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새해, 새 뜻, 새 힘
김명원(시인,대전대 겸임교수)
새해입니다. ‘새’라는 단어에서는 청신한 소나무 향내가 풍깁니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받아들던 새 교과서의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맡아집니다. 물푸레 빛으로 번지는 아침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정동진의 크고 둥근 첫 햇살이 느껴집니다. 이제 막 작은 우주 알에서 껍질을 깨고 부화하려는 아기 새의 젖은 깃털이 만져집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2009년 첫 월평을 씁니다. 지난 해 경제 침체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벗고 올해는 따스하고 가벼운 일들과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직한 사람들을 시에서 만나게 되기를 고대합니다. 작년도에는 시가 고통의 곁에서 시대의 부조리와 암울함을 웅변하는 증거물이 되었다면, 새해 첫 달에는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올해에는 웃음 가득한 일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심정 가득한 연유입니다.
문학이 삶의 총체적 진실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우울한 예단은 게오르그 루카치( G. Lukacs) 이래 연원이 오랜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위축되고 의기소침한 문학적 전망의 한쪽 끝머리를 밟고 서 있습니다. 루카치가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의식의 속성 및 능력과 관련하여, 이들은 더 이상 인격의 유기적 통일체로 결합되지 못하며, 마치 외부 세계의 온갖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소유할 수도 있고 내다 팔 수도 있는 사물로 전환되고 만다고 설명한 것은, 오늘날의 문학이 보여주는 정신적 퇴행 현상을 예고한 셈이 됩니다. 루시앙 골드만(L. Goldmann)의 경우에는 아예 몇몇 특수한 경우 이외에 부르주아 의식을 드러내는 위대한 문학은 불가능하다고까지 단정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세기말의 굴곡을 넘어 2009년까지 넘어 온 새로운 시간을 바라보며, 문학이 이처럼 가치 정립의 난관이 임립한 시대상을 헤치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은 희망과 같은 정론적 방향 설정과 정체성의 탐색은 소비 시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검토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는 오늘날이 더 이상의 부차적인 설명 없이도 명명백백한 소비 시대이며, 전 시대의 가치 개념을 순탄하게 수용하거나 계승할 수 없는 방향성의 상실이 퇴영적이며 즉자적인 소비 문화의 성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그 현상학적 실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문학의 지순한 가치를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전망이 수납될 공간이 없습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문학의 위기’라는 언표를 부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비 시대라고 하는 용어의 내부에 들어 있는 부정적 관념이 문학적 방향성의 탐색자들이 요구하는바 발전적 조정력을 암중모색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동시대의 가장 전방 지점에서 변화하는 문화 패턴이 순문학의 질서를 훼파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하더라고 문학에는 수천 년의 세월을 두고 축조해 온 본령이 있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따스한 애정과 신뢰, 문자언어를 통한 정제된 표현 방식, 우리 영혼의 심연을 두드리는 공감과 감동 등속의 순기능적 요소 모두를 허물고 현존하는 동시대적 문학의 특성만을 내세울 사람은 없습니다.
양자의 조합, 그 화해로운 악수는 당대의 문학이 면전에서 맞이하고 있는 아포리아입니다.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아포리아인지도 모르지만, 난제란 그것을 풀고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시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 시절,
비가 오고
꽃이 팔리지 않는 날
명동 거리의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양동이 안에 지친 꽃다발을
들여다보면
〉
시든 꽃 속에 낀
어린 꽃봉오리들
모가지 꼿꼿이 세워 피어나고 있는
중
〉
꺾이고 묶이고
통 속에 갇히었어도
빗물 먹고 공기 먹고 피어나고 있는
중
- 노명순,「生은 지고 피어나는데」전문 (『애지』2008년 겨울호)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또 하루 ‘살아 있다’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한다. 사무치도록, 각별하고 아름다운 봄날이어서…
남들은 건강해지려고 걷는다는 산길, 김영은(34)은 ‘살려고’ 매일 두 차례씩 걷는다. 찔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영은씨, 말없이 시든 꽃잎 한 잎 한 잎 떼어내기 시작한다. 꽃잎들, 그녀 허물어진 가슴에 눈물처럼 뚝, 뚝, 떨어진다.
