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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시말의 본성 : 이접移接 혹은 몽따쥬 / 김석준

by 丹野 2009. 1. 26.

 

 

                 시말의 본성 : 이접移接 혹은 몽따쥬

                                                     

 

                                                                       김석준(시인·평론가)


  # 0 : 시말의 시말서始末書

 

형이상학은 시적 언어의 총합이다. 시는 사유의 극한이다. 시는 형이상학을 구멍 틈으로 들여다보기이다. 따라서 시적 이해는 이 세계의 총체적 이해에 앞선 선험적 이해, 즉 총체성을 구성하는 내적 계기이다. 그러나 시적 이해는 일면적이다. 비록 시말이 세계성 전체를 조망하려고 시도하지만, 시적 이해는 항상 세계를 전유할 수밖에 없다. 전유된 이해, 전유된 세계, 전유된 앎, 전유된 형이상학. 시란 전유이다. 시란 전유된 미적 현실성인 동시에 그 현실을 작동시키는 내적 계기이다. 시란 이중성이다. 시란 상호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시말-사태를 동일한 구조 속에 이접시킨다. 따라서 시말의 본성은 몽타주다. 왜냐하면 시말운동(시적 언어)은 본성상 다양한 언어적 층위를 교묘하게 가로질러가면서 시말-사태를 의미-사태로 역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말은 이질적인 말의 파편이나 조각을 절묘하게 이접시켜 동일성의 구조로 치환시킨다.

시란 이미 확정된 말-외연을 기계적으로 조합하는 말놀이가 아니라, 말-외연 내부에 의미를 외삽시켜 말-내포로 지향해가는 기적적 행위이다. 따라서 시말운동은 확정된 말-외연을 파괴하는 말의 신기원이다. 시가 말의 외연을 주파해갈 때, 시말 얼굴은 다양하게 변양되지만 시말은 말-외연을 말-내포로 무한 수렴시켜 시말을 혁신시킨다. 따라서 시말운동은 이접된 말-사태를 몽타주로 드러내는 가운데, 그 몽타주로 구성된 이질적 사태들의 나열을 동일성으로 고양시킨다. 하여 시란 그 자체로 하나의 형이상학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비록 전유된 형이상학일지라도, 시말운동의 몸짓은 앎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예리한 감각과 육감을 작동시켜가면서 시말은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사상을 이룩해가는 역동적인 내밀한 의식이다.


119 구급차에 실려와 심폐소생술 받는 노인의 동공이 초점 없이 열려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기는 영 틀린 모양이다 검게 주름 패여 갈퀴 진 손마디마다 진땀 흘러내리고 분화구처럼 푹 꺼진 숨구멍 마지막 가쁜 숨 가파르다 나무에 매달려 긴 겨울 땅에 떨어질 줄 모르는 고집 센 떡갈나무 잎 보는 것 같다 삶이 죽음보다 무겁다는 걸 온몸으로 가르치는 노쇠한 육신의 사투가 면도칼처럼 마음을 베어낸다 몸이여, 이제 그만 평생 끌고 온 소금덩어리 노구를 내려놓고 짜게 절여진 염장의 몸뚱이 베어 내 배고픈 중생과 둘러앉아 밥이나 먹자 밤새도록 불 밝힌 응급실 붉은 불빛 아래서 전 생애의 소금 꽃 온몸으로 부려놓고 있다

 - 최춘희 「소금 꽃 핀 자리」, 『21세기의 문학』, 겨울호 

 

 

 


  # 1 : 살아남은 자의 슬픔 혹은 염장鹽藏

 

때는 가을과 겨울 사이 혹은 죽음의 문턱. 장소는 응급실 또는 영안실.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다 죽는다.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늙고 병들어 그렇게 시간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가쁜 호흡, 깊게 패인 검은 주름 그리고 호흡의 정지. 생은 죽음보다 무겁다. 아니 회생불능인 상태로 무한 수렴해가는 생 그 자체를 승인해야만 하는 삶이 무겁고 두렵다. 두려운 무거움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의 몫이거나 살아남은 자에게 남겨진 미증유의 불안이다. 외길, 이탈이 불가능한 어릿광대, 외줄타기. 생은 반환점이 없다. 생은 회귀하지 않는다. 회귀 또는 반환점은 기만이거나 허구다. 하여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즉 판타지이다. 그런데 이것이 더욱 큰 문제를 파생시킨다. 문제는 그것이 인간에게 남아 있는 희망 중에서 유일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회귀와 반환점을 꿈꾸며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처연하다. 상상계의 승화, 실재계에 베일 씌우기, 살아남기, 살아서 버티기, 끝까지 살아남기. 판타지에 기만당하기. 혹은 판타지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기.

