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과 생성의 시학 혹은 그 사이
김석준(시인·평론가)
생성과 소멸 사이에 생명적 삶과 그 흔적들이 있다. 그렇다면 생명 이전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 생명은 어디로 향해 가는가.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적 벡터량, 즉 생에의 시간을 채우는 운동 에너지가 무한대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생성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있다. 물론 생에의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보존 전이되어 생을 지속시키지만, 생은 동일자로 영원회귀하지 않는다. 생은 생성과 소멸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불가역적인 제로섬게임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생 그 자체가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관계하는 존재자’, 즉 현존재Dasein가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게 만드는 어떤 미지의 기획이 모든 문제들을 파생시킨다.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는 그 무엇, 생성 이전의 기획과 소멸 이후의 비의秘儀를 주재하는 어떤 원리가 근본 문제를 파생시킨다.
왜 우리는 소멸하지. 왜 우리는 유한하지. 왜 우리는 영원이 아니지. 왜 우리는 생에의 시간을 교활한 술책으로 살아가지. 왜 우리는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왜 우리는 소동파가 말한 것처럼 천명을 하늘에 맡겨놓고 아름다운 생에의 형식으로 존재하지 못하지. 왜 우리는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권력의 늪에 빠져들지. 왜 그래야만하지. 다 부질 없고 다 소멸하게 되어 있는데, 영원 앞에 하나의 점으로도 존재하지 못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無로 수렴하게 되어 있는데, 우린 왜 시간의 덫에 걸려 허우적이지. 우린 뭐지. 우리는 무엇으로 존재하지. 도대체 우린 왜 생에의 형식으로 존재하지.
생성 이전과 소멸 이후는 생명의 역사가 풀어내야만 하는 하나의 숙명적 과제이다. 허나 그것은 생에의 형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에 위치하는 바,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 즉 영원히 해결돼서는 안 되는 패러독스적인 비밀로 존재한다. 만해 한용운의 「수의 비밀」은 한 땀 한 땀 공들여 비의의 영역 속으로 이입해 들어가지만, 그가 인지하고 깨달은 지점은 패러독스이다. 의미의 바깥, 언어의 바깥. 논리의 초월, 초월의 초월. 우리는 Trans라는 접두어 앞에 기만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생성 이전과 소멸 이후에 관하여 Why-Question의 방식으로 물음을 던질 수 없다면, 우리는 왜 이 공간 이 시간 속에 존재하지. 도대체 우린 이 공간 속에 어떤 의미지.
우리는 ‘사이’다. 우리는 생성과 소멸 사이에 존재한다. 우리는 생성하는 중이거나 아니면 소멸하는 과정 중에 있다. 우리는 ‘과정’이다. 우리는 ‘중中’이다. 우리가 느껴 아는 우리는 우리를 만들면서 우리를 우리 밖으로 내몰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죽고, 죽으면서 산다. 그러나 생은 중 혹은 사이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생성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 혹은 비-동일성으로 무한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운명하셨습니다
의사선생님의 말에 감정이 없다
죽음이 참 단순하구나
숨 쉬던 이 숨 쉬지 않고
말하던 이 말하지 않을 뿐
나 볼일 없는지 눈을 뜨지 않는다
주검과 나 더 나눌 얘기가 없는 거다
어머님 전 상서, 이승하 본제입납
때로는 마지못해, 때로는 보고 싶어
편지를 올리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수취인 불명
승하야 보아라 하고 시작하는 답장을
주검은 쓸 수 없다
침묵의 언어로 어머니 앞에서 약속한다
숨 쉬는 모든 생명의 운명을 관觀하겠다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아픔을 철綴하겠다고
우선은 어머니의 죽음을 이웃에게 알리고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도 해야 한다
그리고는 모든 기억의 종이를 꾸깃꾸깃 구겨야 한다
- 이승하 「주검과는 대화할 수 없다」 『시작』 봄호
생은 운동이다. 생은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질주하는 시간의 선분운동이지만, 그 시간의 점들은 생의 흔적들이 기입된 의미의 적분 값이다. 순순환과 악순환을 상호 이접시키면서 생은 직선의 선분 위를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생은 엔트로피적 선분 위를 내달리는 작은 순환의 반복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여 생은 순환이다. 생은 하루라는 단위 시간의 무한순환인데, 만약 이 순환이 울체되어 종료하게 된다면 생은 종결된다. 다시 말해서 생이 사이를 왕래발착하지 않거나 과정의 중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혹은 사이와 중이라는 역동적인 벡터적 운동성이 정지할 때, 우리는 소멸하게 된다. 악순환이 순순환으로 전이될 때, 생은 화려한 웃음꽃을 만발하지만, 그 순환이 역전되는 필연의 과정으로 이입될 때, 생은 적체 소멸하게 된다. 시인 이승하는 「주검과는 대화할 수 없다」에서 순순환이 악순환으로 전이된 정지상태를 죽음으로 명명하면서 생의 허망함을 노래하고 있다. 위태위태한 삶, 가랑잎 부서지듯이 가볍게 으스러지는 그 삶을 정관하면서 이승하는 운명과 아픔이라는 존재론적 심연을 점검해 들어가고 있다.
