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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결국 말인 것을 / 안도현

by 丹野 2009. 5. 6.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결국 말인 것을 / 안도현


 

26. 시를 완성했거든 시로부터 떠나라 시를 간섭하지 않는 시인 / 침묵도 말이다

26. 시를 완성했거든 시로부터 떠나라

고등학교 시절, 여학교 시화전에 가기 전에 문예반 선배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여학생 하나를 울리고 와야 한다.”
선배들의 사주를 받은 우리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싸하게 악동의 표정을 연기했다. 시에 대해 질문이 있다는 핑계로 한 여학생을 불러놓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그 여학생의 시를 집요하게 칼질했다. 여학생은 도마 위에 올려진 한 마리 가여운 생선이었다. 악동들의 파상적인 질문 공세에 파들파들 떨다가, 주춤거리며 대답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학생이 운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울음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시화전시장을 상갓집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우리는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그때 우리들이 파놓은 질문의 수렁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교복들이여, 부디 용서하시라.).


<시인은 언어의 대변자일 뿐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


차라리 그 여학생,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더라면 악동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친절한 여학생은 자신의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하면서 우리들의 마수에 걸려들었던 것. 이 시를 쓴 계기가 무엇이라거나, 무엇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거나,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그 여학생은 순진하게 진술했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에 대한 겸손하고 친절한 답변을 통해 그 시의 감동을 높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의 감동이 아니라 시의 몰락을 불러오는 변명이고 화근임을 여학생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 속에 다 있어요.”
그냥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쌀쌀하게 돌아섰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뻘쭘해진 우리 악동들이 오히려 두손들고 줄행랑쳤을 것을!

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를 창작하는 사람은 시인의 개인적인 삶과 시를 별개로 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삶은 엉망진창으로 살되 건강한 시를 쓰라는 말이 아니다. 시라는 텍스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지 창작자의 사사로운 체험이나 느낌을 가지고 시를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의 시인이 쓴 것이지만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시에다 쓴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것이며 독자의 것이지 시인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완성했거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시를 잊어버려라. 당신은 그 시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라.


바닥난 통파
움속의 降雪(강설)
꼭두새벽부터
降雪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목수건)


박용래(1925∼1980)의 <시락죽>이다. 시인은 갔어도 우리는 오늘도 이 시의 언어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본다. 시를 읽을 때마다 행과 행 사이의 건너뜀이 왜 이런 보폭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降雪’은 왜 ‘강설’로 바꿔 쓰면 안 되는지, ‘후살이’는 왜 세간의 ‘세컨드’와 다른 의미인지 생각하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빗자루로 간밤에 내린 눈을 쓰는 마음을 생각하고, 목수건에 오른 때를 생각하고, 지금은 옆에 없는 이 여인의 남자를 생각한다.
시가 다다라야 할 언어의 절제력과 고밀도의 기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박용래 시인에게 물어볼 수 없다. 아니, 설령 시인이 살아 있다 해도 물어보는 우를 범해선 안 되리라.(만약에 어떠한 연유로 쓴 시인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시인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이처럼 칭얼대시겠지.)


<시의 결점 지적하면 달게 듣고
오독해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어리벙벙한 시인은 대체로 자신의 언어가 투명하다고 착각한다. 시인이 명징하게 말을 한다고 해서 독자에게 언어가 다 명징하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침묵, 혹은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모두 결국은 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침묵의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형상, 즉 이미지는 “말하는 침묵”이다. 시가 언어를 통한 표현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는 매우 도발적인 지적이다. “시인의 말은 그것이 태어났던 침묵과 자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 안에 깃든 정신을 통해서 스스로 침묵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여, 누군가 당신 시의 결점을 지적하면 겸손하게 귀를 열고 가만히 들을 일이다. 얼토당토 않은 비판이라도, 돼먹지 못한 소리라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 해도 달게 들어야 한다. 독자가 당신의 시를 오독한다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대들지 말 것이며, 제발 어느 날짜에 쓴 시라고 시의 끝에다 적어두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 시를 완성한 날이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그 따위를 알려고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다. 당신이 완성했다는 그 시는 당신의 마음 속에서 완성된 것일 뿐, 독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언제든지 변화하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

<끝>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