하얀 꽃, 순박한,
별처럼 슬픈 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낙엽이며 눈을 한결같이 쓸어내는 아버지가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면 일어나 야채스프를 끓여주는 남편 전붕식(36)이 있다.
뭣보다도, 찔레꽃 봄날, 목숨 걸고 낳은 딸 시영이(1)가 있다.
- 엄원태,「내 생의 봄날」전문 (『애지』2008년 겨울호)
우리의 삶이 소비를 충족시키려는 욕망으로 점철되어 갈 때 이를 이 악물고 제어시키려는 강압성은 이미 문학이 아닙니다. 생명을 찬탄하는 방식을 통해 소비 쾌락을 향해 돌파하던 무모한 시대를 성찰하게끔 하는 데에 문학이 존재합니다. 자본의 속성을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속악한 자본의 향락에만 물들어 피폐해져 가는 몸의 편리성을 추구하다 보면, 영혼이 감당해야 하는 병폐는 자살 급증, 우울증 환자 속출 등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최근 발간되는 일간지들이 주요한 지면에 시를 소개하는 공간을 배치하는 것도 강퍅한 시대를 전언하는 뉴스에 맞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강간과 도적이 난무하고 사기와 온갖 행태의 추악한 사회적 실상을 담은 일간지 지면에서 풍기는 악취를 시가 돌보고 있습니다. 한해 간신히 추수한 곡식을 형이 밤새 아우에게 가져다 놓으면, 아우는 자신의 경작물을 식구가 많은 형에게 다시 가져다 놓는 미담이 그리운 지면에 시는 위로와 위무의 손길을 풀어놓습니다. 자신에게만 기울이는 소비 추구가 아니라 서로 나누는 배려의 미학, 나보다는 형제와 이웃을 먼저 살피는 헌신의 미학, 여기에 사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고, 생명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현전하는 것입니다.
인용하고 있는 시 두 편은 이러한 생명의 힘을 노래합니다. 노명순은「生은 지고 피어나는데」에서 도심 한가운데 꽃집쯤 될까요? 양동이에 들어있는 꽃들이 척박한 외부 환경과는 무관하게 활짝 피어나고 있는 생명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엄원태는「내 생의 봄날」을 통해 환자를 둔 가족이 어떠한 결속력으로 죽음과 맞서며 생을 끌고 가는지 참으로 숙연하게 진술합니다. 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노명순에게 “그 시절”은 선연합니다. 명징한 이미지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비가 오고/ 꽃이 팔리지 않는 날/ 명동 거리의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양동이 안에 지친 꽃다발”을 들여다 본, 놀라운 날로 떠오르는 까닭입니다. 그 날은 양동이 속 “시든 꽃 속에 낀/ 어린 꽃봉오리들”을 본 날인데, ‘어린 꽃봉오리들’은 “모가지 꼿꼿이 세워 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비좁은 양동이에 처박혀 “꺾이고 묶이고/ 통 속에 갇히었어도/ 빗물 먹고 공기 먹고 피어나고 있는/ 중”이랍니다. 제가 그 시절의 명동 꽃집 양동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 싶습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제 생명을 감연히 피워내는 어린 꽃봉오리들을 바라보면서 새해 아침 푸른 목숨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노명순이 자연물에서 생명을 끄집어냈다면, 사람에게서도 얼마나 내장된 생명의 에너지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엄원태의 시가 있습니다. 엄원태는「내 생의 봄날」에서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또 하루 ‘살아 있다’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하는데, “사무치도록, 각별하고 아름다운 봄날이어서”라고 말합니다. 