운명運命이 운명殞命으로 소멸해갈 때, 돌고 돌아가던 생명의 순순환이 한 지점에 응고되어 순환운동을 정지하게 될 때 우리는 죽는다. 『우파니샤드』 4장, 즉 「쁘라샤나 우파니샤드」는 호흡작용인 숨(푸라나pranah)을 통해서 이 세계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태양인 숨(혹은 정신)과 달인 물질이 상호 끊임없이 작용하여 이 세계를 순순환으로 이행시킬 때, 생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일치된 역동적인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되지만, 태양이 달로 경화될 때, 혹은 숨이 멈추어 물질로 화석화될 때, 생은 무의 공간 속으로 이입하게 된다. 이승하는 숨이 멈추는 어머니의 임종 순간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생에의 운명을 보고, 생명의 아픔을 잇대어 시로 형상화하겠다고 침묵의 언어로 어머니에게 약속하고 있다. 비록 어머니와 시인 사이에서 서로 공명할 수 없는 수취인 불명의 상태로 돌입하기는 했지만, 시인 이승하는 소멸과 생성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과 슬픔을 시적 언어로 예인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허나 이러한 생에의 운동성, 즉 運命이 殞命으로 전이될 때, 혹은 살아남은 자가 죽어가는 자를 응시할 때, 살아남은 자의 몫은 무엇인가. 기억인가, 망각인가. 시인이 “모든 기억의 종이를 꾸깃꾸깃 구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운명을 관하고 슬픔을 철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상호 모순 되는 패러독스적 인간학적 사태를 묘파하면서 시말의 존재 양태를 절묘하게 언표한 것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운명을 보고 슬픔을 잇대겠다는 언명은 어머니의 임종에서 깨달은 생에의 운명성이기는 하지만, 시인이 기억의 종이를 구기는 행위는 인간의 운명과 슬픔의 단순한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시적으로 승화시켜 숭고한 운명의 세계로 비약시키겠다는 결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승하의 「주검과는 대화할 수 없다」는 시말운동이 펼쳐내는 역동적인 지점을 응시하면서 시의 존재론적 양태를 우회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아버지 짚이 되셨네
햇살 밝은 가을날 벼 거둔 천수답에서
퇴비 깔고 보리씨앗 넣으시며
‘참 좋다 참 좋다’ 이르시고 짚이 되셨네
마당 가득 처마보다 높게 차곡차곡 쌓인 낟가리
볏짚으로 쌓은 황금의 성
그때는 정말 넉넉한 부자였네
은은한 달빛 넣어 꼬아낸 새끼줄보다 질긴
삼신 줄을 엮어 오신 우리 아버지
포성이 오갔던 그해 여름 문경 새재 보국대 다녀오신 뒤
목마를 해서 건넜던 낙동강
아버지의 높은 어깨에서 솟아났던
쇠죽솥의 구수한 짚 냄새
한가한 날 약주를 즐기셨던 아버지의 불그레한 얼굴이
근심을 태우셨던 아궁이의 불기운으로 상기된
그 모습으로 나도 홍시가 되면
멍석에 누워 별 헤며 들었던 가마니 치는 소리 솟아나고
이엉 엮어 새로 덮은 집의 따뜻한 겨울밤에 닿는데
짚 거둬간 빈 들 썰렁하다 못해 차가움으로 오는
대설 지난 지금에야 조금 알 듯도 하네
짚이 되신, 흙이 되신
아버지의 길지 않는 생애를
- 박찬선 「짚·2」 『시에』 봄호
생이 시간의 덫에 걸려 넘어진 순간 삶은 영원한 소멸의 공간으로 이입하게 된다. 허나 이러한 생에의 필연적인 운동을 선형적 소멸로 기화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기억이다. 기억은 생에의 시간 속에 흔적들을 기입한 불연속적인 의미의 층들인데, 그것은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촘촘하게 채워 강렬하게 각인된 시간의 어느 한 지점으로 회귀해 들어가게 만든다. 아버지의 길지 않는 생애를 반추하면서 짚 또는 흙이 되신 아버지의 형상을 재구해낼 때, 소멸했던 생은 아날로그 영상으로 되살아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라는 대타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박찬선의 「짚·2」는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때는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1950년 무렵. 혹은 유년기의 풍요롭고 정감어린 사랑 그득한 경상도 어느 산골마을. 시인 박찬선은 몽상에 젖어들고 있다. 허나 그 안온한 몽상은 가을에서 겨울로 이행한 순간, 혹은 풍요로움에서 차가움으로 시간이 경과한 순간, 시인의 가벼운 몽상은 차갑고 무거운 몽상, 즉 아버지의 길지 않은 생애를 추억하게 된다. 