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희망없이
황정산
오래 전에 윤영수 작가가 “사랑하라 희망 없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묶어 낸 적이 있다. 소설들의 내용도 별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제목이다. 정말 그럴듯한 경구이다. 희망 없이 사랑하는 것은 가장 정직하게 인간적으로 사는 방식일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문학하는 일이 바로 희망 없이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수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시로 쓰지 않겠다고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세계상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현실을 넘어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를 일반화시키는 기존의 서정시를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렇게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희망이다. 물론 희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것이기에 그것은 항상 그 안에 억압을 간직하고 있다. 좋은 것이기에 사람을 끌어모으고 다스리는 수단이 된다. 어떤 종교 어떤 정치권력도 다 희망을 말한다. 희망을 통해 모든 권력들은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때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한 것도 희망 때문이고 그 유태인들이 다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모두 따지고 보면 희망 때문이다. 희망은 인간의 욕망을 집단화시키고 그 집단화된 욕망에 파괴적인 에너지를 부여한다.
시는 이런 이데올로기화된 희망을 거부하고 희망으로 감추어진 진실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로 치장된 희망 또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어루만지는 가짜의 언어들이 가지는 상투성을 벗어버리고 힘들지만 진실을 대면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보편성이 사라진 시대에 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다음의 여태천의 시는 과감하게 희망 버리기를 하고 있다.
눈이 크고 팔이 길쭉한
십대의 아이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말을 한다.
잘 안 돼?
알코올에 취한 아이들
그들과 함께 도시의 어둠은 지나간다.
지하철의 운명은 2분 혹은 3분이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자주 덜컹거렸다.
지하철이 잠시 떠있는 순간
한 아이는 달콤한 연애를 꿈꾸리라.
백년 후에 살아있지 않을
눈이 크고 팔이 길쭉한 아이들
잘 안 돼?
으응.
하나의 계절이 죽어가고 있었다.
- 여태천, 「메이드인 서울」(『애지』, 2008년 겨울호)
건조한 언어로 현실을 간명하게 그려 보여주고 있다. 김수영이 말했던 대로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시인의 눈에 서울은 황량한 지하철 풍경과 술취한 아이들의 모습으로만 보인다. 그들에게 꿈이라고는 “지하철이 잠시 떠있는 순간”이라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은 “잘 안 돼?”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욕망의 좌절만을 경험할 뿐이다. 결국 미래란 “하나의 계절이 죽어가고 있”듯 이들 역시 사라져 간다는 확실한 사실만을 말해줄 뿐이다. 희망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희망이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잘 안 돼?”라고 묻는 말에서처럼 현실은 끊임없는 욕망 좌절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많은 언어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언어들은 모두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가능성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많은 광고 문구들이 그렇고 정치가들의 말이 그렇고 의미없이 내뱉는 인사말들이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바로 이런 모든 말들과 그 말들에 들어 있는 희망을 제거하고 있다. 그래서 눈에 선명히 드러나는 황량한 현실을 희망 없는 건조한 언어로 보여준다.
다음 시에서도 세상은 황량하다.
가시 많은 줄기에
선인장꽃 한 송이 핀다
사막에 뿌리 내려
어둠 속 실뿌리 많이도 더듬거렸다
퍼붓는 불볕 아래 가시 잎새 오그리고 숨 죽였다
휘몰이 모래 칼날에 살점 하나하나 찢겨나간 뒤
앙상한 뼈만 남아
손잡고 걸어온 마른 발자국
누군들 가슴 속에 사랑 하나 키우지 않으랴
물관부 타고 꼬물거리는
불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어둠 속 긴 날들
핏줄 밴 발가락만 길어졌다
오늘도 마른 모래땅,
너를 위해
가시 많은 오두막 한 채 짓는다
- 이혜선, 「가시 오두막」(『우리시』, 2008년 12월호)
세상은 온통 “마른 모래땅”이다. 삶의 흔적마저도 “마른 발자국”으로 존재하고 그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은 선인장처럼 온통 가시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한 송이의 꽃이다. 시인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이 가시처럼 살기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만 또 어찌 보면 선인장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시 많은 오두막을 한 채 짓”듯 사랑을 만들어 가기 위해 팍팍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복하지만은 않는 사랑을 우리가 왜 하는 것인지 그 아이러니를 이 시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다음 시는 바로 이 사랑을 생각하게 해 준다.
