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곤퀸 파크 Algonquin Park
나호열
알곤퀸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세시간 쯤 걸리는 곳에 있는 자연공원이다. 서울 면적의 서너 배쯤 되는 넓이에 이천 오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호수와 삼 백 마리의 늑대, 이 천 마리의 검은 곰과 무스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곳을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위락시설도 거의 없고, 우리의 관념에 깊이 들어박힌 양념 가득한 볼거리를 그곳에서 찾는다면 그 여정은 낭패의 연속일 것이다. 공원에 들어서기 전부터 압도되는 풍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정적,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울울한 시간의 흔적을 우리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나는 곧장 불편함을 느낀다. 내 몸을 일으켜서 그 광대무변한 숲 속으로 몰입하여 갈 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게 되는 것인데. 그런 내공을 쌓는 것은 어렵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이 자연에 몸을 섞는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터. 소로우가 윌든 숲에서 3년 동안 칩거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유행처럼, 유령처럼 우리 주위를 횡행하는 웰빙 wellbeing은 우리의 몸을 편의와 안락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불편과 수고로움의 길로 인도할 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은 아닐까?
자연은 인간에게 처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리라. 자연은 인간을 芻狗로 여긴다는 노자의 언명은 해마다 거듭되는 災害앞에 속수무책인 우리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고 그 공평이 자연의 몸을 이룬다. 다음에 인간은 종교로 자연을 위무하고 기계문명으로 자연을 협박했다. 그리하여 말없는 자연은 자신의 몸을 허락하였으나 그 허물어진 몸은 인간의 영혼에 낙인같은 크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생각해보니 그가 고맙다. 편도 삼 백 킬로가 넘는 거리를 함께 동행해준다는 것이 고마워서 기꺼이 핸들을 잡았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도로는 이내 한적해진다. 힘껏 달리고 싶으면 앞서 나가고 뒤쳐지고 싶으면 뒤로 물러서서 가면 그만이다. 텅 빈 일차선, 추월을 할 때가 아니면 대부분의 차들은 2차선으로 내려선다. 일차선에 버티고 앉아 정속주행을 한답시고 느긋하게 자리잡고 가는 운전자와 그 뒤에서 전조등을 껌벅이고, 2차선, 3차선을 통해서 추월해 가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1차선은 추월선이다'라는 원칙, 그 일차선을 빛의 속도로 달리던 말던 그것은 나와는 무관하다는 상식이 오히려 불편하다. 수 백 킬로를 달려도 교통사고를 보기 힘들어 그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문득 오가는 차들이 적어진다. 길은 어느새 왕복 이차선으로 바뀌고 거울같은 호수들이 언뜻 제 얼굴을 비추고 있다. 알곤퀸에 한발짝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여행 안내소에서 커피 한 잔으로 휴식을 취하고 안내 팜플렛을 받아든다. 수없이 많은 트래킹 코스, 카누를 탈 수 있는 수많은 지류, 야영장, 수 십 킬로를 며칠 동안 걸어다녀도 막상 그곳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마주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망원경으로 숲 속의 동물을 관찰할 수 있고, 짧은 여름에 생명을 키우는 풀꽃들을 무릎을 땅에 대고 마주할 수 있다. 야영의 밤, 숲에 가득히 울려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 눈으로 가득 쏟아져 내리는 별빛에 스스르 잠이 들면 덩치 큰 검은 곰이 텐트 속에 손을 쑥 디밀어 먹을 것을 훔쳐간다! 아침에 영롱한 아침 이슬을 털고 일어나면 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곰 발자국을 발견한다!