짚이 되고 흙이 되신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따라서 기억이 추억으로 형질전환 된 순간, 몽상은 인간학적인 심연에 도사린 삶의 비의 쪽으로 수렴하여 아버지의 존재론적 운명성을 응시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박찬선이 “대설 지난 지금에야 조금 알 듯도 하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생애의 전체를 이해하게 될 때, 시인의 몽상적 그리움은 가볍게 기화되어 사라지는 동시에 대타자로 존재하는 아버지의 상징성을 직관하게 된다. 아버지는 짚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재가 되거나 거름이 되기를 자초하는 퇴비이다. 하여 박찬선의 「짚·2」는 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려있는 인간학적인 삶의 무게를 헤아리면서 운명적인 아버지의 삶을 상징의 높이로 고양시키고 있다.
갈수록 기록되지 않은 날들이 수북해지고
그저 하루해 지는 모습을 작은 창을 통해 보는 것으로 충분한
안과 밖
붙잡는 순간 나를 떠나는 나의 의미들
오늘은
눈썹 같은 까만 새 떼들이 꽃씨처럼 보였다
- 한수재 「눈썹을 정리했다」 『우리詩』 3월호
생성과 소멸 사이에 생이라는 형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생은 그 내부에 무엇을 채우는가. 생 그 자체인가, 의미인가. 만약에 생의 내부를 의미로 채운다면, 왜 생은 의미를 지향하여야만 하는가. 도대체 생이 어떤 의미를 내장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수재의 「눈썹을 정리했다」는 생은 무엇이고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되묻게 만든다. 시인이 기록되지 않은 날들과 떠나는 의미들에 관하여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사유할 때, 혹은 눈썹을 정리하듯 하루라는 시간을 미망의 공간 속으로 이입시킬 때, 그가 진짜 붙잡고 싶었던 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허나 한수재는 그러한 물음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내놓고 있지는 않다.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기화하는 의미. 의미에 붙들려 살아온 시간. 생성과 소멸 사이에 그 무엇인가를 채워 의미를 길어 올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생에의 시간 속에 의미는 자신의 본모습을 정확하게 현현시키지 않는다. 하여 의미는 절대성으로 고양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쇄적 그물망 속에 산종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중심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이라는 하루이다. 수북이 쌓여가는 기록되지 않은 나날들을 인정하면서 오늘이라는 하루를 향유하는 시간의 주체가 될 때, 생에의 의미는 바로 그 속에 있다. 의미는 오늘이라는 현존적 시간이다. 의미는 살아 숨쉬는 하루이다. 의미는 새 떼를 꽃씨로 인지하는 곳에 있다. 의미는 시간의 내부 속으로 무한히 미끄러져가는 데리다의 차연적 운동의 퇴적 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탁자 위 아메리카노커피가 하얀 채찍을 휘두른다
입술이 커피에 닿자 흑인영가가 들려온다
태초의 색으로 태어난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하얀 노래
신이 원치 않았던 유일한 리듬을 냄새 맡는다
허공을 몇 굽이 휘감았던 채찍이 니그로를 휘감는다
몸통에 피의 음표 맺히고 한 소절을 넘는다
총구 앞에선 형제가 형제에게 채찍질하는 동안
너희 영혼은 같은 음계에서 흔들리고 있다
서둘러 커피콩을 따는 소년의 손이 소녀의 동공에서 떨린다
하얀 이빨로 검은 입술 깨무는 소녀여
사람이 낼 수 없는 향기로 흐느끼지 말아다오
이빨자국으로 스민 눈물로 두툼해지는 네 입술 따라 커피콩이 여문다
눈물의 향으로 채색되는 이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너희는 키스하며 흔들리는 영혼을 눈물로 염장하고 있다
서로의 등에 새겨진 악보를 더듬어 노래 부르고 있다
검은 유전자로 착색된 눈물을 마시는 나여
떨리는 손으로 유년을 건넌 소년처럼 눈감고 보아라
커피콩을 따듯 내 입술에서 손 떠는 한 방울의 검은 소녀를
- 차주일 「에티오피아 소녀의 입술이 두툼한 이유」 『애지』 봄호
