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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오타와Ottawa에서의 편지

by 丹野 2009. 2. 12.

 

 

 

 

                           

                               오타와Ottawa에서의 편지

 

 

                                                                                    나호열

 

 

4월의 눈

오전 7시에서 8시로 가는
페이지 235에서 236페이지로 가는
그 사이에 눈이 내린다
사월의 겨울나무 위에 돋는 상추
그 푸른 상처가
세상을 경이로 이끈다
쌓이지 않는 관념들
그리움의 옷자락에 얼핏 비치는
투명힌 살의 이끌림
아작아작 밀어 올리는 풀빛
産婦의 하늘을
프로메테의 어깨로 받치고 있는

봄의 힘!

Good Morning! .
전화가 왔다. '창 밖을 보세요, 눈이 내려요!' 나의 눈이 오전 7시와 8시 사이로 내리고 있었다. 페이지 235와 236페이지 너머로 잔뜩 흐려진 시선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술이란 구체적인 사실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하나하나의 가치들에 주의를 돌리기 위하여, 그 사실들을 배려하고 정돈하는 선택작용이다. 예를 들면, 노을진 저녁 하늘을 잘 보려고 몸이나 눈의 위치를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간단한 예술적 선택 작용이다. 예술적 습관은 생생한 가치들을 즐기는 습관이다. 방금 끓인 커피 한 모금을 전화기 저 속으로 밀어넣으며 나는 웅얼거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월에 내리는 눈을 보았다. 사월에 눈이라니! 눈은 소멸을 향해 달려드는 안긴힘과도 같이 내리면서 녹고,녹은 그 자리에 다시 내리고 있었다. 습관 하나를 버렸다.녹이 슬고 적당히 닳은 열쇠 하나를 권태의 늪 속으로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책상과 의자, 게을러진 늙은 개의 느릿한 움직임처럼 앓는 소리를 내던 컴퓨터, 쿰쿰한 담배 냄새를 남기고 사라져버린 우울의 습관들이 진눈깨비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화사한 꽃 대신 눈송이들이 나무들에게 繪事後素의 필법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아침. 나는 어디에선가 사라지는 대신 이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을 가시려구요?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나가 있는 모양이죠? 라고 묻는 사람에게도 그저 웃어 보였다. 나의 사라짐은 그렇게 병원 입원이나, 한가한 관광여행, 아니면 학구적 탐구의 여정으로 정당화되고 그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나의 행방은 정처없는 것이 된다. 아무도 나의 사라짐을 안타까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복에 마시는 몇 잔의 콜럼비아 커피의 쌉살함과 오버랩되면서 문득 나의 이름을 상실하는 공포에 맞물린다. 완전한 익명의 공포, 이 세상에서 격리조치 되었다는 억울함과 연민이 정신의 백혈구를 지상으로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오타와를 가기로 한다. 어림잡아 왕복 일 천 킬로, 10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야할 거리이다. 401 고속도로를 타고 킹스턴을 경유하여 15 번 하이웨이나 16 번 하이웨이를 타야 한다. 상세지도는 없다. 그저 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지나와 보니 그것이 내가 걸어온 길이었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왔는데도 돌아 보면 구곡양장이다. 안간힘을 다하여 제 갈길을 가는 지렁이의 희미한 족적처럼 낯 부끄러운 삶의 흔적, 가도가도 너른 평원이 주는 위압감, 짧은 여름동안 성장을 맞춰야 하는 뭇생명들의 분주한 靜中動의 세계, 그 한가운데로 돌진하여 들어가듯이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16번을 타야 하는데 서둘러 15번으로 들어왔다. 한참을 우회하는 길이다. 시야를 가리는 눈은 다행히 쌓이지 않는다. 앞으로 옆으로 달려들었다가 사라져가는 겨울 숲의 은유!

겨울 숲의 은유

살아 남기 위하여
단 하나 남은
잎마저 떨구어내는
나무들이 무섭다
저 혼신의 몸짓을 감싸는 차디찬 허공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큰 슬픔을 안아들이는
눈물 없이는
봄을 기다릴 수 없다

