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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시론]
시와 나 사이
이생진(시인)
1. 꿈
꿈속에서 벨 소리가 났다. 수화기를 드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쪽에서 기연미연 하는 눈치다. 순간 ‘어머니!’ 하고 소리쳤다. 이쪽 소리를 듣고는 그제서 ‘너냐, 잘 있니?’ 한다. "네, 어머니!" 나는 이 순간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은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신 지 14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다. 어머니 없이 못 살 것 같던 그 마음이 어머니가 가신 뒤에도 계속되는 것을 나는 고마워한다. 내가 살아있는 현재도 내가 죽는 내일도 나는 나를 어머니와 공유하며 공존할 거라는 생각이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만 믿고 사느라 그 흔한 종교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그 무엇이 나를 죽게 한다 해도 그 즉시 어머니 곁으로 달려갈 것 같습니다.’
나는 살아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 어머니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꿈. 살아서 맺어진 정은 모두 어머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그 뿌리가 오래 오래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나의 시는 그런 그리움에 있다.
2. 책
‘구름처럼 바람처럼’ 하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도시에서 섬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섬에서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바람 부는 날 바닷바람에 실려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 이것이 서울을 낯설게 만든다. 그러나 그 낯섦은 나와 시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시는 낯섦의 바다요 또한 지식의 요람이다. 지식은 머리에 담아도 담아도 넘치는 일이 없다. 이점에서 나는 서울의 고마움을 섬의 고마움 못지않게 신선한 것으로 본다.
5호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교보문고로 가는 기분은 살아서 지식의 용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이곳에서 지식의 갈증에 목을 축이는 물고기들을 본다. 그 많은 젊은이들에게 눈으로 악수를 청하며 ‘너희가 미래다’라고 말한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 선물 중에 책보다 고마운 선물은 없고, 사람 중에 책 읽는 사람만큼 반가운 사람은 없다. 책은 썩지 않으며 혹 비바람에 상했다 해도 읽어서 탈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병을 책으로 고쳐가며 살았다. 책은 의사의 의사요 스승의 스승이다. 내 가까이 책이 있는 한 나는 늙을 시간이 없다.
3. 서울
나는 도봉산과 북한산으로 둘러싼 방학동에서 산다. 섬에서의 출발점은 바다지만 육지에서의 출발점은 방학동에 있는 900년 생 은행나무 밑이다. 이 건장한 생명의 덩어리에서 내가 태어나듯 매일 아침 활기에 넘쳐 집을 나선다. 쌍문역에서 4호선을 탄다. 이것은 불편 없이 나를 교보에도 실어다 주고, 인사동에도 실어다 준다. 인사동에 가면 학고재가 있고 아트사이드가 있고 인사아트센터에 인사아트플라자 등 많은 전시장이 있어 의욕적인 전시가 나를 자극한다.
그러나 한편 서운한 것은 인사동에 음식점도 많고 찻집도 많고 기념품가게도 많은데 비해 왜 시가 없느냐 이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시는 삶의 꽃인데 어찌하여 문화의 중심지라는 인사동에 꽃이 없느냐 이거다. 나는 시집 『인사동』(2006년 1월)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젊어서는 섬이더니, 왜 늙어서 인사동인가? 이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시인은 섬과 같아서 겉으로는 사람을 멀리하지만 속으로는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런 나를 기아(棄兒)라 해도 좋고 그리움에 지친 기골(肌骨)이라 해도 좋다.
나는 70이 넘어서 박희진 시인과 인사동에 시 읽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매월 엽서를 띄워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트사이드에서 시인학교로, 시인학교에서 보리수로 옮겨 다니며 장돌뱅이처럼 시를 읽었다. 읽고 나면 허전해서 다시 섬으로 떠났다. 그렇게 도시와 섬을 오가며 변해가는 세상 모습을 담은 것이『인사동』이다.’
―시집『인사동』의 ‘머리말’에서
2000년 12월 21일 인사동에 있는 아트사이드에서 처음 시낭송회를 열 때 이런 말을 했다.
‘인사동엔 골동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죽은 유물들이다.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골동품이다, 허나 진열장에 들어 있는 골동품과는 달리 살아 있는 골동품이다. 나는 평생 시와 살아왔으니 시를 가지고 봉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말로 시작한 시낭송회가 8년째 접어들었다. 인사동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 되면서 섬과도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인사동에서 시를 읽고 나면 섬으로 돌아간다. 바닷바람에서 새로운 것을 듣고 싶어서 그런다. 섬의 봄은 바람으로 시작한다. 나도 봄바람이 되고 싶다. 방랑은 바람 따라가는 것이기에 시인은 풍객(風客)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람둥이다.