뒤이어 오는 2연에서 그 사유가 밝혀집니다. “남들은 건강해지려고 걷는다는 산길, 김영은(34)은 ‘살려고’ 매일 두 차례씩 걷는”답니다. 시의 주인공인 김영은 씨는 아마도 볼치병에 걸린 환자인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찔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영은씨, 말없이 시든 꽃잎 한 잎 한 잎 떼어내기 시작”하는데, “꽃잎들, 그녀 허물어진 가슴에 눈물처럼 뚝, 뚝, 떨어진다”는 묘사 때문입니다. 시들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그녀의 연민이 부각되는 까닭은 그녀가 아마도 죽음 앞에 긴급히 노출되었다는 것이 아닐까요? 감동은 다음입니다. 죽음을 앞둔 아내를 지키려는 “낙엽이며 눈을 한결같이 쓸어내는 아버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면 일어나 야채스프를 끓여주는 남편 전붕식(36)”과 “뭣보다도, 찔레꽃 봄날, 목숨 걸고 낳은 딸 시영이(1)”가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왜 엄원태가 시 제목을「내 생의 봄날」이라고 지었는지 알만합니다. 그들이 낳는 눈물겹도록 치열한 정서가 시인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도, 시인에게도, 봄날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딛고 일어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가족이 있습니다. 의지하고 받쳐주며 지켜주는 힘의 원동력, ‘가족’입니다.
그들 사이엔
은유隱喩의 자리가 없다.
나뭇가지 위에 흔들리는 작은 새의
떨리는 두려움이 있고
가을마당에 말리는 붉은 고추처럼
눈에 선한 그리움이 있다.
간절한 눈망울들이
집 안의 어둠을 밝힌다.
탯줄은 오래 전에 끊어졌지만
엄마의 목숨 속을
끝없이 돌아가고 있다.
엄마는 세파世波에 떠내려가면서
젖을 먹이고 있다.
고통에 담금질한 사랑만이
가족을 지켜냄을 알고 있다.
슬픔의 힘을 또한 알고 있다.
아빠가 어두운 부엌에 내려놓은
식량食糧은 축제의 풍악으로 울린다.
자나깨나 손에 손을 맞잡고 가족이 추는 원무圓舞는
세상을 떠받히는 고리가 된다.
그들이 나날이 먹고 마시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절실한 기도祈禱이며
세상의 축제에 대한 봉헌奉獻이다.
- 고창수,「가족家族」전문 (『우리시』2008년 12월호)
가족의 존재 이유를 이보다 잘 묘사한 시가 있을까요? 가족은 필연적인 운명으로 결속된 가장 최소 단위의 사회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눈을 붉히면서 강변하는 바 ‘피’를 나눈 집단이며, 재산을 아낌없이 공유하는 공동체이며,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며 함께 생활을 영위하는 작은 국가입니다. 하기에 고창수는 “그들 사이엔/ 은유隱喩의 자리가 없다”고 규명합니다. 이는 “고통에 담금질한 사랑만이/ 가족을 지켜냄을 알고 있”기에, “아빠가 어두운 부엌에 내려놓은/ 식량食糧은 축제의 풍악으로 울”리고, “엄마는 세파世波에 떠내려가면서/ 젖을 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서로 가꾸는 희생이 바탕이 된, 상생의 아름다움이 발현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자나깨나 손에 손을 맞잡고 가족이 추는 원무圓舞는/ 세상을 떠받히는 고리”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가 끝났다면 가족예찬론 정도가 되었을 터, 고창수는 시의 영역을 무한대로 끌고 갑니다. 즉 “그들이 나날이 먹고 마시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절실한 기도祈禱이며/ 세상의 축제에 대한 봉헌奉獻”이라는 시의 결미로 가족이 기여하는 헌신의 의미를 신에게까지 미치게 하면서 세상 전역으로 파급하도록 도모합니다. 우리는 가족이 곁에 있는 한, 신과 소통하며, 세상에게 버려진 외로운 존재자가 아닌 것입니다.