반찬을 집어주다 뜨거운 뚝배기 운두에 닿은 자국, 그대 살 속에 피어 회유할 수 없던 그 잎을 첫눈이라 불렀다
한 여자의 눈에 지운 한 사내의 눈물이 물들던 잎마다 바람도 무색하여
무슨 할 말 있는 듯 입술 가까이 떠 있다 가도 먼 길 걸어온 탓인 줄 알아 허공에 잡힌 물집인 줄 알아
가을에 혈율을 두고 와 눈 붉어진 열매들 사이 설레며 오가는 살점을, 나는 여적 첫눈이라 부른다
- 권덕하, 「첫눈」(『시로 여는 세상』, 2008 겨울호)
이 시에 따르면 사랑은 “첫눈”이고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만날 때 새겨지는 강렬한 흔적이다. 그것은 “뜨거운 뚝배기 운두에” 덴 것처럼 순간의 사고이기는 하지만 존재들의 빛나는 마주침이고 첫눈처럼 항상 새롭고 또한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 시는 이렇게 한 존재와 한 존재가 만나는 일, 즉 사랑의 의미를 첫눈이라는 이미지로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음 시도 역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준다.
나 맨발이었네 발바닥은 굳은살
피가 날 때도 있었다네
밤마다 꿈에 만나는 춤추는 시신들
나처럼 하나같이 맨발이었네
걷고 또 걷다 죽을 것 같은 날
나뭇가지를 꺾어 물집을 터뜨리면
시원하다 아 이렇게 살아 있구나
미약媚藥의 맛을 내 알지만
목 탈 때 마시는 물맛보다 좋지는 않더라
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몸 어딘가에는 흉터가 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흉터 부끄러워했고
어떤 사람은 그 흉터 자랑스러워했다
마을을 떠나야 마을을 만날 수 있고
사람을 떠나야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오늘도 길에서 나는
문 밖이 집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
- 이승하, 「행려」(『우리시』, 2008년 12월호)
이 시에서 사랑은 “문 밖이 집인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세상을 안주하지 못하는 ‘행려’에서만 가능하다. 문안에 산다는 것은 자신의 영토를 갖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영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서로 갈등하고 때로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 영토를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맨발로 세상을 견디어야 하고 자신의 몸에 흉터를 만들어내야 하는 고통의 길이다.
그런데 사랑은 나를 버리고 다른 것을 지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나와 네가 하나가 되어 더 큰 우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희망이다. 그러나 다음 시는 이러한 사랑의 희망을 가차 없이 무너뜨린다.
나에게 씨를 뿌려서 씨의 얼굴을 펼친다 너에게 못을 박아서 못의 얼굴을 매단다 우리는 깜빡 식목을 끝낸 사람처럼 최신의 예의로 물을 뿌렸던가 그러고 나면 누가 누구를 간절해 한다 누가 누구를 간절히 소모한다 우리는 유월의 야채밭처럼 만사가 병렬적이다 병렬적으로 사랑하고 병렬적으로 이별한다 뭉턱 한 소쿠리의 야채가 솎아지고 단 하루 만에 부쩍 한 움큼의 야채가 불어나는 야채밭의 기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누가 누구를 상처냈나 누가 누루를 배반했나 그렇거나 말거나 계속 간절함이 작용한다면 아무 일이 있어도 없었던 듯이 흘러간다 사라진 너를 위하여 사라질 너를 준비하는 병렬적인 나 사라진 나를 위하여 사라진 나를 대신하는 병렬적인 나 우리는 고맙게도 유월의 야채밭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다음 뒤에 다음이 온다 씨를 거두어서 씨의 얼굴을 치우거나 못을 뽑아서 못의 얼굴을 거두거나
- 조말선, 「등록」(『시에』, 2008년 겨울호)
이 시에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간절히 소모”하는 일이다. 소모하는 일이기에 사랑의 대상은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병렬적으로 사랑하고 병렬적으로 이별한다” 나나 너나 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병렬적인 존재일 뿐이다. 어떤 절대적인 사랑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은 없는 것일까? 그 반대이다.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필요로 한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사랑을 갈구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아이러니이다.
