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개성 : 문체文體는 문채文彩다
김석준(시인·평론가)
시인에게 있어서 문체는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운명성 또한 걸려 있는 가장 요긴한 문젯거리이다. 하여 문체文體는 문채文彩가 나는 인격이다. 문체는 말이 빚어내는 오묘한 마법의 작용인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과제이자 몇 개의 변곡점을 경유해야만 문채가 나는 문체를 형성시킨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있어서 문체는 ‘아’와 ‘어’ 사이의 어감 차이를 질주하면서 말의 인격을 완성시켜 간다. 문체가 인격이라는 말이 맞다. 분명 모든 글엔 그 품격이 있다. 허나 말의 본새 그 자체는 품격이 없다. 말하자면 말의 기표와 기의의 작용은 가치 판단 이전의 말-사태이거나 의미 이전의 말작용이다. 의미와 가치는 말해진 말 속에 뜻이 얹힌 상태인데, 그것은 뜻을 펴 전달하는 의사소통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쩌면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 이전의 그 무엇으로 지칭되는 문자 내지 원문자가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문자는 뜻을 지시 전달하는 발화된 음성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역동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밝히는 찬연한 문채를 발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인은 탐구자가 되어야만 한다.
시인은 의미 이전의 문자 속에 새겨진 문양을 조직하여 문자의 구조를 구축하여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시적 개성이자, 예술혼이 위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말자하면 시적 개성이 나타나는 문채가 나는 문체는 시적 구조의 향기가 만들어내는 영기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그 쪽이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도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어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을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라서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 유안진 「그림자도 반쪽이다」
『현대시학』 4월호 시적 문체엔 시인의 개성적 측면이 잘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문체의 빛깔을 정확하게 언표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사실 문채가 나는 문체의 특징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순간, 시향詩響은 사라지고 잔영만이 남아 시향詩香 전체를 죽인다. 시란 그 자체로 느낌의 언어이다. 시란 그 자체로 느낌 속에 잔여를 남기는 여율呂律이다. 말하자면 문체는 끝없이 미분해도 사라지지 않는 시인의 고유성을 담보하는 보증수표이다. 허나 문채가 나는 문체는 말―기호의 즉자대자운동 속에 새겨진 말―문양의 본새에만 있지 않다. 아니 문채가 나는 문체는 시말―구조 속에 시인의 마음을 얹혀놓는다. 말하자면 시인의 문체는 시말운동 속에 영혼의 기의를 기입하여 시말운동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우주로 완결시킨다. 유안진 시인의 「그림자도 반쪽이다」엔 말―문양 속에 몸―문양과 마음―문양이 절묘하게 새겨져 있다. 「그림자도 반쪽이다」의 뼛골 깊숙한 곳엔 시간의 함수가 빚어내는 인간학적 사태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 알알이 박혀 있다. 문체가 인간학적 인격으로 환원되는 데는 그 나름에 타당한 이유가 있다. 비록 유희를 지향하는 해체적인 자기 파괴적 문체도 없지 않으나, 미적 패러다임 내부를 관통하는 모든 세계―내―사태들은 “기울어진” 것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문양은 그리움, 안타까움, 사랑 그리고 아픔이라 감정의 문양을 가로질러가다가 인간학적 본질에 대한 회의에 이른다. 분명 시인 유안진은 시의 문채가 나는 문양 속에 ‘존재론적 기울어짐’을 기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여 시인이 시말 속에 기입한 문체의 문채는 애잔한 향기 뿜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문다. 분명 유안진은 인간학적 음영에 드리워진 반쪽 그림자를 사유하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인간학적 사태 속에 필연적으로 기입되는 인간의 운명성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다 아픈 것으로 기울어진다. 모든 것은 다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사랑하다가 필연적으로 기울어져 아프고, 저려서 아프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삶의 음영에 드리워진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매다가 삶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게 마련이다. 시인 유안진은 묻는다. 그 나머지 반쪽이 어쩌면 인간학적인 본질일지도 모른다고.