생성과 소멸 사이에 삶의 지난한 흔적들이 그득하다. 사이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거나 삶을 지속시키는 자가 견디어 내야만하는 미증유의 고통이 산재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삶의 시간이 기쁨과 환희로 충일한 축복받은 생도 없지 않으나,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단 일회의 진자운동 속에서는 눈물로 얼룩진,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눈물조차 말라버린 비정한 생활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기아와 난민, 혹은 인종학살과 노동착취. 차주일은 「에티오피아 소녀의 입술이 두툼한 이유」에서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커피농장 어디쯤을 상상하면서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흑인 소녀의 삶을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사이를 지배하면서 인간을 삶에의 의지로 충일하게 만드는 총체적인 심급은 희망이다. 허나 언 듯 언 듯 보이는 희망은 어쩌면 삶의 고통을 희석시키면서 사회적 모순의 부조리함을 교묘하게 숨기는 기만인지도 모른다. 아니 희망은 고통이고 기만이다. 달콤하고 그윽한 하얀 향기가 고통의 흔적들이 기입된 알레고리로 치환되듯, 생은 언제나 희망이라는 함수 속에 기만당하고 있다. 살아남기. 살아서 생을 증명하기. 허나 사이를 주파하는 생은 고통이다.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왜 그렇게 존재해야만 하는지도 모른 채, 커피농장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는 아프리카 소년 소녀를 상상하면서 차주일은 상처 난 영혼의 흔적을 추적해 들어가고 있다. 아메리카노커피를 마시면 흑인 소녀의 환상이 보이고 흑인 영가가 환청처럼 귓전을 맴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말한 것처럼 차주일은 노동 그 자체의 소외뿐만 아니라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된 잔혹한 노동의 현장을 가슴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피의 음표와 상처 난 영혼의 환부 어디쯤을 몽상하면서 시인은 눈물로 얼룩진 흑인 소녀의 영혼을 위무하고 있다.
허나 우리는 커피향 즐기면서 생에의 순간을 달콤하게 향유할 뿐이다. 아프리카 어디쯤엔 아직도 수많은 소년 소녀들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하여 쓰레기를 뒤지거나 노동의 현장에서 착취를 당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왜 이 세계, 이 공간은 서로 나누지 못하지. 아마 차주일은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모순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그것이 커피의 그윽한 향기가 불러일으킨 상상적 사태이기는 하지만, 시인은 그 향기 속에 기입된 고통과 노동착취의 함수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다. 그윽한 향기는 항상 어린 영혼의 고통 속에서 피어오르는 기만적인 모순의 향기이다.
그리고 정말 나는 나쁜 놈이다
너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
한계령을 넘는다
비릿한 안개는
AM 999.9MHz
심해에서 흘러나오는 바다뱀들의 교성이
내 귀볼을 잘근잘근 깨문다
안개에 취해 나는 나른하다
흐물거리는 수 만개 촉수들이
흐느적거리며 해류를 따라 뻗어가고 있다
안개의 중얼거림
자욱한 MHz가 바뀔 때마다
내 몸뚱이는 다른 형상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늙은 바다뱀의 허물과
심해어가 물어뜯는 죽은 고래의 질긴 가죽
끈적거리는 촉수들이 내 음모를 잡아당긴다
내 울음은 12000.924MHz
아무도 내 심연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 할 것이다
- 이인철 「심연의 라디오」 『현대시』 3월호
생성과 소멸 사이에 삶이라는 개연적 사태들이 존재한다. 살고 죽고, 죽고 살고 수많은 생명적 현상들이 생성되고 소멸되지만, 생은 희망이라는 함수보다 슬픔이라는 인간학적인 고통이 깊이 스며있는 것 같다. 허나 생은 너와 나 사이를 잇대어 이 세계 전체를 유토피아로 만들기를 소망한다. 비록 삶이라는 형상이 단 일회의 진자운동으로 끝나는 한계상황적 운명성을 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삶을 지배하는 최종심급은 소통이다. 한 영혼이 다른 영혼들과 만나서 마음의 심연을 풀어 헤칠 때,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은 벽을 허물어 상호 소통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이입할 때, 이 세계는 평화가 이룩된다. 그런데 이인철은 「심연의 라디오」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언명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사이를 상호 대비시키면서 시인은 죽음 혹은 슬픔의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다.
