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키치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인 화가 사비나의 말을 통해 키치를 비판하고 있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에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키치가 모든 진지한 예술의 가장 적대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키치는 예술뿐만 아니라 진정성이 없는 동정심, 고상한 척, 남의 시선 의식하기, 정치인들의 애국심, 따라 하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끊임없이 상투화시킨다는 것이다.
흔히 ‘이발소 그림’으로 불려지는 키치kitsch는 값싼 대중적 예술을 말한다.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키치는 가짜 예술이다. 그것은 예술의 형식을 빌어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치관 상투적인 감상을 전달함으로써 편안과 위안을 주고 사회의 주류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현대는 바로 이런 키치의 시대이기도 하다. 많은 중산층 집안의 거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상품이나 의복들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마저 이런 키치가 지배하고 있다.
시에서도 키치는 존재한다. 진부한 미의식, 상투적인 현실인식, 진정성이 상실된 근거 없는 감정 과잉, 사회·역사적 고민이 탈각된 자동화된 가치관 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키치적인 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한 시들은 때로 대중성이라는 이름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가 될 뿐이다.
흔히 키치 시는 쉬운 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쉽다고 키치인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서울역 앞 흡연구역 사람들 틈에 끼어
담배를 빤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다
철쭉꽃 한창이다
한쪽에선 악기 연주가 한창이다
멀리 남미 에콰도르에서 왔다는 인디오
담배 잎에 물고 모두가 박수다
기다리는 순간은 잠깐이다
하나되는 순간도 잠깐이다
시간을 본다
바삐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
바삐 출구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
담배 한 대의 시간만큼
연주 한 곡의 시간만큼
멈추어 있다 떠난다
살이 있는 것들은 그렇게 오래 떠난다
- 이명수, 「몽유도」(정신과표현 9,10월호)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기차를 타러 서울역에 나가본 사람은 모두 한번쯤 봤을 익숙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결코 상투적이지 않다. 그런 익숙한 장면을 통해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삶의 모습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 떠난다”는 아이러니한 구절에서 선명히 잘 드러나 있다. 떠남을 항상 순간이고 떠남은 오래 머물지 못함을 말하기에 이 구절은 형용 모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담배 한 대 같이 피고 노래 한 곡 같이 듣는 시간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리고 그러한 만남이 항상 떠도는 것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단지 순간의 일이 아니라 길고도 또 의미심장한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오랜 떠남”을 통해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온 에콰도르의 떠돌이 예술가를 만나는 것도 바로 그런 계기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오래 지속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를 통해 지속되는 것임을 이 시는 아주 쉬운 시어들로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얘기해 주고 있다. 익숙한 광경을 쉬운 언어로 그러나 결코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보여주는 시인의 경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대상을 대할 때 사물과 투명하고 순수한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층적인 가치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키치가 된다. 예를 들어 진품을 모방하여 진품을 소비하는 계층의 사회적 위상을 대리체험하려고 한다든가, 예술적 묘사에 사회적 가치나 종교적 교의 또는 교육적 함의를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도 모두 키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시교육 자체가 키치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상처로 꿰매놓은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수련처럼 평생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고개를 돌려보니
물기 젖은 창 너머로
또 낙엽이 진다
- 길상호, 「목욕」 (우리시 11월호)
시를 쓰는 것은 언어에 부과된 상투적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이다. 이 시를 쓴 시인도 그러한 껍질을 벗고자 한다. 옷이나 먼지 살비듬은 모두 상투화된 일상이 부과한 존재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속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것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고투를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시인에게 그것은 시를 쓰는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 시는 시인이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시를 통해 언어의 생생함을 회복하려는 시작의 오랜 각고로 해석될 수 있다. 마지막 “또 낙엽이 진다”라는 표현이 조금은 익숙하긴 하지만 그것은 이런 과정의 시간적 영속성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키치는 나태한 정신과 연결된다. 세상의 진실이나 감춰진 이면을 보려고 애써 노력하기보다는 주어진 시각이나 만들어진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심리적 편안을 느끼고자 하는 데서 키치가 만들어 진다. 그런 점에서 다음 시는 키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바람은 등 구부러 바람을 낳는다.