하늘에 붙어 있는 하나의 눈
낙산 앞 바다 표면에서 움직이는 만 쌍의 눈
둘 다 만만치 않지만
하늘에 붙어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바다에 가야겠다
만 한 쌍의 눈이 되어야겠다
만 두 번째 쌍의 눈을 기다려야겠다
눈을 뜨고 있더라도 살아 있지 않은 것이라면
낙산에 가야겠다; 낙산에 가보라고 해야겠다
벌써 만 쌍의 눈이 깜박 깜박하는
만 두 번째 쌍의 사연이 아무 것도 아닌
눈을 뜨고 살아 있는 것은 그들끼리 살라
눈을 뜨고 있어서도 살아 있지 않는 것들도 그들끼리 살라
낙산으로 가라
- 박찬일 「만 쌍의 눈」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3-4월호
박찬일은 요즘 들어 독특한 정신세계를 견지하면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시 「만 쌍의 눈」도 그러한 시적 범주의 연속선상에 있는데, 박찬일의 의식은 시의 극한 값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허나 그가 어떠한 시적 경지에 도달하여 시말-문체 내지 시적 개성을 완결시켜갈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박찬일의 요즘 씌어진 시들이 존재-형이상학적인 측면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시적 새로움과 존재론적 사유, 양자를 놓치지 않으면서 시말 내부에 인간학적 사태를 내접시킬 때, 혹은 시 「만 쌍의 눈」에 형상화된 것처럼, 하늘의 눈과 바다의 눈 사이에서 인간학적 사태를 예인해낼 때, 시말 눈은 어디로 향해가는가. 박찬일의 시 눈이 광활한 두 공간(하늘과 바다) 사이를 무한 질주해 갈 때, 시적 지향성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하나의 눈과 만 쌍의 눈 사이에 새로운 눈의 의미를 추적해 갈 때, 시인의 눈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혹은 시인의 눈이 만 한 쌍의 눈이 되고, 만 두 쌍의 눈을 기다릴 때, 그 눈은 어떤 눈인가. 시인에게 있어서 눈은 단순하게 보는 행위seeing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눈은 투시하는 힘이다. 눈은 살아있는 것도 투시하고 살아 있지 않는 것도 투시한다. 말하자면 시인의 눈은 경계의 지점을 응시하는데, 이때 시인은 랭보적 견자이거나 생에의 비의를 응시한 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의 눈은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여 만 두 쌍의 눈을 기다리는 시인은 하늘의 눈과 바다의 눈을 매개자이거나 삶과 죽음을 매개시키는 인간학적 대리자이다.
나비떼 쏟아져 들면
맑은 찬 데에 부딪쳐 날개 다치리
푸른 구름 하늘하늘 핀 그 아래 온갖 상품들의 꽃무늬 잘 비쳐올라서
나비떼 성찬의 꿀이라도 취해볼까 하고 날아온다면
마알간 푸름에 베어 배반당한 상처가 쓰라리리
부전나비 큰줄흰나비 노랑나비 먹그늘나비 제비나비 모시나비 애물결나비
청띠신선나비 알락나비 배추흰나비 공장들은 일제히 파업 중인데
유리 건물이 가둔 하늘 속으로 꽃구름 쉴새없이 피어오른다
배반은 늘 유리창처럼 틈도 없이 잘 끼워져 있으니
그 유리로 바깥을 내다보려무나
- 이하석 「유리 하늘」 『현대시』 5월호
시인 이하석의 「유리 하늘」은 어떤 시말-문체를 시 속에 내파시켜 어떤 시-문양을 그려내고 있는가. 문명의 그늘인가, 인간학에 스민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인가. “마알간” 시말 속에 배반과 상처를 기입했을 때, 시인의 시말운동은 마알갛고 투명한 시적 문채를 드러내고 있는가. 이하석의 「유리 하늘」속엔 속이 다 비치는 쓰라린 상처가 있고 다쳐 날지 못하는 날개가 있다. 분명 마알갛게 잘 정제된 시말 속을 쉴 새 없이 배반당한 상처가 주파해갈 때, 시말은 어떤 인격적 문체로 문채를 드러내는가. 마천루 즐비한 테헤란로의 어디쯤을 몽상하면서 시뮬라크르적 허상이 즐비한 도심 속을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때, 혹은 현기증 날 정도로 유혹적인 가공의 산물에 이끌려 하늘 저편에 이르렀을 때, 이하석은 이 세계 내부에 드리워진 기만적인 덫을 응시하게 된다. 허상이다. 유리에 비친 꽃무늬는 화려한 유혹이다. 다 속아넘어간다. 나비라고 명명된 그 모든 개체는 허상에 날개를 다치고 배반을 당한다. 분명 이하석은 유리 건물에 갇힌 도심 하늘을 유리하늘이라고 명명하면서 문명화된 도시 속에 드리워진 기만과 허위를 비판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내부에 무수한 허방들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시인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 놓여 있는 모순을 투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하석은 나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넨다. “그 유리로 바깥을 내다보려무나”, 날개에 상처를 받지 않게 조심하거라 하고 당부를 아끼지 않는다. 더 나아가 시인 이하석은 문명의 그늘을 응시하면서 자연의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기만적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썩을 것이
