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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사는 일 / 김명원

by 丹野 2009. 1. 13.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사는 일


                                                                             김 명 원(시인, 대전대 겸임교수)

 


정일근「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시안』2008 가을호)

마종하「물집」(『 시작』2008 가을호)              

   박정규「바람개비」(『 리토피아』2008 가을호)

김금용「시 비빔밥」(『 우리詩』2008 10월호)

공광규「부부론」(『 시와정신』2008 가을호)

우대식「향연饗宴」(『 리토피아』2008 가을호)

김경성「직립으로 눕다」(『 우리詩』2008 10월호)

이명수「신라의 달밤」(『 화요문학』2008 가을호) 


11월입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푸석하게 끼어 있는 달입니다. 타오르던 단풍나무들은 이미 다 헐벗었고, 결빙과 곤혹의 계절을 견딜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추위를 일으키는 바람이 하늘 가득히 들어서는 스산한 소리, 가슴으로 들으면서, 창가로 다가가 그리움이라는 입김을 불어 봅니다. 흑백 사진으로 인화되는 유년의 골목과 목 아래께 근처에서 가래 끓는 슬픔으로 근원 모를 눈물을 훔치던 고등학교 시절 빈 운동장의 늦가을이 그려집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과 그 먼 시간의 경계를 푹 허물며 아득함이 물밀져 오는 때입니다. 결별했던 이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나를 버렸던 인연을 용서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먹먹한 오후, 따스함이 필요해집니다. 커피를 만들고, 책상에 놓여진 시집과 온갖 시지詩紙들을 펴들며 문학만이 베푸는 위로를 기대해 봅니다.

지난달, 저에게 배달되어 온 시집과 시지들은 대략 오십여 권이 됩니다. 적은 양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상품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듣는 이들에게 그리 큰 충격을 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 근대체제의 형성과 전개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의 저작물인 문학 작품을 상품의 형식으로 존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작가의 작품도 상품의 형식을 부정하며 자기 존재를 지속시킬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루시앵 골드만(Lucien Goldmann)처럼 얘기하자면, 문학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존재해야 하는 운명, 요컨대 상품의 운명을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와 같은 운명을 싫든 좋든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시도 그러할 것입니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더 넓은 지역에 보급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시를 통해 동시대의 고민을 나누고, 더불어 가장 보편적인 감동을 유포하여, 어쩌면 교보문고에서 모든 문학 단행본들을 제치고 단연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시집을 출간하고 싶어할 지도 모릅니다. 백년이 흘러도 암송되는 시를 남기고 싶어 시를 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담금질을 견디며 절대 잊히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길 욕망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욕망과 현실이 어디 정비례하던가요. 문학 매체가 속속 출현하고, 비주얼한 영상물들에 의해 손쉽게 이미지를 획득하려는 독자들이 시를 읽기는 하던가요. 머리 써 가면서 언어의 상징성을 고투하며 찾아내야 하는 시를 읽는 일이 자본적 속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일인가요. 그러하니 시집을 출간하면서 인세를 주는 출판사가 몇이나 되는지요. 더구나 신간 시집이 서점 비인기코너에 진열되다 보니 시인들이 위축되기는 하겠지요. 원고료가 없어도 시를 써 잡지에 보내야 하고, 생활기록부 직업 난에 ‘시인’이라고 명기하기 어려운 실정인 시인의 숫자가 2만 명을 넘어서는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상품 가치로서 이미 좌절된 시를 쓰면서 비자본적 속성 때문에 더욱 시를 쓰고상품가치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중 모순을 이번 호에서는 살펴보려 합니다. 창백한 시간이 고여있는 11월,《 우리詩》월평방에서 시인들 내면으로 잠수해 들어가 봅니다.