심연은 소통이 불가능한 불연속의 지대인데, 시인 이인철은 그것을 라디오의 주파수대로 비유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인간학적인 문제를 슬픔의 알레고리로 묘파하고 있다. 소멸과 생성 사이에 놓여 있는 생에의 형식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소통이 불가능한 이 세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인철의 시말운동은 이 두 가지 층위를 동시에 예인중인 것 같은데, 그것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인과율의 바깥, 즉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삶과 죽음이 불연속적 층위로 인식되듯이, 시인은 다양한 가청 주파수대가 모든 단절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세계는 MHz의 코드변환에 따라 다양한 다른 형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상호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을 슬픔의 심연에 이르게 만든다. 시인의 의식 속에 이 세계는 코드화 되어 있다. 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혹은 삶과 죽음 사이에 상호 다른 코드가 심연을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 이인철은 단호하게 “아무도 내 심연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 할 것이다”고 선언하고 있다. 생성과 소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놓여있다.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 눈을, 그리고 땅속의
벌레들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붙게 하옵소서.
- 박희진 「새봄의 기도」 『우리詩』 3월호
생성과 소멸 사이에 삶이라는 괴물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지만, 생의 운동은 생을 위한 생만의 운동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하여 생은 고통이고 비애이다. 비록 수많은 의미들이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지만, 생은 삶의 제전으로 고양되지 못한다. 따라서 생의 주체는 생 그 자체가 아니라 생의 운동을 타나토스로 이끌어가는 소멸에의 의지이다. 그런데 박희진은 「새봄의 기도」에서 그러한 존재론적 사태를 생성의 운동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박희진 시인의 시말운동은 죽음 - 생 - 죽음의 운동이 아니라 생 - 죽음 - 생의 운동으로 짜여져 있다. 다시 말해서 시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멸을 생성으로 연접시키거나 죽음을 생으로 이접시키는 생명의 자발적인 운동이지, 결코 소멸의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여 박희진의 「새봄의 기도」는 생성의 시학 위에 펼쳐지는 생명적 기운이 넘쳐나는 상생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사이’를 ‘사이’로 이접시키기. ‘사이’와 ‘사이’ 사이에 소망을 내접시키기. 타나토스를 신생으로 역전시키기. 순환하는 생명적 주기 속으로 모든 사태를 이입시키기. 이 세계에 사랑과 생기를 가득 채우기. 박희진의 시말운동은 풍요롭고 따스하다. 시인의 시선이 상생의 지점으로 비약 주파해갈 때, 혹은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을 찬미 기원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도록 노래할 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어둠과 소멸의 지점, 즉 죽음 속에서 피어난 찬란한 봄꽃을 연상시킨다. 겨울이라는 소멸의 공간을 응시하면서 세계-내-사태를 봄의 공간으로 이행시켜가면서 시인은 이 세계를 사랑의 심금으로 고양시켜가고 있다. 하여 박희진의 시말운동은 생성과 소멸이 지배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직선운동이 아니라, 생에의 운동을 원환운동으로 복선화하여 세계 전체를 순순환의 구조 속으로 이입시키고 있다. 따라서 박희진의 「새봄의 기도」는 생-죽음-생의 역학관계를 초록의 전언으로 생명화 하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멸과 절멸에 이르는 가을날의 기도문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땅속의 작은 벌레까지도 소생시키는 새봄의 아름다운 기도문을 읊고 있다. 죽어버린 땅과 얼어붙은 몸속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면서, 시인 박희진은 이 세계가 이 우주가 생에의 운동으로 충일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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