고창수가 가족을 통해 생명의 빛나는 연원을 밝히고 있다면, 임동윤은 이웃의 삶―성실하게 살아가는 기층민의 일상을 찬찬히 드러내면서 생의 눈부심을 밝힙니다.
K은행 뒷골목, 나지막이 붙어있는
한 평 반 컨테이너 구둣방
노인은 뜨는 해를 배경으로 앉아있다
삐걱거리는 숯 검댕이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세상 헤매다 돌아온 가장의 낮은 굽을 수선한다
뒤축 터진 자리에 바늘을 꽂고
금박의 햇살까지 자르르 부으면
닳아 없어진 길들이 꿈틀꿈틀 살아난다
투박한 손가락에 세월은 못 박혔어도
노인은, 너덜거리는 것 하나 없이
단단하게 박아준다, 나른한 오후가 되면
자꾸만 아래로 축축 처지는 어깨
흥겨운 트롯도 멜로디에 기대는 고단함이
층층이 많은 길을 걸어온 사연들이
선반 위 구두 진열대에서
손길을 기다리며 오랜 여독을 풀고 있다
한껏 햇살이 기울어진 구둣방
햇빛 속을 날아오르다 들킨 먼지들이
풀풀 유리문에 닿을 때면
벌써 창밖은 가을이 깊어있다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낮은 소리를 내며
바람의 길을 따라 길을 떠나고 있다
어제와 다른 하루가 반으로 접히는 시각
노인의 고단한 하루는, 오늘도
다른 구두와 함께
가지런히 진열대에 반질반질 내걸린다
- 임동윤,「늦가을」전문 (『우리시』2008년 12월호)
또 하나의 가족이 ‘이웃’입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생활 속에서 풍겨내는 친밀감을 극도로 탐지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온 세월에서 인지된 경험적 진실 때문입니다. 바르게 살아가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열심히 노력하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생을 추체험하며 나의 하루를 반성합니다. 나보다 더 안타깝게 산 이웃들을 보고 느끼며 안온했던 나의 하루를 송구해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남긴 아름다운 노동과 봉사를 헤아리며 나의 오늘을 감사해 합니다. 임동윤의 하루에는 “K은행 뒷골목, 나지막이 붙어있는/ 한 평 반 컨테이너 구둣방”의 ‘노인’이 그러한 ‘이웃’으로 존재합니다. 그 이웃은 “삐걱거리는 숯 검댕이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세상 헤매다 돌아온 가장의 낮은 굽을 수선”하는 노인입니다. 여기에서 시어의 불을 켜는 지점은 “세상 헤매다 돌아온 가장의 낮은 굽”을 “수선”한다는 것입니다. 가계 경제의 중심이 되어 헐떡이며 헤매 다녔을 가장의, 그것도 미천한 하위에 위치해 있는, 휘고 닳고 고장 난, 더럽혀진 굽을 매만지는 노인의 손길은 얼마나 숭고하고 애잔한 것입니까? 누구도 돌보지 않으려 하는 상처를 돌보는 노인의 심정이 그 다음 행부터 눈부신 형상으로 이어집니다. “뒤축 터진 자리에 바늘을 꽂고/ 금박의 햇살까지 자르르 부으면/ 닳아 없어진 길들이 꿈틀꿈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노인은 “투박한 손가락에 세월은 못 박혔어도” “너덜거리는 것 하나 없이/ 단단하게 박아”줍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임동윤의 따뜻한 시선이 서정의 힘을 흠뻑 발산합니다. 그의 시선은 삶의 현장을 치밀하게 바라보고 엮어내는 포착의 긴밀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구둣방 노인이 낡은 구두를 수선해 가는 능숙한 솜씨는 시인이 서정적 시 형식을 풀어내는 솜씨와 꼭 닮아 있습니다. 게다가 노인의 웅숭깊은 모습과 이를 시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시인을 묶는 풍경에 카메라 앵글은 가 있습니다. 곧, 구두 수선점의 “창밖은 가을이 깊어있”고, “울긋불긋 나뭇잎들이 낮은 소리를 내며/ 바람의 길을 따라 길을 떠나고 있다”는 시적 배경입니다. 시를 더욱 시답게 반죽해 간 시인의 노고가 수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작고 낮은 처소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시속에서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불만과 분노로 마음이 사나운 날 싱싱한 목소리들이 우렁찬 재래시장에 들르는 것처럼, 그곳에서 위안을 얻는 것처럼, 우리의 건조하고 어긋난 시간이 이웃들의 물기 많은 모습에서 수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해칠 자 이 세상에 없다
나를 해칠려는 자 있으면
그분의 주먹이 가만히 안 있는다”