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자칭 타칭 2만이 넘는다는 시인이 오늘도 쉬지 않고 시를 쓰는 일은 그 시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수백 종의 문학잡지를 먹여 살리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문학잡지는 종이공장을 먹여 살리고 종이공장은 인쇄공장을 먹여 살리고 인쇄공장은 잉크공장을 먹여 살리고,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시집이 출판되는 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간 수천 권의 시집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출판사를 먹여 살리는 일이다. 출판사는 대형 인터넷서점을 먹여 살리고 대형서점은 택배회사를 먹여 살리고 택배회사는 자동차공장을 먹여 살리고 자동차공장은 제철 공장을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를 쓰기에 문학, 출판기사를 쓰는 신문사 문학 기자를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집을 내기에 시집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를 먹여 살린다. 아직도 원고지에 시를 쓰는 시인이 있기에 사라지지 않은 원고지를 찍어내는 가난한 인쇄공을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집을 내기에 신간 시집을 정리하는 도서관 임시직원을 먹여 살린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서 시를 쓰는 일은 시인의 수십 수백 개 하청업체를 가동하게 하는 문화산업의 원동력, 하청업체의 수천 수만 수십만 그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경제활동.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날에는 날마다 취하여 주류업체를 먹여 살리고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시간에는 밤새 담배를 피워대며 KT&G를 먹여 살린다.


하여 시인이여, 문학잡지가 신작시 한 편 청탁을 하지 않아도 출판사가 당신이 출판을 의뢰한 시집원고를 되돌려 보낸다 해도, 대형서점이 신간시집 코너에 새 시집을 꽂아주지 않아도 신문사 기자가 기사 한 줄 써주지 않는다 해도,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일. (중략) 가족부터 시인을 무시하여도 시인이여 시의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 창세기 이후 만년적자라 해도 시의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
           - 정일근「, 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일부『( 시안』2008 가을호)


시를 읽다가 쓸쓸한 가을날이 부려놓았던 신산함이 쑥 가시겠지요. 바로 정일근의「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이라는 시 때문입니다. 시가 길어서 일부만 소개시켜 드리고 있는데요. 정일근은 능청스럽도록 시인의 역할이 자본적 속성에 얼마나 잘 부합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대한민국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자칭 타칭 2만이 넘는다는 시인이 오늘도 쉬지 않고 시를 쓰는 일은 그 시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수백 종의 문학잡지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피력합니다. 이는 “문학 잡지는 종이공장을 먹여 살리고 종이공장은 인쇄공장을 먹여 살리고 인쇄공장은 잉크공장을 먹여 살리”는 일로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뿐입니까? 시집이 출판되는 일은“대형 인터넷서점을 먹여 살리고 대형서점은 택배회사를 먹여 살리고 택배회사는 자동차공장을 먹여 살리고 자동차공장은 제철공장을 먹여 살리고, 시집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원고지에 시를 쓰는 시인이 있기에 사라지지 않은 원고지를 찍어내는 가난한 인쇄공을 먹여 살리고 시인이 시집을 내기에 신간시집을 정리하는 도서관 임시직원을 먹여 살”려 “대한민국에서 시를 쓰는 일은 시인의 수십 수백 개 하청업체를 가동하게 하는 문화산업의 원동력, 하청업체의 수천 수만 수십만 그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경제활동”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강변합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날에는 날마다 취하여 주류업체를 먹여 살리고 시인은 시가 쓰여지지 않는 시간에는 밤새 담배를 피워대며 KT&G를 먹여 살린다”는 표현입니다.

