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ort a Fairy tale
시는 가장 위험한 칼
최문자 (시인)
벌써 오래 전 얘기다.
시 쓰는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울고불고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그 남자는 날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고통으로 남아서 견딜 수 없어, 어떤 칼로도 이걸 잘라낼 수 없다구.”
그때는 대중가요 가사쯤으로 들리던 그 이야기가 나이 들어 다시 생각해보니 깊은 의미가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해봤자 상처만 깊이 내는 이별의 불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잘라내지도 못하던 그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누구나 가슴에 말 안 듣는 칼 하나씩을 품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의식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칼. 때로는 그 칼이 위기를 몰고 오기도 한다. 그 위험한 칼을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어떤 사람은 두려워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
잘 썰리지 않는 칼은 말썽만 부린다. 썰어야 할 물체의 부위 부위 상처만 내고 도마 위에 피만 낭자하게 고이게 만든다. 가끔 젊은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이 부러워진다. 그들에게서 잘 썰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차가 있다고 하겠지만 비교적 그들은 싫증나면 버리고, 더러우면 바로 침 뱉고, 아니다 싶으면 끊고 중지한다. 자기 의식대로 잘 썰어지는, 잘 드는 칼을 자율적으로 사용한다.
나는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안 드는 칼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칼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 누구의 사용 허락이 가능할 때만이 내 칼은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외로움도, 소외도, 분노도, 싸움도, 심판도 이 모든 고통의 사실을 내 마음대로 썰거나 잘라내거나 수술하는 것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남이 사흘 앓고 일어날 고통도 나는 한 달이 넘도록 끙끙대며 앓아야 했다. 단숨에 잘라내는 성능 좋은 칼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라 로쉐루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따라 살만큼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설득해내지는 못하는 말이다.
그 동안 고통의 환부를 바로 수술하지 못해서 받는 고통은 엄청나게 많았다. 때로는 잘 들지 않는 칼로 섣부르게 자르려다, 오히려 환부만 건드려 더 큰 환부를 만드는 일도 자주 겪었다. 그 때마다 뼈를 깎는 수치감, 자괴감을 추스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데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내가 잘 안 드는 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건드리고 또 건드리고 더 건드릴 수 없을 때까지 건드린다. 폭발 직전까지 일단 건드려 본다.
‘변변치 못한 칼로 뭘 어떻게 하려고?’
‘감히 나 같이 질기고 두꺼운 것을 그 칼로?’
하고 얕잡아 본다.
그 잘 안 드는 칼을 도구로 삼고 그러면서 여기까지 살아왔다. 모든 인간관계, 문단생활, 학문세계, 교회생활, 결혼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 도구를 버릴 생각을 못한다. 그 도구 자체가 내가 갖고 싶어 가진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깊이 사고하고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내 손에 들려준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지 못하고 그걸 사용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신에게 이렇게 호소했었다. ‘아예, 제 손에 아무 도구도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런 어설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한 편,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에게 아마 잘 드는 칼을 도구로 쥐어주었다면 수많은 것들이 잘려나가고, 또……또…… 생각만 해도 두렵고 소름 끼치기도 한다.
그 동안 크리스쳔이라는 사실, 대학교수라는 사실, 시인이라는 사실들이 내 삶에서 더욱 더 칼날을 무능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어느 평자가 내 시를 다루면서 월평에 쓴 글이 떠오른다.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 스치고 사라진 곳에 그의 시는 시작된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는 날카로움이 숨어있고 그래서 그의 시는 흐느적거릴 수 없다. 그는 푸른 날을 수면 위로 나타내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시세계 속에는 날선 감각이 번득인다.’
라고 했다. 부분적으로는 잘 짚은 얘기라고 보았다. ‘자기 이성이 사라진 곳에서 바로 신앙이 시작된다’라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말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박노해 시인의 시 「부드러운 페니스로」라는 시에서 ‘착한 사람도 화날 때 보면/성난 무처럼 뿔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행이 새롭게 기억된다. 가장 부드러운 부분은 언제라도 뿔이 될 수 있는 용기를 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쇠처럼 강해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중의 치열한 전쟁과 고통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무딘 칼 때문에 슬픔과 절망을 통해 정화를 거치는 힘이 생성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칼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홍보전략을 갖는 21세기의 시점에서 나는 늘 위기를 느낀다. 요즘도 어이없게 시달리고 있다. 피만 흥건하게 괸 기분이다.
이 맘에 안 드는 보잘 것 없는 도구 때문에……. 잘 안 드는 칼은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늘 위험하지만, 주눅들지는 않는다. 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새파란 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월간『牛耳詩』 제183호)
'이탈한 자가 문득 > 램프를 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사는 일 / 김명원 (0) | 2009.01.13 |
---|---|
시적 개성 : 문체文體는 문채文彩다 / 김석준 (0) | 2009.01.13 |
[임보]이규보의「論詩」(시를 말함) (0) | 2008.11.30 |
[이생진]시와 나 사이 (0) | 2008.11.30 |
[김명인]삶의 진정성을 향해서 (0) | 2008.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