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시적 언어
황정산 (문학평론가. 시인)
장만호 「시」(『다시올문학』, 2009년 봄호)
조수옥 「나는 이런 소리가 좋다」(『우리시』, 2009년 3월호)
유인서 「나비 선글라스」(『시안』, 2009년 봄호)
김경선 「새들의 본적」(『우리시』, 2009년 3월호)
이성렬 「수증기 약사略史」(『애지』, 2009년 봄호)
요즘 ‘막장 드라마’라는 말이 유행이다. 불륜, 배신, 복수의 3종 세트로 점철되는 드라마를 흔히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런 드라마를 말도 안 된다고 욕하면서도 드라마의 유혹에 중독되어 계속 보게 되고, 이 드라마들은 결국 높은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있을까? 그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하나의 이유는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하기 힘든 또는 현실에서는 지탄이 대상이 되는 나쁜 짓을 마음껏 하고 싶은 욕망을 그 드라마들이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드라마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결국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결코 이 막장 드라마들은 사회를 위태롭게 할 생각도 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드라마에 빠져 불륜을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량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거나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은 그보다 이들 드라마는 사회의 안정에 기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을 잊게 하고 자신의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인물들로 하여금 온갖 나쁜 짓을 하게 하지만 결국은 모든 문제를 한 개인의 심성으로 환원하여 그 개인을 응징함으로써 세상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공통된 줄거리이다. 결국 이들 드라마는 사람들을 착한 시민이 되게 하고 권력과 정치에 순응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드라마들에서 불온한 낌새를 살피는 것은 극단적 도덕주의자들의 알레르기적 반응일 뿐이다.
사실 진정한 불온성은 오랫동안 진지한 예술 특히 시의 몫이었다. 그래서 권력은 항상 시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아니면 반대로 사탕을 물리려고 한다. 때로 독재적인 권력은 시인의 혀를 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불온하다고 해서 시가 벽보를 붙이고 선전 삐라를 뿌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방식은 아니다. 시는 다른 방식으로 불온함을 획책한다. 그것은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기존의 언어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그 언어로 표현된 세상에 의문을 던지고 그 언어로 질서화 된 세계에 추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시의 방식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이 봄에 진정한 새로움으로 우리의 일상에 젖은 무감각을 일깨우는 불온한 시들이 주는 해방감을 맛보는 것은 행복하고도 소중한 일이다. 그 중 몇 편을 살펴보자.
커브를 돌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소리를 잃고 두 귀는 허공에 걸려 있다 액자처럼, 떠다니는 얼굴들 떨어지며 바닥을 물어뜯는 물방울들 지문을 허락하지 않는 이곳에서 지금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은 안개의 실금이다
한 걸음씩의 깊이로 명멸해 가는 매 계단에서 나는 당신들을 만나거나 헤어졌을 것이나 커브를 돌자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이다 발등 위로 검게 피어오르는 공기는 나의 폐 속에서 휘몰아치고 진흙 속에 갇힌 폐어처럼 내 안을 헤매기 시작했을 때
두드릴수록 서서히 두꺼워지는 벽 안에서 내 안의 맨홀에서 나는 허공에 매달린 끝없는 점멸등의 적막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당신들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을
- 장만호,「 시」( 『다시올문학』2009년 봄호)
이 시에서 지금 이곳은 ‘지문을 허락하지 않는’곳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숨쉬게 하는 공기는 ‘진흙 속에 갇힌 폐어’가 되어 시인 자신의 몸속에 갇혀 버린다. 이 모두는 총체적인 억압이 시인의 감각에 포착되어 나온 표현이다. 그런데 이 억압은 무엇 때문에 기인할까? 그것을 꼭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으로 환원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의 일상 모두가 억압 아닌 것이 있겠는가? 더 돈을 벌어야 하고 더 출세를 해야 하고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버티어야만 하고 이 모두가 우리를 억압하는 강고한 폭력이 된다. 그뿐이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가 질서이다. ‘지킬 것은 지켜야 ’건정한 시민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모든 것들이 우리를 꽁꽁 둘러치고 있다. 때문에 ‘두드릴수록 서서히 두꺼워지는 벽 안에서’ 살고 있다고 시인은 느낀다.