무너지고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앞이 나타나
모래구릉이 구릉을 벗지 못하는 것처럼
낙타 새끼는 제 어미를 빼닮았다.
태어나자마자 헌 구두처럼 너덜거리는 아가리다.
먼 물 냄새 들리는 듯,
그걸 또 우물거리며 내다보는 것이다, 저 긴 모가지를 사족 없이 걷고 걸어
단봉 꼭대기 오래 걸려 넘기까지,
터벅거리는 발자국 꾹 다문 엉덩이에서부터
뒷다리 쪽으로 뭉개는 신음 또한 벌써 붉어 구부정하다.
배밀이, 배밀이하는 배 같다.
박토의 폭염을 빨며 사막을 건너가는 구근,
낙타 새끼는 도무지 귀엽지 않다.
- 문인수, 「고구마」(현대시 10월호)
시인은 낙타 새끼를 도무지 귀엽다고 보지 못한다. 새끼나 애들은 귀엽기 마련이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에게서는 생명의 활력이 넘치고 인간이 그렇게 연장시키고자 하는 시간적 미래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끼나 아이들에게서 희망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애들을 보고 동물의 새끼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이런 심리적 과정 때문이리라. 하지만 감춰진 이면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결코 낙타 새끼가 귀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삶의 고통을 애초에 타고 태어난 존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발소 그림처럼 귀여운 돼지 새끼들을 그려놓고 행운을 떠올린다거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평온한 미소를 사진으로 찍어 순수라는 관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거의 대부분 키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시의 시인은 그런 관용적인 관념과는 거리가 먼 낙타 새끼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낙타 새끼는 고구마이기도 하다. 메마른 땅을 파나가며 등이 휘게 살아나가야 작은 구근이라도 맺을 수 있는 고구마나 거친 사막을 살아남아야 작은 단봉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낙타가 닮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이면을 들춰보면 금방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다. 시인은 괴롭지만 이 진실을 바로 보고자 한다.
흔히 키치는 사랑이나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관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미나 존재가치를 강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키치적인 작품이 진지한 예술, 가치 있는 예술로 잘못 평가되는 경우도 주로 이런 경우이다. 하지만 키치적인 작품에서 그런 보편적인 가치는 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현실의 매개 없는 사회적 가치의 설파, 사회적 고민이나 갈등을 무화시키는 종교적 이념의 주입이 키치적인 작품의 주요 특징이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보편적 가치를 말하지만 결코 관념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다.
마른 더덕처럼 늙은 여자 하나 골목길을 바쁘게 지나갑니다
그녀의 몸안이 궁금하다는 듯 명아주와 강아지풀이 키를 높입니다
여자의 머리는 하얗고 갈옷 젖은 데는 먹색입니다
오래도록 땅의 문을 두르렸을 지팡이는 무릎 높이입니다
통통통 지팡이가 땅 속 사정을 묻는 소리
안에서는 아직 기척이 없나봅니다
바닥을 밀쳐내는 여자의 발걸음이 비꽃보다 빠릅니다
- 이대흠, 「비 그친 사이」(다층 가을호)
이 시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시인은 이제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 “늙은 여자”에게서 발견한다. 시에서 늙은 여자는 하얀 머리와 먹색의 갈옷으로 점점 흑백 사진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며 지나는 길에 있는 풀들마저 그녀의 생명의 한도를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이제 꺼져 가는 생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비가 개인 틈을 타 그녀는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발산한다. 늙었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영원한 어둠속으로 금방 꺼져 가는 경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볼 수가 있다. 늙은 생명이 그 생명의 마지막 힘을 보여줄 때 생명의 소중한 가치가 더욱 강조되고 그래서 더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한 폭의 그림으로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 강요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생명의 마지막 활기를 보여줌으로써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선물처럼 우리 손에 쥐어주고 있다.
자연을 그리는 시 중에 키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자연을 그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위안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생태주의니 환경보존이니 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이상적 공간이 자연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인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비현실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의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나 언어적 표현의 참신함이 없이 자연을 그리는 것은 이발소에 걸린 물레방아 그림만큼이나 키치적인 작품이 되기 십상이다.