토론토의 맥 마이클 미술관에는 캐나다 7대 화가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울창한 침엽수림과 설경, 곰, 큰사슴, 들소로 가득 메운 그들의 그림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탐험과 혹독한 자연환경과 그 앞에 마주 선 개척자들의 정신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개화되어버린 유럽에서 건너와 그곳에서 일찍이 마주친 적 없었던 거대하고 온순한 생명들을 만났을 때의 경이로움과 그 경이로움으로부터 빚어지는 정복욕은 묘한 갈등을 야기시켰음에 틀림없다. 그 생명체들은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도록 고기를 제공해 주었고, 혹독한 추위를 견뎌낼 수 있도록 가죽을 제공했다. 인간은 그들을 약탈했고, 약탈한 만큼 그들은 공허해져 갔다. 他者가 사라져버렸을 때의, 경이로움이 사라져버렸을 때의 삶은, 긴장이 사라져 버린 풍선과 같았으리라. 저기 숲 속 어딘가에, 나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가 살고 있다는 환상이 사라져 버렸을 때 인간이기 때문에 고독하다는 절대절명의 외침이 솟구쳐 나왔을 것이다. 맥 마이클 미술관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기 조차한 자연주의적 회화들은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향한 절실한 구애의 몸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알곤퀸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알곤퀸의 풍광에 대한 찬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내가 알곤퀸을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반면교사처럼 내 머리 속에는 내 나라의 산천이 가득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사라진 산하와 그 산하에 몸담고 있던 수많은 생명체들을 떠올리는 것은 괴롭다. 단지 수고로움과 경제적인 이익을 도모한다는 이유 하나로 산을 허물고 길을 넓힐 때 우리의 태백산에는 호랑이가 사라지고, 신화가 사라지고 우리의 지리산에는 인공사육된 반달 곰 몇 마리가 어슬렁거릴 뿐이다. 경이가 사라져 버린 우리의 삶, 우리의 웰빙을 위해서 도처에 깔린 올무와 덫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작은 생명들을 자연보호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화물차 한 대가 앞서가면 줄줄이 그 뒤를 느린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좇아가던 죽령 고개를 이제는 터널을 통해 4분이면 통과해 버릴 수 있다. 공릉에서 태능으로 따라가던 길에는 작은 벤치가 있고, 은행나무가 있고, 경춘선 열차가 지나갔었는데, 길이 확장되고 갑자기 소란스러워져서 무언가를 생각해 보겠다고 낙엽길을 걷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매연에 목이 매이고 숨이 턱턱 막히고 만다. 人山을 이루는 우리의 山, 人海를 이루는 우리의 바다는 규격화된 아름다움으로 더럽혀지고 있다. 이 밀렵의 시대에는 산에서 만나는 사람이 두렵고, 프로스트처럼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날카로운 덫에 발목이 잡히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의 이 좁은 땅에 전 국토가 자연스러운 남의 나라는 꿈일 뿐이다. 우리는 알곤퀸을 가질 수는 없다. 가질 필요도 없다. 지난 해 여름 지나고 지리산 계곡의 농월정이 불탔다.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세운 구조물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것이므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허물어지고 으깨어진 산, 상처투성이인 산의 주인, 작은 생명체들은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왜 우리는 사라져서는 안되는 존재들을, 현상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진리는 배우고 행동하고 연습하지 않으며 안된다. 오랜 연습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큰 배경을 마주하게 된다. 주말이면, 휴일이면 우리는 자연을 향해 떠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그것이 마치 큰 위안과 안식이 되는 것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자동차라는 괴물로 돌진해 들어가서 그만큼 자연이 뒤로 물러선 자리에 인간의 고약한 습성과 냄새를 뿌려놓고 되돌아온다. 자연은 불편하다. 자연 속에 있으면 인간은 나약하고 불평불만에 가득차게 된다. 자연이 우리에게 평화 안식의 대상으로 자리잡으려면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먼저 가슴에 아로새겨야 한다.
알곤퀸의 가을 해는 짧고 돌아오는 여정은 길고 멀었다. 우리는 서둘러 다시 도시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
나는 그곳에서 보았다. 가족을 이룬 무스 떼가 아주 가까운 물가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지 무스 엄마 무스, 새끼 무스들이 비로 코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풀을 뜯다가 물을 마시다가 덩치가 작고, 키가 작은 동양인 두 명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연의 팽팽한 간격! 생명과 생명이 마주치는 팽팽한 눈빛은 그대로 경전이 된다. 베르크손이 말하던 생의 躍動感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길들임과 길들여짐의 관계가 무용해지는 순간에 발화되는. 알곤퀸을 다녀와서 나는 '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럽게'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곤 한다. 자연으로부터 유폐된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딘지 자주 길을 잃곤 한다. 가끔 꿈속에 무스들이 찍은 우리의 사진을 볼 때가 있다. 갈대처럼 흔들거리는 나약하고 이상하게 생긴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