칠순노인의 말투가
꼭 일곱 살 아이만 같다
“예쁜 입술 보면 입맞추고 싶은 것
젊은이들의 복일세
고운 눈을 보면 눈 맞추고 싶은 것
늙은이들의 복일세”
이럴 땐 다시 칠순노인이다가
“아침 먹으러 산으로 간다
수저가 필요 없다. 온 몸이 수저니까.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없다
입으로 먹는 식사가 아니니까”
이럴 땐 다시 푸른 산 푸른 나무
푸른 이끼이다가
“오늘도 나 進化하고 있소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는 나도 모르오
눈 위에 코 있고 코 위에 입 달린 사람
될 수도 있소. 지구의 중력 벗어나면”
이럴 땐 은하수 헤엄쳐 가는
우주인의 나이가 되기도 한다
- 김동호,「나이」전문 (『리토피아』2008년 겨울호)
자유는 솜털의 모근 끝에 번지는
고요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모든 물질에는 솜털이 있다
물론 뒹구는 돌에도 풀잎에도
떠도는 구름에게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전달기관이 있다
두 뼘 남짓한 투명 수족관 안에서
남생이 두 마리가 쉬지 않고 자맥질을 한다
앞발과 머리로 관의 벽을 밀쳐내며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돌진 중이다
헛발질이 계속 될수록
그의 조각난 등껍질 위에 솟은 작은 깃털들이
파르르 떨며 쾌감을 느낀다
갸름한 햇살 속의 오후
자유가 멀지 않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오랜 기다림을 뒤로 하고
두 뼘 남짓 투명의 세계로 다가가
나의 손끝과 머리를 처박는다
정류장에서, 이렇게 오랜 기다림 뒤에
비로소 느끼는 아, 자유!
모든 털이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고요하고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
- 박철,「어느 정류장에서 일각(一覺)」전문 (『詩評』2008년 겨울호)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나이’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는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의 편리성에 의해 분절된 개념이지만 인간은 그 시작과 결미에 중대한 의미를 둔다고 했습니다. 2008년 12월 마지막날과 2009년 1월 첫날이 실상 무어 다르겠습니까? 확연하게 다른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특기할만한 새로운 이슈로 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새 다짐을 합니다. 자신의 나이가 한 살 더 늘어났다는 것에도 엄중한 재평가를 합니다. 이런 습성에 일격을 가하는 흥미로운 시가 김동호의「나이」입니다.
김동호는 인용시「나이」에서 ‘나이’의 불필요성을 피력합니다. 왜냐하면 직접 발화 형식의 어투와 내용을 근거로 하여 사람의 나이라는 것은 물리적 시간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의 1연에서 ““나를 해칠 자 이 세상에 없다/ 나를 해칠려는 자 있으면/ 그분의 주먹이 가만히 안 있는다””라는 “칠순노인의 말투가/ 꼭 일곱 살 아이만 같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다시 2연에서 ““예쁜 입술 보면 입맞추고 싶은 것/ 젊은이들의 복일세/ 고운 눈을 보면 눈 맞추고 싶은 것/ 늙은이들의 복일세”/ 이럴 땐 다시 칠순노인”이 된다는 나이의 넒나듬이 정당해 보입니다. 일곱 살에 자위할 법한 화술과 칠순 노인에게서 발견되는 혜안을 갖춘 화법 등이 존재자로 처한 세상에 대한 직관을 천착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의 3연과 4연 역시, 산에 가면 산(山)공기를 밥 대신 먹으므로 나이를 초탈하는 산(山)나이, “푸른 산 푸른 나무/ 푸른 이끼이다가”도 “지구의 중력 벗어나면” “은하수 헤엄쳐 가는/ 우주인의 나이가 되기도” 하는 나이의 유연성이 재미있어집니다. 나이는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하니 “오늘도 나 進化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시간의 형성으로 각인되는 물리적 나이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시원한 일격이 통쾌합니다. 통념 대신에 개성과 인식이 우선이라면 올해부터는 나이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자유로워집니다.