그런데 시인 최춘희는 실재계를 똑 바로 응시하면서 죽어가는 자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비딱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뚫어져라 죽음을 응시하면서 소멸하지 않는 것과 부패하지 않는 것을 예인 중이다. 그것은 바로 소금인데, 시인 최춘희는 죽음의 형상 속에서 왜 소금 꽃을 피우는 광경을 목격하는가. 죽음이 축제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죽음 속에서 영원성을 응시했기 때문인가. 미셸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소금을 부패 또는 악화와 대립시키면서 가난에서 부유함으로, 불행에서 위로로, 굶주림에서 포만으로의 변환을 떠맡는 작용소라고 언명하고 있다. 최춘희도 세르처럼 소금을 변환의 작용소로 인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성과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하여 죽음을 염장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최춘희의 시 「소금 꽃 핀 자리」는 죽음을 바라보는 자의 마음이거나 죽어가야만 하는 자의 마음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승화도 아니다. 그것은 엄존하는 실재계의 잔혹함도 아니다. 생성과 부패를 한 자리에 세우면서 생-사태가 죽음-사태로 변이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응시하면서 산자와 죽어가는 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하여 소금은 풍요로움이고, 소금 꽃은 죽음이 전하는 화려한 선물이다. 모든 것이 응고되고 화석처럼 굳어지는 생의 끝자락에 처연하지만 아름다운 소금 꽃이 핀다. 그러나 그 꽃이 핀 자리가 죽은 자의 자리이기에 슬프다, 눈물이 난다, 하여 가엽다. 슬픈 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침에 헐어버린 집을

다시 또 짓는다

낮은 담장을 치고

고치 속의 애벌레가 되어 꿈속을 뒤척인다

길 잃은 바람이 찾아 들어와

나란히 드러눕는다


나는 노숙자路宿者가 아니다

이슬 속에 잠드는 사람


내 몸 어디선가 바다가 출렁이고 있는 건지

길 잃은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지느러미를 햇살에 말리려는 걸까

잃어버린 누군가를 찾는 걸까


떠날 준비는 다 마쳤는데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는데

나비가 되는 길을 잃어버린 내 운동화는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걸까   

- 김소양 「노숙자露宿者」, 『우리詩』 12월호

 

 


  # 2 : 살아 있는 자의 초상 또는 露宿者(혹은 路宿者)

 

죽음 옆에 삶을 이접시키기, 죽음과 삶을 몽타주로 만들기. 살아 있는 자는 언제나 꿈을 꾼다. 바다를 꿈꾸고, 날아오르기를 꿈꾼다. 비상에의 꿈. 꿈은 소유가 아니다. 꿈은 존재다. 나비가 되고 싶은 꿈. 고치 속에서 우화를 꿈꾸는 애벌레. 그러나 꿈은 무소유가 펼쳐내는 아름다운 소망만으로는 이룩되지 않는다. 꿈은 기다림 옆에 숨어있는 가녀린 숨결이다. 하여 꿈은 삶을 살아낸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죽음충동 옆에 꿈 이접시키기. 허물어진 폐허 위에 집짓기. 고치는 하나의 우주 혹은 완성에의 꿈이다.

갈 곳 없음, 길 위에 삶 혹은 이슬을 덮고 자는 나비. 길 위에 삶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떠나야 한다. 그러나 목적지는 없다. 길은 외길로만 향해져 있다. 길은 바다로 향해 있고, 꿈으로 향해 있다. 그러나 길을 잃어버린다. 유년의 운동화도 잃어버리고, 안온했던 사랑도 잃어버리고, 마지막엔 꿈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길 위에 선 자. 이슬을 덮고 그 속에 청초하게 나비잠 자는 자. 그러나 잃어버린다. 방향상실. 바람과 함께 눕는 삶. 길을 잃은 물고기. 허우적임. 가쁜 호흡.