시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정일근의 풍자적 미학이 절정에 이릅니다. “하여 시인이여, 문학잡지가 신작시 한 편 청탁을 하지 않아도 출판사가 당신이 출판을 의뢰한 시집원고를 되돌려 보낸다 해도, 대형서점이 신간 시집 코너에 새 시집을 꽂아주지 않아도 신문사 기자가 기사 한 줄 써주지 않는다 해도,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룩한 일”이므로“가족부터 시인을 무시하여도” “창세기 이후 만년적자라 해도 시의 공장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쓸쓸한 웃음이 한바탕 지나가지 않습니까? 교묘하게 우회하여 숨기는 풍자가 아니라 거침없이 솔직하게 뿜어내는 직설적 조소가 웃음 뒤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 역시 이와 유사한 생각을 품었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적 사회에 편승되지 않으려는 정신적 작업의 소산물이 시임에도, 그런 사회의 속성에 부합되는 생리를 거부할 수 없기에, 이와 같은 시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중적 모순의 덫에 우리 시인들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자본적 사회와 시인, 그리고 시의 삼각관계를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재치 넘치면서도 참 아픈 시입니다.


입술이 부르텄다.
밤새워 시의 여자와
입 맞추며 물집 짓던
젊은 날은 가고.


발에도 물집 선다.
눈독 들여 헤맨 벌판,
되는 대로 발맞추며
떠돌아다녀서다. (중략)

 

이제야 겨우
빛 머금은 실눈 뜨고
오줌줄기 길게
부푼 몸집 물 비운다.
              - 마종하「, 물집」일부『( 시작』2008 가을호)


우리 할머니 고부랑 부지깽이로 죽은 불씨 다독이며
어두운 시를 왜 쓰냐고 고래고래 나무라는 바람에
슬픈 문자들이 우두둑 떨어지는 시절
가을운동회 만국기 아래도
등하교 코스모스 자갈밭 길에도
바람은 지구를 수 바퀴나 돌아 앞산 등성에 있었습니다.
해풍이 쏟아지는 갈대밭에도
갯벌 아낙들 하얀 허벅살에도
바람은 덕지덕지 붙어 가슴으로 올랐습니다
언론에 들락거리는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아리송해’를 엇박자로 흥얼거리던 날에도
흔적 없고 냄새 없는 바람에 눈동자 빙빙 돌았습니다.


- 중략 -


바람개비의 추억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 박정규,「 바람개비」일부『( 리토피아』2008 가을호)


마종하와 박정규는 시를 쓰던 젊은 날을 추억합니다. 그 시절은‘이미 지난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일근이 도식한“당신의 시에 숟가락 들고 함께 밥 퍼먹는 하청업체 직원과 직원을 하늘처럼 믿고 사는 그 식구들의 밥상을 생각하며 시를 쓰자. 낮이나 밤이나 쉬지 말고 시의 공장을 돌리자. 여기 대한민국, 우리들만의 시인공화국에서”라는 반어적 항변이 금전적 환산 안 되는 남루한 시인의 현지도를 그리고 있다면, 위의 두 시는 시인들이 열망하던 시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함몰된 회억일 뿐이라는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마종하는「물집」에서“입술이 부르텄”던 상흔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밤새워 시의 여자와/ 입 맞추며 물집 짓던/ 젊은 날”이 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랬겠지요. 한때 문학을 갈망하면서 밤을 새워 고투하고 고민하던 젊은 날이 있었겠지요. 시마에 들 듯 시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던 열정의 시간이 있었겠지요. 이제는“겨우/ 빛 머금은 실눈 뜨고/ 오줌줄기 길게/ 부푼 몸집 물 비우”는 시간, 냉엄한 현실의 시간입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는『노년-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대부분의 노인들은 시간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옛 자아가 현재에도 계속 존재함을 믿고 있다고 규정합니다. 기억을 회상하면서 변함 없는 본질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임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을 제압할 수 있는 단타적인 환상(미르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신화·물·신비』)을 제공할 뿐, 결국은 시간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출에 불과하다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말은 이 시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무리 몸부림해도 과거는 과거일 뿐, 남겨진 것은 절대적이며 물리적인 현재의 시간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마종하에게도 부푼 물집에 물이 서던 푸른 생명력의 젊은 시절은 이제 쇠락하고, 물을 비우는 시간이 남겨져 있을 뿐이니까요.

