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다
박 찬 일
1
다음은 황동규의 「무이산(武夷山) 문수암」과 이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은 필자의 해석이다.1)
저 만 쌍의 눈으로 깜빡이는 남해 바다
이처럼 한눈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입구의 어두운 동백들 때문일까.
청담(靑潭)이 살다 관뒀다는 기호(記號), 사리탑에서 내려다보면
언젠가 시력(視力) 끊겨도 몇 년은 계속 보일
저 환한 자란만(紫蘭灣). 떠도는 저 배들 저 부푼 구름들 저 잔물결들
자세히 보면 자란섬 뒤로
나비섬 누운섬, 떠다니는 섬들도 있다.
청담 스님이 슬쩍 자리를 비워준다 해도
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
뒤에 문득 기척 있어
동백이 떨어진다.
동백 뒤에 청담이 나오면 청담을…
바다에 해가 뛰어들고
섬들의 겨드랑이가 온통 빛에 젖는다.
“만 쌍의 눈으로 깜빡이는” 바다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너무나 동그래서 눈이 아프다. 눈을 감을래야 감을 수 없다고 한 것을 이해한다(“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 눈 속에 만 쌍의 눈이 들어왔는데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정말로는 시인은 눈을 감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감을래야 감을 수 없는 이곳에 눈을 파묻지는 않으리”라고 한 것은 ‘눈을 감아야 하는 상황'[죽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강조로 보인다. “만 쌍의 눈으로 깜빡이는” 바다는 죽음을 유혹하는 바다이다. 투신하여 만 한 쌍의 눈이 되자고 꼬드긴다.
시인의 눈에 “나비섬 누운섬, 떠다니는 섬들”은 모두 바다 속에 빠져버린, “눈을 파묻”은 것들이다. 만 쌍의 눈의 일부이다. 시인도 바다에 파묻혀 ‘만 한 번째 쌍’의 눈으로 반짝이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만큼 유혹은 강렬하다.
그래서 “동백이 떨어진다”라는 표현이다. 동백을 시인 대신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것으로, 동백을 죽인 것으로, 성이 안 찬다. 바로 뒤의 “동백 뒤에 청담이 나오면 청담을…”이라는 표현이다. 시인은 “사리탑” 속에 들어있는 청담(스님)도 꺼내 바다 속에 처넣으려고 한다. 목적격 조사 ‘을’과 말줄임표 ‘…’의 결합을 청담을 바다 속에 처넣으려는 시인의 의도로 읽는 것이다.
“바다에 해가 뛰어”든다고 한 것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시인이 해를 바다에 뛰어들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가 진다’고 하지 않고, ‘해가 뛰어든다’고 한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시인은 동백꽃을 살해했고, 청담을 살해했다. 해를 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죽어서 만 한 번째 쌍의 눈이 되고 싶어하는 시인의 욕구! 죽음에 대한 욕구! 그러나 죽음에 대한 욕구와 병존하는 삶에 대한 욕구! 동백은 나 대신 죽어라. 청담도 나 대신 죽어라. 태양도 죽어라. 나는 살아야겠다!
2
다음은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2부 일부 및 이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은 필자의 해석이다.2)
Ⅱ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Ⅲ
살려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
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
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Ⅴ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의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3개의 章을 인용했지만 전부 8개의 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8개의 章이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관계에 있지 않다. 바흐찐식으로 말하면 ‘8개의 목소리’의 말이 존재한다.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관계는 하나의 章 내부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Ⅱ章에서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라고 하다가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라고 하고 있다. 다시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라고 하고 있다. 다시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라고 하고 있다. Ⅲ章에서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라고 하다가 “북을 살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다시 “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라고 하고 있다. Ⅴ장에서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다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고 있다. 다시 “멕시코의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라고 하고 있다. 하나의 章 내부에서도 ‘말의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Ⅴ章에서 첫 행만 제외하고 전부 쉼표로 연결했고, 끝 행도 마침표로 끝내지 않고 쉼표로 끝낸 것은, 무한한 목소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김춘수의 ‘무의미시론’과 관계 있다.
