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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소월 진달래꽃도 3년을 고치고 고쳤느니 / 안도현

by 丹野 2009. 5. 6.

 

 

 

소월 진달래꽃도 3년을 고치고 고쳤느니 / 안도현

21.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문을 밀까, 두드릴까 / 참담한 기쁨을 느낄 때까지 / 소월도 3년 동안 고쳤다

 

21.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고’라는 말은 당대의 시인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가까운 데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가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이 시의 마지막 행 두 번째 글자인 ‘고(敲)’는 ‘두드리다’는 뜻이다. 시인은 애초에 이 글자가 들어간 자리에 ‘민다’는 뜻의 ‘퇴(推)’를 썼다고 한다. 스님이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날 노새를 타고 가면서도 ‘퇴(推)’로 할지, ‘고(敲)’로 할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지나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간 가도는 글자 한 자를 결정하지 못해 실수를 범했노라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퇴지였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퇴(推)’보다는 ‘고(敲)’가 낫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부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이후 글을 수정할 때 퇴고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우연한 시상·표현은 씨앗일 뿐, 퇴고는 글쓰기의 시작이자 끝>


그러면 한퇴지는 왜 ‘퇴(推)’보다 ‘고(敲)’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취향에 의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보면 곤란하다. 새들도 잠든 한가하고 고요한 밤에 스님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필요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거처이므로 스님은 발 닦고 이불 펴고 잠들면 그만이다. 긴장이 없는 정황은 울림이 없는 시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스님이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 대문까지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또 집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스님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시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님을 맞이하는 이가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 같은 사내면 어떻고 어여쁜 여인이면 또 어떻겠는가?)

1940년에 처음 나온 글쓰기 지침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모두 제9강으로 짜여 있다. 이 중 다섯 번째를 ‘퇴고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로 할애하고 있다. 그는 “심중엣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퇴고는 “우연이 아닌, 계획과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태준은 산문 <무서록>에서도 퇴고에 대해 힘주어 말한 적 있다.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다.”
퇴고의 중요성은 백번 천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습작이란 퇴고의 기술을 익히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퇴고가 외면을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덧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이 되어서도 안 된다. 퇴고를 글쓰기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퇴고는 글쓰기의 처음이면서 중간이면서 마지막이면서 그 모든 것이다.

시라고 해서 우연에 기댄 착상과 표현을 시의 전부라고 여기면 바보다. 처음에 번갯불처럼 떠오른 생각만이 시적 진실이라고 오해하지 마라. 퇴고가 시적 진실을 훼손하거나 은폐한다고 제발 바보 같은 생각 좀 하지 마라. 처음에 떠오른 ‘시상’ 혹은 ‘영감’이라는 것은 식물로 치면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면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 햇볕이 잘 들게 하고 거름을 주는 일, 가지가 쑥쑥 자라게 하고 푸른 잎사귀를 무성하게 매달게 하는 일, 그 다음에 열매를 맺게 하는 일… 그 모두를 퇴고라고 생각하라.
내가 쓴 시에 내가 취하고 감동해서 가까스로 펜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 때가 있다. 습작기에 자주 경험했던 일이다. 한 편의 시를 멋지게 완성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튿날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쓴 그 시를 다시 읽어보았을 때의 낭패감! 시가 적힌 노트를 찢어버리고 싶고, 혹여 누가 볼세라 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때의 그 화끈거림! 나 자신의 재주 없음과 무지에 대한 자책!


<두려워 말고 밥먹듯이 고치되, 뜸들 때까지 서둘지는 말아야>


당신도 아마 그런 시간을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습작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 편의 시를 퇴고하면서 그 시에 눈멀고 귀먹어 버린 자가 겪게 되는 참담한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퇴고를 하는 과정에 시에 너무 깊숙하게 침윤되어 잠시 넋을 시에게 맡겨버린 결과다(사랑에 빠진 사람을 콩깍지 씌였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시에 감염되어 있는 동안 당신의 눈은 밝아졌고, 실력이 진일보했다고 생각하라. 하룻밤 만에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시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변화를 한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寧邊엔 藥山
그 진달래꽃을
한아름 다다 가실 길에 부리우리다.

가시는길 발거름마다
뿌려노흔 그 꽃을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이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달래꽃>하고 상당히 다르다. 1925년 12월에 출간한 시집 <진달래꽃>을 준비하면서 소월은 3년 동안 시를 퇴고한 것이다. 시행을 바꿔 전체적으로 리듬을 유려하게 살렸고, ‘고히고히’는 ‘고이’로 줄였으며(‘한아름’은 ‘아름’으로), ‘그’라는 불필요한 관형사를 지웠다. 특히 3연은 대폭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앞서 등장한 ‘길’과 ‘뿌리다’ ‘고히’라는 말이 3연에 다시 반복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언어의 장인인 소월은 못 견뎠을 것이다. ‘마다’라는 조사는 얼마나 가시처럼 그의 눈에 거슬렸을까? 이러한 퇴고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걸음걸음’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한국적 언어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도 시를 고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밥먹듯이 고치고, 그렇게 고치는 일을 즐겨라. 다만 서둘지는 마라. 설익은 시를 무작정 고치려고 대들지 말고 가능하면 시가 뜸이 들 때까지 기다려라. 석 달이고 삼 년이고 기다려라.
그리고 시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시를 보여줘라. 시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다. 농부도 좋고 축구선수도 좋다. 그들을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잠재적 독자인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이규보도 “다른 사람의 시에 드러난 결점을 말해 주는 일은 부모가 자식의 흠을 지적해 주는 일과 같다”고 했다. 누군가 결점을 말해 주면 다 들어라. 그러고 나서 또 고쳐라.

“글은 다듬을수록 빛이 난다. 절망하여 글을 쓴 뒤, 희망을 가지고 고친다”고 한 이는 소설가 한승원이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좋아한다고 했고,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시를 고치는 일은 옷감에 바느질을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고치되, 그 바느질 자국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라.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는 천의무봉의 시는 퇴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