늪에서 억새들이 흔들리고 고사목들이 비석처럼 서 있는 벌판 사이로 길은 하염없이 뻗어있다. 에이커 단위로 자리잡은 농가들, 우리 농민들은 농사 지어 먹고 살 수가 없어 도시로 나와 노동자가 되는데, 이곳의 농부들은 요트를 타고 자가용 경비행기를 몬다. 가뭄이 들어 물을 대려고 이웃과 다툼을 벌이고 살인을 하게 되는 주름진 우리의 농부들의 마음을 이곳에 넓게 펼쳐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가뭄이 들어 광활한 농토에 물을 댈 수가 없다면 이곳의 농부들은 서로서로 위로를 하며 망하든지, 흥하든지 어깨동무를 할 수 있겠지만 손바닥만한 논에 한 모금의 물이면 수확을 꿈꿀 수 있는 우리의 농부들은 오히려 이웃을 돌볼 수가 없다.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도려내야 하는 아픔을 풍요의 사회에서는 야만이라고 부르겠지만 극빈極貧의 비명은 존재의 뿌리를 뒤흔들어 버린다.
내가 있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고, 나 아니면 안될 것 같던 일들이 여전히 굉음을 내고 돌아가고, 낡은 부속품 하나처럼 나뒹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어디론가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민망함에 고개 숙이게 될 때, 오타와Ottawa -chippewa 혹은 ojibwa 인디언을 ottwa라고 부르게 되었음.오타와에는 미시건 인디언과 오클라호마 지역의 인디언들이 살았음-는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와 있다. 무엇인가 소식을 전해주고 받고, 물건을 사고 팔고... 만남의 장소에는 약속이 있고, 신뢰가 싹트고 기다림이 선다. 사람이 만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이던 간에 그곳이 소금을 주고 곡식으로 물물교환하는 티벳의 어느 오지이던 간에 서로를 기다리는 시간이 존재한다.
나는 지금 그 낯 선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눈은 비로 변하고, 어림짐작으로 차는 좌회전과 우회전을 거듭한다.
아!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집과 무덤