서로의 등과 배를 맞댄 나뭇잎
뒤의 알 무언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만으로
따스한 오후
불태운다 더 이상 푸를 수 없어 누렇게 말라 바스락대는 나뭇잎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고통 희망 추억 바로 이 맛이야 잿불 속에 넣어 호호 불어가며 먹던 계란 껍질로 지은 밥 톡톡 부화하지 못한 정령들이 날아오른다
날비 자 나비 버르적 벌레들이 사라지면 인간은 행복할까 나비 날개로 벌레의 눈으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하여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슬어
이 아름다운 날들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길……
무심중간 만져지는 뾰루지
힘껏 짜낸다 하루가 찡긋,
저물어간다
- 고성만, 「슬어」(우리시 11월호)
하지만 결코 위의 시를 키치라고 할 수는 없다. 음풍농월적인 자연예찬을 하고 있거나 자연과의 합일을 비현실적이고 탈현실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자연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시인은 “슬어”라는 단어로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곤충들이 작은 알들을 한꺼번에 낳은 모습을 ‘슬다’라고 한다. 그런데 넓게 보면 우리가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다. 시인은 자연의 모습에서 같이 살고 있음을 보고 있고 그것을 ‘슬다’라는 말로 새롭게 의미부여하고 있다.
최근 산문시의 경향이 커져가고 있다. 전통적인 문법을 파괴한 산문시가 새롭고 전위적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산문시는 키치적 경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산문시라고 키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정제되지 못한 언어로 개인의 경험을 산만하게 나열하는 것이 최근 유행이 되고 있고 유행은 곧 키치를 낫는다. 진지한 형식적 고민과 탐구 없이 줄글을 쓴다고 그것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시적 형식과 그 형식에 따른 운율에서는 결코 느껴질 수 없는 새로운 호흡과 언어적 질서를 만들어 낼 때 산문시는 그 의미가 살아나게 된다. 다음 시를 통해 우리는 산문시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보게 된다.
죽은 자의 붉은 靈이 내 몸에 점점이 찍혀 이 밤은 습하다
밤이면 구름을 뚫고 가장 반짝이던 유성이 가장 먼저 물가로 내려온다 나는 당신의 천 년 전생을 이해하기 위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물의 거울을 들여다본다 사랑했지만 단 한 번도 사랑을 말하지 못했던 불온한 한 生이 두 눈을 끔벅거리며 나를 본다 한 다리를 잃고 어깨에 피를 흘리던 젊은 병사가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나를 본다 하얀 수수꽃다리를 귀에 건 가는 팔의 누이가 한 모금의 물을 손바닥에 적시며 나를 본다 천 년 전이거나 혹은 천 년 후이거나 단단한 열매를 궁글리던 줄다람쥐 몇이 산과 들과 밭의 물가에서 풍덩, 작은 손을 맞대고 있다 한 치의 혀로 차마 발설하지 못할 것들이 밤이면 물 위에 어리어 있다
뭍의 짐승들은 나를 가끔 삵이 아니라 삶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산, 「삵」 (우리시 11월호)
인디언들에게 있어 삵은 영적으로 ‘비밀의 지킴이’ 또는 ‘비밀을 아는 자’라는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가다 들여다보는 작은 연못, 목말라 잠시 목추기던 시냇물, 산과 들과 밭가에 흐르고 있는 물가에는 모두 거기에 비친 많은 삶들의 흔적이 있다. 잠시의 일별이지만 거기에는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존재들의 모습이 뒤섞이는 공간이 바로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멸종위기의 보호동물 ‘삵’은 그것을 알고 있는 자연의 영혼이고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러한 존재들의 삶과 그 삶의 뒤엉킴을 표현하기 위해 긴 줄글을 썼다. 그것은 정리되거나 분절되거나 체계화될 수 없는 혼돈이며 시간적으로도 동시이지만 또한 무한히 다른 시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문의 리듬이 바로 이러한 시적 의미를 배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문학이나 예술도 또한 팔려야만 가치를 갖게 되는 시대에 대중성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야 의미를 가진다는 강박관념이, 새로움으로 우리의 상투화된 일상을 괴롭게 뒤흔드는 진지한 예술적 성찰을 약화시키고, 키치라는 가짜 예술을 양산하고 문화산업이라는 이름의 예술의 카타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키치에 대한 저항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 우리시 12월호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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