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고영민
이 저녁엔 사랑도 사물(事物)이다.
나는 비로소 울 준비가 되어 있다 천천히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늙은 나무를 보았느냐.
서 있는 그대로 온전히 한 그루의 저녁이다.
떨어진 눈물을 주울 수 없듯
떨어지는 잎을 주울 수 없어 오백년을 살고도 나무는
기럭아비 걸음으로
다시 걸어와 저녁 뿌리 속에 한해를 기약한다.
오래 산다는 것은 사랑이 길어진다는 걸까, 고통이 길
어진다는 것까
잎은 푸르고, 해마다 추억은 붉을 뿐,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의 집주인은 한달 새 가는귀가 먹었다.
옹이처럼 소리를 알아먹지 못하는 나이테 속에도
한때 우물처럼 맑은 청년이 살았을 터이니,
오늘밤도 소리를 잊으려 이른 잠을 청하고
자다 말고 일어나 앉아 첨벙, 몇번이고 제 목소리를 토
약여 재울 것이다.
잠깐, 나무 뒤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나무를 따라와 이 저녁의 깊은 뿌리 속에 반듯이 눕는
것은 분명
또다른 너이거나 나,
재차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혼자 사는 저 나무의 집주
인은 낮은 토방에 앉아
아직도 시선이 집요하다.
날이 조금 더 어두워지자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나무 속에서 참았던 울음소리가 비어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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