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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학] 가을호'시창작방법론' 에서
*필름이 감길 때
허혜정
(시인. 한국사이버대 교수)
진열장에 전시된 저 최첨단 카메라가 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엄청나게 화
려한 풍경이나 싱그러운 웃음, 혹은 어여쁜 소녀들일 것이다. 대학 경영관에
서 청춘시트콤을 찍던 어여쁜 배우가 잊혀지지 않는다. 큐 사인이 떨어질 때
마다 그녀는 기계적인 웃음으로 정지해 있었다. 끝없이 렌즈를 갈아 끼우며
카메라가 접근하는데도, 그 유명한 CF스타는 변함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
다. 어느 날 여성지에 소개된 그녀의 안락한 집을 본 적이 있다. 인테리어가
완벽했지만, 새로운 가구로만 가득한 그 집은 얼마나 이상한 곳이던가.
하지만 무참히 어질러진 하오, 흐릿한 어둠 속에 미련하게 틀어박혀 있을
때, 변덕스런 카메라는 쉽사리 가버린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래서 내 구식
카메라를 버리지 못 했는지 모른다. 호주머니에 꼭 맞는 그 낡은 캐논카메라
를 들고 나는 이곳 저곳을 흘러 다녔다. 갑작스레 카메라를 챙겨들고 훌쩍 떠
나 버린 하오, 볕에 그을린 까칠한 아이가 캐러멜을 까먹으며, 바람 부는 골
목에서 허밍을 즐기는 걸 본 적이 있다. 카메라를 들어올리자 아이는 환한
주먹으로 이마를 가리며 거북해했다. 곧바로 주먹을 쥐고 부드러운 바람 속
으로 한달음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늘 그런 아이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갈대처럼 부서진 머리칼을 하고
녹슨 철로를 따라 마른 풀냄새를 헤치고, 내키는 대로 쏘다니고 싶었다. 아
픈 신발을 벗어놓고 노변에 앉아 바라보는 하얀 억새벌판, 눈을 쏘는 흰 구
름의 빛, 모든 슬픔이 기꺼이 배경으로 물러가는 시간, 그렇게 서서히 인화
지에 떠올랐던 광경들은 포토샵으로도 변조할 수 없는 스냅사진으로만 남
아 있다. 언젠가 방콕 변두리의 낡은 목조 사원 퇴색한 만다라를 기어오르는
지네를 잡은 적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셔터를 눌러대는 동안 필사적으로 초
점에서 벗어나려 기어오르는 벌레, 초점이 흐른 채 끝내 화면 밖으로 미끄러
지던 벌레, 거북한 관심을 즐기지는 않았을 자그만 생물처럼, 나는 삶의 장
소를 무심히 지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저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발밑에 크
레용을 늘어놓는 아이 곁에 마악 무너질 듯한 책을 바닥에 쌓아두고, 에어컨
을 끄고 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말이다. 간혹 아이의 웃음을 담기 위해 카
메라를 들고 공들여 각도를 잡기도 했다. 왜 그런 것은 세상의 일보다 중요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스틸 카메라에 고정된 억지 웃음을 믿는다. 엄청난 화소
를 신봉하듯 우리가 걸치고 있는 정장을 믿는다. 정중한 대화 속에 감추어진
침묵을 믿는다. 그런 삶의 풍경은 대부분 내게 어떤 행복도 주지 못했다. 사
람들이 가보라기에 가보아야 했던 여행지처럼, 그저 기록해 놓기 위해 남겨
둔 단체사진처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나는 잘 따라왔었
다. 때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필름처럼 참혹한 공허를 느끼면서 말이
다. 적어도 그런 게 생이었다면 사진보다는 더 많은 것을 의미해야했으리
라. 늘 나의 언어들은 그 문제에 고통스럽게 바쳐졌다. 잘 보이는 것은 안전
한 삶을 보증해 준다. 나는 늘 정확한 삶의 장소에 묶여 있었지만, 그것보다
아무 것도 아닌 장소들은 없었다. 내 경력 속에 남겨진 작은 승리를 나는 향
유하지 못했다. 죽도록 읽어야만 했던 책은 삶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남
들에게 적당하게 보였을지 모르는 사랑은 우울했고 황폐했고 가소로웠다.
다만 '혼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음을 기억한다. 그 혼자가 무한히 길었
음을 또한 기억한다. 시간 내게 가르쳐 준 것이라면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다가가는 법, 무심히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던 외로운 흔적을 무심히 둘러본
다. 내 삶의 나무가 사라져간 자리에 차곡차곡 들어찬 메마른 책장,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말라붙은 커피컵들, 읽혀도 안 읽혀도 상관없던 흐린 잉
크 글씨들, 쓸쓸히 박제되어 있다 붉은 비닐끈에묶여 사라지던 노트들, 무
엇을 위한 삶, 누구를 위한 생은 내게 없었다. 한 줄의 부고란도 나는 원하지
않는다. 모든 눈빛이 사라져간 순간에도 창가의 바람에 펄럭이며 낡아가는
펄럭거리면 ㄴ트라면 족하다. 아니라면 또 어떠랴. 얇은 말들을 말아놓은 작
은 필름통처럼 내 가슴은 언젠가 고요히 흙 속에 묻힐 것이다. 하늘로 스며
드는 낙엽들의 영혼, 노래에 가까워진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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