박정규의「바람개비」는 시인으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지를 드러냅니다.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절망을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시의 1연은 시인에게 시 쓰는 작업의 방해자로‘할머니’가 등장하고, 할머니는 불을 다루는 주술자적 역할을 맡는 권력 구조로 부상합니다. 바로 그 할머니는“고부랑 부지깽이로 죽은 불씨 다독이며/ 어두운 시를 왜 쓰냐고 고래고래 나무라는”분인 연유입니다. 시인에게 시작詩作협조자가 없으니, 아니 시를 쓰고자 하는 운명을 거역하게 하는 훼방꾼만 존재하니“슬픈 문자들이 우두둑 떨어지는 시절”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하니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던 절망이“가을운동회 만국기 아래도/ 등하교 코스모스 자갈밭 길에도”“지구를 수 바퀴나 돌아 앞산 등성에”도 바람이 불었을 터이고,“ 해풍이 쏟아지는 갈대밭에도/ 갯벌 아낙들 하얀 허벅살에도/ 바람은 덕지덕지 붙어 가슴으로 올랐”을 터입니다. 뿐입니까? “언론에 들락거리는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아리송해’를 엇박자로 흥얼거리던 날에도/ 흔적 없고 냄새 없는 바람에 눈동자 빙빙 돌았습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이 가능해지면서 처연해집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바람을 일으키던“바람개비의 추억이 너무나 그립”다고 시를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좌절의 시원始原인 바람개비가 그리운 것은 핍박의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몰락을 기꺼이 수용하던, 순수의 시대를 갈망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시를 왜 써야 하는지, 왜 시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지, 혹은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하기에 왜 삶에게 시를 양보해야 하는지 등, 본질적 질문과의 대면을 회피하면서 일상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두 시인은 장 아누이(Jean Anouilh)『 안티고네』의 크레온처럼 오염과 전락을 필연적인 댓가로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할 것인가, 혹은 안티고네처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삶을 거부할 것인가 묻고 있습니다. 장 아누이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락하는 것인데, 시인인 우리들은 지금 어떠한 지평에 서 있습니까? 생존이 우선입니까? 시업詩業이 최선입니까? 타락을 수용합니까? 타락에 맞섭니까? 시인들의 방을 들여다봅니다.


프라이팬에 물 한 잔 놓고 점심을 먹는다
창틈으로 비껴드는 바람밖엔
숨 쉬고 재잘거리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모두가 죽은 오후 세 시 반에
이승훈 시인의 비빔밥 시론을 베껴 먹는다
전기밥통에서 식혜가 되어가는 잡곡밥과
기제사에서 쓰고 남은 나물들
된장국물과 김치 조금 섞어 비비다가
마른 김 몇 장과 볶은 깨, 참기름 약간 두르면
비행기 기내음식으로 외국인도 환영한다는
문지방 사라진 웰빙 음식이 탄생한다
클래식과 뽕짝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그림과 사진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을 구하는 나이와 국경, 性의 구분까지 허물고
오직 눈빛 하나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 하나로
이념도 목적도 필요 없어진 문지방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정해진 요리법이며 트릭도 맛내기도 필요 없는
나만의 식사 나만의 허락된 존재와 몽상 안에서


혼자 꾸역꾸역 적막을 비벼 먹는다
수저로 허공을 빡빡 긁어 먹는다
                   - 김금용,「 시 비빔밥」전문『( 우리詩』2008 10월호)

 

 

오늘은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결혼은 삼겹살을 굽는 것이네
타지 않게 골고루 잘 익혀야 하는 것이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불꽃을 조절하고
알맞게 익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이네


결혼은 된장국을 끓이는 것이네
알맞은 양을 물에 풀고
양념을 넣고 자꾸자꾸 간을 보는 것이네
된장과 양념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네
그걸 몰라서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 공광규,「 부부론」전문『( 시와정신』2008 가을호)


