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고 가는 길
최서림
1. 소월적 고뇌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란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도는 꿈을
즐거히, 꿈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도르랴, 아침에 점을 손에
새라 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東이랴 南北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츳 가느른 길이 니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저 혼자……산경(山耕)을 김매이는
-김소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소월의 시는 대부분 낙원 상실 및 그것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다. 실낙원은 실낙원대로 관념으로서 실재하며 우리를 사로잡아오며 한평생 끌고 다닌다. 소월에게 있어서 이 실낙원은 소위 숨은 신으로 존재한다. 숨은 신은 지금 숨어 있을 뿐이지 신으로서의 역할은 다하고 있다.
초기 소월의 자연 서정시에서 실낙원 곧 숨은 신은 잃어버린 순수자연으로 나타난다. 주로 신비적 베일에 가려진 ‘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의 靑山, 다시 말해 순수자연은 관념 내지 정신적 존재, 형이상학적 존재로 나타난다. 1920년대 한국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관념으로서의 청산은 바로 민족혼이 훼손되지 않은 채 신성한 모습으로 들어있는 존재이다. 이 정신으로서의 산은 식민지 수도에 살고 있는 즉, 신성한 민족혼이 박탈당하고 사라진 경성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치유와 소생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병든 내면뿐만 아니라 점점 왜곡되어 가는 사회와 역사를 바로잡고 그것들에게 새 힘을 제공해주는 원시적 활력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점점 더 해체되어 가는 것들을 재통합해주는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소월에게 있어서 그 순수자연, 곧 신은 저만치 떨어진 채 숨어있을 뿐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에 놓여있을 뿐이다. 김소월 시에 나오는 비극적 파토스는 바로 이 숨은 신인 순수자연을 본받고 그에 동화되려는 데서 시작된다.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데 모방하기엔 너무 먼 거리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진리, 곧 Idea와 합일하려는 에로스적 욕망 때문에 빚어지는 아이러니적 정서이다. 소월 시의 지배적 정서인 恨은 바로 이렇게 모방하기엔, 즉 동화되기엔 너무 먼 거리에 존재하는 순수자연을 사모하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엔 서정적 비전과 그 비전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좌절시키는 현실의 논리, 서사적 갈등과정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문면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그러한 현실적 방해세력과 싸우는 서사적 갈등과정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월 초기시에 보이는 감동적인 긴장감은 바로 이 이원적인 것의 모순된 통합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에게는 숨은 신으로서의 순수자연이 애매모호한 존재인 것처럼 현실 그 자체도 매우 추상적인 그 무엇이다.
소월은 이렇게 우상화되고 절대화된 순수자연을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자아가 아니라 대상 중심으로 우주적 통합을 이루어 내고 더불어 자기동일성, 주체를 확립하려 했다. 낭만적 서정시가 주체중심으로 동일성을 이루어내고 있다고 하는 통설과 달리 소월의 자연 서정시는 객체중심으로 동일성을 성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주체중심적인 발화로 되어있고 자아의 정서로 착색된 대상이 보이지만 동일화는 엄연히 대상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대상 중심적 사고가 바로 근대에 있어서 주체를 확립하고 주체 및 사회와 역사를 치유하고 구원해 내는 방식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소월의 객체 중심적 동일화 방식이 초기에는 ‘관념으로서의 靑山’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후기에는 ‘생활터전으로서의 땅’에다 기반을 두게 된다. 이것은 그가 동아일보 구성지국 경영을 맡아 세상의 논리와 힘을 몸소 체험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그는 추상적인 순수자연, 곧 숨은 신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신이자 진리 그 자체인 땅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제 현실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온 것이다. 이때 나온 걸작 중에 하나가 바로 위에 인용한 시이다.
위의 시에는 ‘있는 그대로의 농촌현실’과 ‘응당 앞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이상적인 농촌현실’이 생생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앞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이상적인 농촌현실은 서정적 주체로 하여금 모방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서정적 주체는 그러한 이상적인 농촌현실을 시적으로 선취하고 그것을 본받음으로써 문학적 정신적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제 농촌의 현실적 진보와 자아의 발전도 아울러 꾀하고자 한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된 이상적인 농촌 현실은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다. 아무도 소외됨이 없는 농촌공동체, 그것은 소외되지 않은 건강한 노동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그 소외되지 않은 건강한 노동은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땅’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 그것은 건강한 민족공동체의 물질적 토대이자 낭만적 서정의 현실적 조건이다. 소월의 초기 자연서정시에 나오는 자연이 관념적인 낙원에 그쳤다면, 그의 후기시에 나오는 농촌공동체는 현실적 낙원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주체의 정신적 사회적 성숙을 의미한다. 동일성의 중심축을 관념적인 존재에서 현실적인 가시적인 사물로 옮김으로써 그의 은유적 사고는 팽팽한 긴장감과 시적 리얼리티를 더욱 크게 확보한다. 그만큼 그의 정신이 감당해야 할 부하도 커진 셈이다.
