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화와 전통문화
나 호 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역문화위원)
문화란 무엇인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가 있다. ‘문화’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막상 ‘문화 文化란 무엇인가?’라고 되묻게 된다면 그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소박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질박한 것에서 장식적으로의 전환, 야만으로부터 진화하는 인간다움의 느낌을 누구나 자족한다는 것이다. 실례를 든다면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 문화를 덧붙이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을 보면 알 수 있다. 술, 성, 음식, 정치, 주거, 청소년. 군대 등등의 낱말 뒤에 우리는 얼마든지 문화를 붙여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단독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집단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의 양식이 문화라고 정의될 수 있으며. 따라서 문화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무형의 가치 즉 정신적 가치를 생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축적화 개념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의 개념이 본질상 축적을 넘어서서 기획하고 만들어지는(作爲)의 개념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데 문화산업이나 문화 콘텐츠 같은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문화를 경제적 측면에서 생산성과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문명 文明의 요소가 지배적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 보다 뚜렷하게 문화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전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文과 化가 합성된 개념이다. 文은 논어에 나오는 바대로 行有餘力 則而學文이라고 하거나: 학문과 藝術, 아름다운 외관: 文質, 예악, 제도 등 국가 시회를 빛나게 하는 것 :문물, 문명, 모양이 나도록 하는 꾸밈이라고 볼 수 있고, 化는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되는, 한 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뀌면서 개선되거나 교화 敎化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끄는 행위, 인류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학습에 의하여 이루어놓은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의 성과 , 衣食住를 비롯하여 기술, 학문, 예술, 도덕, 종교 따위 물질 양면에 걸치는 생활 형성의 양식과 내용을 포함함, (새우리말 큰 사전, 신기철, 신용철 편저, 삼성출판사) 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영어로 culture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어서 the development of the mind or body by education, the result of the careful training of the mind, training in manners, etc, 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동사형으로 쓰일 때에는 ~을 경작하다. 재배하다의 용법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동, 서양을 막론하고 문화의 정의는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가 정리한 “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는 견해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역사를 이어주는 다리
인간이 종이와 문자를 발견하기 이전에도 다양한 생활도구, 동굴 벽화 등을 통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후대에 남겨 놓았다. 先史時代를 지나고 문자를 통해서 전해오는 사실들을 역사 歷史라는 이름으로 탐구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다. ‘과거의 사람들을, 사건들을, 생활의 면면을 탐구한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라는 의문은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리거나 망각한 민족이 종국에는 지구 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쉽게 풀릴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선인들의 사고와 풍습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대응방식을 취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으며 그런 사실들이 오늘의 삶의 양식을 이해하고 주어진 환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방도가 되는 것이다. 공자가 설파한 溫故而知新, 述而不作의 정신은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거을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반드시 옛것을 올바로 살피는데서 나오고 과거를 반성하는데서 혜안이 밝게 트이는 것을 경시한다면 이는 딜타이가 주장한 문화적 遺傳을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속에는 과거의 문화 因子가 고스란히 살아 있어서 한 국가 또는 민족의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격, 즉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인데, 그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 타 민족의 삶을 사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탐구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역사적 존재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후대에 투영되는 역사적 산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알아야 하고 오늘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거울로 오늘을 되비쳐 보아야하기 때문에 역사를 올바로 탐구한다는 것은 배타적 민족주의나 우월주의로 편향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문화를 이야기할 때 올바른 문화나 올바르지 않은 문화로 나누는 것이 온당한 일은 아닐 것이나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충분히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 국가나 민족이 쇠망할 때의 공통적인 특징은 상식적으로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횡행할 때라고 이해되고 있다. 좋던 싫던 간에,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과거의 이름으로 후대에게 전승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은 역설적이게도 민족중흥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올바른 문화를 형성해야할 책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들
우리 사회는 압축 성장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풍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西勢東漸의 추세가 자연스럽게 적용됨으로써 서양 諸國들이 수 세기에 걸쳐서 발전시켜왔던 산업화, 정치적 민주화, 그와 더불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IT산업은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여 인터넷 서비스, 휴대전화로 상징되는 정보통신수단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보급이 급속히 진행됨으로써 일찍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세계화나 국제화와 같은 패러다임이 국가의 번영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정형화되어 세계시민정신을 고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이진경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이론」에서 아래와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이처럼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하는 운동은, 특정한 코드와 영토에 ‘정착’시키고 고정시키려는 권력의 지대(地帶)를 횡단하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영토를 생성해낸다는 점에서 ‘유목’(nomad)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번에 전체를 해방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지대, 그리하여 모든 것을 고식적인 형태로 고착시키려는 지배적 경향에서 벗어나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긍정적 생성이다. 그것을 통해 권력에 길든 삶의 방식, 권력에 의해 코드화되고 영토화된 개인에서 벗어나, 횡단하며 접속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개개인을 새로운 주체로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유목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급속한 사회의 변동은 세대 간의 단절을 증폭시키고 갈등을 유발한다. 그 뿐 아니라 유목의 정신은 현대와 전통을 절연시키고 민족 개념을 와해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국토의 통일이라는 숙제가 남아있고.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역사왜곡과 영토침탈의 야욕에 직면해 있다. 한 마디로 세계정신의 구현과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
우리 땅에서의 삶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반 만 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에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든 선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遺跡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소중함의 의미를 稀少性에서 구하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기에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소홀해지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문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볼 때 전통문화의 근간은 농경과 군주제에 의한 계급사회, 불교와 유교와 같은 종교의 이데올로기화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러한 전통적 토대가 무너지고 새로운 토대가 생성되고 있다. 임희섭이 「발전의 역동과 근대화」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순응의 논리, 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억제되고 합리적이고 법과 규칙을 준수하려는 의식이 희박한 폐해가 전통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가족주의적 가치관, 자연과의 조화, 개인보다 전체를 중요시하고 더 나아가서 공동체의식을 공고히 하는 것들은 오늘날 안고 있는 사회적 병폐를 치유하는 요체가 되고 있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보존, 계승은 오늘에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관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통 문화유산을 현실의 가치와 효용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내치는 일이 어리석은 일임에 틀림없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를 주장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슬로건은 전통문화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중국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모방에 급급하여 현실적 환경에 걸맞지 않는 행위에 치중하지 않았다. 정치, 사상, 종교에서부터 일반 서민들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선진외래문화의 발전적 수용이라는 주관을 버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가려내는 일은 축적된 경험과 학습을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낼 수 없다. 한 사물의 의미나 가치를 체득하기 이해서는 개개인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다.
이제 한 두 가지의 소박한 제언을 내려놓으며 이 글을 마칠 때가 되었다. 한동안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고 성급히 역사적 평가를 내리려는 경솔함을 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역사적 편견을 제거하고 합리적인 역사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것이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계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면서도 나의 정체성을 뚜렷이 자각할 수 있는 비판과 반성의 능력을 배양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 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유무형의 문화재들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대중성을 넓혀 나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시행되고 있는 문화해설사 제도는 더욱 전문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국가의 제도적 지원체제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전통문화와 현대의 삶을 융합할 수 있는 상시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어 누구나 기꺼이 역사의 현장과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 문호를 열어두는 것이 백년지대계가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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