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떨어진 자리
길상호
잠시 장마가 멈춘 골목에서 보았다
나무들 채 익지 않은 푸른 열매 떨어뜨리고
늙은 개처럼 빗물 털고 있었네
배꼽 불거진 감또개를 잃은 감나무와
알도 차지않은 석류를 놓친 나무가
암캐와 수캐처럼 서로를 향해
속으로 짖었는데 그 울음이
밟혀 뭉개진 열매처럼 마음에 걸려
한참을 막다른 골목이 되어버렸네
놓친 시간들을 떠올리듯
거기 멍하니 바라보는데 눈물을 닦고
두 나무 나를 더 애처롭게 바라보네
떨어진 열매의 자리, 그 빈 자리가
남은 열매를 키우는 힘이라고
자리를 양보한 둥근 꿈들이
남은 열매들의 몸 씨앗으로 박힐 거라고
푸른 잎으로 반짝 말을 던지네
나는 상처 입은 열매를 주워 들고서
그 어두운 골목 얼른 빠져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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