박철은 ‘자유’에 대한 인지를「어느 정류장에서 일각(一覺)」에서 조명해 보입니다.‘자유’라는 다소 생경하고 용량이 무지 큰 관념어가 어떠한 이미지들로 변용되는 가를 주목해 보겠습니다. 시의 언어가 일상적 의미의 지시 기능을 거부하고 상상력을 여과한 이미지의 언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한편의 시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시어들은 이미저리 표상에 관련됩니다. 브룩스(C. Brooks)는 이미지를 시에 있어서 경험된 지각의 재현이라 부릅니다. 이미지는 단순히 정신 속의 그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감각의 어떤 것에 호소해야 한다고 하여 시의 이미지를 감각 체험의 재현에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철은 ‘자유’를 이미지화하면서, “솜털의 모근 끝에 번지는/ 고요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두 뼘 남짓한 투명 수족관 안에서/ 남생이 두 마리가 쉬지 않고 자맥질”하며 “세계로 돌진 중”인데 “헛발질이 계속 될 수록/ 그의 조각난 등껍질 위에 솟은 작은 깃털들이/ 파르르 떨며 쾌감을 느낀다”고 시각적이며 촉각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자유’를 관전하던 화자는 “두 뼘 남짓 투명의 세계로 다가가”서 “손끝과 머리를 처박”고 남생이들과 동일화를 거칩니다. 그때 “비로소 느끼는 아, 자유!”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 느낌은 “모든 털이 세상을 향해 팔을 벌리고/ 고요하고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일입니다. ‘솜털’로 시작하여 ‘바람’까지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결코 어떤 목적을 진술하지 않고 그들 상호간을 지시함으로써 시를 표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며 주제의 의미를 뚜렷하게 합니다. 자유가 온 몸으로 감지되는 시입니다. 올해는 속도에 눌려 어쩌지 못하던 급박한 일상 속에서도 이러한 낭만적인 자유를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
못질을 한다.
허물어져 가는 나의
가슴,
올곧은 것들만을 골라서
못질을 하지만
상처로 되돌아오는 나의
일상日常,
못질을 한다.
출근길, 퇴근길 혹은
모진 세상 언저리
내 모든 것들을 모아서
못질을 하지만
매일같이 빗나가는 나의
하루.
- 강신용,「못질」전문 (『大田의詩人들』2008년 겨울호)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의 관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인가.
오랜만에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한다.
유리창을 닦으면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마음을 닦으면 세상 이치가 환
해지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듯이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고, 아무리 퇴색한 기억도 오래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얼굴빛이 밝아지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면
환하게 상처가 아물고, 돌멩이라도 쓰다듬으면 마음 열어 반짝반짝 대화
를 걸어오듯이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속에는
탁하고, 추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많이 쓸수록 빛이 나는 이 말들은
세상을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힘을 갖고 있다.
