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by 丹野 2009. 3. 4.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

어진다는 것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

약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

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이탈한 자가 문득 > 향기로 말을거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자의 추억 / 고성만  (0) 2009.03.04
숭어 / 고성만  (0) 2009.03.04
비비추 / 고영민  (0) 2009.03.04
視綠의 무게 / 황인숙  (0) 2009.03.03
소쿠리 가득 봄볕이 / 황인숙  (0) 200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