밥 먹는 풍경을 그리고 있는 김금용과 공광규 시인의 방입니다. 정효구는 밥(bob) 버는 일이 바로 직업(job)이라고 시를 비평하는 지면에 쓴 적이 있습니다. 그의 글처럼 음운론적으로‘밥’과‘잡’은 비슷한 발음을 내는군요. 아니 내용상으로도 직업을 갖는 일은 밥을 먹기 위한 일이니 결국 ‘밥’과 ‘잡’은 이음동의어이군요. 김금용은「시 비빔밥」에서 특별한 재료나 비법 없이 밥을 마음대로 만드는 행위를 “이승훈 시인의 비빔밥 시론을 베껴 먹는다”고 비유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밥을 만드는 일은 시인이 시를 짓는 일과 등가입니다. 이는 “창틈으로 비껴드는 바람밖엔/ 숨 쉬고 재잘거리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모두가 죽은 오후 세 시 반”에 이루어지는 시인의 성찬 의식입니다. 누구의 힐난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에 부리는 작업, 즉 “전기밥통에서 식혜가 되어가는 잡곡밥”과 “기제사에서 쓰고 남은 나물들”을 “된장국물과 김치 조금 섞어 비비다가/ 마른 김 몇 장과 볶은 깨, 참기름 약간 두르면 ”잡탕식 식사,“ 문지방 사라진 웰빙 음식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는 “클래식과 뽕짝의 경계를 허물고/ 시와 산문, 그림과 사진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을 구하는 나이와 국경, 性의 구분까지 허물고/ 오직 눈빛 하나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열망 하나로/ 이념도 목적도 필요 없어진 문지방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정해진 요리법”인 것입니다. 완성된 비빔밥을 “혼자 꾸역꾸역 적막을 비벼 먹는다/ 수저로 허공을 빡빡 긁어 먹는다”는 시의 결미는 시인의 식사법을 작시법으로 슬쩍 치환시키는 고도의 움직임으로 포착됩니다. 이미 경계가 깨어진 파편화의 시대, 비비는 작업은, 김금용 시인이 주장하는 “트릭도 맛내기도 필요 없는/ 나만의 식사 나만의 허락된 존재와 몽상“인 셈이며, 이것이 그녀가 시를 쓰는 방법입니다.

시에 사진까지 첨부되고 해체시, 환상시, 구체시 등이 등장하는 시대에 무슨 정통 시론이 요구되겠습니까. 어떤 강권의 규범이 필요하겠습니까. 혼자서 비비며 홀로 꿈꾸는 김금용 시인의 식사법, 그녀의 작시법이 시원합니다. 이렇게 신명나게 자신만의 고독을 자유로 즐긴다면 대한민국에서 시인으로 사는 것, 괜찮겠습니다.

이에 비해 공광규는 아내가 나간 집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챙겨줍니다. 시인의 아내가 왜 부재인지는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2연과 4연의 마지막시행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에서 알겠습니다. 가출한 이유도 대강 알겠습니다. 그러하니 시인은 “결혼은 삼겹살을 굽는 것”이라고, “ 타지 않게 골고루 잘 익혀야 하는 것”이라고, “알맞게 익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탄하듯 깨닫습니다. 또한 “결혼은 된장국을 끓이는 것”임을 알아차립니다. “알맞은 양을 물에 풀고/ 양념을 넣고 자꾸자꾸 간을 보는 것” 이어서 “된장과 양념의 조화를 맞추는 것”임을 인지하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잠언적 각성을 슬쩍 시작詩作으로 환치해 봅니다. 결국 둘은 같습니다.

김금용과 공광규 모두 밥을 차리면서, 밥을 이야기하면서, 시인이 찾아가고 있는 삶과 시의 본질을 묻습니다.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초와 고투를 밥 챙기고 밥 먹는 행위로 넌지시 풀어놓습니다. 고된 밥을 통해 자신의 직업 정신을 검열합니다. 왜 시인들은 이다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매양 하고 있을까요?