그러나 꿈을 꾸고 싶다. 아니 비록 정처 없이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露(路)宿者 신세일지라도, 살아남은 자 혹은 살아 있는 자의 초상은 삶의 비상을 꿈꾼다. 비록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꿈일지도, 꿈을 꾼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김소양 시인의 시 「노숙자露宿者」는 분명 삶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노숙자를 나비로 비유하면서 잃어버린 꿈을 노래하고 있지만,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지만, 路宿을 露宿으로 의미 변환시켜 잃어버린 꿈을 노래하고 있다. 그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그대 아직도 사랑을 갈망하는가. 그대 아직도 바다와 햇살을 열망하는가. 비록 길을 잃고 헤매는 나비 같은 노숙자일지라도, 그대 아직도 가녀린 소망 하나를 꿈꾸고 있는가. 시인 김소양은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을 노숙자로 비유하면서 꿈과 소망과 염원의 현주소를 묻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인의 의식 속에 현대인들 모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노숙자로 보였던 것은 아닐까.


티벳의 오지奧地에도 염전이 있다 급류가 흐르는 협곡의 허리에 붙어 부챗살처럼 퍼진 붉은 소금밭

차마고도茶馬古道, 해발 육천 칠백의 설산雪山 턱밑에서 소금샘물이 솟는다 천년이 넘도록 여인들이 수십 개의 우물에서 등짐으로 퍼나른 소금물, 살은 햇빛과 바람에게 다 내어주고 물의 흰 뼛조각들만 쌓여 지금 소금밭은 눈부시다 통나무로 떠받쳐 허공에 뜬 겹겹의 소금밭, 밑 널판천장에서 소금고드름이 송곳니처럼 자란다 한줌 훑어 오드득 씹으면 입 안 가득 끓어 넘치는,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정수리에 더운 김 펄펄 오르는

설산은 녹아 난창강을 이루고 강은 흘러 바다로 간다 협곡을 감도는 여인들의 짜디짠

- 홍은택,「소금고드름」 전문, 『시안』 겨울호

 


 

  # 3 : 살아남기 혹은 그래도 생명은 뿌리를 내린다

 

영원한 ing. 현장성. 황토 빛 다큐멘터리 필름. 최불암의 정감어린 내레이션. 멀티미디어로 다른 세상 엿보기. 후기산업사회와 고대적인 삶을 몽타주하기. 수백 만 년 동안의 융기 혹은 바닷물 설산에 가두기. 여인의 삶 혹은 끈질긴 생명력. 우기가 끝나면 여인들의 지난한 삶이 시작된다. 척박한 대지, 불모의 지대. 소금은 여인들의 한이자 운명이다. 소금이 풍요와 평화로의 변환의 작용소라고 말한 미셸 세르의 소금에 관한 단상은 결코 옳지 않다. 티벳의 여인(자시용종)의 삶에 있어서 소금은 저주받은 운명이다. 그러나 소금은 불모의 지대 위를 살아가는 티벳인들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다. 하여 소금은 상호 대립되는 양가적 가치를 함의하고 있는 운명의 수용체이다. 소금은 살아남기다. 소금은 고대의 신화이다. 소금은 불가능성의 가능으로 변전이다.

