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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詩의 造形性

by 丹野 2009. 2. 12.

 

 

 

 

 

 

                                          詩의 造形性

 

 

                                                                                   나호열

 

 

 

 

시를 분석하고 갈래를 짓는 작업은 엄밀히 말해서 시인의 몫이 아니다. 시가 무엇이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추적하는 일은 비평가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시 그 자체를 발현하고 완성해 나갈 뿐이다.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경향을 찾아가는 시인들의 창조적 행위로 말미암아 시의 영역은 다양해지고 풍성해 진다. 이승훈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방식에 따라 설명, 논증, 서사, 묘사의 네 가지의 시가 분류될 수 있으며, 랜섬은 시의 내용에 따라 플라톤적인 시, 형이상학적인 시, 사물적인 시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 김춘수는 전통 서정시, 피지컬한 시, 메시지가 강한 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의 시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이 짧은 글에서 그 내용을 세세히 밝힐 수는 없을 것이나 창조적 존재로서 시인이 그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탐험가의 정신과 시대를 앞서가는 先覺의 풍모를 잊어서는 안될 것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2000년을 넘어서면서 한국시단은 8,90년대를 휩쓸었던 통일이나 민주화 등의 거대 담론이 사그러들면서, 해체되는 개인의 무기력한 일상 풍경이나 자연에의 복귀를 낭만적으로 그려내거나 종교화된 정신의 고양을 부추기는 작품들이 대량 생산 되면서도 창조적인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는, 조정, 침체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인의 양적 풍요가 독자들의 하향 평준화를 겨냥하고 있다거나, 집단 편가르기에 편승한 안일한 시쓰기는 종국에는 시인의 존재까지 위협하는 한국문학의 사막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욱 고개를 드는 것은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어째든 시인은 바로 오늘의, 이 땅의, 우리들의 이야기를 발언하는 존재이다. 이야기의 주체와 내용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시인의 시각은 고정화된 현실의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식을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고정화된 형식이란 간단히 말해서 대중들의 가지고 있는 일상화된 상식이다. 시인들이 일상화된 상식에 함몰되어 있으면 '詩言志'의 명제가 아무리 부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시는 범박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예술도 그 작품 속에 미적 요소를 갖추지 않고서는 예술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무엇보다도 그 조형성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이미지와 이미저리의 통합물이다.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도 그것이 이미지화 되지 못한다면 진부한 교훈이나 넋두리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 시가 記意보다 記表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은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心象가 얼마나 큰 시적 요소인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시에서의 조형성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박응남, 손진수, 신채린, 윤난홍의 시는 시 읽기의 즐거움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관념화된 주제나 소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익숙하게 놓여져 있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는데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한 하다는 것이다. 
<양양 장터에서>,<고희연에서>,<상처>.<별꽃>등은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도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재에 시인의 독특한 색깔을 투여하므로서 문학의 특성인 경이 驚異의 세계를 추체험할 수 있게 하여준다. 장터, 잔치날, 나무, 이름모를 풀꽃에서 삶의 진경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지각화된 경험에서 비롯된 일차적 심상의 진술이 아니라 수집된 일차적 심상들을 시인이 의도하는 바대로 자르고, 분해하고 재통합하는 복합적인 심상으로 체험하는 작업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시적 대상을 관찰하고, 자신의 삶 속에 육화시키고 발효시켜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시에서는 당연히 메시지의 강화보다는 현상의 감각적 묘사가 훨씬 의미가 깊어진다
<양양장터>는 지금은 현대화된 상설 마켓의 위력에 설 땅을 잃어가는 시골 장날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심심산중에서 나물을 캐는 사람들의 굵은 손마디의 푸른 핏물이 하늘빛 같다는 노동의 건강성과 신성함과 더불어 사고 파는 일보다/ 가슴 속에 담은/ 그간의 안부로/꽃 피우는 사람들 -마지막 연 에 드러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사고 팔기 위한 수단의 존재가 아니라 안부를 물으므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랑과 관심의 장 場이라는 메시지를 결코 회한이나 장탄조로 읊고 있지 않다는데서 시 읽기는 즐거워진다
<고희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장인의 칠순 잔치에서 30 년 뒤에 다시 만나자는 덕담에 일순 스쳐가는 허무를, 그러나 결코 허무하지 않은 듯한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므로서 그 허무를 더욱 짙게 만들어내면서도 시치미떼는 시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삼 십 년 후 오늘의 주인공은 살아 있을 것인지...중략   
엉겁결에 미래 열차를 탑승한 비현실의 사람들
주루룩 되말리며 멀어지는 세월에서 
제각기 뛰어내리곤 
내린 곳을 몰라 잠시 망연해 한다     

위의 두 시인의 시작 태도가 거시적으로 삶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면 신채린의 <상처>나 윤난홍의 <별꽃>은 시의 대상을 고정시키고 치밀하게 대상의 특성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또다른 이미지로 생성해 내는데  그 재미가 있다.
나무는 고정적이고 수동적이다. 나무의 상처는 그러므로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다. 나무에 난 상처 → 상처로 인한  고통의 울음 소리 →귀뚜라미 소리 → 펄럭이는 상처와 같이 점층적으로 나무에  잎 돋고 잎 지는 시간의 경과와 상처라는 이중의 구조를 깔아 놓으므로서 한결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상처의 내용이 무엇인지, 누구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므로서 나무라는 대상의 일차적 상징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상처>에 비해서 윤난홍의 <별꽃>은 보다 구체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별꽃으로 부르고 그 꽃은 별이/ 떨어져 죽은/ 윤회의 업보 - 시 5 연 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별은 요염한 정부의/ 진하디 진한/ 화장내음 풍기며 -시 6연 처럼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파괴해 버린다. 이름도 없고, 인적 드문 풀섶에 핀 작은 꽃은 요염한 정부의 짙은 화장 내음으로 변색되어 결국에는 고독한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해 버린다. <별꽃>은 추락 - 꽃 핌 - 다시 하늘을 향함의 구조를 통해 일차적으로 서정적인 꽃의 묘사를 노리면서 광물의 이미지에서 식물의 이미지로 다시 광물의 이미지로 변화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을 덧씌여 놓는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는 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진술이 아니라 묘사의 특성을 강조할 때 아름다워지고 의미가 깊어진다. 시가 어찌하여 언어의 사원이란 말인가? 기도와 시는 침묵에 가까울 때 영롱한 빛을 발산한다.
이 밖에도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많은 작품들이 제한된 지면 탓에 언급되지 못하였음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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