사실 위의 시에서 보듯이 그 이상적인 농촌공동체의 물적 토대인 땅은 현실적으로 농민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들은 그 땅을 잃어버리고 소외된 노동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이란 국가이고 국토이다. 그래서 실제의 농민들은 동이랴 남북이랴 떠돌며 유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땅을 잃어버리고 유랑하는 식민지 농민의 현실적인 삶과 앞으로 회복되어져야 할 이상적인 농촌공동체를 제시하는 서정적 비전을 긴장감 있게 변증법적으로 잘 통합하고 있는 이 시는 건강한 모방을 보이고 있다. 모방이란 이처럼 모방할 만한 모델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실이 아무리 비참하지만 낭만적 꿈을 잃지 않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별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상적 삶의 과정이 바로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별빛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 ‘가느른 길’, 좁은 길이다. 이 좁은 길을 잘 참고 꾸준히 나아갈 때 서정적 비전과 서사적 갈등과정이 긴장감 있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근대이후 서정적 비전과 서사적 갈등과정, 곧 현실적 갈등과정이 변증법적으로 긴장감 있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이 ‘가느른 길’밖에 없다. 이 좁고 가는 길의 긴장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때 「옷과밥과자유」나 「돈타령」과 같이 서정에의 꿈을 잃어버린 비참한 일상적 허무, 곧 ‘길 없음’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 「여름 달밤」과 같이 아무런 현실적 토대나 반성 없이 허무맹랑하게 백일몽적으로 미화된 이상적인 농촌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 그치게 되는 ‘넓은 길’에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 소월의 후기시 중에서 현실적 서사과정과 이상적 서정적 비전이 긴장감 있게 통합된 것은 몇 편에 지니지 않는다. 대부분은 「옷과밥과자유」에서와 같이 길 없음에 빠져 허무적 정조로 허우적거리는 것이고, 또 다른 일부가 「여름 달밤」에서와 같이 넓은 길에의 유혹으로 빠져 긴장감을 상실해버리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에게 부과된 현실적 짐을 감당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솔직함이 또한 소월의 또 다른 매력의 하나다. 진정한 근대시의 매력은 이처럼 소월적 고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서사문학이 서정적 비전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듯이 감동적인 서정문학은 자체 서사적 갈등과정을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 위의 시에서 서정적 주체가 좁고 가는 길의 긴장, 곧 서정과 서사의 변증법적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온 새벽에 동무들이 <저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는 현실적 광경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현실적 광경이란 결국 고통스런 식민지 농촌 현실에 존재하는 서정적 주체, 모방주체와 앞으로 이 땅에 회복되어져야 할 이상적인 농촌 현실, 곧 모방대상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가능하다. 이처럼 소월의 후기시에 있어서도 서정과 서사의 팽팽한 결합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모방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방행위는 지나치게 주관화되고 상대화된 이 시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미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적인 삶의 윤리를 모랄로 내세우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미메시스라는 철학에는 객관적인 미를 모방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동화됨으로써 보편적인 구원에 이르고자하는 이데올로기, 곧 은유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숨은 신이 다시 그 모습을 보이고 그 숨은 신과 함께 선험적 고향이 회복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 시대 우리가 미메시스 철학을 강조하는 것에는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복원코자 하는 이념이 들어있는 것이다.
2. 양심으로서의 문학
오늘날 은유를 주장하면 시대 뒤떨어진 퇴물이나 촌놈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 은유적 삶의 회복을 위한 소월적 고뇌를 이야기하면 아직 근대적 삶의 미망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냐고 빈정댈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 양심이 살아있는 시인 작가라면 그 소월적 고뇌라는 말 앞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찔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공존(동양적 삶, 제유적 삶의 방식), 공생을 최우선시 한다. 이 시대 통합을 말하고 은유를 주장하면 파시스트로 낙인찍히기 알맞다. 생태시가 유행하고 정신주의시가 범람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존으로서의 문학인 생태시와 구원으로서의 문학인 정신주의 시, 주로 동양학적 사유체계에 이념적 기반을 두고 있는 이들 문학은 근대 서구적인 학문체계에다 매우 깊은 우려와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그 전에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던 근대 서구적 학문체계를 서로 먼저 헌신짝처럼 벗어버리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이성중심적이고 주체중심적인 사고는 어느 한순간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리얼리즘과 같은 총체성을 지향하는 사고체계들은 무슨 죄인처럼 다루어졌다. 이제 작가회의 사람들조차 리얼리즘이란 말만 들으면 도리질을 할 정도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인다. 우리가 찾는 것은 리얼리티이지 리얼리즘이 아니라고.