여성은 평생을 소금물 등짐 져 염전 밭 일구고, 남성은 마방이 되어 평생을 차마고도 외길 따라 소금무역을 한다. 1:1.5 혹은 1:2로 물물교환(소금과 곡식의 교환비율)하는 흥정이 벌어진다. 살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낳고 죽고, 죽고 낳는 동일한 삶의 반복주기. 시인 홍은택의 시 「소금고드름」은 티벳인들의 삶에 관한 보고서를 응시 통찰하면서 소금의 결정체 속에 응고된 삶의 형상을 그려내고 있다.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삶이 무엇이기에 척박한 대지 위를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살아가는가.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가난한 나라 티벳, 불행지수가 가장 높은 경제대국 일본. 도대체 이 황당무계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햇살이 내리쬐는 티벳 고원의 염전 밭. 천길 낭떠러지 외길 차마고도. 소금을 져 나르는 마방들의 행렬. 삶은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있기 위해 그렇게 동일한 방식으로 순환한다. 척박한 대지 위에 생명은 그렇게 뿌리를 내린다. 천년 전의 삶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머니의 어머니가 했던 염전 밭일을, 아버지의 아버지가 했던 마방 무역 일을 티벳인들은 지속시켜가고 있다. 설산의 물이 난창강을 이루어 바다에 이르듯, 생은 그렇게 짜디짠 입김 불어가면서 생을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게 한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광통신망으로 연결된 디지털코드를 아날로그적 삶으로 이접시키기. 티벳 여인의 삶을 서울의 관객 옆에 몽타주하기. 살아있(남)기 혹은 그 고통과 행복의 반비례. 또는 그 역설.


나 좀체 뜨지 않네

뭍에서도 물에서도 허우적거리네

나는 왜 혜성처럼 뜨지 못할까


별세계에도 물세계에도

이 지상의 낮은 변죽에도

나는 없네


그때 뜰걸 그랬나? 사랑하는 경아로,

가슴에 A자 하나 품고

인생 한바퀴 뒤집어 볼 걸 그랬나

뭇 가슴에 냉소의 불을 질러볼까


높이 떠오른 그대들이여

그대는 몇 그램의 살과 뼈인가

몇 리터의 물과 기름인가


내 속의 회전하는 욕망의 퍼즐

켜켜이 퇴적된 막막한 생의 집

무거워


조용히 가라앉는 의식을 집전하고 있네 

- 윤준경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 『우리詩』 12월호


 

 


  # 4 : 욕망 혹은 내면풍경

 

시인에게 시쓰기란 무엇인가. 자기만족인가, 아니면 타자와의 소통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욕망의 다른 표현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표현인가. 시를 욕망하는 것이 시인의 욕망과 상충하게 될 때, 우리는 시인의 시말운동이 가진 시적 함수를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가. 고은처럼 시말의 정신성이 시인의 정신성과 상호 상충할 때, 우리는 시말을 시인과 별개의 것으로 평가하여야 하는가. 타락한 정신성과 물욕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내려간다면, 그것은 어떤 운명을 타고난 것인가. 전혀 곱다고 말할 수 없는 고은처럼 시인의 인품과 시말의 정신성은 일치할 수 없는 별개의 사태인가. 시가 영혼의 형식이라 할 때 타락한 영혼이 아름다운 시를 창작해낸다면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 아닌가.

윤준경의 시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은 시의 위의와 시인의 욕망을 동시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수작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떠오른 자와 좀체 뜨지 못하는 자 사이를 응시하면서 시의 본질을 묻게 만든다. 시말이 상호 대립되는 욕망과 삶 그리고 의식을 헤집으면서 나(시인 자신)를 문제 삼을 때, 또는 떠오른 자들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문제 삼을 때, 시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나(시인 자신)인가, 그대(뜬 시인)인가 혹은 독자의 뇌리 속인가. 묵묵히 자기길 가기. 좀체 뜨지 않는 자신을 부여안고 가기. 내가 없는 나를 위무하면서 자신의 길가기. 시의 길이란 고독한 의식의 집전 속에서 무거운 생의 집을 건져 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뜬 시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없지 않으나, 찬란한 혜성처럼 떠올라 지지 않는 별이 되고 싶은 충동이 없지 않으나, 어찌 그것이 시인의 임무이고 시말이 펼쳐내는 운명의 언어이겠는가.

회한. 못 다 이룬 꿈. 냉소. 무거워지는 삶. 뜨지 못하는 자는 변명하지 않는다. 뜨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자기를 정관한다. 뜨지 못하는 자는 의식의 집전 속에 나를 본다. 그래! 욕망이 펼쳐내는 허망한 퍼즐 그리고 허우적임. 그래! 높이 떠오른 자들의 위선과 교만. 생은 결코 가볍게 뜨지 않는다. 생은 결코 가벼워서 안 된다. 생은 무겁게 퇴적된 존재의 집이다. 하여 생은 욕망하는 의식 밑으로 잠행해 들어가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투명하게 집전하게 된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뜨지 못하는 자의 삶이, 기쁘지 아니한가! 무거운 존재감을 견디어내는 시인의 삶이.

