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고봉밥'을 먼저 떠올려봐 / 안도현
24. 개념적인 언어를 해체하라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시인 / 시적 상상력과 창의성
24. 상상력 발전소를 가동하라
모든 사랑은 상상으로 시작되어 상상으로 막을 내린다. 특히 이성을 만나기 전이나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상상력의 펌프질은 두뇌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두 사람의 상상력이 접합 지점을 찾았을 때 우리는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 둘 사이에는 상상력이 엇갈려 삐걱거릴 때도 있다. 바야흐로 의심이 싹트면서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에 금이 가는 시점이 도래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신은 끈질기게 훼방을 놓고 연인들은 심각하게 결별을 고려한다.
처음에 상상력은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 생각의 크기와 밝기도 미약하기 그지없다. “상상력은 대상과 밀착되고 있는 상태를 말해준다. 분석적 관찰의 결과가 아닌 종합적 직관의 결과다”(이형기)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시적 상상력은 직관 중에서도 감각적 직관의 도움을 받는다. 이문재는 감각을 일컬어 “몸과 마음의 경계”이면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시에서 감각이 중요한 이유는 시가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애초부터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자이다. 시인이 불씨를 살려 강철을 구부리고 녹여 만들어낸 연장을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상상력은 재 속에 숨은 불씨
꺼지지 않도록 풀무질하라〉
만약에 그렇게 해서 시인이 하나의 낫을 만들었다고 하자. 우리는 풀과 곡식을 베는 농기구로서 낫의 실용적 가치를 살피기 위해 그 연장을 요모조모 뜯어볼 것이다. 쇠의 강도와 둥그런 날의 각도는 적당한지, 날은 잘 벼려졌는지, 낫자루를 끼우기에 적합한지를 따져볼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낫은 실제로 삶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기여한다. 시적 상상력이 허무맹랑한 공상과 구별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의 낫이 농기구가 아니라 인명을 해치는 무기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할지 모른다. 시인의 상상력이 또 다른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이 만들어낸 낫의 외형을 보면서 그것의 미학적 가치를 따지기도 할 것이다.
질베르 뒤랑은 “상상된 공간은 매순간 자유롭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존재의 지평과 희망을 영원 속에서 재건립한다. 상상계는 우리의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이며, 영혼이 살아 있는 심장이다. (…) 상상력의 기능은 죽어 있는 객관성에 유용성이라는 동화(同化)적 흥미를 부가하고 유용성에 기분 좋은 것에 대한 만족감을 부가한다”(<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상상력이란 “세상과 사물을 맺어주는 비밀스러운 끈”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문인수의 <쉬>는 ‘뜨신 끈’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은 어느 날 정진규 시인한테서 아버지를 안고 오줌 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시의 불씨였다. 불씨를 붙잡고 상상력의 풀무질을 계속한 끝에 부자간의 인연을 오줌발의 ‘뜨신 끈’이라는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낸 것이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시에서 상상력은 비유를 동반할 때가 많다.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불꽃은 우리에게 상상할 것을 강요한다”고 말할 때 당신도 무작정 상상을 강요당하고 싶은 적이 있는가? 그가 “불꽃은 젖어 있는 불이다”라거나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그 매혹적인 은유 앞에서 금세 시인이 된 듯 착각에 빠진 적이 있는가? 그리고 또 그가 “불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아편을 먹는다. 그리고 불꽃은 아무 말 없이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는다”라고 강렬하게 외칠 때, 시의 불꽃에 타서 죽고 싶은 적이 있는가?
상상력은 무엇보다 창의성과 긴밀하게 동거한다. 현대창의성연구소장 임선하 박사의 <창의성에의 초대>를 읽다가 아동의 창의성 교육에 관한 이론이 일상에서 ‘시적인 사고’와 ‘시적인 상상력’을 추출하려는 우리의 관심과 거의 유사한 접근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즉 창의적 사고와 시적 사고는 별개가 아니며 한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창의적 사고의 기능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민감성이다. 주변 환경에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능력을 이른다. 자명한 듯한 현상에서도 문제를 찾아보고, 나와 친숙하지 않은 이상한 것을 친밀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둘째, 유창성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초기의 아이디어가 최선의 아이디어인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한층 많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들로부터 많은 것을 연상하기, 문제 상황에서 가능한 해결 방안을 있는 대로 많이 찾기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융통성이다. 고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시각 자체를 변환시켜 다양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상투적이고 고정적인 사고의 틀을 깨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전혀 관계없는 사물들의 유사점을 찾아본다든지, 사물의 구체적인 속성에 주목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넷째, 독창성이다.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여 참신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나만의 것을 찾고, 기존의 생각이나 가치를 부정하는 사고를 말한다.
〈혹여 불 꺼지면 어둠 속 있으라
눈 닫힌 대신 코와 귀 열릴지니〉
다섯째, 정교성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기존의 아이디어를 한층 치밀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헝클어지고 조잡한 생각을 다듬고 그것의 실제적인 가치를 고려해서 발전시키는 활동이다.
이와 함께 이 책에서는 창의적 사고의 성향을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자발성, 독자성, 집착성, 호기심이 그것이다. 이런 용어는 “상상력, 독창성, 확산적 사고, 창조성, 발명, 직관, 모험적 사고, 창출, 탐구, 창안”과 더불어 시를 읽고 쓰며 상상력을 공부하는 우리의 잠든 의식을 적절하게 자극한다.
시인들이 때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기인으로 비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철없는 낭만주의자로 인식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인생의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일탈을 꿈꾸거나 혁명을 갈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를 쓰는 일은 마음속에 상상력 발전소를 차려 가동하는 일이다. 그 발전소에서 당신은 먼저 머리에 입력된 모든 개념적 언어를 해체하라. 정진규의 말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버리고 ‘어머니의 고봉밥’을 상상하라. 개념어는 삶을 일반화해서 딱딱하게 만들지만 구체어는 삶을 말랑말랑하고 생기 있게 만든다.
때로 상상력 발전소가 이유 없이 정전이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거나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글렀어, 하고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어둠 속에서는 어둠을 오래 바라보라. 시각이 닫히면 청각이나 후각이 열릴지도 모른다.
당신은 상상력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필기구를 준비해두고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갈 필요가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의 절반쯤을 과감하게 버릴 필요도 있다. 상상력을 위해서 며칠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수염을 깎지 않은들 어떠리. 시는 놀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게임이니까. 상상력으로 승부를 걸고 싶은 당신은 체 게바라의 말을 상상력 발전소의 연료로 써라.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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