저녁에 닿기 위하여 새벽에 길을 떠난다

오타와를 오기 위해서 아침 새벽부터 준비를 해야만 했는데, 어느새 오타와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되돌아 가야 하는 곳에 그 누구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길눈이 어두워 되돌아 가야한다는 것이다. 1850년에서 1860년 사이에 건축되었다는 카나다 팔리아먼트를 멀찌감치 보고 오후 12시30분, 전몰 장병을 위해 500개 이상의 종을 울리는 오묘한 음의 조화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현대식 건물 앞으로 휘적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국립미술관 National Gallery of Canada, 미술관으로는 파리의 루브르,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고 하는데, 짧은 시간에 둘러 볼 수는 없는 일, 그나마 일주일에 3일 쉬는 그 시간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3개월 이상 기획전으로 열리는 섹션에 눈길을 준다.
그림이나 사진은 만국의 공통 언어이다. 아무리 귀를 세워도 들리지 않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영어, 그래서 느는 것은 침묵이고, 침묵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절실하게 느껴질 때, 가티에 포크 Gathie Falk와 린느 코헨Lynne Cohen을 만난다. 적어도 미술분야에 있어서 카나다에서는 상업적으로 작품을 팔고 사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작가의 역량이나 업적이 인정되면, 국가는 전폭적으로 작가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 주므로 예술활동을 통해서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지 않는다면 먹고 사는 일에 힘을 빼는 일은 이 나라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포크와 코헨, 포크는 뱅쿠버에서 활동중인 작가(화가?)이고, 코헨은 사진작가이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완성된 그들의 작품들은 작가들의 사유의 깊이와 고뇌를 가늠하게 해 준다. 포크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자유로운 소재 선택으로 일상 속에 침윤되어 있는 권태와 침묵을 끄집어내어 보여준다. 그가 택한 오브제는 과일, 신발, 옷, 등 우리의 주변에서 아무런 반성 활동 없이 소모되고 있는 것 들이다. 그는 세라믹으로 오렌지라든가 사과 등을 한 두 개가 아니라 집적된 형태로 구성한다. 참을성 있게 몇 년 동안 같은 작업을 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주시한다. 10년 전에 만든 사과와 10년 후에 만든 사과는 관람자에게는 동일한 관념으로, 직관적으로 사과로 주입되지만 그 관념과 직관 너머에 자리잡고 있는 시간은 우리의 삶과 행복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뜨린 철사 끝에 매달린 다양한 형태의 물체들에 빛을 주면 저 건너편 벽에 전혀 그 물체들과 상이한 그림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그 그림자들이 바로 그 물체들의 실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체들이 이루어내는 조화로운 이미지 속에서 삶의 균일성을 찾아내지만 미안하게도 그 벽에 투사된 그림자는 작가가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 감각으로부터 받아들여진 인식의 부정확함, 포크는 자신의 영혼과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오브제가 되므로서 대상이 주관을 역으로 바라보는 칸트적 사유를 재현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장식장 속에 붉은 8 켤레의 오른발 앵클 부츠가 있다. 붉음, 8, 구두의 이미지가 먼저 들어오고 마지막에 오른발이라는 관념이 들어온다. 고흐Gohe는 한 켤레의 낡은 가죽 구두를 길 위에 놓아둠으로서 고단하고 핍진한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재생시켜 주는데, 포크의 작품들은 우회적이면서도 치밀한 전략으로 관란자를 우롱(?)하고 계몽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자. 8개의 부츠가 각기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동일한 신발로 여겨지던 그것들이 밑창의 마모도 磨耗度의 차이를 보여주며, 곧바로 우리들에게 그것이 동일인의 8개의 신발인지, 아니면 각기 다른 8명의 신발인지 분산되고 굴절된 시간의 양태로 혼린을 자극하게 된다. 어쩌면 여덟 개, 붉음, 오른 발 등의 관념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 소용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계화되고 습관화된 우리의 하루는 부재하고 있는 왼발 부츠의 행방에 의해서 그 존재를 확인 받는 것은 아닌 지 모르겠다.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어린 소녀의 원피스 그 밑에 양초 몇 개가 놓여져 있거나 책이 놓여져 있거나 구두가 놓여져 있거나 할 때 우리는 우선 옷이라는 동일성에 주목하고 책, 양초, 구두 등의 차이를 생각하게 되며 마지막에는 옷과 양초, 옷과 책, 옷과 구두가 주는 관념들의 결합을 시도하게 된다. 포크는 그의 작품을 보여주고, 보여준 만큼 우리에게 해답을 요구한다. '너의 삶은 어때?' 그 대답은 천차만별일 것 이며, 영원히 그 해답은 구해지지 않을 것이다
코헨은 어떠한가. 전시된 작품 거의가 흑백 사진이다. 흑과 백의 대비는 칼러에 비해서 더욱 강열하다. spa, 강의실, 실험실, 집의 거실, 사격 연습장, 해부실 등, 인간이 만들어낸 공간의 의미를 코헨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구획되고, 차단된, 인간의 공간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의 삶은 죽음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사격 연습장의 표적은 가늠쇠를 겨냥할 때 죽음을 향해 서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표적을 향해 있는 사격자의 뇌리에는 표적은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실체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는 피냄새를 맡는다.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죽음을 향해 촉수를 내민다. 죽음은 비어 있음으로 상징화 될 뿐만 아니라. 죽음은 언제나 포크가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스파에 가득차 있는 물은 생명의 에너지를 포함하면서 소멸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스파는 인간의 운동을 위해서 고안된 인공물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곳에 익사 溺死, 우리의 죽음이 공존한다. 그와 같은 불온한 공기는 도처에서 우리를 만나고, 우리를 위협한다. 거실 쇼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소를 즐기는 우리는 유령이 된다. 바로 여기 이 자리가 고스트ghost의 세계가 아닌가! 코헨의 전시 타이틀은 No Men's Land이다.
포크와 코헨을 잠시나마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그들의 작품은 단지 작품으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으로 생생하게 나타나며, 작품을 통해서 드러난 공포와 절망이, 보여지지 않는 삶의 권태가 그들의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절절히 각인시킨다.

절벽 사이를 철鐵로 된 로프가 가로 놓여져 있고, 그 로프를 붙잡은 두 손은 철에 긁히고 피가 배어 나온다. 안간힘을 다하여 로프를 잡고 있던 실체는 아득히 떨어져가 버리고 남는 것은 로프와 로프에 묻혀진 살점과 피이다. 작가는 그렇게 살아 있고 그렇게 죽는다.
예술행위는, 아니 우리의 모든 삶은 그와 같이 끊임없이 소모되면서 완성되는 허무의 기록일 것이라는 생각이 뒷목을 친다.
 

Gathie Falk is one of British Columbia and Canada's most respected senior artists. She has been awarded the Order of Canada (1997) and the Governor General's Award (2003) for her contribution and commitment to Canadian Art. Most recently, she was a recipient of the Vancouver Arts Award in the category of the Visual Arts.

Her exhibition at Evergreen Cultural Cente was a selection of recent works, including paper mâché, bronze sculpture, photography and painted vellum sheeting and included works: Agnes, 2001 bronze, Crossed Ankles, 1998 photograph on vellum, and her series of four papier mache works, Bob, Garry, Jake and Andy 2000 - 2001.

 Gathie Falk Apperal


참고 인터넷사이트
http://national,gallery.canada http://www.nga.gov


Cohen의 작품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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