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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바람의 흔적, 존재를 찾아서(2)

by 丹野 2009. 2. 12.

 

 

 

 

                       바람의 흔적, 존재를 찾아서(2)

 

 

                                                                                 나호열

 

 

 

폐사지에서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와 머뭇거림이 시간을 지체했다. 원주를 앞에 두고 문막에서 빠져나와 차는 지방도로로 접어든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처럼 산과 들은 잔설로 희끗거리고 기억을 되짚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차는 몇 번인가 머리를 바꾼다. 낯 선 곳으로의 이동은 경이롭다.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러므로 어떤 묘사로도 담아낼 수 없는 그 어떤 곳이 존재한다는 것, 그곳에서도 뭇 생명과 마을과 사랑과 미움이 바람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 눈물겨웁다. 잠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표지판의 마을 이름, 숫자화된 도로명이 그 되돌아가야 할 곳을 알리는 따스한 손길이고 눈짓이 될 때, 바람은 비로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실체를 부스러기처럼 흔적으로 남긴다.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어느 사람은 바람을 잡아두고 싶어하고, 어느 사람은 바람을 그리고 싶어한다. 그러니 우선은 바람 앞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연의 마주침, 분기와 생성, 이동, 사라짐 또는 소멸... 끊임없이 다가서는 관념은 바람에 찢겨지고, 펄럭이며,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이 바람으로 가득하다. 정지한 바람, 뛰어가는 바람, 저 집도, 저 산도, 나무도, 구름도, 모든 것이 다 바람이다. 바람을 거역하는 본능과 본능을 제압하려는 자아의 분투 속에서 사랑은 사생아처럼 태어난다. 바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답다. 폐허는 사랑으로 온전히 남아 있다. 아!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나는 나를 고발한 자나 사형을 언도한 배심원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미움을 가지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고개를 지나가고 있다. 사랑이 본능적이라고 한다면 왠지 다량으로 만들어진, 식어빠진 붕어빵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붕어를 빵으로 만들어 먹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 않은가? 붕어빵을 씹어 삼키면서 우리는 붕어라는 관념을 함께 저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자아는 관념을 생산한다. 자아의 만다라가 사랑이다. 원초에 생성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만들어 진 것이다. 만들어진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고, 익숙해지려면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자, 우리는 바람의 집에 도착했다. 작은 외로움은 큰 외로움을 만나야 사라지고, 보잘 것 없는 슬픔은 큰 슬픔 앞에 머리를 숙인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는 죄, 그 큰 슬픔 앞에 당도한 것이다. '움직이는 쓰레기통 같지 않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그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다. '너무 자학하지 마세요' 그래, 나는 움직이는 쓰레기통 같다. 스스로 먹고, 죽이고 배설하는 자연도 쓰레기통인데, 자연은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너른 공지를 바라보았다. 그 때도 그랬다.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는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지에서 공터로 내려 붇는 푸른 소나기 속에서 우리는 많이 울었다. 세상이 우리를 몰라준다는 야속함과 패배감과 지으면 허물어지는 욕망의 실체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던 것이다. 지독한 기도가 아니면 절실한 사랑이 아니면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이다. 만 평 가까운 절 터는 가까스로 주춧돌과 석축, 회랑의 흔적, 천 년 전 어느 선사의 탑비와 불상을 얹어 놓았던 좌대와 금당터, 복원된 삼층 석탑과 오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로 가득했다. 그 나무는 석축의 틈새에 뿌리를 박고 안간힘을 쓰며 쓰러질 듯 우람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살아 있구나, 살아 있구나 허공을 향해 뻗쳐있는 무수한 가지들은 또 무수한 잎을 키우고 버리면서 천천히 공간을 제 살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지독한 기도일 것이다. 제발 나를 나무의 업보로부터 해방되게 하소서! 정지로부터 빚어지는 나무의 몸부림은 어느 건축물보다도 견고하고, 그 누구의 무용보다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람과 비와 추위와 더위의 형벌 속에서 빚어지는 춤사위는 하나의 경전이다. 세 개의 선언지 選言枝 중에서 하나의 정답이 있을까? 지독한 기도나 절실한 사랑,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이다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여야 할까? 느티나무가 느티나무이기 위해서는 지독한 사랑과 절실한 사랑을 필요조건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느티나무는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느티나무의 생물적 속성은 나무 일반의 외연보다 적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독한 기도, 절실한 사랑은 나무 일반에도 포섭이 되는 개념일 뿐이다. 