무우사無憂寺라는 절이 있다. 근심이 없다는 말, 좆같다. 늘 좆이 근심인 내게 그 절 이름은 근심을 더해 준 셈이다. 근심은 세리稅吏와 같다. 시인 심보선은 이를 신의 반열에 올라선 스트레스라 했다. 죽음이 신이라고 믿고 살아온 나 같은 놈은 한심하다. 신도 없는 죽음으로 떨어져 마땅하다. 근심 없는 한 세상을 살면서 무력한 자신의 사타구니를 몇 번이나 핥으리라. 케냐의 동물원 같은 곳에서 꼬리를 휘휘 저어 파리나 쫓는 일을 하리라. 근심 없는 세상에서 근심에게 근심을 던져주는 신이 되어, 단독자가 되어 향연을 베풀고 싶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근심의 향연.

                      - 우대식,「 향연饗宴」전문『( 리토피아』2008 가을호)

 

 

빗방울에 눌려 떨어져도 고요하다
소리 지르지 아니한다
입술 같은 꽃잎, 조금이라도 넓게 펴서
햇빛 녹신하게 빨아들여
몰약 같은 향기 절정일 때
바람에 날린다 해도 서럽지 않다
직립의 시간 허물어뜨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눕는다
목단꽃 떨어져도 넓은 꽃잎 접지 않는다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이 있다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물 배이도록 젖어들다가
아, 나도 한 장의 꽃잎이 되어
네 꽃잎 위에 눕는다
포개어진 꽃잎 위로 스쳐가는
바람 부드럽다

           - 김경성,「 직립으로 눕다」전문『( 우리詩』2008 10월호)


시는 아픈 자들의 신음이며, 시인은 세상의 온갖 근심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 체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들입니다. 시가 고혹스러우리만큼 아름다움에 떨리는 이유는 그 근심과 고통을 아름답게 미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심 고통과 직면하여 적확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대식은「향연饗宴」에서 향연의 진정한 의미를 표명합니다. 이는 ‘무우사無憂寺’라는 절 이름에서부터 파생하는 “근심이 없다는 말, 좆같다”는 거친 어조로 격양된 효과를 자아냅니다. 누구든 피하고 싶은, 누구든 떨치고 싶은, ‘근심’을향해 시인인 화자는 “늘 좆이 근심인 내게 그 절 이름은 근심을 더해 준 셈이다”라고 짐짓 너스레를 부립니다. ‘좆이 근심’이면 다른 어떠한 것도 근심 아닌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근심으로 채워진 생, “근심은 세리稅吏와 같”아서 “시인 심보선은 이를 신의 반열에 올라선 스트레스”라고 하였으니 근심을 마음껏 근심할 수 있는 자들은 보통 독종이 아닐 듯 싶습니다. 그러니 “근심 없는 한 세상을 살면서 무력한 자신”이기보다는 “근심 없는 세상에서 근심에게 근심을 던져주는 신이 되어, 단독자가 되어 향연을 베풀고 싶다”고 우대식은 자신의 열망을 확인합니다. 바로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근심의 향연”, 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시詩안에서 마음껏 근심을 즐기며, 근심과 놀며, 근심을 묘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포가 있는 자, 시인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김경성은「직립으로 눕다」에서 시를 정밀하게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를 간파합니다. 어떤 시간에 시가 형성되는지, 시를 만나게 되는 그 미세하고 숨막히는 절정을 시로 뽑아 올리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긴장의 농도를 너무도 수려하게 대상물들에게 투사시키고 있습니다. 시에서는 자연물들이 출연하는데, ‘빗방울’, ‘꽃잎’, ‘햇빛’, ‘바람’,‘ 목단꽃’등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시의 중반부까지 모두 소멸에 관련되어 있는 서술부와 연결됩니다. “눌려 떨어져도”, “허물어뜨리고”, “그대로 시들어”등입니다. 이런 정조는 시인의 시적 공간을 비어 있음의 세계로 만듭니다, 세상이 이질적 존재들 간의 유기적 질서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인식 주체에게 소멸이라는 양상은 세계와의 단절로 이어지며, 이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귀결됩니다. 즉“소리 지르지 아니한다”, “서럽지 않다”,“ 접지 않는다”등입니다. 그러나 시가 후반부에 이르러 이런 단절 의식은 화해로 전환되는데, “직립의 시간 허물어뜨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눕는다”는 행위로 발생하는 계기입니다. 목련꽃이 지는 때를 기려 그리고 있는 이 시는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을 반추하면서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물 배이도록 젖어”버리는 시인의 심성에서 시가 탄생함을 보여줍니다. 지는 꽃잎처럼“한 장의 꽃잎이 되어/ 네 꽃잎 위에 눕는”순간, 시는 완성됩니다. 세상과 시인은 단절을 깨고 동일화(identification)를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비로소 세상과 시는 하나가 됩니다. 이를 축복하듯 “포개어진 꽃잎 위로 스쳐가는/ 바람 부드럽”습니다. 저에게까지 이 순연한 바람의 결이 느껴집니다.