윤준경의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은 진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슴 시리게 시인의 임무를 충실하게 실현시켜가는 아름다운 영혼만을, 시인의 존재론적 무게만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숭고하지 아니한가! 윤준경 시인의 시적 태도가. 가슴이 뭉클해지게 만들지 아니하는가! 뜨지 못한 자의 아름다운 변명이. 그러한 시적 태도가 진짜 시인의 위의가 아니겠는가! 의식을 무겁게 집전하는 시인의 태도가.


길은 언제나 길로 이어지고

마을은 언제나 마을로 이어진다

내 언젠가는 너로 이어지고

우리는 끝내 너희로 이어진다

다들 그렇게 살아온 나날


바람아 더 따뜻하게 불어라

씨앗들이 봄을 예감하고 있을 때

봉오리들이 봄비를 예감하고 있을 때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수렵하고

자기 닮은 생명을 부려놓기도 하니

저마다 지 새끼가 있어

아픔도 이불처럼 포근해지고

슬픔도 입처럼 감미로웠으나

바람은 때때로 저돌적이 된다

바람 잘 날 없던 상처의 나날


네가 죽더러도

나 세끼 밥 찾아서 잘 먹을 것이다

내가 죽는 날 너는 무얼 할 것이냐

생명은 언제나 생명으로 이어지고

바람은 언제나 바람으로 이어진다 

- 송찬호 「바람記」 전문, 『애지』 겨울호

 


  # 5 : 동일성 혹은 생을 생으로 덧대기

 

사람은 사람이고 길은 길이다. 바람은 바람이고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말이 말을 설명할 때, 말은 말을 완벽하게 설명해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이해가 루소적인 의미의 말의 대리보충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완전한 말의 순환. 말의 이해는 말해진 말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 결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동일성이 동일성으로 이어지고 동일성을 동일성으로 설명할 때, 비동일성, 즉 동일성의 타자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모든 사태를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헤겔. 모든 사태를 비동일성으로 귀결시키는 들뢰즈. 우리는 동일성인가, 비동일성인가. 견딜 수 없는 권태인 동일성과 모든 것을 차이로 환원시키는 비동일성 사이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생은 몽타주다. 생은 결코 동일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아니 생은 비동일성의 차이나는 반복을 무한반복으로 실현하다가 죽음이라는 무차별적 동일성으로 귀환하게 되어 있다. 하여 삶을 살아낸 생의 흔적은 몽타주다. 생은 생경한 것들로 이접되어 있다. 생을 이어낸 또 다른 생. 생을 먹음으로써 생이 되게끔 되어 있는 생. 생은 생으로 덧대어져 있다. 말하자면 생은 아날로그적 시간 위에 기술되는 디지털 코드이다. 하여 생의 순간순간들은 특발성을 띤 몽타주다. 그런데 송찬호의 「바람記」는 세계-내-모든 사태를 동일률의 자장 내에서 묘파 서술하고 있다.

과연 생은 동일한가. 과연 생은 DNA 유전자 속에 동일한 생에의 형식과 사태를 각인시키고 있는가. 생이 다음 생으로 이어져 생-순환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갈 때, 생은 그것으로 위안을 받는가. 그러나 생 내부를 이끌어가는 동인은 동일성이 아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비동일성. 상처 혹은 고통. 차이 혹은 타자. 생은 아와 비아가 이접移接될 때, 세계-내-삶의 현전성을 이접離接시킨다. 생은 다르다. 생은 차이다. 생은 비동일성에의 욕망이다. 비록 생에의 형식이 펼쳐내는 순열조합의 배후가 동일성이기는 하지만, 더 나아가 생을 지배하는 본질적인 내적 코드가 동일성이기는 하지만, 생은 생을 충실하게 살아낸 흔적 속에 비동일성의 원리를 각인시킨다. 그런데 송찬호는 생에의 모든 차이 나는 사태를 동일성 속으로 응고시킨다. 왜 그런가. 왜 송찬호는 동일성에의 지향성 내부로 이 세계 전체를 내파 시키는가. 죽음 때문인가, 바람이 만든 상처를 초극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생에의 형식 전체를 조망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시인의 의식 속에 생은 이어가기이다. 생은 이어서 이접하고, 이어서 몽타주하기이지만, 바람이 만든 상처가 생의 본모습이기는 하지만, 생은 함수 F(죽음) = 바람X +상처Y +비동일성Z이다. 따라서 모든 생은 죽음이라는 동일성으로 귀결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다.