바로 이런 억압의 인식으로부터 시가 시작한다. 그 억압을 바라보고 그 억압을 부정할 수 있는 말을 꺼내는 것이 바로 시인 것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정치적인 악다구니가 아니다. ‘더 작은 목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하는 것이다. 일상에 매몰되고 질서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말을 하는 자 그가 바로 시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을 통해 시는 일상과 그 일상을 지배하는 질서와 그 질서를 지배하는 권력에 흠집을 낸다. 시가 불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음 시는 좀 더 분명하게 불온을 꿈꾸고 있다.
나는 소리 중에서도 이런 소리가 좋아
몇 십 년 동안 기둥에 박힌 대못을
돼지발톱 닮은 장도리로 뽑아 낼 때 나는
뿌지직 + 찌익+ 찍-
오래 참았던 방귀를 뽑아내는 괄약근처럼
나뭇결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오는 소리
그 소리가 왜 그렇게 후련하고 경쾌한지 몰라
평생 아버지를 옭죄었을 가난을 뽑아내는 것 같은
그 소리가 왜 도랑물처럼 귀청을 맴도는지 몰라
그래서 더욱 힘을 조이면 응어리 진 체증을
꽉 물고 나온 녹슬고 휘어진 대못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다가
옳거니! 이제 나도 장도리를 챙겨 들고
세상 어디 한켠을 깊숙이 누르고 있는
슬픔을 뽑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까지 확 - 뽑아 제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조수옥「나는 이런 소리가 좋다」(『 우리詩』2009년 3월호)
조금 거칠고 직설적인 어법을 동원한 시이지만 그래서 힘차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못을 뽑는다는 것은 단순히 박혀 있는 것을 제거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 못이 지탱하고 있을 어떤 질서화된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그 소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닮았지만 또한 ‘후련하고경쾌한’ 기쁨의 외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시인에게 벽이나 기둥에 박힌 대못과 같은 삶의 응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응어리들은 세상의 억압이 만들어 놓은 고통의 결절이고 용종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항상 몸과 생활에 박고 살고 있다. 그리고 억압을 감내하고 착한 가족 구성원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해방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 나뭇결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오는 소리’라는 구절에서 그 해방감의 생생한 소리를 듣는다. 벗어나고 해체하고 우리를 묶고 있는 대못을 과감히 뽑아버리고 그 해방의 소리를 만끽하자는 이 시의 권유는 지극히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는 공공연한 구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시는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불온을 전파하고 있다.
낯선 대륙을 향해 간다는 그의 배가 한동안 내 창가에 정박해 있었다
나는 그의 숨은 항로를 훔쳐보기 위해 자주 그 배의 갑판 위를 서성거렸다
두꺼운 유리창으로 들여다본 그의 방 탁자 위에는
풍경과 인물이 뒤섞인 푸른 퍼즐상자와 항해일지가 낡은 지구의 옆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벽면의 낮은 선반에는 갖가지 꽃빛깔의 술병들이 있었고
뱃버리에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의 난바다가 실려 있었다
등을 보이며 서있는 그의 몸에서 비릿한 도심의 숲냄새가 번져나는 듯도 했다
그의 어깨 높이를 떠도는 바다제비와 몇몇 구름 같은 섬들도 보였지만
어느 것도 분명하진 않았다
나는 그 배를 구석구석 찬찬히 살펴보지 못했으나
그의 출항은 소리소문 없이 이루어졌다
한 해이른 아침, 정글 가운데 솟은 산꼭대기에서 햇빛을 쬐며 구름에 비친 제 몸의 그늘을 보
고 있다는 그의 소문을 들었다
- 류인서「나비 선글라스」(『 시안』2009년 봄호)
출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누구이어도 상관없고 또 아무나이기도 하다. 떠나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린 시는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떠남을 그리워하고, 준비하기도 하고 더러는 감행하기도 하지만 결코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항상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범하는 일탈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저 잠시의 외도일 뿐이다. 그러나 항해를 한다는 것은 다른 경험이다. 그것은 떠남의 일상화이다. 떠나 헤매는 것 자체가 일상인 삶이다. 위의 시는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몸에서 비릿한 도심의 숲냄새가 번져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떠나는 것은 현실로부터 초월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세상 속으로의 항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의 항해는 지향이나 목적이 없다. 또한 ‘소리소문 없이 이루어’진 그의 출항으로 봐서 그것은 어떤 명예나 가치를 얻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단지 떠나기 위한 떠남이다.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영토를 마련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영원히 떠남만을 계속하며 살아가고 싶은 자유로운 영혼을 찾고자 하는 사람의 갈구이고 고투이다.