종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영영,
죽지 아니함을 입는 날
서에서
동이, 먼 것같이
먼 것같이 멀리라
- 이정환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시』 5월호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삶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삶은 죽어 썩어문드러진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삶의 존재론적 양태를 넘어서서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꿈꾼다. 그렇다. 분명 인간은 꿈꾸는 존재다. 인간은 꿈을 꾸다가 문득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시키는데, 그것은 불후와 불멸에 관한 패러독스적 의지이다. 시인은 그 의지적 삶에 관한 단상을 정형의 율조 속에 응고시키는데, 정형의 시적 리듬은 시간의식과 공조체제를 이루어 불후 불멸하는 날을 몽상하게 만든다. 허나 그러한 시적 의식은 가능한가. 인간이란 그 자체로 썩고 문드러지는 존재가 아닌가. 시인 이정환이 불후와 불멸을 사유할 때,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것이기나 한가. 이정환의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는 시적 패러독스의 자장 내에서 불가능을 가능에 잇대어 놓는다. 마치 상호 대립적인 동과 서가 실은 상호 서로 이접되어 있는 것처럼, 썩지 아니함과 썩음, 죽지 아니함과 죽음을 상호 동일한 차원으로 시간화시킨다. 허나 시인 이정환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시켜 불멸과 불후를 어느 특정한 날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종장에서 시인은 “서에서/동이, 먼 것같이/먼 것같이 멀리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동과 서는 상호 대극점을 이룬다. 하여 죽음과 불멸, 썩음과 불후는 동과 서가 너무도 먼 것처럼 상호 대극에 위치하는 패러독스가 된다.
나무는 한 해에 하나의 파문波紋을 제 몸속에 만든다
그것이 나무의 지분知分이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무는 홀로 자신만의 호수를 조용히 기르는 것이다.
- 홍해리 「지족知足」 『황금감옥』 우리글 대표 시선 10
시란 운명적으로 모든 욕망을 거세시켜 마음의 평정상태에 이르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제아무리 새롭고, 제아무리 시적 개성을 추구하더라도, 시란 운명적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자족에 이르게 만드는 것 같다. 시란 분명 평화와 사랑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평정심. 적멸. 혹은 고요. 분명 시적 언어의 임무는 아름다운 시말에만 있지 않다. 분명 시적 언어가 지향하여야만 하는 그 운명적 테제는 천명을 알고 그것에 맞추어 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데 있다. 홍해리 시인의 「지족知足」은 시의 처음이 아니라 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여 시의 문채는 자본의 저 편으로 비약해 들어간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세상. 타오르는 욕망. 운명과 천명을 하늘에 맡겨놓고 자족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도 없으리라. 시인 홍해리의 「지족知足」은 나무의 한해살이의 의미를 정관하면서 욕망의 부질없음을 인식시키고 있다. 더 이상 흔들릴 것도 없는 삶. 늘 만족하는 삶. 하여 윤동주가 「서시」에서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갈망했듯이, 시인 홍해리도 「지족知足」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성찰하면서 무욕과 자족의 세계에 이입되어 이미 족함을 알고 있다.
우리시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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