖은 손을 씻으며 리타르단도 라르고/ 다시 리타르단도 라르고”로 요리 연주의 막을 내립니다. 전체 형식은 반복 구조이지만 세부 형식은 변화됩니다. 시작은 ‘알레그레토’로 빠른 템포였지만 마지막은 ‘리타르단도’로 느리게 마감됩니다. 이제 드디어 유쾌한 식사가 마련되었습니다. 가뿐 운율이 이미지로 겹치고, 청각적인 이미지가 요리 재료들의 기악곡으로 스며드는, 활발한 시입니다.
이에 반하여 박유라는 ‘냉동고’라고 지칭하는 겨울의 공간에서 ‘동쪽 난간’이라는 봄의 공간이 어떻게 전화轉化되는 지를 특이한 이미지 전개 기법으로 연결시킵니다. 화자는 부엌에 있습니다. 한 쪽엔 요리 재료를 꺼내야 하는 냉동고가 있을 것이고, 다른 한 쪽에는 봄을 그려내야 하는 동쪽 난간이 비쳐들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두꺼운 책 한 페이지가 찢진 채 누운” “방”이 존재합니다. 그 방은 공간 기호로 치자면 경계에 있습니다. ‘냉동고/ 방/ 동쪽 난간’은 ‘결빙/ 중간 지대/ 해빙’의 상징성을 함의합니다. 둘(냉동고/ 동쪽 난간)의 대립적인 공간을 함부로 넘어가기 어려운 지점에서 화자는 완충 지대로서의 타협점(방)을 마련한 것입니다. 아무튼 화자는 먼저 “냉동고에서 민대구살을 꺼내”는데, 카메라는 중간 지대인 방을 비추고, “방에는 두꺼운 책 한 페이지가 찢진 채” 있으며, 다시금 이동하는 카메라는 “창살 너머”를 비추면서, 여기에는 “뿌옇게 차오르는 아침”을 담아냅니다. 왜냐하면 곧 바로 아침 이미지에 이어서 나올 “동쪽 난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쪽 난간에 얹어둔 유리병이 박살”납니다. 깨어지는 것이 없이 탄생하는 것은 없는 까닭입니다. 봄이 태어나려면 반드시 갇혀진 공간 기호가 깨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유리병이고, 그 공간에서는 “예보도 없이 가루가루 떨어지는 눈”이 내리는데, 이 눈은 “파랗게 불거진 손목 혈관 위로/ 번뜩이는 면도날처럼 봄빛이 내리”는 변용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미지의 색깔이, 이미지의 모습이 얼마나 획기적으로 몸 바꾸기를 하면서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출현하는지를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대구살”에 이미 독특하고도 세련된 이미지 빛깔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독자들은 맛 볼 것이고, 민감한 혀를 통해 봄을 음미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릴 시는 3월을 그려내는 이미지들의 종합선물세트편입니다.
할미꽃을 내어 놓았으니
노랑나비도 내어 놓아라
연두를 내어 놓았으니
빨강도 내어 놓아라
수수한 여자도 좋지만
연지 찍은 여자가 더 좋더라
다수운 여자도 좋지만
재바른 여자가 더 이쁘더라
헐벗은 길을 내어 놓았으니
개울물의 노래도 내어 놓아라
짚북더미로 간 굴뚝새를 내어 놓았으니
흙더미로 간 배암도 내어 놓아라
아직 구름의 표정을 읽긴 이르지만
입안에 가득 찬 구름송이를
이제 그만 머금고 뱉어 놓아라
(중략)
기다림에 휴식이 있겠느냐
활활 불 지펴야 한다
저 산도 들판도
안마당도 장독대도
삼월아
- 이기철,「삼월처럼 분주하고 싶다」일부 (『우리시』2009년 2월호)
해설이 필요 없는 시가 있습니다. 극명한 이미지로만 찍어 낸 단상들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그 자체로 그저 두어야만 하는 시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렇다 할 부차적인 해석이 너절한 사족이 되는 시 말입니다. 이기철의「삼월처럼 분주하고 싶다」가 그렇습니다. 3월을 이보다 더 잘 그려낸 시가 있을까요. 시의 1연은 꽃과 나비를, 그리고 자연의 색감을 찍어냅니다. “할미꽃을 내어 놓았으니”까 “노랑나비도 내어 놓아라”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신비롭도록 통정하는 역사이니 ‘꽃과 나비’는 모든 사랑에 대한 환유겠지요. 봄 색깔이야 싹눈들의 색인 “연두를 내어 놓았으니” 곧 피어날 꽃들의 색 “빨강도 내어 놓아라”라며 지천에 형형색색 황홀지경의 색들이 펼쳐짐을 예견하는 것이겠고요. 2연은 봄과 잘 어울리는 여자에 대한 부분입니다. 화자는 “수수한 여자도 좋지만/ 연지 찍은 여자가 더 좋”고, “다수운 여자도 좋지만/ 재바른 여자가 더 이쁘”다고 이야기합니다. 활동성이 강조되는 봄에는 어떤 여자가 주목 받는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의 3연은 기타 자연물들을 포섭합니다. “헐벗은 길을 내어 놓았으니/ 개울물의 노래도 내어 놓아라/ 짚북더미로 간 굴뚝새를 내어 놓았으니/ 흙더미로 간 배암도 내어 놓아라”는 것이지요. 시인은 우주 만상을 깨워냅니다. 거기에는 지상뿐 아니라 천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4연, “구름의 표정을 읽긴 이르지만/ 입안에 가득 찬 구름송이를/ 이제 그만 머금고 뱉어 놓”게 해서 하늘에도 충만함을 깃들게 합니다.
그러하니 “기다림에 휴식이 있겠”습니까. “활활 불 지펴야 한다”는 시인의 주문은 우리말 ‘봄’의 어원에 대해서 ‘불(Y)’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불’의 옛말 ‘블火’과 ‘오다’의 명사형 ‘옴來’이 합해져서 ‘블옴’에서 ‘봄’이 된 것이므로 불의 온기가 다가옴을 가리킵니다. 물론 ‘봄’의 어원이 ‘보다(見)’라는 동사의 명사형 ‘봄’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요. 우수를 지나면서 해빙이 완성되면 죽은 가지처럼 앙상하던 뽕나무 가녀린 새 움에 파란 싹이 돋아나고, 온갖 씨앗들은 용솟음치는 힘이 솟아 딱딱한 땅덩이를 불쑥 밀어 깨뜨리고 솟아오르고, 벙그는 꽃잎마다 범나비 넘나들고 멧새들이 제 짝들을 찾아 사랑의 노래 부르는, 활기 넘치게 소생하는 모습들은 이기철의 이미지 그대로 “활활 불 지펴”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시인들이 재배한 봄 이미지들로 온 몸이 따끈합니다. 온 감각이 환해집니다. 바야흐로 봄입니다. 이 봄, 마음을 밝고 맑은 것들에 얹으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봄의 눈길로 사랑을 바라보시기를. 시詩의 가슴길로 3월을 읽으시기를! ■
◈ 김명원 시인 약력 ◈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졸
성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으로『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달빛 손가락』등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현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메일 : redriver-m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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