- 김선태,「말들의 후광」전문 (『현대시학』2008년 11월호)
예시한 두 편의 시들, 강신용의「못질」과 김선태의「말들의 후광」은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신용은「못질」에서 일상의 노동을 ‘못질’로 비유합니다. 화자가 영위하는 “출근길, 퇴근길 혹은/ 모진 세상 언저리”를 “내 모든 것들을 모아서/ 못질을 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노력을 경주한 결과가 어찌 성공으로만 끝맺음을 하겠습니까? 그러하니 “올곧은 것들만을 골라서/ 못질”을 해도 “상처로 되돌아오는 나의/ 일상”이며, “매일같이 빗나가는 나의/ 하루”일 것일 테지요. 그럼에도 화자는 오늘도 못질을 할 것입니다. ‘못’은 자신을 박아내는, 강인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상징물입니다. 화자 자신을 대상화하여 세상의 급소를 향해 박아야 하는 노동의 대가가 늘 기대 이하이며 상흔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내일 역시 ‘못질’을 하리라는 강한 신념이 이 시에서 읽혀집니다. 우리의 생도 이처럼 못질이 빗나가고 어설프다 하여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밀어 올리고 있는 생의 무게와 절망의 깊이를 시지프스처럼 당당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강신용의 진지한 어조와 달리 김선태는 ‘말’이 견지하는 힘을 통해 경쾌한 문체로 ‘나/세계/관계’를 노래합니다. 시인은 시의 1연에서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의 관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인가”라는 의구형 문장을 넌지시 제시하면서 독자들을 자신의 시속으로 유인합니다. 2연, “오랜만에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하게 되고, 이는 곧장 3연에서 “마음을 닦”는 행위로 연결되면서, “세상 이치가 환해지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4연에서는 이러한 이치가 세상 만물 모든 존재에서도 가능함을 확산시킵니다. 즉,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고, 아무리 퇴색한 기억도 오래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니 말입니다. 6연과 7연에서는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많이 쓸수록 빛이 나는 이 말들은/ 세상을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힘을 갖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순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적 구조는 김선태만의 독창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성립됩니다. 연을 거듭할수록 문체적 장치들의 효과가 축적되면서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될 때에 지각과 태도의 통일성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그의 문체적 특성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문체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러한 개성에 기초하여 시는 자율적인 건축물이 되며, 문체는 작품에 고유한 지각의 형식과 통일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체 분석에 의하여 작품에 내재하는 화자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문체란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어 장치들의 기능을 태도의 표현으로 해석하려면 작품을 하나의 동적 체계로 가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체 해명에서 문제되는 것은 특이한 표현이 아니라 언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실현하는 방법과 형식, 다시 말하면 작품을 바로 그 작품으로 형성해주는 언어 장치들의 기능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닦다’, ‘문지르다’,‘쓰다듬다’라는 단어가 파생하는 잠재된 기류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통해 문체의 아름다움과 힘을 증명해 보입니다.
2009년 새해입니다. 얼룩진 마음들을 잘 세탁하여 볕 좋은 양달에 널어놓고 싶습니다. 김선태의 시처럼 지난해부터 묵혀 왔던 서러움이 있었다면 잘 닦고, 낡아 흐릿해져 가는 심상이 있었다면 영혼의 온기 후 불어 잘 문지르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생명들이기에 가없는 연민과 사랑을 품어 서로 쓰다듬으면서 시간의 문턱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강신용의 ‘못질’ 마냥 매번 좌절하는 순간을 만난다 하더라도 루카치가 말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라는 태도가 문학예술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했으므로 우리는 늘 새로이 우뚝 일어설 것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다시 세울 수 있는 고통을 부여할 뿐이라고 했으니까요.
새해에는 박철이 찾아낸 자유를 찾아 영혼의 길 드높이시기를,
엄원태와 노명순이 발견했던 연둣빛 생명의 빛을 마음껏 쏘이시기를,
고창수가 전언한 가족애를 더욱 느끼시고,
임동윤이 바라보는 이웃들의 삶을 여러분들도 생생히 중계해 주시기를,
김동호처럼 나이의 경계를 와해하여 멋지게 진보해 가시기를!
새 뜻, 새 힘으로 충전되는, 근사한 새 날들이시기를 가득히 기원 드립니다. ■
-우리시 2009년 1월호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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