한 행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이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혀 새로운 활로를 제시한다. […] 連作에 있어서는 한 편의 詩가 다른 한 편의 詩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3)
하나의 이미지가 의미를 만들려고 하면 다른 이미지가 나서서 이를 처단하여 이미지의 정박을 계속 늦춘다고 하고 있다. 무의미시란 여러 개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이다. 여러 개의 이미지들이 단일한 통일된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3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2부를 ②라고 하고 황동규의 「무이산 문수암」을 ①이라고 한다. ①이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 관계를 가진 시4)라면, ②는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 관계를 가진 시가 아니다. ①이 유의미시라면 ②는 무의미시이다(①에서는 의미가 파생되었고 ②에서는 의미가 파생되지 않았다). ①은 완결된 ‘닫힌 형식’의 시이고, ②는 완결되지 않은 ‘열린 형식’의 시이다. 드라마로 비유하면 ①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환상극의 영역이고, ②는 브레히트적 서사극의 영역이다. 바흐찐식으로 말하면 ①은 ‘단일한 목소리’의 시이고, ②는 ‘다양한 목소리’의 시이다.
①은 시적 충동에 의한 시쓰기, 곧 자연발생적 시쓰기의 ‘구체화’이고, ②는 미적 자의식에 의한 시쓰기, 곧 의도적 시쓰기의 구체화이다. 자연발생적 시쓰기는 전통적 서정시의 영역이고, 의도적 시쓰기는 현대적 실험시의 영역이다.
아침에는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를 쓸 수 있고, 점심에는 의도적 현대적 실험시를 쓸 수 있다. 저녁에는 다시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를 쓸 수 있다. 내일 아침은 다시 의도적 현대적 실험시를 쓸 수 있다. 아침에는 빵을 먹고, 점심에는 설렁탕을 먹고, 저녁에는 비빔밥을 먹는다. 내일 아침은 라면이다. 인간의 조건은 분열이다.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만 쓰면 ‘인간적’이 아니다. 의도적 현대적 실험시만 쓰면 인간적이 아니다.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에 국한시켜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는 사랑에 대한 시를 쓰고, 점심에는 불의에 대한 시를 쓰고, 저녁에는 죽음에 대한 시를 쓸 수 있다. 내일 아침에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시를 쓸 수 있다. 산본에서 쓰는 시가 다르고, 서울에서 쓰는 시가 다르고, 만해마을에서 쓰는 시가 다르다.
하나의 시집에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만 있다면 그것은 의도적이다. 하나의 시집에 의도적 현대적 실험시만 있다면 그것은 의도적이다. 인간의 분열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시집이 죽음에 대한 시, 혹은 사랑에 대한 시로 통일되어 있는 것도 인간의 분열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에 대한 시만 내내 쓰다가 죽음에 대한 시를 내내 쓰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시를 내내 쓰다가 사랑에 대한 시를 내내 쓰지 않는다. 인간은 밥도 먹고, 빵도 먹고, 국수도 먹는다.
저 사람은 자연발생적 전통적 서정시파, 저 사람은 의도적 현대적 실험시파라고 분류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 사람은 리얼리즘파, 저 사람은 모더니즘파라고 분류하지 말라는 것이다. 분류는 ‘시’만으로 충분하다. 시인을 분류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시인을 분류하는 것은 인간을 분류하는 것인데, 인간은 분열에 관한 한 ‘한 통속’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시’라고 하는 것은 욕하는 말이다. 상호 긴밀한 내적 긴장 관계가 있어야만 시라고 하는 것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라는 말 대신 ‘완성도가 없다’라는 말을 썼으면 좋겠다. 완성도가 없는 시도 시이고 완성도가 있는 시도 시이다. 중심이 여러 군데 있는 시도 시이고 중심이 한 군데 있는 시도 시이다. 중심이 없는 시도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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