시인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는 이 시간에도, 그런 여유조차 아깝다는 듯 시를 위해 고요히 정진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경주 사는 석공 윤만걸은
달밤에 석수질을 한다
대낮에는 돌의 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낮에 폐사지에서 놀다
밤에 남산에 올랐다
탑곡 마애불들이 밤에 더 예쁘다
돌로 돌을 쪼아내고 있는 신라의 석공,
거친 돌의 숨소리가 남산에 가득하다


달밤에 석공이 돌을 마르듯
마음으로 마음을 쪼아

시 한 편을 마른다
뾰족이 솟아난 마음 한쪽이
이슬에 젖고 있다

                  - 이명수,「 신라의 달밤」전문『( 화요문학』2008 가을호)


두 인물이 이명수의「신라의 달밤」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경주 사는 석공 윤만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인 화자 자신입니다. 시의 1연과 2연에서는 석공 윤만걸이 돌을 다듬어 작업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시의 3연은 시인의 시작 방식을 ‘돌’을 통해 정결한 형상화로 빚고 있습니다.‘ 돌’은 강인한 속성을 표출하는 상징물입니다. 완고한 자기 존재성이 강한 물질로서 돌이야말로 비타협적인 물상인 연유입니다. 그런 ‘돌’을 “달밤에 석수질”하는 이유는 “대낮에는 돌의 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은 “낮에 폐사지에서 놀다”가 “밤에 남산에 올”라 “돌로 돌을 쪼아내고 있는 신라의 석공,/ 거친 돌의 숨소리가 남산에 가득”함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는 예술혼을 답지하는 소리, 시인의 가슴에서 울리는 심상의 소리, 밤의 시원성에서 만나게 되는 생명의 소리인 것이지요. 그리하여 “달밤에 석공이 돌을 마르듯/ 마음으로 마음을 쪼아/ 시 한 편을 마른다”는 시인의 고백이 서늘해집니다. 돌을 한 땀 한 땀 쪼듯 시를 쪼아 “뾰족이 솟아난 마음 한쪽이/ 이슬에 젖고”있으니 팍팍한 세상에 물기가 젖어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에 기꺼이 입 맞추는 자들입니다. 근심과 고통을 찾아다니는 유목민들입니다. 더 깊고 어두운 세계와 소통하는 견자見者들입니다. 내밀하고 신비한 창작을 통해 시로 발현된 생의, 죽음의 본질적 심연을 가늠케 하는 신의 대리인들입니다. 시인들이 경배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며, 열악한 문단 환경과 척박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치열한 존재 탐구의 의지를 독자들에게 전수하고자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김명원 시인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詩文學』으로 등단. 시집『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달빛 손가락』등.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현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