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흔적, 존재를 찾아서 (3)
나호열
다시 여자
자작고개를 다시 넘어오는데, 저 앞에서 짚차 한 대가 멈추어 서고 한 사내가 내린다. 한 손에는 지도를 든 채로 우리가 방금 떠나왔던 절터를 묻는다. 폐사지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하기 때문이다. 역사 유적을 공부하는 사람 아니면, 또 나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패배와 굴욕에 몸을 떠는 사람이 아니면, 폐사지는 단지 공터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빈 터는 언제나 빈 터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죽음과도 같이 빈 터는 그 옛날의 영광과 분투의 기억을 버리는 대신 자연의 쓰레기이면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님으로 살아 남을 수 있다. 겨울 해는 빠르게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그와 나는 가늘게 눈을 뜨면서 해지는 쪽, 우리들의 집을 행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제일 멋있지요. 집에 갔는데, 애엄마가 없으면 되게 화가 나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십이 넘은 남자에게 여전히 여자는, 아내이면서. 엄마이기도 하다. 여성들이여, 이 남자들의 치졸함을 받아주시기를! 남성은 늙어가면서 여성 홀몬이 증가하고, 여성은 남성 홀몬이 증가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가 어찌 되는가를 슬쩍 넘어가 주기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본능적 요소를 남녀간의 우열의 잣대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편견과 악습을 만들어 왔다. 문화는 동물적 본능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남녀를 바로 세우는 잣대로 기능한다. 이성을 포함한 자아는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본능적 욕구와 충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가 되든 인격체로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랑은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이데아로서 우리 앞에 현현한다. 그 사랑은 육체적 쾌락을 넘어서 정신을 해방시키고 용서와 화해를 구현한다. 직선적 대립이 지양되고 스스로 구부러짐으로써 희생과 인내의 절대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자. 2 -폐사지에서」는 박강순의 세 번째 시집 『바람흔적』(시와산문사,2003)의 한 편에 불과하다. 이 시집에는 이 밖에도 다섯 편의 '여자' 연작시가 더 수록되어 있는데, 이만한 질감과 긴장을 가지고 오늘의 여자를 절단한 시편은 없어 보였다. 3연 9행에 불과한 이 시에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여자의 절편을 추출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위험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가 여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여자라는 단어를 취한 까닭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인도의 성자들은 정명론에 구애받지 않았다. 유교문화권에서의 正名은 세계를 구축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중요한 이념의 틀이었다. 나는 전자의 입장에서 시를 읽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알 수 없으나 모성은 영원히 남성에게는 콤플렉스임에 틀림없다. 생명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그 고통 속에서 모성은 싹튼다. 그 모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용기와 희생의 단서를 제공하는 경전일 것이다. 좀처럼 겹쳐질 수 없는 폐사지와 여자의 이미지가 팽팽하게 맞서고 서로를 아우르는 경지 속에서 나는 많은 오독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느꼈다.
* 이 글에 나오는 폐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에 위치한 거돈사지이다.
* 거돈사지(居頓寺址) 1966년 12월 19일에 사적 제168호로 지정된 거돈사지는 현재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59번지에 자리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거돈사지는 보기드문 일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권46 원주목(原州牧) 불우조(佛宇條)에는, "거돈사재현계산유고려최충소찬승승묘(居頓寺在玄溪山有高麗崔沖所撰僧勝妙碑)-거돈사는 현계산에 있다. 고려 때 최충이 글을 지은 승묘 스님의 비가 있다."고 한 기록에 따라 거돈사가 위치한 산명이 현계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람의 건립연대가 신라시대였음은 절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으로 짐작할 수 있다.그러나 폐사(廢寺)된 년기(年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조선 중엽까지 존립해 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전할뿐이다. 거돈사지터는 정산리 일대 약 7,500여평을 차지하고 있다. 사지 내에는 중문지(中門址)가 있으며 중문 앞에 축대(築臺)가 있고 중문 좌우에 회랑지(廻廊址)가 동서로 나아가 다시 북으로 꺽여 강당지(講堂址)기단과 연결된다. 중문지 뒤쪽에는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으로 세워진 삼층석탑이 있고 그 뒤쪽에는 금당지(金堂址)가 있으며 강당지가 바로 연이어져있다. 금당지에 전면 6칸 측면 5칸의 주초석이 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20여 칸의 대법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화강석 블좌대가 있는데, 좌대의 높이로 보아 금당에 봉안되었던 불상은 좌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층석탑 서쪽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된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다. 이 탑비의 비문은 고려 문종때의 대학자로 해동공자라고 불렸던 최충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김거웅이 썼다. 거돈사지에 있던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승묘탑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이전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로 옮겨져 있다. 그리고 절터 아래쪽의 폐교된 정산분교 운동장에는 길이 9.6m, 폭 80cm, 두께 57cm의 거대한 미완성의 당간지주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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