바로 이 시는 이러한 떠남을 미화하고 있다. 그래서 영토에 묶여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떠나도 멋있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꼬드기고 있다. 은밀하고 교묘한 불온한 언어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장난을 본다.
새들의 자유는 과장되었다
평생 허공을 날다가
죽어서 귀가 열리는 새들
죽음으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자유로운 날개는 속박이었다
허공의 길,
한 번도 그 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새들의 무덤은 하늘이다
그 아래 우리의 무덤이 있다
땅에 닿지 못하는
새들의 자유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바람을 등에 업고 바람이 되어 살다가
비로소 허공이 된
새를 받아 안은 하늘무덤을 바라본다
그들의 마지막 유언도
그들을 따라 날아갈 날개도 나에겐 없다
무덤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한 무리의 새 떼가
서쪽하늘로 사라진다
- 김경선「새들의 본적」(『 우리시詩』2009년 3월호)
새만큼 시에서 많이 사용된 소재도 없다. 새는 자유를 꿈꾸는 시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날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것이 아니고 땅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하늘에 있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새는 또한 아이러니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도 새의 아이러니를 본다.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새의 하늘이 어찌 보면 새에게는 속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여기에서 새를 시인의 모습과 겹쳐 볼 수 있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자유를 꿈꾸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시인에게는 큰 속박이 된다. 하늘이 속박인 시와 마찬가지이다. 이는 불온한 자유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하늘이거나 땅이거나 자유를 아는 존재가 그것을 갈구하다 결국은 영원히 갇혀 버린 무덤일 뿐이다. 그래도 시인은 거기서 벗어나고자 힘들게 ‘무덤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비록 같은 무덤이긴 하지만 시인은 새들의 무덤을 본다. 새들의 본적은 결국 시인의 본적이다. 그것이 속박이고 죽음이라 하더라도 시인은 자유를 꿈꿀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혀 불온한 것 같지 않은 언어로 쓰여 있지만 이 시는 불온한 사상을 깔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시인을 무서워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다음 시도 시적 불온함의 실체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애초에는 끓어오르는 쇳물 곁을 맴도는 흔적이었으나
땅 속 깊은 곳에서 인고忍苦하여 목숨을 가졌다.
외계를 날아온 빛의 부르튼 목소리라는 설이 있으나
자진自盡하는 꽃들의 심장에서 잉태되었다고도 한다.
형상이 없으나 하늘에 오르면 공중정원을 이루고
오래 생각하여 무거워지면 지상으로 내려와
뚜렷한 풍경들의 시야에 깊은 음영을 건넨다.
인간의 질시를 받은 건 기차를 처음으로 움직였을 때
악마의 기계를 작동한다는 교회의 힐난을 잘 견뎌내었다고.
기도와 탄식 사이 좁은 길로 떠나갔다가
버려진 겨울정원을 언 발로 찾아오는 떠돌이별의 입김으로
세상의 수선垂線들을 눕히는 시간의 빗금으로
대지와 허공 사이 경계를 지우며 흔들린다.
- 이성렬「수증기 약사略史」(『 애지』2009년 봄호)
수증기는 모든 초월하고자 그래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것들의 비유적인 심상이다. 원래 지상의 것이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가져 자신의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고 항상 하늘로 상승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진하는 꽃들의 심장에서 잉태’된 것처럼 생명의 본질이기도 하고 ‘뚜렷한 풍경들의 시야에 음양을 건내’는 것과 같이 모든 사물을 사물답게 만들어주는 존재들의 필수 구성성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자유를 속박하려고 한다. ‘악마의 기계를 작동’하듯이 자유가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러 종교적 교의들은 이 인간의 자유를 저당잡고 신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기도 한다. 자유의 실체인 수증기가 ‘기도와 탄식 사이의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자유를 통해 세상에 구획 지워진 경계를 허물 수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릴 때의 그 힘찬 사선을 보고 시인은 딱딱하게 세워져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수직선들을 눕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의 불온한 상상이 아니면 세상을 어찌 이리 삐딱하게 볼 수 있겠는가?
출처 / 우리詩 4월호 월평
◈ 황정산 시인 약력 ◈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2002년 『현대시문학』시 등단
*『정신과표현』 시와 수필 등단
*저서로
『작가론 총서 김수영(2003)』
『쉽게 쓴 문학의 이해(2000)』, 『주변에서 글쓰기(2000)』
『한국현대시의 운율론적 연구(1998)』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격월간 『정신과표현』 편집위원
*이메일 : river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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