 

 

줄 듯

줄 듯


입맛만 다시게 하고

주지 않는


겉멋만 들어

화려하고


가득한 듯

텅 빈


먹음직하나

침만 고이게 하는


얼굴이 동그란

그 여자


입술 뾰족 내밀고 있는. 

- 홍해리 「석류石榴」, 『우리詩』 12월호

 


  # 6 : 사물 혹은 여인의 향기 

 

사물은 마력의 산물이다. 사물은 하나의 우발적 생산물이 아니다. 사물은 읽기다. 사물은 느껴지는 존재다. 교감 혹은 조응. 견자 혹은 통감通感. 상상력 혹은 특발성. 시말의 펼침은 사물의 펼침이다. 감칠맛 나는 시말. 사물이 발하는 감각적 기호. 시말은 사물이 펼쳐내는 역동적 감각을 의미의 기호로 코드 변환시키는 말-사태이다. 날아오르는 상상력. 사물의 내면읽기. 사물과 시인의 이접 혹은 몽타주. 시인이 펼쳐내는 물질적 상상력은 이접離接된 사물을 이접移接시키는데 있다. 석류를 여성으로 이접시키기. 몽타주는 상호 이질성이 동류항으로 전환되는 알레고리인데, 그것은 불연속적 사태가 빗어내는 불협화음의 향유에 있다. 차이 나는 기호와 기호 사이의 대립각. 상호 이질적인 사태의 병치. 몽타주의 몽타주. 시말의 본성은 말과 말을 이접시킨 몽타주다.

홍해리의 시「석류石榴」는 시말이 지니는 상상력과 사물을 절묘하게 이접시켜 하나의 말-사태를 연출하고 있다. 석류는 여성이다. 석류는 에스트로겐을 분비하는 여성의 유혹적 향기이다. 부드러운 살결과 향기. 성적 이미지와 사물의 본성. 석류는 여성의 동그란 얼굴이다. 하여 석류는 키스다, 섹스다, 유혹이다. 그러나 석류 속에 응고된 시인의 리비도는 에로티시즘으로 고양되지 않는다. 석류는 지불이 정지된 리비도의 경제학 위에 펼쳐지는 유혹인데, 그것은 상상적 섹스다. 응시하는 주체, 도발적 의미를 분출하는 사물, 사물의 여인으로의 탈바꿈. 편집증적 응시는 집요한 눈빛의 교환이자, 물질적 상상력이 도발적인 성적 코드로 변환되는 지점인데, 시인의 응시는 리비도의 경계면 속으로 무한 질주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홍해리 시인이 ‘주다’, ‘다시다’, ‘먹다’라는 감각적인 동사들 속으로 자신의 리비도의 경제학적 욕망을 우회시킬 때, 성의 직접성(섹스 그 자체)은 ‘-듯’이라는 유보적 태도 밑으로 가라앉는다. 유혹을 유혹으로 대체하는 시말운동. 그러나 리비도는 차연 유예된 채, 유혹의 비탈면을 가로질러간다. 그것은 리비도의 성취의 실패가 아니라, 리비도를 유예시킴으로써 더 큰 리비도를 도발하게 된다. 아름답고 얼굴이 동그란 그녀의 뾰족 내민 입술이 시인을 유혹한다. 키스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분비되는 테스토스테론 혹은 남성성. 여성성 혹은 에스트로겐의 분비. 유혹은 동시적이다. 유혹은 상호 일치되는 교감이다. 하여 유혹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발하는 강렬한 눈빛 속에 교환되는 상상적 섹스다.

 

 

출처- 우리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