이성중심적 사고를 부정하다가 이성적 사고 자체를 배척하고나 있지 않은지? 이성적인 말 속에 들어있는 ‘양심적’이란 의미를 너무 쉽게 던져버리지나 않았는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과학적’이란 어사 속에 들어있는 이 ‘양심적’이란 의미를 일부러 고의적으로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시인, 소설가, 비평가들이 문단에서 생존하기 위해 일부러 광주문제와 노동문제, 민족문제 등을 회피해오지 않았는지?
리얼리즘이란 용어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너무 과학적인 의미만으로 규정짓지 않았는지? 리얼리즘은 과학 법칙이기 이전에 인간적 사회적 양심이어야 하지 않을까?참말로 우리는 지난 교조적인 시대 지나치게 법칙만 따지지나 않았는지? 역사는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는데 마치 유일무이한 역사적 법칙만 발견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양 이론에만 급급해하지는 않았는지? 그리하여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역사는 괴물이다!” 하고 너무나 맥없이 쉽게 주저앉고 말지나 않았는지? 문제는 역시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인데 이 리얼리티란 바로 살아있는 작가적 양심 때문에 가능하다. 지금 작가회의는 권력과 유착되어 있어서 더욱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어떤 새로운 법칙이나 이론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회적 역사적 양심을 회복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요즘 문단을 휩쓸고 있는 유행담론들
, 예컨대 생존 내지 공존의 문학을 내세우는 생태주의나 치유와 구원의 문학을 강조하는 정신주의에 얼마나 살아있는 사회적 양심이 들어있는 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사회적 역사적 양심을 몰각하고 유행에 따라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어쭙잖은 평론가들의 구미에 따라 문학상에의 욕심에 따라 몰려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양심이 밑바탕이 될 때 생태시도 정신주의시도 진정 살아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시도 마찬가지다. 실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많은 평론가들과 시인들이 이 양심의 문제에서 얼마나 양심적인가 묻고 싶다. 투쟁과 상생을 동시에 노린다고 하면서 진정 사회적 약자에 대해 사랑의 눈길을 제대로 보내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페미니즘도 제대로 되려면 먼저 이 사회적 양심부터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시인들은 툭하면 산이나 들로 돌아다니기에 바쁘다. 지난 90년대 시인들이 병적인 내면으로만 헤매고 다녔듯이, 이젠 걸핏하면 산이나 절로만 찾아다닌다. 문학상이라는 제도를 움켜쥐고 있는 권력자들과 그 밑의 평론가들의 입맛에 들기 위한 계산 빠른 시인들도 많은 줄로 안다. 그들은 툭하면 정지용을 끌어들여 자기네들을 정당화하려 든다. 그런데 정지용의 후기 산수시를 보라. 거기에는 역사에 패배당한 자의 뼈를 저리우는 고통과 고독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조지훈의 유유자적은 자신의 말마따나 현실에서 패배 당한 자가 체념과 울분으로 가득 찬 채, 짐짓 자신의 역사적 패배를 감추어보려고 그냥 애써 헛폼을 잡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정신주의 시에 정지용이나 조지훈에게서 보이는 살아있는 양심, 고통스런 양심이 얼마나 보이는가? 우리는 정신주의, 생태주의란 이름으로 너무 쉽게 ‘넓은 길’에로의 유혹에 미혹되고 있지는 않은가? 넓은 길에로 유혹되는 것은 지난 1990년대 이 땅을 휩쓸었던 해체주의의 ‘길없음’에 절망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이지는 않은가? 더 크게 병들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병든 줄도 모른 채 추상적인 자연, 곧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꼴은 아닌가?
서정시는 만남의 시학이다. 너와 내가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름답게 만나는 게 목표고 꿈이다. 그러나 이 시대 진정한 서정의 길, 만남의 길은 소월처럼 좁고 가는 길로 나아가려고 할 때에 발견된다. 넓은 길은 결코 너도 나도 살리는 길이 아니다. 이 좁고 가는 길은 먼저 사회적 양심을 회복할 때 새벽별처럼 빛을 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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