다음의 두 작품은 이러한 사랑의 의미가 예술이나 문학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감정 미술관에는
내가 그린 그림이 한 점도 없다.
빈 벽이다.
그것이 당신의 벽이라는 사실
사랑의 그림이 결혼 후에 한번 걸렸던가?
사랑 대신 적당히 당신을 속이기 위해
걸어놓은 달
아직까지 벽에 떠 있다니.
그 달빛으로 번역한 눈물의 삶
더불어 길을 잃지 않았노라고
각인된 혀끝에 묻어나는 혼야의 수결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읽혀졌을까?
내 젊음의 거품은 다 꺼졌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젊은 시절의 내 얼굴과 이름
암송하고 있다니
숭고함의 떨림이다.
늦었지만 더듬더듬
당신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달빛에 쇠한
늙고 초라한 인상
당신이 허락한다면
당신의 벽에 걸어도 되겠소?
- 황도제,「감정미술관」(『우리시』, 2008년 12월호)
나 투투섬에 안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투투섬 망가로브 숲에 일렁이는 바람
거기서 후투티 어린 새의 울음소릴 못 들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녀애들은 해변에서 하이힐을 벗어던지겠죠
물살 거센 파도에 뛰어들어 미장원에서 만진 머리를
풀어 제킨다죠
수평선을 끌어당긴 비키니 수영복 끈은
자꾸만 풀어져
슴새들의 공짜 장난감이 된다는
투투섬에
나 그 섬으로 가는 티켓을 반환해버린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쓰리 당한 핸드백처럼 볼품없이 행인들 틈에 섞이다가
보도블록에 넘어진 사람 부축한 일 없지만
옛날 종로서적 해묵은 책먼지 생각이 떠올라서
풍선껌이나 사서 씹죠
―나 투투섬에 안 간 것 정말 잘한 결정이죠
발자국 수북이 쌓인 안국역 지나 박인환을 꼭 만날
예정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마리서사 헌책방이나 하나 차리고
멀뚱멀뚱 토요일의 난간에 기대어
낡디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주기도 하며
후투티 둥지 안에 투숙할까
그런 계획이죠
- 김영찬, 「투투섬에 안 간 이유」(『현대시학』, 2008년 12월호)
먼저 인용한 황도제 시인의 시에서 “내가 그린 그림”은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존재하지 않아왔다. 상대를 속이기 위한 가짜의 장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미술관’이다. 절실한 사랑의 감정은 없었고 그것을 가장한 장식물의 전시에 그쳐왔다는 시인 스스로의 자탄이 드러난 표현이다. 시인은 늙고 초라해진 이제야 비로소 ‘당신’에게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자신을 꾸미고 자신의 희망으로 상대를 속이는 “젊음의 거품”을 걷어버리고 “늙고 초라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행위는 바로 시를 쓰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아름답고 희망찬 언어로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늙고 병든 고통스러운 언어로 세상을 진실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고 시를 쓰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영찬의 시는 이러한 시 쓰기의 의미를 좀 더 경쾌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투투섬에 안 간 것”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욕망은 모든 희망의 근원이다. 세상이 힘들수록 이러한 욕망은 강해지고 희망의 필요는 더욱 절실해진다.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투투섬’은 바로 이러한 희망의 가장 세속적인 표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산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꿈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그것의 헛됨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신 시인은 낡은 헌책방을 택한다. 그것은 꼬질한 문학의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을 풀어주는” 행위로서 상투성에 갇힌 일상을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길이기도 하고, “후투티의 둥지 안에 투숙”하는 것과 같이 사랑의 실현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희망은 없다. 있더라도 그것은 정말 희망으로만 존재한다. 그래도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여, 사랑하라 희망 없이.
-우리시 2월호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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