4. 섬
마라도에 와 있다. 마라도 잔디밭에서 몇몇 시인들과 함께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를 읽었다. 이것은 상당한 기세다.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마라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최북단 마안도까지 시를 읽으며 갈 기세였으나 그것을 해내지 못했다.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백령도까지는 갔다. 그러나 마안도는 아직도 멀다. 마라도는 나의 상징적인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여기서 바닷바람으로 고독을 부풀리고 파도소리로 가슴을 채운다. 사진작가 김영갑이도 제주도에 오자 마라도에 초점을 맞췄다. 그와 나는 사진과 시를 한 집에 묶는 인연을 마라도에서 맺었다. 그 후 그는 중산간으로 들어와 오름에 취할 때 나는 다랑쉬오름을 오르내리며 시를 썼다. 그 인연으로 매년 5월에 아끈다랑쉬오름에서 4.3의 아픔을 달래는 시를 읽는다. 이때에도 바람은 나를 구름에 얹어놓고 멀리 마라도로 향한다. 그러나 마라도는 관광객들의 발에 시달려 많이 황폐해졌다. 지금도 ‘마라도야 마라도야’ 불러본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 금잔화가 들어와 돌담 밑에서 바람을 피해 움츠리고 있었고 수평선은 유배된 금잔화를 동정하느라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얼마 안 있어 섬 한복판에 십자가가 서고 목탁소리가 떠돌더니 난데없는 자장면 배달이다. 그것도 문명이라고 잔디밭에 빈 그릇이 널브러지고 한나절 오토바이 소리가 판을 치더니 마라도가 간데없다.
마라도야
마라도야
어디 있니
혹시 관광객을 따라 육지로 간 거 아니냐
간밤엔 등대원이 초대 받아
넥타이를 찾느라 북새더니
대통령 취임식에 갔다고
거긴 왜 가나
보고 싶으면 올 일이지
등댓불 꺼지면 어쩌려고
거길 왜 가나
마라도야
마라도야
너
어디 있니’
―시집 ‘인사동’에서
5. 건강
시를 쓰는데 뭐 그리 힘이 든다고 건강 건강하느냐 하겠지만 육체가 정신에 앞서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앓아누우니 연필조차 들기 싫더라. 그거야 당연하지 하고 웃는다. 웃지 마라 하찮은 것이 아니니. 시 쓸 시간을 병에게 넘겨주기 싫어서 그런다. 내가 너무 시에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시인은 시에 욕심을 부려야지 어디에 눈 돌리려는 건가. 더욱이 나이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 아깝더라. 그러나 밥은 먹어야 하고 잠은 자야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니 시간을 아끼려면 건강이 제일이다. 이런 발상이다. 누군 몰라서 그러나 하고 웃는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이것이 건강에 대한 나의 욕심이다. 그 욕심이 없으면 나는 생(生)을 포기해야 한다. 걷기는 혼자 할 수 있어서 좋다. 혼자 있을수록 내 시간이 많아진다. 오늘 걷고 내일 쉬는 것은 안 된다. 걷는 것은 호흡이나 다름없으니 오늘 걷고 내일 걷지 않으면 내일 호흡은 끊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걷는다. 걷기가 끝나는 날 나는 시를 놔야 하고 그날 호흡도 끊어지는 날이다. 이렇게 내가 나를 건강 쪽으로 몰고 간다. 비오면 우산을 들고 걷자. 이렇게 다짐한다. 요즘 신념은 오로지 걷겠다는 신념이다. 나는 시작(詩作)의 한계를 걷기가 가능한 날까지로 잡았다. 이쯤 되면 더럽게 죽기 싫어하네 하고 비웃겠지. 그러나 살아있는 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맛있는 음식도 아름다운 사랑도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란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을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을 어디까지로 하느냐. 나는 내가 시를 쓸 수 있을 때까지로 잡았다. 그것을 죽음에 이르러서 알게 되어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의 존재를 실감하며 그 존재를 고마워하자. 이렇게 다그치며 죽음으로 다가간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인생에 있어 가장 절실한 과제다. 건강은 누구와 싸워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해를 끼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착실한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인생 70이라 한다면 같은 70이라도 앓아가며 산 70년과 건강하게 산 70년의 질과 내용은 엄청난 차이이다.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한다. 나는 늘 이런 훈계를 받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 걷는다. 이 습관이 걷기를 좋아하게 만들었고 그 걸음이 시와 가까이 하게 했다. 나의 시는 내가 걸어가는 길가에 핀 민들레꽃이다. 건강할 때 피는 꽃, 시는 그런 꽃이다.
• 이생진 시인 ---------------------------------------------------------------
충남 서산 출생.『현대문학』을 통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등 30여권. 1996년
『먼 섬에 가고 싶다(1995)』로 윤동주 문학상, 2002년 『혼자 사는 어머니』 (2001)로 상화(尙火)시인상을 수상했음.
2001년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로 제주도 명예도민증 받음. 이메일 : sj29033@hanmail.net
출처- 우리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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