절터는 마을버스가 멈춰 선 곳으로부터 한참을 걸어 올라와야 하고 길은 한 두 번 휘어져 마을 쪽에서는 절터가 보이지 않고 절터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대중들의 발자국 소리와 ,수도승들의 염불 소리와 힘차게 속세로 내려가는 시냇물 소리와 금당에 우뚝 했을 불상과, 경전은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그 빈 터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환영을 그림자로 밟고 서 있다. 사지 寺誌에는 신라 말에 개창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병화 兵禍가 유난히 많았던 우리의 역사에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은 수도처라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지는 않았을 터. 어쩌면 소실과 분탕의 흔적이야말로 선 禪의 증명이 아니던가. 지독한 기도가 아니라면/ 절실한 사랑이 아니라면/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일 뿐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 버렸는데, 완강한 돌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악전고투하며 생명을 잇는다는 것은 지독한 기도와 절실한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다. 마을 입구 평지에 으젓하게 서 있는 당산 나무들을 보라. 몸체는 우람하고, 가지는 튼실하여 마을의 길흉화복을 일러준다는 당산나무들.. 인간은 늙어 죽지만, 나무는 늙을수록 신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 아득한 벼랑 위의 느티나무는 삶이 힘겹다. 이 느티나무는 신산한 고투 속에서 느티나무가 아닌, 신비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절이 허물어지고, 경전은 불타고, 수도자는 떠났다. 그리고 느티나무만이 남았다. 폐허 위에 우뚝 선 느티나무야말로 살아있는 반야심경이 아닐까? 세월도 겁없는 오래된 절터에서 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 이 어지럼증으로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 지독한 오독 誤讀이다. '겁 없는'의 주어는 무엇인가? 겁 없는 오래된 절터에서/ 세월도/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① 겁 없는 세월도/ 오래된 절터에서/ 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② ①은 이미 무너져버린 무소유의 경지인 절터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절터가 지닌 공포가 해소된 경지를 ②는 무소유의 경지를 보여주는 절터이기에 무량한 시간과 생명의 원천인 태양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보는 것이다. ①이든, ②이든 폐사지는 진공의 상태이다. 완전한 無, 완전한 空을 체득하는 순간 생명이 지지하고 있는 구심력과 원심력은 분해되고 만다. 이 어지럼증으로 /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 난데없는 그리움이라니? 넘겨버린다니? 어디로? 누구에게? 어지럼증은 세월이나 늙은 태양같은 직관의 형식일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話者의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첫 번 째 연의 단정의 주체도, 두 번째 연의 초월적 인식도 話者인 '나'의 드러냄인 것이다. 현재 진행형인 어법 즉,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다 라든지,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라는, 현재형 단정은 그러한 단정이 조건과 상황에 따라사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항구불변인 眞如임을 밝히는 것이다. 코 끝이 시렵기는 했지만 12월의 햇살은 빗금으로 내려오다가 아주 조그만 움직임에도 사그락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금모래처럼 사라져버린 금당 안의 불상과 그 불상을 지켜보던 삼층석탑이 약간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장난인 줄은 알았지만, 우리는 흔들리며, 무너져내리는 바람의 집인 것은 곧잘 잊어버린다. 속세에서의 보잘 것 없음이 이 텅 빈 폐사지의 공허 속에서 더 보잘 것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울컥 자신을 읽으며 목이 매이는 것이 아닌가 가늘게 눈을 뜨면 가느다란 그가 보인다 눈을 부릅뜰 때 핏줄은 팽팽하게 당겨지고, 오감은 긴장한다. 동공을 크게 연다는 것은 내 앞에 주어져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서 확실하게 내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눈이 크게 열린다는 것은 대립과 긴장, 압축된 소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은 외부세계의 눈부심에 대한 방어적 행동일 수도 있고,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眼識을 安息으로 바꾸어놓는 신호일수도 있다. 그것은 의식을 풀어놓으며, 인식의 대상을 대상 바깥으로 놓아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투쟁이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눈짓이 가늘게 눈을 뜨는 행위인 것이다. 가늘게 눈을 뜨면 /가느다란 그가 보인다 라는 표현은 굵게 눈을 뜨면 굵은 그가 보인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가늘다 라는 여린 여성적인 이미지는 그 여성성으로 말미암아 그를 또한 가녀린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크게 눈을 떠서 온전한 그의 실체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는 대립적이고 투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슴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므로써 호랑이를 용서한다. 자연의 먹이사슬은 하늘에게 땅에게 자신을 바치는 거룩한 공양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